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화 꽃잎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캔버스에 까만 유화물감이 입혀지고 있었다.
그 위로 붉은 물감이 뚝뚝 떨어졌다.
바당은 십 몇 년 만에 붓을 들었다.
무엇을 그리게 될지 모르지만 창작욕구에
불타 이젤 앞에 앉았지만 무엇을 그려야 할지
무엇을 그리고 싶은 것인지 구상이라는 것은
없었다. 그냥 물감을 보고 검정색에 끌려 온통
채웠을 뿐이다. 그 다음 빨강색은 그의 가슴 속에
인장으로 남아 절대로 지워지지 않은 피의 이미지
그것을 내쏟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아
마음 가는대로 손이 가는대로 그림을 그렸다.
장미도 방바닥에 엎드려 바당이 사다준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렸다. 장미가 선택한 색은
파란 바다색 쓱쓱! 그 위로 떠 있는 아름다운 빛깔의
산호초들 바다 물고기들 그리고 턱시도를 입고 있는
바당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렇게 완성된 두 사람의 그림은 톤이 완전 달랐다.
바당의 그림은 검고 어둡고 칙칙하고 불안정하게
느껴지는 반면에 장미의 그림은 밝고 화사하고
행복한 기운이 넘실대고 있었다.
건수는 바당의 그림을 보면서 마음이 아파왔다.
장미 그림을 보면서 건수는 ‘이만하면 됐다. 내가
잘 키웠다‘ 여한이 없다고 생각이 드는 한편 이렇게
인생에 아무런 상흔도 없는 장미가 내성이 길러지지
않은 장미가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는 결혼생활을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장미랑 결혼해서 여기서 살고 싶다고.
다시는 회사로 돌아가지 않겠노라고.
바당이 말했을 때 건수는 그말이 진심인 것도 알았고
두 사람을 말릴 수 있는 구실도 없다는 것도 알았다.
지금 건수가 가장 바라는 일이라는 것도.
“바당, 난 그런 집안에 장미를 시집 보내서 천덕꾸러기로
살게 하고 싶진 않네. 자네가 정말 우리 장미를 사랑한다면
그냥 이대로 아무 것도 생각 안난 채로 살아야 하네.
내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지?”
바당은 그러겠다고 했다. 장미를 선택할려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바당은 그런 결심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선택은 아니였다.
장미는 바당과 결혼하라는 아버지 말에 환호를 했다.
“저런! 부끄럽지도 않나?”
건수의 이 말에
“아빠 왜 부끄러워야 하는데? 난 좋기만 한데 부끄러워야
하는 거야?”
하고 천진하게 물었다.
“아니 좋아하면 돼”
바당이 맞장구를 쳐주자 장미는 얼굴을 붉히면서 부끄러워
했다. 장미도 부끄러움을 아는 처녀였다. 바당은 이렇게
한없이 맑고 밝은 장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지난날의 모든
상처들이 치유가 되는 것 같았다.
이제 다시는 예전의 자기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새어머니를 증오하면서 한집에서 살아야 하는 고통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었나? 그 여자가 원하는대로 못하게
하기 위해 결국 자신이 망가져가고 있었구나를 깨달았다.
이대로 여기서 장미랑 함께 살고 싶다는 강한 염원이 생겼다.
그러기 위해서 결단을 내려야 했다.
바당은 읍내에 있는 PC방에 가서 다시 지난 기사들을 모두
검색해 봤다.
“민진건설 후계자 윤민수 실종?”
“자살인가? 실종인가? 사고사인가? 민진건설 윤민수 전무”
“제주바다에서 건져 올려진 윤민수 전무 승용차”
“사람은 없고 차만 돌아왔다” 등등 무수한 기사가 자신의
실종을 알리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 자살과 실종, 사고사로 몰아가고 있었다.
타살이나 납치는 어느 기사에도 없었다.
그날 있었던 일의 전모가 서서히 기억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마음이 괴로움으로 가득 찼다.
그들은 사고사를 위장해 나를 죽이려고 했다.
나는 살아났고 어떻게 해야 하나? 또 그들과 싸워야 하나?
나머지 인생을 그렇게 망치고 싶지 않았다.
장미와 함께 소박하게 살리라.
기억력을 잃은 사람으로! 차라리 기억이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마음이 이렇게 괴롭지는 않을 텐데..
그들 앞에 나타나 그들이 한짓을 낱낱이 파헤쳐 법의 심판을 받고
원래의 자기 자리로 장미와 함께 갈까?도 생각했다.
