칼주름 잡힌 양복,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에 간단한 메이크업까지 마친 상훈은 후줄근한 지훈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오늘따라 상훈은 더 빛이 났다. 지훈은 생각했다. 그래 어릴 때부터 항상 이랬지. 항상 형은 빛났고 나는 초라했어. 형은 성적도 항상 나보다 좋았고 친구도 항상 나보다 많았고 연애도 많이 했고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잖아. 초등학생 때부터 항상 나보다 한 단계 위의 옷을 입었지. 어째 세월이 지나도 신세는 달라지지가 않네. 지훈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없이 서 있었다.
“잠은 어디서 잤냐?”
상훈은 비웃음 섞인 말투로 물었다.
“여주네 집에서.”
지훈은 무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
“뭐? 헤어진 거 아니었어?”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던 상훈의 얼굴에 별안간 금이 갔다. 상훈은 지훈이 아버지와 싸우던 때를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세한 사연은 알지 못했다. 단순히 VVIP를 바람맞혔으니 쫓겨난 줄로만 알았다.
‘이제 다시 박지훈이 역전할 기회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JUNE그룹이라는 동아줄을 아직도 잡고 있단 말이야? 게다가 같이 잤다고? 언제 그렇게까지 발전했지?’
상훈은 미간에 주름이 잔뜩 잡힌 채 지훈을 노려봤다.
“그냥 친구하기로 한 거니까 괜히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나가. 난 아버지한테 또 깨질 준비해야 되거든.”
지훈은 문을 열고 상훈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나 상훈은 곱게 나가줄 생각이 없었다. 상훈은 발끝에 힘을 주고 버티면서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여기가 미국도 아니고 다 큰 남녀가 친구라고 같이 자냐? 너 용하다? 대기업 딸내미 꼬셔서 나를 넘어보겠다 이건가? 그래서 배짱 좋게 무단결근에 무단지각 했구나?”
“그런 거 아니니까 좀 나가. 생각을 항상 그따위로밖에 못해? 모든 사람이 형처럼 승부에 목매면서 살진 않아. 친구 많고 애인 많으면 뭐해 그 중에 형이 힘들 때 달려올 사람 하나 없잖아.”
“그러는 넌 있냐?”
“...”
상훈의 물음에 지훈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피차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지훈은 상훈을 문 밖으로 겨우겨우 밀어낸 뒤 문을 잠갔다.
“아이씨”
상훈은 문밖을 나서자마자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 목록을 뒤졌다. 그리고 ‘솔희’로 저장된 번호를 꾹 눌렀다.
**
“김여주씨죠? 얘기 많이 들었어요. 물론 어릴 때 얘기가 대부분이었지만. 반가워요. 신나리예요.”
청바지에 베이지색 블라우스를 입고 긴 갈색머리를 대충 하나로 묶은 여자가 여주에게 악수를 청했다. 확실히 의사 가운을 벗으니 진료 받으러 온 환자인지 의사인지 구분이 잘 가질 않았다.
“아 안녕하세요.”
여주는 어색하게 악수를 나눴다.
“옆에 계신 분은 비서분인가요? 상담은 원래 둘이서만 하는 건데.”
“아 이쪽은 백찬미씨. 제 비서 겸 경호원이에요. 제 트라우마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같이 있어도 괜찮아요.”
“그래도 원칙적으로 상담은 일대일인데.”
나리가 찬미를 어색하게 쳐다보자 찬미는 손에 들린 봉투를 들어올려 가볍게 흔들었다.
“도시락 제가 사온 거니까 오늘만 봐주세요. 초밥 좋아하신다고 해서 명동에 있는 사쯔꼬까지 가서 제일 비싼 걸로 사왔어요.”
“그 정도 안목이면 같이 가도 되겠군요. 따라오시죠.”
나리는 초밥 얘기를 듣더니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해 찬미를 환영했다. 너무 속이 보인다고 해야 할까, 속물 같다고 해야 할까. 여주와 찬미는 ‘이런 사람을 믿고 상담해도 될까’싶었다.
최승용이라는 이름이 붙은 방에 도착하자 나리는 아무렇지 않게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근데 이렇게 다른 의사 방에 들어가도 돼요? 친하면 괜찮은 건가...”
여주는 복도 CCTV를 걱정스럽게 살피며 나리에게 물었다.
“당연히 안 괜찮죠. 다만 누가 CCTV 확인해보자고만 안 하면 안 걸리는 거니까.”
