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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작가 : 은이설
작품등록일 : 2019.10.25

제 이름은 설입니다. 몸이 없어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남들처럼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제 처지가 이 모양이라 사람들 몸에 들어가 생활합니다. 다른 존재에 의지하면서 지낼 수밖에 없는 붙살이지요. 그리고 동거인이 염원하는 누군가의 몸 안으로 동거인과 함께 이동하면서 삶을 유지하지요.
최근에는 제 이야기를 누구에게라도 들려주고 싶더라고요. 속이 답답해서…, 털어놓고 싶은 사연이 무궁무진하거든요.

 
여덟 외톨이 백상아리
작성일 : 19-10-25 20:35     글쓴이 : 은이설     조회 : 772     추천 : 0     분량 : 23,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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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외톨이 백상아리

  백상아리 안에서 어떻게 나왔냐고요? 바다에 들어갈 때는 바다에서 죽을 줄 알았는데 시간이 찬 건지 다시 나오게 되네요. 천상 육지동물이라 어쩔 수 없었겠지요. 스킨스쿠버라는 물고기 짓도 육지동물이 하면 잠영일 뿐이고, 평생 머물 수 없으니까. 다른 세상 찾아가자고 바다에 들어간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산소가 떨어지면 육지로 나오잖아요. 저도 그래서 나왔나봅니다.   
  오만가지 물고기들 사이로 헤엄쳐 다닐 적에는 앞으로 육지 생활은 없다, 꿈도 꾸지 않았는데 동거인만 바꾸어서 떠난 자리로 돌아왔어요. 혜진씨를 만난 덕분이지요.
  혜진씨 소개를 제대로 못했네요. 혜진씨는 프리랜서 여행 작가에요. 지금은 동해안 버스 여행 기사를 맡아 쓰지요. 6부작 특별 기획으로 잡혀서 여성 잡지에 한 차례 실렸는데 반응이 호의적인 편이라 책으로 엮어볼까 구상 중입니다. 출판을 예정에 두고 작업하려니까 내용이며 분위기며 일관성이 필요해서 어떤 부분을 보강해야하나 즐겁게 고민하고 있지요.
  실은 선희씨가 살아나서 의지를 펴는 건 아닌지 하루 종일 심란했습니다. 육지로 돌아왔다고 진즉에 소화된 사람이 살아날리 없는데…. 혹시 몸만 사라지고 의식은 남은 걸까요?
  아니죠. 자기를 잡아먹은 상어가 사람 속에서 지낸다한들 죽은 건 죽은 거죠. 그런데 자꾸 의심이 이네요. 태풍 소식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져서는 내 믿고 싶은 대로 뜯어 맞추려고나 하고 정신을 차려야겠습니다.   
  오늘은 혜진씨가 별거 중인 남편하고 저녁에 만나기로 약속한 날입니다. 그런데 태풍이 올라온다는 인터넷 뉴스 한 줄에 돌연 약속을 취소했어요.
  ‘바쁜 일이 생겼어. 취재 여행 갔다 와서 연락할 게.’
  이혼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남편에게 이리 문자를 보내고 가방을 둘러멨지요.
  혜진씨는 독신같은 비독신이에요. 이혼을 협의하는 단계라 공식적으로는 독신이 아니지요. 세 살 된 아들을 시어머니가 돌보는데 양육비를 누가 얼마나 책임질 것인가가 쟁점이에요. 뻐꾸기 노릇하고 싶으면 돈이라도 내라면서 남편이 혜진씨 능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금액을 요구합니다. 골탕을 먹이려는 심사겠지요. 여행작가 벌이가 얼마나 박한지 사정을 뻔히 아니까 이리 나오는 거예요.
  사시사철 지고 다니는 배낭에다 팬티 한 장, 지갑, 사진기를 챙겨 넣고는 시외버스터미널에 갔어요. 삼척 행 표를 끊었지요. 태풍이 오는 날 삼척이라, 일 년 전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야릇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해변 풍광이 눈에 익구나 싶을 때 혜진씨가 정차 버튼을 눌렀어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사진기를 꺼내 버스정류장 팻말부터 찍었지요. 여행 작가의 직업적 행동이었는데 선희씨와 비교하게 되더군요. 선희씨는 휘둥그레 주변을 살피면서 어수룩한 티를 냈지요. 
  후덥지근한 바람에 내려앉은 하늘, 육지로 내달리는 파도, 모두 여전했어요. 사람만 바뀌었다 싶더라고요.
 선희씨는 파도를 보면서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혜진씨는 해변 끝에서 끝까지 뛰듯이 걸었습니다. 작은 항구와 식당들, 바다와 모래사장, 소나무 숲과 산책로를 사진기에 담았지요. 
  해안 절벽과 그 밑 바위들에는 눈길이 오래 머물렀어요. 선희씨가 오르려했다 오르지 못했던 절벽이었는데, 변함없이 위압적이면서 편안했습니다. 절벽 위에 올라가볼 작정으로 주변을 빙빙 돌았는데 길을 찾지 못했어요. 한 시간 남짓 헤매다가 이리로 돌아왔습니다.
  도저히 모른 척 할 수 없었습니다. 선희씨한테나 붙살이인 저한테나 절벽은 의미심장한 장소니까요. 그래서 오감을 바짝 고두고 혜진씨 안을 살폈습니다. 새로운 기운은커녕 백상아리조차 잡히지 않았어요. 반년을 못 채우고 백상아리의 의지가 완전히 바랐더라고요. 아무리 단순한 동물이라지만 너무 일찍 사라졌다 싶어 서운했습니다. 말 많고 생각 많은 사람하고 달라서 동물들이야 워낙 그렇지만요.
  제가 겪어 본 깜냥으로 어느 정도는 압니다. 한때 동물 속에서 동물처럼 지냈어요. 숱한 날들을 변화무쌍하게 보냈지만 이보다 특이한 경험은 없지요. 강아지, 하필이면 제일 작고 약한 강아지였어요. 치와와라고 깡말라서 눈만 댕그란 애인데, 요즘은 다들 아시더라고요.
  고릿적 케케묵은 사연인데, 제 붙살이 인생을 통 털어 그 시절이 최고로 비참했습니다. 팔지도 못할 이불이나 훔쳐 쌓아놓는 도둑 몸에 머물다가 타다만 장작개비 같은 치와와 속으로 도망쳤으니 비렁뱅이보다 못했지요.
  버림받았는지 길을 잃었는지 배는 오그라들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강아지 안에서 강아지하고 똑같이 비루하게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어요. 낮이고 밤이고 사타구니 밑에 꼬리를 쑤셔 넣고는 뭇 짐승들을 피해 숨어 다녔습니다. 사람이라고 맘을 놓았던 것 역시 아니고요.
  무심한 인간들 발길질 한 번에 사지를 쪽 뻗고 황천길에 올라야하는 치와와라니, 어느 결에 큰일을 당할지 몰라 불안하기 짝이 없었어요. 더 이상은 힘들다, 자포자기 직전에 간신히 동거인을 만났습니다. 변태 이불도둑에 치와와까지, 되짚을수록 기가 찹니다.
  왜 변태냐고요? 붙살이로 태어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한 몸으로 지내왔지만 그 놈만큼 괴상망측한 인간이 없었으니까요. 치와와 이전 동거인들하고는 멀어져도 한 참 멀어져서 어떤 이가 그 놈을 맘에 두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제 짐작에는 둔한 데다 성질까지 급한 한 남자였을 거예요. 그러니 하필 겉만 멀쩡하지 속은 곯을 대로 곯은 참외를 냉큼 집어 들었겠지요. 눈빛이 거슴츠레해서 아주 멀쩡해 보이지도 않았는데 말이지요.