행복할 것 같지 않았다. 민진건설의 후계자로 있는 한
그여자 김비서와 그녀의 아들 민혁이가 있는 한 자기의
인생은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해야 한다.
이제 그러기가 싫어졌다. 바당은 윤민수가 아닌 바당으로
살고 싶어졌다. 다시는 그 지옥과 같은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건수에게 간곡하게 부탁을 한 것이다.
건수는 바당이 처음 자기집으로 올 때부터
아무데도 갈데가 없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졌었다. 20여 년 동안 이곳에서 은둔생활을 했건만
외로움이라는 천형을 극복할 수는 없었다.
외로움 때문에 살고 외로움 때문에 죽지 인간은.
건수는 꽃잎이 다 져버린 장미 나무를 보면서
몇 년전 일을 떠올렸다.
어느날 길을 잘못든 육지 사람이 건수네 집을 보게 되었다.
장미꽃이 한창 핀 오월이었다. 이 오지에 백만송이 장미라니!!
사진을 찍어 블로그에 올렸다. 그 블로그를 보고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건수는 사람들이 두려워졌다.
그래서 장미를 다 뽑아버렸다. 애지중지 키우던 장미꽃이었다.
왜 장미를 키웠는지 알수가 없다. 아니 건수는 알고 있다.
모른다. 알고 있다. 모른다. 무의식은 알고 있지만
의식은 모른다.
그녀가 좋아했던 장미. 지금도 그녀를 상징하는 장미.
그 장미를 키운 것은, 장미를 장미라 부르는 것도 모두
그녀를 향한 일념이었다. 그녀에게 알려져서는 안되는 일념.
그런데 왜 장미를 키우지? 누군가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없다. 이건 모순이다 지독한 모순.
건수는 ‘꽃밭에서’라는 노래를 좋아했다. 특히 이 대목
“이렇게 좋은 날에 이렇게 좋은 날에
그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소절을 들으면서 백만송이 장미가 활짝 피어있는 뜰에
어느날 그녀가 나타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간절히 염원했지만 이루지 못할 꿈이라는 절망감만 쌓여갔다.
그래도 매년 허망한 꿈을 꾸는 자신이 싫어졌다가 허망한
꿈일 망정 꾸고 있는 동안은 행복하다는 것을 알기에
멈출 수 없었다. SNS에 자꾸 이곳이 알려지면 그녀가
찾아 올수도 있다! 이 생각이 들자 건수는 장미꽃을 모두
뽑아버렸다. 그런데 그 뽑힌 장미가 다시 뿌리를 내리고
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꽃잎이 지는 계절.
꽃잎이 진다고 건수는 그녀를 잊은 적이 없다.
그런데 이제 건수는 그녀를 기다리지도 피하지도 말아야
할 때라는 것을 안다. 그녀를 맞딱뜨려야 될 때가 온 것이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
결자해지. 매듭을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
건수는 묵직한 통증이 느껴지는 위장 부위를 만져보았다.
거대한 산덩어리가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것 같은 느낌.
결코 가볍지 않은 몸. 마음도 따라 무거워졌다.
건수는 얼른 진통제를 찾아 먹었다.
이렇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건수의 마음이 급해졌다.
“바당 나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좀 다녀올까 하는데”
건수의 이 말에
“네?”
하고 바당이 화들짝 놀랬다.
왜그렇게 놀라는지 얼른 알아차린 건수는
“개인적으로 만날 사람이 있어서.. 염려하지 말게”
안심을 시켰다.
“아빠, 잘 갔다 와아!!!!”
장미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건수를 배웅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빨리 오라고 징징거렸을 장미가
웃으면서 자신을 배웅하자 건수는 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허점함 같은 것? 그래도 좋았다. 장미 네가 행복하기만
하다면 아빠는 어떻게 돼도 좋단다.
뱃머리에서 멀어져 가는 장미 모습을 보면서
건수는 생각했다.
“빨리 고래 만나러 가야지~~!”
장미가 물질옷을 챙겼다.
“물질 안하면 안돼요?”
바당이 그렇게 묻자 장미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물었다.
“왜요?”
“힘들잖아!”
"아니 나는 재미있는데? 바다 속이 얼마나 이쁜데요.
바당도 거기서 만났잖아요“
아아! 그렇구나! 장미에게 바다는 놀이터였지.