나리는 심각한 애기를 대수롭지 않게 했다. 여주는 ‘나랑 같은 과인 거 같은데 더 강적이다’라고 생각했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나리는 마치 자기방인 양 승용의 의자에 앉아 여주에게 앞에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일단 상담 시작하기 전에 사쯔꼬 초밥부터 까볼까요? 초밥은 신선도가 생명이니까.”
나리는 젯밥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초밥을 내려놓기 무섭게 나리는 나무젓가락을 쪼개 연어초밥을 집었다.
“음얌얌 그래서 트라우마를 준 사건이 뭐예요?”
진지함이라곤 전혀 없는 분위기로 상담이 시작됐다. 원래 이런 상담 기술이 있는 건지. 마치 10년 지기 친구와 수다를 떠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어...그러니까...”
여주는 온통 초밥에 정신이 쏠린 나리를 보며 말을 질질 끌었다. 진지하게 들어줘도 말할까 말까할 판에 푸드파이터처럼 초밥을 삼키는 나리 앞에선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움 저는 신경 쓰지 말구 켁켁 말해보세요.”
나리는 목이 막혔는지 승용의 자리에 있던 생수를 따 마셨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아 내가 개떡 같은 오빠라고 놀려서 이런 사람을 소개시켜준 건가. 그냥 나갈까. 여주의 초점은 허공을 향해있었다.
“저기...그거 다 먹고 나서 얘기하죠. 제가 살면서 이렇게...제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사람 앞에서 얘기를 해본 적이 없어서 적응이 안 되네요.”
여주는 말 중간 중간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케이! 10분만 기다려요. 금방 먹을 수 있어요.”
10분 동안 세 사람은 침묵 속에서 조용히 초밥을 씹었다. 여주와 찬미는 초밥 다섯 개를 겨우 삼키고 젓가락을 내려놨지만 나리는 초밥 스무 개를 다 해치웠다.
“아후~잘 먹었다.”
“솔직히 좀 황당하긴 한데 저랑 뭔가 비슷한 거 같네요 성격이. 하하하하.”
여주는 해탈한 듯 웃었다. 여주는 ‘남이 보는 내가 이런 느낌일까’싶어 약간 반성했다.
“잘됐네요! 성격이 비슷하면 상담에 도움이 될 거예요.”
“글쎄...요.”
“자 이제 말해 봐요. 여주씨 삶에서 가장 충격적인 그 기억이 뭐죠?”
“...음...그...”
누가 진지하게 경청해주어도 말하기 힘든 건 만찬가지였다. 말하려면 그때 그 기억을 다시 떠올려야 하니까. 여주는 말을 끌다가 한숨을 쉬다가 하는 것을 반복하다 대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비서언니는 다 아니까 언니가 대신 말 좀 해줘.”
여주는 찬미를 자기 자리에 대신 앉히고 옆에 있는 소파로 가 앉았다. 찬미는 말없이 여주의 지시에 따라 나리 앞에 앉아있었다.
“이러면 상담이 안 돼요. 그때 감정이 어땠는지 이런 걸 자세히 얘기해야 되는데.”
“오늘은 첫날이잖아요. 대강 줄거리 정도라면 비서언니가 잘 설명할 수 있어요. 더 디테일한 건 다음 상담 때 제가 말할게요.”
“하...말할 준비가 안 됐다면 어쩔 수 없죠.”
**
“돈 얼마 줄 건데요? 성공하면 그 금액이고 실패하면? 아 아니다 실패 안 해요. 끊어요.”
계절감을 앞서가는 노출 많은 패션에 부러질 것 같은 하이힐을 신은 솔희는 방금 상훈과의 통화를 막 마쳤다. 솔희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가방 하나를 집어 들었다. 명품관에서 제일 잘 나가는 모델이었다.
“이거 계산.”
솔희는 옆에서 자신을 졸졸 쫓아다니는 직원에게 가방을 던지듯 안겨주었다. 직원은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속으론 욕지거리가 나왔다. 드라마에서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돈 쓰면서도 싼티 작렬이네. 먹고 살아야 되니까 참는다.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일시불.”