  하루 밤 지나자마자 통곡하고 싶었을 겁니다. 나야 참고 기다렸다 다른 몸으로 옮겨가면 되지만 당사자야 무를 수가 없으니, 구린내 팍팍 풍기는 인간말종하고 평생을 붙어살아야하는구나 절망스러웠겠지요. 낙담한 바람에 변태가 제 몸을 사르도록 내버려두었을 거예요. 보석털이도 아닌 한낱 이불이나 훔치는 좀도둑으로 경찰서나 들락거리고 손가락질이나 받느니 차라리 깔끔하게 죽자, 독하게 결심했겠지요. 어쩌면 부족한 자신에 대해 벌을 주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섣부른 판단으로 자기를 망쳤으니까요. 
  이름은 모르겠습니다. 가물에 콩 나듯 공사판에 나가 딱 굶어죽지 않을 만큼 일당을 받고, 그 걸로 밀린 월세 내고, 라면 한 상자 사고. 궁색한 처지에서도 외출할 때는 단벌 양복으로 구색을 갖추는 남자였습니다. 사람들로 북적대는 대로 한복판에서 부딪치면 솔기가 헤진 구식 양복에다 손에 든 이불 보따리 때문에 한 차례 스윽 훑어보게 되는, 지나치자마자 쉽게 잊히는 그렇고 그런 인물이었어요.
  주식이 라면이었습니다. 냄비 손잡이까지 그을음이 새까맣게 끼는 낡은 곤로에 끓여 먹었어요. 먹던 냄비를 들고 나가 수돗물에 서너 번 헹구어 내고 그대로 물을 받았는데 수세미가 닿은 적이 없어 거무죽죽한 기름 찌꺼기가 켜를 이루었지요. 방문 앞에서 끓여 방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먹었답니다. 이불에 냄새가 밸까봐 그랬을 거예요.
  이불 도둑답게 이불에 둘러싸여 지냈습니다. 어떤 이불이냐 하면 부부가 사용하던 살 때 뭍은 놈들이었지요. 부부라고 했지만 정식 부부냐 아니냐보다는 금슬이 중요했어요. 곱게 개켜 켜켜이 쌓았는데 반짝반짝하는 재질에 화사한 이불이 먼저 눈에 들어오더군요. 그래 처음 며칠은 비싸고 고급스런 이불을 모으는 줄 알았습니다. 주제에 맞지 않게 이불 욕심이 남다르구먼, 방이 가득 차면 저 숱한 이불은 어쩌려나, 가벼이 받아들이고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지요.
  보면 볼수록 하는 짓거리가 요상했습니다. 사방팔방으로 싸돌아다니다 이사 중인 사람들을 만나면 주변을 배회하면서 하는 거동을 눈여겨보더군요. 부부가 서로 데면데면하게 굴면 휙 돌아서고, 방문을 닫자마자 똑 걸어 잠그고 한 몸으로 엉겨 붙을 듯 은근해 보이면 살쾡이마냥 훑어보았지요. 이삼일 지켜보다가 집이 빈 순간 이부자리를 날쌔게 들고 나왔답니다. 꽃분홍색 신혼부부 이부자리가 여러 채였는데 다 그만한 까닭이 있더군요.
  달랑 이부자리 한 채만 사서 월세 방에 들어간 젊디젊은 애들을 점찍었는데, 손수레나 들어가는 골목길에 플라스틱 세수 대야, 비누 곽, 중자 소자 양은 냄비 하나씩, 헐렁한 짐 가방 두 개를 부려놓더라고요. 먼지가 탈세라 새로 산 이불만 품에 꼭 안았지요.
  아랫목에 깔아놓은 이부자리가 홀연히 사라진 광경을 보았을 텐데, 뒷수습을 어찌 했을까 궁금하네요. 얼굴도 모르는 이불 도둑에게 험한 욕을 쏟아내다 가진 돈을 긁어모아 이불을 사러 나갔으려나, 상대를 비난하며 싸우다 홧김에 헤어졌으려나.
  저처럼 물러터진 사람이나 이런 걱정을 하지 이불도둑은 거리낄게 없더군요. 남녀가 한 몸인 듯 붙어 여관방에 들어가면 도둑고양이마냥 숨었다 살내에다 땀내까지 푹푹 풍기는 나일론 이불을 윗도리에 숨겨 나오고, 양손을 꼭 부여잡은 노부부가 양옥집에 들어가면 다음 날 시장에 간 틈을 타서 하늘하늘 헤지기 직전인 두터운 솜이불을 들쳐 업고 나오고.
  재수가 없는 날에는 대문을 나서다 이웃집에 들켜 줄행랑을 쳤어요. 가엾고 우습고 혐오스럽고, 아무튼 가관이었습니다. 이 모양으로 슬쩍해낸 이불보따리를 방에 들이다 집주인한테 들킨 적이 대여섯 번은 되었어요. 앞뒤가 안 맞는 소리를 죄 끌어다 변명이라고 둘러댔는데 주인이 믿을 성 싶지 않았지요. 그런데 집주인은 이맛살만 찌푸리고 한 마디를 덧대지 않더라고요. 따지고 들어서 아는 게 늘어 봤자 입장만 난처해진다, 모른 척 묻어두는 게 상책이다 여겼겠지요. 
  이부자리 수십 채를 훔쳐냈으니 사단이 날 밖에요. 현행범으로 잡혀 이불은 돌려주고 한바탕 창피 당하고 경찰서에 끌려가고, 이 정도는 그 동안 해온 짓거리에 비하면 억울할 바가 아니었어요. 붙들려 갈 적마다 죽을죄를 졌다 국으로 고개를 쳐 박았지만 갈수록 쉽게 안 넘어가지더라고요. 경찰 기록에 전적이 남다보니 이불 주인이 합의를 해주지 않으면 유치장 안에서 열흘 넘게 구류를 살아야했어요. 제 정신으로는 할 노릇이 못되었습니다. 송충이 보듯 하는 사람들 눈총에 숨도 제대로 못 쉬었지요.
  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루를 백 년같이 보내고 어렵사리 돌아와서는 자중을 하는 듯했어요. 먹고살기 위해 벌인 도둑질이라면 그나마 나을 텐데 인간인 바에야 부끄러움이 없을 수 없지요. 몇 겹으로 깔아놓은 이불 속에 쳐 박혔다 라면 두어 개 끓여먹고 공사장에 나갔을 때 문제가 터졌습니다.
  정말이지 억울해서 환장할 노릇이었어요. 그 당시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여배우 이불이 왕창 사라져 관할 경찰이 수사에 나섰는데 용의 선상에 이름이 올라갔더라고요. 당연히 아니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아니라고 했지요. 삼복에 더위 먹은 개 마냥 헐떡대면서 바닥에 바짝 엎드려 애걸복걸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믿는 둥 마는 둥 하던 경찰이 옴짝달싹 못하게 윽박질러 놓고 확인해봐야 한다는 명목으로 이불을 반나마 실어가 버렸어요. 방 안에 그득하던 이불 중에서 쓸 만한 물건들은 죄 빠지고 한두 해 지나면 바꿔쳐야할 허접한 놈들만 남았답니다.
