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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도전! 에스퍼 리그
작가 : 은백
작품등록일 : 2016.10.28

수십 억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초능력 배틀 스포츠!
그 안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은 소년소녀의 작고 거창한 이야기

 
2부 - 도주자(3)
작성일 : 16-10-28 21:31     조회 : 370     추천 : 0     분량 : 5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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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와아. 여기가 글로리 에스퍼즈 안이구나. 처음 봐!”

  “처음 보는 건 린다도 마찬가지지만, 그리 놀랄 것도 아닌데?”

 

  아르카디아 최악의 빈민촌 제13지구에서 첨단 문명의 혜택을 입었다고 유일하게 자부할 수 있는 시설, 글로리 에스퍼즈. 외형은 제13지구의 여느 건물과 큰 차이도 없는 잿빛 콘크리트 건물이지만 그 내부는 대형 광장과 고급 체육관을 적당히 뒤섞은 듯한 모습으로 부잣집 동네라 일컬어지는 제1지구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만큼 세련된 인테리어가 특징이다. 물론 본 목적이 목적이니만큼 미술 박물관마냥 화려한 디자인을 바라기엔 무리겠지만 자로 잰 듯한 구조물 배치, 기능미를 살린 기기들의 조화들이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제13지구 치곤 과한 투자라는 생각이 절로 자아내는 풍경이다.

 

  아더는 억대 보물을 발견한 해적처럼 눈을 빛냈다.

 

  “선택형 인공지능 대전 기기 ‘메탈릭 저지먼트’! 이능력 체험 기기 ‘체인지 어빌리티’! 광고 영상에서만 보던 꿈의 물건들이 한 눈에!”

  “아더도 참, 에스퍼 리그 제패가 꿈이라는 애가 겨우 이 정도로 황홀해하면 어떡하니? 타 지구에서는 프로는 물론이고 아마추어들도 이런 것쯤은 사비로 들여서 쓸 텐데.”

  “오오, 하느님, 예수님, 성모님, 부처님, 공자님, 알라님, 간디님, 나폴레옹 황제 폐하, 이순신 장군, 마×카 여신,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제 인생에 이런 영광이!”

  “……안 듣는군. 저게 뭐가 그리 신기하다고. 최신품도 아니고, 죄다 한 세대 이전의 기종들인데 말이야.”

 

  린다가 영 미적지근한 반응만 내보이자 시그마가 참견조로 끼어들었다.

 

  『이 동네는 매일 끼니부터 걱정하는 마당이니 이상할 것도 없지. 오히려 이쪽이 보편적인 반응이다. 실제로 이 글로리 에스퍼즈는 타 지구 사람들이 보기엔 허름하게까지 보일지 몰라도 대다수의 13지구 주민은 쳐다보기도 힘든 고급 시설이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어조로 찔러보듯이 한 마디 덧붙였다.

 

  『꼭 타 지구에서 온 사람처럼 이야기하는군. 13지구 출신 아니었나?』

  “으, 응?”

 

  정곡을 찔린 린다는 목이 타들어가는 느낌을 받고 아더의 눈치를 살폈다. 잠시 까맣게 망각하고 있었는데, 린다는 지난 밤을 기점으로 이 AR 스캐너의 AI에게 최악의 약점을 잡힌 상태다. 이미 눈치 챈 사실을 아더에게 왜 당장 이실직고하지 않는지 그 본의는 불분명하지만 언젠간 은연중에라도 밝힐 여지가 있음을 드러낸 셈이다. 하지만,

 

  “봐! 팀 히어로 헤일로가 버스터 세이버즈를 누르고 8위로 치고 올랐어! 엄청난 루키다!”

  『…….』

 

  정작 이 말을 새겨들어야할 장본인은 헤일로 엔터테인먼트 공인 랭킹인 헤일로 랭킹이 게시된 전광판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린다와 시그마 간의 긴장 어린 대화 따위에 관심 기울일 필요 없다는 듯이. 하여간 한숨을 자아내는 데는 선수다. 그 한숨이 어떤 의미든 간에 말이다.

 

  린다는 어린이처럼 천진하게 웃는 아더의 모습을 무심결에 훑다가, 노란색 라이더 재킷의 가슴팍 밑에서 볼록 솟은 윤곽으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물건을 시야에 담았다. 군침이 돌았다.

 

  “히히히, 우리 ‘유니온 프릭스’도 언젠간 저기에 이름을 새길 수 있겠지?”

  “으, 응?”

 

  아더의 희망찬 질문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린다는 불의의 일격을 당하고 말았다. 쇠바늘로 명치를 깊숙이 찔린 느낌이었다. 심히 미묘한 기분이다. 따끔한 것도, 저릿한 것도, 쑤신 것도 아닌, 말로 형용하기 힘든 감촉이다. 사람들은 이를 ‘양심’이라고 부르던가.

 

  ‘웃기지 마. 린다가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썼다면 애당초 이 꼴이 되지도 않았겠지.’

