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델리스를 대신해 아흐레 전부터 역시 명목상 '임시' 계곡지기가 된 뚱뚱한 페이나스의 기이할 정도로 얇은 목소리가 카일로스의 귀를 간질였다.
그에 카일로스가 약 3분 가량을 자신의 앞에 멍하니 서 있던 여행객, 무더운 여름 날씨와는 전혀 맞지 않는 긴 후드를 걸쳤지만, 오른쪽 허리춤에서부터 살짝 튀어나온 투박한 네모형의 폼멜이 여지없이 칼을 착용했다라 알려주고 있는 여행객에게 살짝 귀찮은 표정으로 성문, 정확힌 그 옆에 뚫린 개구멍같이 작은 문을 가리켰다.
"앞서도 보셨겠지만 저기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리곤 오늘도 벌써 수백 번은 반복한 틀에 박힌 말을 툭 던져 뱉고는, 얼른 이 여행객이 자신의 눈 앞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던 카일로스는, 사라지기는커녕, 되려 뚜벅뚜벅 다가와 자신과 마주보며 서는 후드의 여행객을 역시 귀찮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일 또한 근무를 서다보면 꽤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
경비병들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고, 꼭 자기들 입맛대로 경비병들을 교육시키려는 콧대 높은 귀족의 자제들. 생각해보니, 이들 대부분이 다 낡아빠진 후드를 걸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요즘 귀족들 사이에선 저런 낡은 후드를 걸치고 다니는 게 유행인 모양이었다.
거기다 나흘 전만 해도, '살텐'이란 어느 시골 영지를 다스리는 남작의 자식이 먼저 시비를 걸어왔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버릇없는 아가씨는 다 낡아버린 후드를 걸치는 게 싫었던 건지, 꽤 값비싸 보이는 실들이 약간 과다하게 수놓아진 화려한 로브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도 내가 누구인지, 어떤 대우를 받아야하는지 지레짐작을 못 하겠냐며 바락바락 떠들고 간 일도 있었다. 비록 그 아가씨 뒤로 수십 명에 해당하는 기사들이 하나같이 죄다 멍청한 분장을 한 채 따라붙은 것만 아니었다면, 그냥저냥 무시하고 따르는 척하며 파리 쫒듯 지나 보냈었겠지만, 이들의 대부분은 항시 보호자들, 즉 부모나 집사, 혹은 기사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싫어도 곧잘 따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헌데 눈 앞의 여행객, 귀족이 자식이라 추측되는 거대한 키의 여행객 뒤엔 어딜봐도 평범한 가정의 가장으로 추정되는 중년의 사내와, 그 사내의 손을 꼭 쥐고 있는 10살배기 여자아이가 전부였다. 다시 그 뒤로 쭉 뻗어 있는 인파의 실타래 속에도 기사나 집사 같은 사람으로 보이는 이는 없었다.
'분명 귀족의 자식일 것이다.'란 약 90%의 가능성을 깨부수는 평민이란 결과가 아니라면, 필시 자신의 검술 실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귀족이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