  힘 들여 모은 이불을 뭉텅이로 빼앗기고 이만저만 상심한 것이 아니었어요. 이틀 밤낮을 꼬박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끙끙 앓기만 하더군요. 마음에 응어리가 져서 남이 쓰던 이불을 모아들였을 텐데, 사연이 구구절절 많나보다 가련하더라고요. 애처로운 마음에 다독여줄까 했다가 이 김에 못된 버릇을 고치는 게 낫다 판단해서 뒤로 물러나 냉정하게 있었어요. 이불을 뺏겼다고 죽으려 들 줄이야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사흘 째 되던 날 새벽에 이불을 한 채 한 채 들어다 동네 외곽 공터에 쌓았습니다. 남부끄러운 과거는 훌훌 털어내고 정갈하게 새 출발하려나 보다 반갑더군요. 아무렴 허우대는 멀쩡해가지고 멀쩡하게 행동해야지 남들한테 비웃음이나 당하면 쓰나, 묵묵히 지켜보다 고개만 끄덕여주었어요.
  홑껍데기 하나 남기지 않고 이불을 옮겨놓더니 공터 한 쪽을 치웠어요. 쓰레기며 돌덩이며 말끔하게 없애고 판판하게 터를 골라 이부자리를 펼쳐 놓더군요. 자기 전에 하듯 요를 깔고 그 위에 이불을 덮고, 시루떡을 앉히듯이 이부자리를 층층이 올렸습니다. 가슴께에 닿는 이불더미를 아련히 넘겨다보다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지요. 제대로 작동하는지 시험 삼아 켜보더군요. 라이터 정수리 위로 주황색 불줄기가 슈욱 솟구쳤어요. 
  이불더미로 다가가기에 불을 붙이려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신발을 벗더라고요. 예상 밖으로 이불 가운데 부근을 들추더니 다리를 밀어 넣고 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그 순간에는 뭘 하려는가 싶어 지켜만 보았어요. 마지막 정으로 포근한 이불 속에 누워 쉬고 싶겠지, 얼마나 아꼈는데 손에서 놓기가 쉽나, 비난보다 이해가 앞서더군요.
  아니었습니다. 옆으로 돌아누워 손에 쥔 라이터를 탁탁 켜대더라고요. 머리끝이 쭈뼛 섰습니다. 무슨 짓을 하려는지 직감했으니까요. 이불만이 아니라 자기 몸까지 태우려들었어요. 미친 놈! 끝까지 미친 짓거리야! 바득바득 이를 갈았는데 어찌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더군요.
  다행스럽게도 이불이 겹겹으로 눌려 연기만 피어오르고 불이 번지지는 않았습니다. 안되겠다 싶으니까 오른쪽 팔만 삐죽 내밀고 이불 가장자리를 향해서 라이터를 눌러대더군요. 하필 싸구려 나일론 이불에 닿았는지 화르륵, 불길 퍼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불에 타 죽는구나, 공포와 동시에 맥이 탁 풀리더군요. 
  살자고 태어나서 죽을 수는 없잖아요. 죽지 않고 살기는 살았습니다. 정신 나간 놈이 매캐한 연기가 코로 목으로 밀려들어 숨이 막히니까 이불더미 밖으로 머리를 밀쳐내더군요. 두 눈과 입을 찢어져라 벌리고 공기를 들이켰어요.
  마침 찢어진 신문지 위에 엎드려 떨던 강아지 한 마리가 불기를 쫒아서 슬금슬금 다가왔어요. 불내를 맡고 구운 고기 점을 떠올렸는지 주둥이를 헤 벌렸지요. 강아지 밖에는 도망칠 데가 없더군요. 어떻게든 불구덩이에서 빠져나가야한다는 절박함으로 변태를 윽박질렀어요.
  숯 구덩이에서 나가자고 나가! 타다만 시체로 남아서 흉물스럽다고 죽어서까지 욕을 먹고 싶어? 불에 탄 시체가 되지 말고 펄펄 뛰어다니는 강아지가 되자고. 강아지로 사는 게 천배는 나아. 목숨 줄이 얼마나 질긴지 몰라?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손가락 발가락 스무 개가 타들어가는 고통을 겪어야한다고. 죽기 한참 전부터 불지옥에 떨어지는 거야. 숨이 막히지? 뜨거워 돌아버릴 것 같지? 나가자고 나가! 꼼짝을 못하겠거든 구질거리는 몸뚱이는 이불 속에 남겨둬 버려. 머리만 정신만 온전히 들고 나가면 너는 산다니까!
  발버둥을 쳤습니다. 벌겋게 익어가는 몸뚱이 안에서 벗어나야한다는 일념뿐이었지요. 정수리로 치받아 미친 놈 목구멍을 열어 제켰어요. 생존, 지금껏 나를 이끌어가던 서슬 퍼런 욕망이 그리 하도록 만들었지요.
  미친 놈 역시 산목숨이라 본능이 작동하더군요. 전염이 됐든, 동화가 됐든 내 의지와 행동에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절실했으니까요. 절대로 죽고 싶지 않았어요. 무엇을 끌어들여서든 세상에 남고 싶었습니다.
 죽지 마! 나가! 고함을 내지르자마자 이불도둑은 저를 태우고 강아지 주둥이 속으로 튀어 들어갔습니다. 얼떨결에 일을 마치고는 구석에 바짝 웅크리고 앉아 바들바들 떨었습니다. 좀체 자기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갈피를 못 잡더니 정신 줄을 놓고 기절해버렸어요. 나일론 이불이 불길에 뚝뚝 녹아내리다 피부에 달라붙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뭉그러졌더군요. 어쩌겠습니까, 못 본 척 고개나 돌려 줄 밖에요. 끝까지 깨우지 않았습니다. 정신이 들어 제 모양에 놀라 자빠지느니 꿈속을 헤매는 것이 낫다 싶었지요.
  졸지에 나락으로 떨어져 당혹스럽기는 저 또한 마찬가지였어요. 사지는 잘려나가고 몸통만 남아 오물더미 위를 발발 기어 다니는 기분이었지요. 이렇다 할 방도를 찾을 수 없어 일단 처지를 받아들이고 묵묵히 견디었습니다. 견디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거든요.
  먹을거리, 사는 장소야 당연히 달라지는 부분이라 크게 개의치 않고 넘겼습니다. 문제는 바로 의식이더군요.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어느 즈음부터 강아지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어요. 인간다움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강아지다움이 들어선 겁니다. 
  과자봉지에 엎드려 까무룩 졸던 치와와가 고양이 울음소리에 튕겨 일어나 안절부절 동동거리더라고요. 환한 대낮인데다 인적이 끊이지 않는 공원 벤치 밑이라 위험할 턱이 없었는데 그 지경이었지요.
  한 순간 머리 끝이 얼어붙으면서 정신이 번쩍 났어요. 사리분별이 가능한 저까지 불안에 달달달 떠는 걸 발견했으니까요. 반은 개가 되었구나, 아차 싶었습니다. 위기였어요. 사람에서 강아지로 정체성이 바뀌는데 눈치를 못 챘던 거예요. 무작정 견디면 된다, 되뇌었는데 그게 다가 아니더군요.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사람답게 행동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임을 잊지 않고, 사람임을 쉼 없이 확인하는 방법, 말이었어요. 그래 다짜고짜 입을 열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따라했지요. 맞대응은커녕 귀를 열어줄 상대조차 없었지만 눈에 보이고 머리에 떠오르는 족족 혀와 입술로 음성을 만들어냈습니다. 지금이야 말수가 늘다 못해 떠버리가 되었지만 솔직히 전에는 말을 할 줄 몰랐어요. 필요성을 못 느꼈으니까요.
  구강 근육이 굳은 탓에 초반에는 지저분해, 못 먹어, 뛰어, 숨어, 최하위 수준의 어휘만 사용했어요. 하지만 발성 과정이 입에 익은 뒤로는 아침저녁이 다르게 실력이 늘더라고요. 열흘 남짓 공을 들이니까 하루 종일 겪어냈던 고단한 일상을 막힘없이 풀어낼 정도가 되었지요.