 

  스스로에게 조소를 날리고는 능청맞게 아더의 장단에 맞춰준다.

 

  “그야 당연하지! 마리오네트라는 그 건방진 여자만 물 먹여도 언론의 주목을 받는 건 시간문제잖아?”

  “꼭 그 여자만은 아닌걸.”

  “응? 무슨 이야기야?”

 

  아더의 고양된 말투가 전조도 없이 확 가라앉았다. 이번엔 눈가에 환희 대신 수심과 증오가 스멀스멀 피어올라 뒤바뀐 심리상태를 대변했다. 단 몇 초 만에 천진한 유치원생과 수사극의 형사를 오락가락하는 녀석이다. 은근히 강적인데.

 

  “내가 말했잖아. 저질러놓은 만행의 스케일만 놓고 따지면 마리오네트보다 훨씬 극악인 녀석이 있다고.”

  “그런 사람이 있었니?”

  “하지만 분하게도 마리오네트랑 달리, 지금은 종적을 감추고 연기처럼 사라져서 도무지 찾을 없어. 눈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이 주먹으로 한 방 먹이는 건데. 뭐, 이 판에 오래 몸을 담고 있다 보면 추격의 실마리가 보이겠지.”

  “아.”

 

  이쯤 되자 린다도 슬슬 짐작이 갔지만 섣불리 무릎을 치고 아는 체할 수가 없었다. 시그마를 대할 때보다 더한 긴장감에 숨이 턱 막혔다.

 

  “알잖아. 마야라는 여자. 아니, 짐승 말이야.”

  “꿀꺽.”

  “웬 꿀꺽?”

  “아? 아하하하하하! 쪼오오오금 긴장이 돼서! 사람들이 어째 린다만 쳐다보는 거 같네!”

 

  급한 김에 둘러댄 말이지만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남성의 비중이 높은 시설이다 보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둘의 관계를 착각하고는 아더를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심지어 주먹을 입에 문 채 꺼이꺼이 우는 사람도 있었다.

  시그마가 혀를 찼다.

 

  『이런 대형 시설에서 어린 아가씨가 그렇게 대담한 탱크톱에 핫팬츠, 레깅스 차림으로 돌아다니면 주목받기 싫어도 받을 수밖에. 치안 상태도 나쁜 구획에서 너무 조심성이 없지 않나.』

  “음, 이 패션이 싫은가? 소프트 오페라의 접대복을 하나 슬쩍할걸 그랬나? 프릴 미니스커트에 루즈삭스 조합 예쁜데.”

  『그 메이드복을 여기서 입고 돌아다니겠다고?』

  “왜? 어때서?”

  『…….』

 

  아더 이상의 괴짜는 이 세상에 없을 줄 알았는데, 용케도 험한 꼴 안 당하고 잘 살아왔다. 속세의 때로 덕지덕지 먹칠된 줄로만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군. 시그마는 새삼 어깨의 짐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깨는 없지만.

  린다 역시 아더의 증오 어린 발언 때문에 급증한 부담감을 떨쳐내고자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린다는 헤일로 비전에서 손이랑 관심을 뗀지 세월이 조금 흘렀네. 상위권의 판도가 어떻게 변했는지 한 번 구경이나 해볼까?”

 

 

  RANK 10 = 마스터즈 플랜(893)

  RANK 09 = 버스터 세이버즈(1017)

  RANK 08 = 히어로 헤일로(1334)

  RANK 07 = 퓨처 비전(1525)

  RANK 06 = 오버 카타스트로프(1794)

  RANK 05 = 리버스 트루스(1840)

  RANK 04 = 포스 오브 포(2153)

  RANK 03 = 일렉트로 헤이즈(2377)

  RANK 02 = 더 디렉터(2442)

  RANK 01 = 노아즈 아크(5910)

 

 

  “자, 잠깐만.”

 

  린다는 흠칫 놀랐다. 자칫 무거워질 뻔한 분위기를 전환시키려 한 행동이었지만 뜻밖에도 뒤통수를 얻어맞은 전개가 되고 말았다.

 

  “마스터즈 플랜이 10위? 지난 대회 준우승 점수는 다 어디서 까먹고?”

  “이제 와서 무슨 말이야. 마야의 데스페라도 사건 때문에 차감된 점수가 몇인데? 유토피아라도 받은 게 천만다행이지, 못 받았어도 할 말은 없어. 팀의 2번째 전력이 빠졌으니 결국 패러독스가 혼자 팀을 이끌다시피 해야 하는데 정작 패러독스 본인은 은퇴. 패러독스가 빠진 마스터즈 플랜이 친선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리가 없잖아. 그래도 30위권까지 떨어졌다가 최근 재도약하기 시작해서 이 위치라고. 그 원동력이 뭔지는 나도 모르겠어. 도무지 정보통이 없네. 대박 신인이라도 들어왔나? 오디션 보러 갔을 때도 딱히 변한 점을 모르겠던데?”