“알았어요. 그럼 들어가요”
“바당이 싫어하면 안할께요”
“싫어하는 건 아니고 난 장미씨가 힘들까봐 그런거지”
결국 두 사람은 옥신각신 하다가 장미가 물에 들어가
있는 동안 바당은 그림을 그리기로 하였다.
“앗따! 우리들 이쁘게 그려주쇼!”
“본바탕이 이뻐야 그림도 이쁘지”
“워메! 뽀또삽도 모르는가? 그리는 사람이 이쁘게
고쳐주면 되야“
할망들은 하얗게 선크림을 바르면서 서로 이쁘게
그려달라고 바당에게 주문을 하였다.
“다들 예쁘시니까 그림도 이쁘게 나올 겁니다”
“오메! 얼굴도 잘생긴 총각이 말도 이쁘게 허네?”
할망들은 장미와 바당이 나타나자 좋아서 입이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바당은 건강하고 소박한 이어도 사람들이 점점
좋아져가고 있었다.
이어도 부두에 내린 민영은 어디로 가야 형을
만날 수 있을까? 여기에 형이 있기는 한건가?
이어도행 배 시간을 물어봤다고 해서 형이 여기
산다는 보장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 마음이 뭘까?
배를 타고 오면서 든 확신은 어디가고 자꾸
부정적인 생각만 올라올까? 혹시라도 못만나게
되더라도 절망하지 않기 위해 마음은 자꾸 예방주사를
놓았다.
부두에 있는 마을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될걸
이 작은 섬에서 서로 모를리가 없잖아?
그런데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들이 그런 사람 모른다고 할까봐 절망을
유보시키기 위해 묻지 않았다.
섬을 한바퀴 돌아보고 난 다음에 물어보자.
민영은 한무리의 관광객들이 먼저 간 길을
천천히 따라 걸었다.
온 신경이 곤두서서 고양이가 쓱! 지나가도
파도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랐다.
호흡을 하자! 마음을 진정시키자! 민영은
심호흡을 한후 바다를 바라보다가 하늘을
보다가 하늘과 바다색이 닮았네? 하다가
걷다보니 어느새 그집 앞.
장미가 있는 그집 앞이었다.
지난 며칠 그렇게도 자기 가슴을 들뜨게 했던
그녀가 있는 그 집엔 장미꽃이 다 떨어져 있었다.
꽃이 없어서인가? 관광객들은 그 집을 그냥 지나쳤다.
민영은 그날 보았던 그 장미라고 불리우던 여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설레이는 마음으로 집안에
들어가 봤다.
제주도식 대문은 열려 있었다.
“실례합니다”
민영은 들어서면서 인사를 했다.
잠잠~~ 조용~~
“아무도 안계십니까?”
그래도 잠잠 했다.
민영은 아무도 없는 마당을 둘러 보았다.
자신의 모습이 꼭 도둑고양이 같다는
자괴감이 든 민영이 나오려는데 마루에 그림
두 점이 나란히 놓여져 있는 게 보였다.
하나는 캔버스에 하나는 스케치북에 그려진 그림.
민영이 호기심이 당겨 그 그림 앞으로 가 보았다.
까만 바탕에 붉은 색 피가 흐르는 모습의 그림을
보고 민영은 ‘허걱’ 놀랬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기시감과 함께
마음에 상채기를 내는 그 그림
옆의 그림은 너무나도 맑고 투명해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 같았다.
그림을 드려다 보고 있는 민영의 귀에 여자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까요?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까요?..“
민영은 얼른 그 집에서 나와 나무 뒤에 숨었다.
여자와 남자가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면서
오고 있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남자의 손에는 그림 도구가 들려져 있었다.
“바당, 내일은 할망들 말고 나 그려줘요”
“얼마든지! 지금 당장 그려줄까?”
“안돼요! 얼굴이 새카맣게 탔어요. 할망들처럼 분도
발라야 해요“
선크림을 장미는 분이라고 했다.
“안발라도 이뻐요!!”
“정말요?”
가까이 다가오는 그들의 목소리
그리고 민영은 보았다.
남자의 모습은 호텔 CCTV에 찍힌 그 모습
민수였다.
형이 왜 여기에 있는가? 근데 왜 ‘바당’이지?
형이 아닌가? 닮은 사람인가? 아니야.
그 시계를 몸에 지닌 사람은 민수형과 나 민혁이...
민영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터져버릴 것 같아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제 13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