  낯설다, 표현을 늘려가던 중에 낯설다는 어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가슴팍을 콕 파고들었어요. 치와와의 몸으로 주변 세상을 파악하고 받아들여야 했던 처지라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다가왔지요.
  한여름에 한중간이었을 거예요. 뒤통수가 뜨끈뜨끈 달아올랐습니다. 네모난 보도블록에 버려져 줄줄 녹아내리는 막대 아이스크림이 눈에 들어왔어요. 보자마자 쌩하니 달려갔답니다. 분홍색과 초록색 국물이 나선형을 이루며 엉겨 붙었더라고요. 허겁지겁 아이스크림 국물을 향해 혀를 드밀던 찰나, 소리 세 개가 입 속에서 톡 튀어나왔습니다. 낯설다. 눈을 파고드는 분홍과 초록, 달착지근한 맛, 뱀처럼 움직이는 혀. 불현듯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 갇힌 기분이 들었지요.
  제 귀에 들린 낯설다는 어휘가 무척 낯설었는데, 음절을 똑 똑 끊어 낯, 설, 다, 낯, 설, 다, 혀를 놀려댈 때마다 눈에 보이는 사물들이 살짝 살짝 다르게 변하더라고요. 아이스크림이 낯설다, 길이 낯설다, 길 위에 풀이 낯설다, 풀 위에 먼지가 낯설다. 낯설다, 낯이 설다, 얼굴이 설다, 모습이 설다, 주위가 설다, 사는 게 설다.
  낯설다와 상봉한 덕택에 마음으로 보고 느꼈던 미묘한 부분들까지 표현할 수 있었어요. 제대로 된 이야기가 가능해졌지요. 그러면서 제가 저다워졌고요. 
  수박 속이 하야네, 하얀 수박이 낯설군, 수박이 설익어 하얗지, 설익어서 낯설군. 여름 한철 내내 그늘 밑으로 숨어 다니며 말놀이를 했답니다. 낯이 설다, 눈에 설다, 사과가 설익다, 밥이 설익다, 섣불리, 섣부르게, 섣부르다, 설렁설렁하다, 살랑살랑하다, 설설 끓다, 살살 끓다.
  어느 날부터인가 낯설다 세 글자 중에서 설이라는 음절을 요리조리 바꾸어가며 이 말 저 말 가져다 이어 붙였어요. 쓰면 쓸수록 정이 가더군요. 설, 그 당시에 설은 나만 알고 나만 좋아하는 소리였습니다. 혀와 입술을 놀려 말을 빚어내면 꼭 연애라도 하는 듯 기분이 들떴지요.
  설. 맞아요. 그래서 제 이름이 설이에요. 설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순간, 가슴이 두방망이질 쳐서 일어났다 앉았다 뱅글뱅글 맴까지 돌았는데….
  헌 옷을 물어다 후미진 담벼락 밑에 깔아놓고 그 위에 엎드려 발등을 타고 기어오르는 개미를 무심히 내려다보았습니다.
  나는 설이야, 내 이름은 설이야. 하얗게 바래가던 의식 한가운데에서 불꽃같은 말 한 마디가 뻥 터져 나왔어요. 머리가 맑아지고 눈앞이 환해지더군요.
  설. 찬찬히 이름을 불러보았어요. 설, 정갈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귀를 타고 들어와 온 몸 구석구석 퍼져 울리더군요.
  부르고 불리는 쓰임을 떠나 이름을 지녔다는 사실만으로 엄청난 힘이 생겼어요. 이름을 넣어 이야기를 하다보면 신이 나고 기력이 솟고, 마음에 품은 기대들이 금세 이루어질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시궁창에서 뒹굴지만 며칠만 지나면 쾌적하고 아름다운 땅으로 옮겨갈 거다, 희망이 샘솟았지요. 먹을거리를 찾아 뙤약볕 아래를 헤매어도 막막하거나 우울하지 않았어요.
  한껏 흥분한 채로 초가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치와와는 점점 지쳐갔어요. 먹을거리와 잠자리, 어느 구석 하나 만만하지 않았으니까요. 숨이나 부지하면서 근근이 하루를 이어나갔답니다. 해가 스러지면 헌옷더미 안에 들어가 잠을 잤지만 아침에 일어난다는 보장이 없었지요. 다급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최대한 빨리 극복할 방도를 찾아야했습니다. 미적거리다 시기를 넘기면 청소부들 손에 쓰레기더미 안으로 버려지거나 후미진 담장 밑에서 뭇 벌레들 보름 치 양식이 될 테니까요.
  상황이 어려운 만큼 치밀한 계획이 필요했습니다. 치와와야 구운 고기 조각인 줄 착각하고 이불 도둑을 받아들였지만 사람은 차원이 다르잖아요. 총기 잃은 눈에 눈곱이 덕지덕지 붙고 등짝이며 다리며 부스럼으로 흉물스러운데 병이 깊은 떠돌이 개를 받아줄 인간이 있을까 걱정이 앞섰습니다.
  치와와 형편이 어떻든 당장 제가 살려면 무슨 짓이든 해야 했어요. 사람들 앞에 나서서 시선을 끄는 행동부터 시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소중한 이름이 생긴 마당에 하찮은 치와와 안에서 왔다간다는 자취조차 없이 사라져질 수는 없었으니까요.
  짐작한대로 치와와보다 제 의지가 서너 단계는 위였습니다. 전에 함께 지낸 동거인들과 달리 치와와는 제 명령대로 행동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어요. 일단 사람들 왕래가 잦은 번화가 한 복판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평소에는 발에 채일까 무서워 얼씬 하지 않던 장소였지요. 휙 휙, 구두 발이 옆구리를 스치면 사지에 힘이 빠져 풀썩 주저앉더군요.
  길바닥에 늘어졌다 사람들이 지나가면 기운을 쥐어짜 애절한 눈으로 올려다보았어요. 치와와를 닦아세워 시선을 맞추도록 했지요. 답답하고 초조해서 사람들 바짓가랑이에 매달리고 싶었는데 그 짓은 차마 못하겠더라고요.
  “아-나 놀래라. 강아지여, 쥐새끼여. 웬 흉측한 놈이 가로거치게!”
  치와와를 피하려다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한 남자가 소리를 질렀어요. 소스라친 마음에 발길질을 하려들었는데 다행히 코앞에서 멈춰서더군요. 대신에 구두 신은 발로 치와와를 툭툭 차면서 길 끝으로 쫒아냈습니다.
  주눅이 들대로 든 치와와는 사람들 걸음이 미치지 않는 구석자리로 피하려했어요. 하지만 저는 다그쳐 돌려세웠습니다. 앞으로 닥쳐올 불행이 빤히 내다보여 매섭게 몰아세울 수밖에 없었어요.
  치와와는 따뜻한 관심을 받기는커녕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 매번 이쪽저쪽으로 걷어차였습니다. 한 나절을 채우지 못하고 포기했어요. 끊임없이 치밀어 오르는 모멸감에 치와와는 치와와대로, 사람들은 사람들대로 밉다 못해 혐오스러웠지요.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들 앞에서 값 싼 동정을 구걸하느니 한적한 숲 속으로 들어가 조용히 죽는 편이 낫다 체념했습니다.
  “어머, 잰 뭐니.”