  『공식 홈페이지에 표기된 로스터는 그대로인데, 어차피 데스페라도 사건 이후로 관리가 하나도 안 되고 있으니 사실상 동결된 자료나 다름없다. 공식 친선경기 출장 기록도 없으니 비공개 랭킹전에서 실적을 많이 올린 모양인데. 나로서도 짐작 가는 바가 없구나.』

  “마스터즈 플랜이라도 다시 살아나면 좋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빌어먹을 암덩어리는 빼냈으니까. 아, 그러면 오디션 기준이 빡빡해지려나?”

  『괜찮다. 애당초 13지구에 헤일로 비전 프로 선수 지망생이라고 해봐야 몇이나 된다고.』

  “여하튼 이게 다 마야 때문이야. 이래서 여자란 믿기가 힘들어. 마야, 마리오네트, 페이트……. 왜 속을 썩이는 존재들은 하나 같이 여자들밖에 없을까?”

  “…….”

 

  린다는 일순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맞장구치기도 변호하기도 애매해진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 행동이라고는 그저 우직한 침묵뿐. 그런데,

 

  “그런 의미에서 고마워, 린다.”

  “어? 왜?”

  “넌 내가 봐온 여자들 중에 제일 믿음직한 여자니까.”

 

  …….

  린다는 가슴 깊숙이 필설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끓어올라 얼굴에 열이 화끈 올랐다. 그 순진무구한 눈망울과 표정에서, 과거 에스퍼 리그 본선에서 마주한 한 남자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수전증 환자처럼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질척하고 더러운 세계에 몸담은 지가 언젠데 아직도 이런데 일말의 미련이 남다니.

 

  ‘안 돼. 이대로는 정들고 말아. 빨리 유토피아를 어떻게든 수중에 넣어서 벗어나야겠어.’

  “그런데 정말로 여자 맞긴 맞지? 거기가 너무 작은…… 커헉!”

  “시껏!”

  『…….』

 

  린다의 얇고 고운 손이 아더의 뺨을 거세게 강타했다. 다행히도 정들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찰진 싸닥션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글로리 에스퍼즈를 반쯤 메운 인파가 일제히 술렁이기 시작했다. 신나게 하하호호 나누던 잡담이 순식간에 멈추고 사람들의 관심이 위층으로 쏠렸다.

 

  “어째 좀 소란스러운데? 위층에서 무슨 이벤트라도 하는 걸까?”

  “아니. 난 그런 스케줄은 본 기억이 없어.”

  『이 반응을 보아하니 대충 촉이 오는데. 그리 좋은 예감이 들지 않는군.』

  “촉이라니? 무슨 말이야, 시그마?”

 

  아더는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며 고글의 대답을 보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머지않아 주변에서 절로 대답을 내주었다.

 

  “노아즈 아크다! 노아즈 아크가 왔대!”

  “어? 진짜! 꺅, 그래비트님!”

  “사진 찍으러 가자!”

 

  인파의 대다수가 일순간에 위층으로 빠지고, 소식통이 늦어서 몇몇 남아있던 사람들도 만면에 화색을 띤 채 신나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는 장식이라는 듯이 발을 바삐 놀리는 그들의 모습에선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 느껴졌다.

 

  물론 개중에는 여타 팬들과는 정반대의 의미로 노아즈 아크의 방문을 반기는 소년도 하나 있었다. 불꽃처럼 하늘로 첨예하게 솟은 적발 아래 회심의 미소가 감돈다.

 

  “마리오네트. 그동안 오래 기다렸어. 힘들여 찾아가기도 전에 알아서 와주는군.”

  『아더. 아직은 때가 아니지 않느냐?』

 

  시그마는 점잖게 말리려 들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여자는 페이트랑 이야기가 달라. 언제든 심판의 철퇴를 맞을 준비가 돼있는 녀석이라고. 내가 담판을 짓고 오겠어. 어떤 변명을 댈지 기대되는데.”

 

  말이 담판이지, 아더는 당장 한판이라도 뜨고 올 기세로 소매를 확 걷어붙였다. 그리고 뜬금없이도 목에 소중히 걸고 있던 유토피아를 휙 벗어서는 린다의 꼭 손에 쥐어주었다. 린다도 시그마도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 사태였다.

 

  『아, 아더……!』

  “린다한테 왜 이걸?”

  “잠깐 맡고 있어. 린다. 그리고 1층에서 기다려.”

 

  아더는 린다와 시그마의 속내도 모르고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패러독스의 유토피아는 다른 사람이 보기엔 크나큰 영광일지 몰라도, 그 여자 앞에서만큼은 더할 나위 없는 치욕이야. 엘리시온을 따내기 충분한 실력임에도 단 하나의 음모로 인해 유토피아에 그친 사람의 마음을, 그 비열한 여자 앞에서 내비치고 싶지가 않거든.”

 

  아더는 설상가상으로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시그마의 전원까지 강제 종료시켰다. 다급하게 무언가 외치려던 시그마의 입은 이로 인해 꾹 닫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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