솔희는 카운터 직원이 가격을 말하기도 전에 카드를 내밀었다. 카드를 내밀 땐 꼭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이딴 것쯤 아무 것도 아니다. 귀찮으니 빨리 계산해라. 그런 걸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솔희는 그렇게 하면 직원들이 자신을 부러워하며 우러러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매일같이 부자들을 상대하는 직원들은 솔희가 우스웠다. 돈이 썩어나게 많은 사람들은 고작 명품 가방 같은 것으로 갑질을 하는 일이 적었다. 명품관에서 유난을 떠는 것들은 졸부이거나, 남의 돈으로 사는 빈대이거나, 돈은 많은데 교양이 없어 존경받지 못하는 개차반 가문의 자제였다. 직원들은 솔희를 보자마자 남의 돈으로 사는 부류라는 걸 알아챘다. 말투나 행동이 딱 그랬으니까.
“감사합니다. 또 오십시오.”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직원들을 뒤로하고 솔희는 뒤뚱거리며 걸었다. 힐이 너무 높아 정상적으로 걷기가 힘든 것인지 아니면 엉덩이를 뽐내고 싶은 것인지 엉덩이를 좌우로 씰룩댔다. 보는 사람이 다 불안할 정도였다. 방금 솔희에게 인사를 한 직원들은 뒤에서 그런 솔희를 비웃었다.
솔희는 백화점을 빠져나가 택시를 잡아탔다.
“JUNE식품 본사로 가주세요.”
JUNE식품 본사 앞 케이크 가게엔 막 상담을 마치고 돌아온 여주와 찬미가 후식을 고르고 있었다.
“아까 초밥을 너무 조금밖에 못 먹어서 배고파. 우리 큰 케이크로 먹으면 안 돼?”
“몸에 안 좋아요. 조각케이크로 하세요.”
“살면 얼마나 산다고 큰 거 먹자.”
“안돼요.”
여주는 병원을 빠져나오자마자 다시 명랑하고 배고픈 여주로 돌아와 있었다. 역시나 다정하고 고분고분했던 찬미도 냉정하게 돌아온 상태였다.
여주와 찬미가 조각케이크를 사들고 가게 앞에 주차해놨던 차로 다가가자 누군가 뒤에서 여주의 이름을 불렀다. 콧소리가 섞인 하이톤의 목소리였다.
“김여주씨?”
여주는 뒤를 돌아봤다. 여주를 부른 것은 명품으로 잔뜩 빼입은 솔희였다. 솔희가 여주를 한 눈에 알아본 것은 상훈의 정보 덕분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인데 해괴망측한 패션의 여자. 그것이 여주에 대한 상훈의 설명이었다.
“누구시죠?”
“박지훈 전무 알죠?”
여주는 솔희의 태도에 미간을 찌푸렸다. 질문을 무시하고 대뜸 자기 용건만 말하는 건방진 말투가 거슬렸다.
“길 묻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건 자기 신분을 먼저 밝히고 묻는 게 예의 아닌가?”
여주는 목소리를 깔며 주먹을 쥐어 자동차 지붕 위에 올렸다.
“나요? 박 전무랑 잘 뻔한 여자요.”
솔희는 여주의 기세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뻔뻔하게 말했다. 솔희의 말은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지훈에게 같이 자자고 작업을 걸었으나 넘어오지 않는 바람에 같이 자지 못했으니 잘 뻔한 여자는 맞았다. 여주는 솔희의 당황스러운 대답에 잠깐 주춤하더니 다시 물었다.
“애인이에요?”
“그러면 어쩔 건데요?”
“어쩔 건 없는데 왜 나한테 그렇게 따지듯 말하는지 모르겠네. 지훈이가 내가 전여친이라고 하던가요? 맞선으로 잠깐 만났지만 심각한 사이 아니었고 지금은 친구예요. 이 정도면 그쪽 용건 끝난 거 같은데?”
여주는 기분이 상해 그만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여주는 차문을 열며 이제 그만 가보겠다는 의사를 표했지만 솔희는 포기하지 않았다.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어요?”
솔희는 여주가 차에 타려고 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 쏘아댔다. 여주는 차에 타려다 말고 차문에 기대서서 대답했다.
“왜 안돼요? 그쪽은 남자만 만나면 무조건 자고 그래요? 괜히 시비 걸지 말고 용건 끝났으면 가던 길 갔으면 좋겠는데.”
여주는 솔희를 무섭게 쏘아봤고 솔희는 드디어 시끄럽던 입을 꾹 닫았다. 정곡을 찔렸으니 입을 다물 수밖에. 솔희는 남자만 만나면 무조건 자는 사람이다. 물론 그것은 남녀 사이에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솔희 직업의 특수성 때문이고, 솔희도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입이 다물어진 것이다.
말을 잃어버린 솔희를 두고 찬미와 여주는 차에 올라타 매연을 내뿜으며 회사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