  먼지 구덩이에 퍼질러진 채로 움직이자, 움직여, 수차례 되뇌는데 또랑또랑한 말소리가 들렸습니다. 치와와에 대한 연민이 감지되었어요. 고개를 번쩍 쳐들고 소리가 나는 곳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삼십 중 반 즈음으로 보이는 둥글둥글한 여자였어요. 치와와 한 마리가 여자 품에 안겼는데 짧은 흑갈색 털에서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더군요. 제 동거동물 역시 주인을 제대로 만났더라면 저리 건강했겠구나, 예뻤겠구나, 달리 보게 되더라고요.
  “우리 레드 친구네.”
  여자가 무릎을 굽혀 앉으며 나긋나긋 말했습니다. 치와와는 앞다리에 힘을 주어 반나마 일어섰어요.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여자와 눈을 맞추었지요. 여자는 손을 댈까 말까 망설이는 눈치였고요.
  안락했던 시절이 떠올랐던 걸까요? 여자 품에 안긴 치와와를 자신이라고 착각했을까요? 치와와가 여자에게 와락 달려들었습니다. 저는 정작 이리저리 재던 중이었는데 치와와가 먼저 행동을 취했어요.
  “어머나!”
  여자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몸을 젖혔습니다. 하지만 치와와는 여자 안으로 쏙 들어갔지요.
  강아지를 유난스레 아끼던 여자여서 도로 튕겨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제 동거동물을 거세게 거부했다면, 깨알만치라도 원하지 않았다면 구역질을 해대다 끝내 토해버렸을 겁니다. 자신을 해치는 이물질에 불과했을 테니까요. 
  “뭔 일이래.”
  품에 안은 치와와를 쓸어내리며 여자가 어리벙벙한 낯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조심조심 일어나 발밑을 살피더군요. 미간에 힘을 주고 미심쩍은 듯 주변을 훑어보았지요.
  고개를 갸웃하다 한 발작 걸음을 떼어놓았어요. 꺼림칙한 기분에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지만 자기 안으로 치와와가 뛰어들었다는 사실은 짐작조차 못했을 겁니다. 귀염 받을 요량으로 앞발을 세우고 가슴 한 가운데에 가만히 앉아 있었으니까요. 여자가 쓰다듬어 주기를 다소곳이 기다렸지요. 소박한 바람마저 옅어진 뒤에는 여자한테 물 마냥 스며들었는지 자리가 텅 비었더라고요. 
  여자와의 만남은 천운이었습니다. 애완견이라는 용어조차 없던 시절에 걸레쪽 같은 치와와를 받아주다니 보기 드문 호인이었어요. 심성이 고운 여자 덕분에 다시 사람의 붙살이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치와와 안에서 익힌 말들을 응원군 삼아 사람답게 사람으로서 세상을 마주했지요.
  어찌되었든 말을 배워 놓으니까 시시때때로 훈수를 두는 일이 가능했어요. 나름 재미가 쏠쏠하더군요. 대 놓고 면전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싫고 좋은 수준까지는 피력 가능했습니다. 
  치와와한테는 미안하기 이를 데 없지만 다시는 구접스런 동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겠다, 의지를 다졌어요. 사람들 발만 보면서 다녔는데, 그 발이 제일 무서웠거든요. 한 동안 구두 신은 발이 눈앞에 알짱거려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비참한 시절이 있던 줄도 모르고 지냈더라고요. 백상아리 안에 들어가 외로움에 직면하고 나서야 기억을 살렸으니 다 늦게 누구를 탓할 수조차 없었지요. 탓한다고 달라질 게 없지만 알고 들어갔으면 하루든 이틀이든 마음을 빨리 다 잡았을 거예요.
  제가 바라던 바는 아니었지만 바다 세상으로 옮겨가 처음 얼마간은 지낼 만 했습니다. 백상아리는 치와와하고 입장이 달라서 누가 공격해올까 긴장할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선희씨가 백상아리 밖으로 나가고 혼자서 심심했는데 딱히 후회는 들지 않았습니다.
  파도를 따라 일렁이는 달빛을 보다가 나는 사람인데, 물고기가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번뜩 깨달았어요. 사람은 사람과 어울려야한다는 당연한 진리가 지나도 한참을 지나서 떠올랐지요. 오래 전 치와와 안에서 겪었던 고통과 더불어 말입니다. 외롭더군요. 눈길 한 번 교환할 수가 없는데 수 천 수 만 마리의 물고기가 곁에서 바글거린들 뭐합니까. 백상아리가 외로움에 지쳐 육지로 올라갔나, 말도 안 되는 잡념에 빠져서 하루를 보내기 일쑤였어요.
  그런데 사람 몸에 사람 이름에 딸, 아내, 엄마, 다양한 역할까지 수행했던 선희씨는 행복해보이더라고요. 가끔가다 언뜻언뜻 보았거든요. 기다란 다리를 통으로 이어 붙여 한결 완벽해진 모습으로 백상아리 곁을 떠나지 않고 주변에서 일상을 꾸려나갔지요. 넓디넓은 바다 안에서 그나마 의지할만한 대상이 백상아리였나 봐요. 백상아리 배 밑에 머무르면 다른 해양 동물들의 위협이 조금은 줄어들 테니까요. 새로운 자신을 얻은 대신 그 만큼 위험에 노출되었는데, 어쩔 수 없지요.
  대체 무슨 까닭에 물고기로 변신했을까? 물고기가 진정 원하던 모습일까? 선희씨의 행동을 따지고 들수록 자유라는 어휘만 뇌리에 어릿댔어요. 바다 속이다보니 이리 느꼈겠지만 헤엄쳐 다니는 모습이 자유로워 보였습니다. 땅 위에서 마냥 옷이고 머리고  행동이고 신경 쓸 게 없었지요. 순수하게 자기 몸 하나만 챙기면 되니까요.
  머리 안에서 갖가지 상념들이 똬리를 틀었다 풀었다 했습니다. 하긴 생각 말고는 딱히 할 만한 일이 없었네요.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시간과 공간들이 길게, 아주 길게 이어졌거든요. 비슷한 풍경 속에서 비슷한 백일몽에 잠겼다 보면 살았는지 죽었는지 가물가물해졌어요. 삶과 죽음을 명확히 하고 싶어 바위를 향해 냅다 돌진한 적도 있었지요. 피는 났지만 크게 다치지는 않았어요. 피 냄새를 맡으니까 그제야 죽은 건 아니라는 확신이 들더군요. 
  끝을 보이지 않던 무료함이 찰나적으로 뚝 끊어지는 시기가 오는데 백상아리가 사냥에 나서는 지점이었습니다. 내장이 텅 비어 우릉우릉 울리면 백상아리는 순식간에 돌변했어요. 기름진 살덩어리를 쫒아 눈을 번득이고 근육 하나하나마다 살기를 채워 넣었지요. 물개든 거북이든 사냥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지만 그 과정은 수월치 않았습니다. 쫓고 쫓기는 사투를 치루고 피비린내를 물씬 풍기고 나서야 남의 살덩어리를 배 안에 담았으니까요. 
  아까 외로웠다 했던가요? 그 시간이 제일 외로웠습니다. 다른 백상아리들이 피 냄새를 맡고 우르르 몰려들까 두려워 살덩어리를 다급히 삼키고 난 뒤에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난 뒤에는 뼈마디가 저릿저릿하게 외롭더군요.
  내장이 찬 상태에서도 살육의 흥분과 긴장은 세포 하나하나에 곧추섰습니다. 그러면서 무료했어요. 살육의 욕망과 무료함이 백상아리 안에서 악다구니를 벌였는데 무료함이 살육의 욕망을 경멸했고, 살육의 욕망이 무료함을 박살냈지요. 균형을 잡지 못하고 끝에서 끝으로 내달렸습니다. 저 역시 그 안에서 초조했고요. 입 한 번 벙긋댈 기회가 없으니 이래저래 외로움만 커졌습니다.
  백상아리 붙살이 노릇을 하느라 절절매던 저와 달리 선희씨는 요령껏 원만하게 일상을 꾸려나가더군요. 백상아리를 따라 남쪽으로 이동했는데 지치는 기색이 없었어요. 되레 젊어졌다는 인상을 받았지요. 얼굴은 얼굴대로 몸은 몸대로 탄탄해지고 윤기가 흘렀어요. 사냥을 마치고 돌아서다 정면으로 마주쳤는데 선희씨가 빠르게 헤엄쳐 시야에서 사라지더군요. 잽싸기가 날치 수준이었습니다.
  당연히 염두에 두었겠지요. 허기진 백상아리 눈에 뜨이면 목숨이 위태롭다는 사실, 도망치는데 실패하면 죽는다는 사실, 누군가에게 먹히면서 죽거나 죽어서 먹히거나 둘 중 하나로 생을 마감해야한다는 사실. 선희씨는 인간이 아니라 물고기였으니까요. 그리고 다른 물고기들처럼 그리 되었어요. 사냥에 실패한 백상아리 눈에 띄어 잡아먹혔거든요.
  세 동강이가 난 선희씨가 차례차례 백상아리 입 안으로 들어와 꿀꺽꿀꺽 삼켜질 때 저는 멍하니 빨간 피만 바라보았습니다. 선희씨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사방으로 흩어지다 가뭇없이 사라졌지요. 슬프고 참혹했지만 그렇다고 백상아리가 원망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차라리 잘 되었다 싶기도 했어요. 사냥이 한 순간에 이루어져 고통이 짧았을 테니까요.
  선희씨를 몸에 넣고 찬찬히 삭히면서 백상아리는 따뜻한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풍랑을 만나 곤욕을 치른 며칠을 빼면 딱히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가끔은 옆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다시 남쪽으로 머리를 두더군요.
  그러거나 말거나 저는 눈에 보이는 대로 보고 귀에 들리는 대로 들으면서 수시로 불퉁거리는 마음만 다잡았습니다. 바다 안에서는 제일 위 단계에 오른 포식자가 백상아리라서 공격당할 걱정이 없었으니까요. 위협이 되는 동물을 꼽으라면 성질이 광폭한 다른 백상아리 정도인데 무리에서 떨어져 다녔기 때문에 부딪치는 경우가 드물었고요.
  흐음, 제 동거동물 백상아리는 외톨이였습니다. 동해안 모래톱에서부터 혼자였던 터라 혼자임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돌고래 무리를 만난 뒤로는 타고난 본성일까 아니면 스스로의 선택일까 궁금해지더군요.
  돌고래들이 자기들만의 언어로 대화하는 모습을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곤 했습니다. 솔직히 부럽더라고요. 말을 주고받는 돌고래들이 무척 행복해보였습니다. 서로 장난질까지 쳤는데 그건 혼자가 아니라 가능한 부분이었지요. 돌고래 무리와 만나 곁에 붙어 헤엄을 치다보면 오래 전 말을 익히던 여름날이 새록새록 떠오르더군요. 어두컴컴한 심해에서 방향 없이 휘돌아다닐 때에는 치와와 붙살이 시절하고 실속 없이 비교 했고요.
  해변에 쓰러져있던 백상아리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어요. 깊은 바다에 사는 백상아리가 무슨 이유로 육지까지 갔을까?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고 아무리 궁리한들 답이 나오지 않더라고요. 사람 안에서 태어나 사람들 붙살이 노릇만 해왔던 터라 백상아리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더군요. 결국 체념하고 말았습니다. 섣부르게 넘겨짚었다 실수나 하면 어쩌게요.
  백상아리는 해안을 따라 계속 아래로 헤엄쳤어요. 나이를 먹은 건지 몸이 커지고 무거워진 건지 둔해졌다 싶었는데 사냥에 나서면 여지없이 드러나더군요. 실패가 잦아졌습니다. 그 때문에 사나워지고 참을성마저 줄어들었고요. 대여섯 번 놓쳤다 간신히 잡아채고는 분풀이 조로 사냥감을 갈기갈기 찢어놓았습니다. 그 바람에 기운은 기운대로 쓰고 배는 배대로 곯아야했어요. 그런 날에는 어두운 바다 밑을 한참 헤매 다니더군요. 자신이 못마땅하다 못해 싫었겠지요.
  결국 사단이 나더군요.
  텅 빈 뱃속을 무엇으로든 채워야 해서 수면 위로 올라가 사냥감을 물색했습니다. 육지와 가까운 지역이라 물개가 흔하더라고요. 물개 무리를 흩어놓고 마땅한 놈 하나를 정했습니다. 주둥이를 벌리고 몸을 솟구쳐 대차게 공격했지요. 어리고 작은 놈이었는데 보통 날래지 않더군요. 매번 빗겨나가는 통에 약만 바짝 올랐습니다. 목덜미를 긁혀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마지막까지 도망치더라고요. 흥분할 대로 흥분한 백상아리는 물개를 쫒아가 두 동강이내고 닥치는 대로 물고 흔들어 난도질을 쳤습니다. 제정신이 아니었지요.
  진짜 위기는 그 다음에 닥쳤습니다. 다른 백상아리들이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들었어요. 물개 살 몇 첨에 한껏 식욕이 동한 백상아리들이 피 냄새에 절은 제 동거동물을 공격했습니다. 예상 못한 바는 아니었지요. 한 차례 당한 경험을 가졌으니까요. 그 때는 사냥감을 빼앗기지 않으려다 싸움이 났는데 수세에 몰린 순간 먹이를 놓고 도망 쳐서 목숨은 건졌습니다.
  전에처럼 백상아리 무리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어요. 상황이 달랐으니까요. 물개 대신에 제 동거동물을 사냥감으로 지목했어요. 몸을 흔들어 대항했지만 사방에서 치고 들어오는 공격을 죄다 막아낼 수는 없었어요. 꼬리 쪽부터 살점이 뜯겨나갔습니다. 사냥이나 싸움이 벌어지면 죽은 듯 눈을 감은 저였지만 나 몰라라 할 수 없었어요.
  멀리 배 한 척이 보이더군요. 가까이에 사람이 존재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유일한 희망, 사람을 향해, 사람이 탄 배를 향해 도망칠 것을 명령했어요. 제 동거동물은 너덜너덜해진 몸뚱이를 돌려세우고 곧장 내달렸습니다.
  배 앞쪽으로 창살이 쳐진 우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 동거동물은 공격자들을 피해 우리 안으로 숨으려 돌진했지요. 그런데 이미 잠수복 차림의 인간이 우리를 차지했더군요. 인간의 선점 여부를 떠나 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했어요. 제 동거동물은 쇠창살에 머리를 부딪고 튕겨나갔습니다.
  백상아리의 공격에 자지러진 인간이 산소 흡입기를 놓쳤습니다. 빈 입만 벙긋대면서 공중에 늘어진 줄을 다급하게 잡아당기더군요. 인간을 담은 우리가 물 밖으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입에서는 연거푸 공기 방울이 부글부글 뿜어져 나왔지요.
  난폭한 백상아리들에게 뜯어 먹히는 고통만 남았더군요. 제 동거동물이 죽으면 저도 죽고 제 동거동물이 먹히면 저도 따라 먹혀야했지요. 배 위에 머무는 인간들은 도와줄 수 없었고요.
  그래요,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았습니다. 잠수복을 입은 인간이 몸 안에다 숨겨주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하지만 과연 모두에게 옳은지, 그리고 가능하기는 한지 확신이 서지 않더군요. 망설이는 사이 제 동거동물은 옆구리를 뜯기고 피를 철철 흘렸습니다.
  죽든 살든 피 비린내가 진동하는 바다에서 떠나고 싶었어요. 피를 쏟아내고 그 안에서 몸부림을 치는 제 동거동물 또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피를 싫어했으니까요. 자신이 사냥해놓고도 사냥감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면 진저리를 쳐댔지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피의 광란에서 도망칠 목적으로 육지에 올라가려했는지 몰라요. 피 냄새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외떨어져 다녔는지 모릅니다. 어느 순간 피 냄새에 광분하고 점점 더 많은 피를 필요로 하는 자신에게 절망했겠지요.
  앞뒤를 잴 틈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무작정 외쳤어요.
  ‘나를 삼켜요!’
  인간의 머리가 물 밖으로 솟구치려는 찰나였지요.
  ‘백상아리를 봐요. 백상아리를 숨겨줘야 해요.’
  백상아리를 지목하며 고함을 내지르던 순간 인간이 목에 건 사진기를 쥐고 고개를 숙이더군요.
  ‘육지로 가고 싶어요! 나를 삼켜요!’
  인간이 제 동거동물을 향해 사진기 셔터를 눌렀습니다. 플래시 터짐과 동시에 제 동거동물은 인간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인간이 제 동거동물을 원했으니까요. 상처 입은 떠돌이 백상아리를 자기 안에 담았지요.
  들어 짐작하시겠지만 혜진씨가 사진을 찍었습니다. 백상아리 케이지 투어 중이었지요. 관광도 관광이지만 업무가 우선이었으니까 투어 취재라는 표현이 정확하겠네요.
  여행 작가들이 모여 서남아프리카 7개국 안내 책자를 지역별로 나누어 제작하더라고요. 혜진씨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담당이었고요. 케이프타운이 마지막 취재 장소였는데 그 도시에서 제일 유명하고 흥미로운 관광 상품이 희망봉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백상아리 케이지 투어였어요. 그 쪽 바다에 백상아리들이 군집해 살아 고안된 프로그램이지요.
  필수적으로 삽입해야 하는 사항이라 투어에 참가해 그 과정을 기록하고 사진을 찍었던 겁니다. 궁지에 몰린 백상아리가 자신에게 덤벼드는 극한 모험까지 겪었으니 제대로 체험하고 취재했지요. 백상아리를 데리고 온 일은 덤이었고요.
  제 동거동물이었던 백상아리는 하루 중 대부분을 흥분 상태로 지냈어요. 급변한 상황에 적응하기는커녕 스스로를 다스리기조차 힘겨워했지요.
  허옇게 질렸던 혜진씨는 직업정신을 동원해서 어찌어찌 취재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충격이 셌던지 심신의 안정을 찾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어요.
  혜진씨는 일주일여 쉬고 편집회의에 참여했습니다. 일상에 복귀했지요. 하지만 백상아리는 곳곳을 헤집어대고 닥치는 대로 부대였답니다. 그 바람에 혜진씨가 병원에 찾아가서 상담을 받아보라는 충고를 들어야했어요. 회의에 집중을 못하고 안절부절 하다 평소에는 참고 넘어갔던 말 한마디에 주먹으로 책상을 치면서 버럭 댔거든요. 내가 맡은 부분은 내가 책임지니까 간섭 말라면서 밖으로 뛰쳐나간 적까지 있었지요.
  병원에 가지는 않았습니다. 자신감도 자신감이지만 비용 역시 문제가 되었을 거예요. 혼자 견디기에는 힘들고 벅찬 상황인데 여행을 하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면서 백상아리를 견디어내더군요.
  백상아리는 살이 뜯긴 아픔보다 피 냄새를 참지 못했습니다. 제 몸에 난 상처에서 비질비질 흘러내리는 피와 피 냄새 때문에 코를 벌름거리고 눈을 희번덕대다 이마를 쾅쾅 박아댔지요. 그 때마다 혜진씨는 고시원 침대 속으로 파고들어가 베개로 머리를 내리누르면서 진땀을 쏟아냈고요.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이불 속에서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러다 남편에게 음성 메시지를 남겼지요.
  “내가 왜 삼백육십오일 민서 옆에 붙어있어야 하는데. 엄마라고 꼭 그래야하는 거 아니잖아. 집 좋아하는 당신이, 항상 곁에 머물러 돌봐주고 싶은 당신이, 아빠가 해도 되잖아. 그거 알아? 민서 행복이 중요한 만큼 내 행복도 중요하다고. 민서하고 당신을 위해서 내가 꼭, 내가 꼭…”
  말을 잇지 못했는데, 전화가 저 혼자 끊겼습니다.
  이불을 젖히고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형광등을 올려다보다 느릿느릿 일어나 벽에 기대앉았습니다. 베개를 끌어다 부둥켜안고 생각에 잠겼지요.
  어두워진 휴대전화 화면을 켜고 문자 메시지 창을 열었습니다. 
  ‘엄마하고 지내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 만큼 행복이 커진다, 백 프로 보장할 수 있어? 아니잖아. 핵심은 옆에 있어주는 것이 아니라 행복이야. 불행한 엄마가 아닌 행복한 엄마를 보면서 행복할 수 있잖아. 엄마가 가져다준 기념품을 모으고 사진을 보고 이야기를 들으면 행복하지 않을까? 엄마가 쓴 글을 읽으면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까? 여행 작가 엄마를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끊임없이 도망치려드는 메시지를 연거푸 되살려 잡으면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지우지도 보내지도 못하고 잘근잘근 입술만 씹어댔어요. 그 때 남편한테서 문자가 왔습니다.
  ‘그래. 뜻이 그렇다면 이혼하자.’
  전혀 예상 못한 건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도 충격이었어요. 방아깨비마냥 끌어안은 베개에 이마만 박아댔습니다. 그러다 머리를 확 젖혀 뒤통수를 벽에 부딪고 눈을 감았습니다. 방음이 안 되는 고시원이라 소리 내어 울 수는 없고 눈물만 줄줄 흘리더군요.
  변기 옆에 걸어둔 두루마리 화장지를 끊어다 눈물을 닦아내고 힘들게 써놓은 메시지를 지웠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 말을 적어 보냈지요.
  ‘나는 내 행복을 얘기했는데 당신은 이혼을 얘기하네.’
  곧바로 남편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이혼을 염두에 두고 아프리카로 떠났던 거 아닌가.’
  ‘아프리카에서 일하고 왔다고 이혼 당하는 사람도 있어?’
  ‘당신은 남편과 아이를 버리고 아프리카로 간 사람이야.’
  ‘아니! 당신이 부인과 집을 버린 거지.’
  알고 보니까 혜진씨 남편이 전셋집을 정리해서 시댁으로 들어갔더라고요. 아프리카로 취재 간 삼 주 동안 말입니다. 남편과 의견조율이 안 된 상황에서 시댁으로 따라 들어갈 수는 없고, 어쩔 수 없이 고시원을 얻었어요. 아이가 보고 싶어서 사과 한 상자 사들고 시댁에는 다녀왔습니다.
  사랑한다 해서 무작정 데리고 나올 수는 없잖아요. 아이 저녁까지만 먹이고 고시원으로 돌아왔습니다. 민서한테는 엄마 멀리 일하러 간다, 이리 말해두었어요. 그랬더니 어린 것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라고요. 아이 아빠가 아침마다 출근하는 모습을 죽 보아왔을 테니까요.
  결국 이혼하기로 합의했어요. 혜진씨는 혜진씨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중시하는 부분이 달랐으니까요. 혜진씨는 여행을, 남편은 부인이 지키는 가정을 포기 못했지요.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마찰이 생겼는데 그건 각자 가진 것들 주고받으면서 해결했어요. 하지만 아이는 아니잖아요. 엄마노릇 아빠노릇이 칼로 두부 자르듯 명확하지 않으니까. 아무래도 아이 양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관건이죠. 현 시점에서는 시어머니한테 의지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다른 맞벌이 가정하고 별반 다를 바 없다 생각하면 그만이기는 한데…, 주어진 여건에서 엄마 역할도 최대한 수행하려니까. 이기적으로 하고 싶은 것만 하려든다, 남편이 그걸 또 못마땅해 하고. 
  이기적이라는 말에 혜진씨가 무척 상처 받았어요. 술 꽤나 마셨지요.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잖아요.
  저는 좀 안타깝더라고요. 누구는 안 그런가요? 세상 천지에 목숨 가진 것들은 이기적이기 마련이잖아요. 그래서 서로 서로 행복하려면 서로의 이기심을 존중하고 조정할 줄 알아야합니다. 쉽지는 않죠, 이기적이니까.
  ‘당신 역시 이기주의자야. 이기주의자!’
  ‘더 최악의 사실은 이기주의자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
  혜진씨가 연속으로 문자 두 개를 보낸 뒤에 고추참치 한 캔 따놓고 소주를 마셨습니다. 술기운에 한 나절 자고 난 다음부터 조금씩 안정을 찾았습니다. 백상아리 덕도 좀 있었고요. 시간이 약이라고 두어 달 남짓 지나니까 발작이 잦아들더군요. 아무리 깊은 상처인들 날이 차면 아물기 마련이잖아요.
  꼬들꼬들 아물어서 잠자듯 눈을 감았다가도 바다 근방에 가서는 난동을 부렸습니다. 바다 비린내가 피 냄새로 여겨졌겠지요. 혜진씨 역시 백상아리 케이지 투어에서 겪었던 공포가 되살아나는지 전신이 뻣뻣하게 굳어서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했어요.
  바다에 민감해진 상태로 동해안 버스 여행 기획 기사를 맡은 건 또 다른 모험이었습니다. 프리랜서 여행 작가로서 글을 쓰고 돈을 벌 기회인데 놓치기 아까웠을 거예요. 글은 차치하고라도 벌이 자체가 들쑥날쑥한데다 알뜰히 챙긴다한들 생활이나 겨우 유지하는 정도거든요. 당장 해결해야하는 금전 문제가 여럿 되어서 백상아리 앙탈쯤은 모르는 척 넘겨두어야 했지요. 두 계절 동안 어르고 달래 백상아리도 순해졌고요.
  동해안 취재에 나서면서 선희씨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바다를 앞에 둘 때마다 괜스레 들떴다 착잡해졌다 종잡을 수 없었어요. 예전 동거인들을 바다에 풀어놓았으니 깃털마냥 가벼워졌을 텐데, 다시 건강해졌으니 하고 싶은 일이 많아졌을 텐데. 가지가지 잡념에 휘둘리다 시내버스를 놓치기도 했고요.
  혜진씨가 찾은 첫 번째 취재 장소는 화진포였습니다. 일박이일 예정으로 떠났다가 사박오일 머물렀어요. 계획대로 안 되어서 글 한 줄 끼적이지 못하고 바다만 바라보다 돌아갔답니다. 그 덕분에 마감 전날 밤을 꼬박 새워야했지요. 경관 사진에 버스시간표까지 곁들여지는 기사라 상대적으로 글 양은 적은 편이었는데 고걸 못 쓰더라고요. 노트북 화면만 죽어라 노려보다 드러눕기 일쑤였습니다.
  화진포에서는 취재만하고 속초 시내로 나와 찜질방에서 묵을 계획이었는데 부주의로 그만 막차 시간을 넘긴 거예요. 언짢은 사고를 겪었던 터라 해변 안으로는 못 들어가고 멀찌감치 떨어져 이곳저곳 에둘러 다니며 전경 사진만 찍었어요, 시간이 남아서 소나무 밑 기다란 나무의자에 누웠다가 깜빡 잠이 들었지요.
  타고 나갈 버스는 없고 어쩔 수 없이 민박집을 얻었습니다. 바다에 인접한 허름한 일반 주택이었는데 하루에 이만 원이더라고요. 평일이었으니까요. 라면 사다 끓여먹고 일찌감치 이불 위에 누웠는데 파도 철썩이는 소리가 그지없이 평화롭더군요. 행여 멋진 문장이 떠오를까 머리맡에 수첩과 펜을 꺼내 놓고 아침나절까지 달디 달게 잠만 잤습니다.
  잠자리가 맘에 들었는지 해장국 한 그릇 사 먹고 해변 언저리를 맴돌다 혜진씨가 하루치 방값을 더 지불했어요. 점심으로 빵과 커피를 사서는 모래사장에 앉았지요. 우산으로 햇빛을 가리면서 해질녘까지 해변에 머물렀습니다. 바다에 대한 두려움이 가시기를 기다렸겠지요.   
  즉석 밥에 즉석 미역국으로 저녁을 때우고 광고지 이면에 기사를 쓰려 했는데 파도소리를 듣다 금방 잠이 들었어요. 바다를 여행하는 꿈만 내리 꾸다 해가 중천에 떴을 즈음에야 일어났습니다. 세수를 끝내자마자 바다로 향했지요. 이른 점심으로 해장국 사 먹고 하루치 방값 계산하고 해변으로 나가고. 이틀을 이리 보내다가 안 되겠다 싶은지 금요일 아침에 서울 행 시외버스를 타더군요. 마감이 며칠 안 남았는데 기사 한 줄을 온전히 쓰지 못했으니까요.
  기사 작성에 대한 부담으로 맘이 편치는 않았지만 바다와 하늘은 원 없이 보았습니다. 파도 소리 역시 원 없이 들었고요. 먹고 해변으로, 자고 해변으로. 시험 삼아 허리춤까지 바닷물에 담갔는데 아무렇지 않더군요. 갈아입을 옷이 없어 마를 때까지 방 안에 콕 박혔던 것만 빼면 다른 문제는 없었습니다. 백상아리 또한 코나 벌름거리고 꼬리지느러미나 움찔대다가 그만이었고요.   
  첫 번째 취재 여행 이후로 바다에 대한 거부감이 씻은 듯 사라졌어요. 그래 두 번 째 여행부터는 바람이 불든 파도가 치든 거리낄 게 없었습니다. 그 덕에 태풍이 북상 중이라는 기사에 앞뒤 재지 않고 후다닥 짐을 챙겼지요.
  저기 혜진씨가 오네요. 빗방울도 떨어지고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숙소는 정하셨나요? 차를 가지고 오셨다고요. 다른 데로 가시게요? 여기 바닷가도 하루 밤 보낼 만 한데. 일단 한갓지고 조용하잖아요.
  저희는 요 근처 펜션에 방을 잡아놨습니다. 날씨도 그렇고 라면 끓여서 소주 한 병 마시려고요. 에이그, 옷하고 신발부터 빨아 널고 뭐든 해야겠네요.
  밤사이에 태풍이 지나갈 텐데 얼마나 요란할라나? 아침 일찍 해변 한 바퀴 더 둘러보고 저희도 올라갈 겁니다. 글을 써야하니까요.
  저는 이만 혜진씨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즐겁게 여행하세요. 태풍 잘 지켜보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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