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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작가 : 은이설
작품등록일 : 2019.10.25

제 이름은 설입니다. 몸이 없어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남들처럼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제 처지가 이 모양이라 사람들 몸에 들어가 생활합니다. 다른 존재에 의지하면서 지낼 수밖에 없는 붙살이지요. 그리고 동거인이 염원하는 누군가의 몸 안으로 동거인과 함께 이동하면서 삶을 유지하지요.
최근에는 제 이야기를 누구에게라도 들려주고 싶더라고요. 속이 답답해서…, 털어놓고 싶은 사연이 무궁무진하거든요.

 
일곱 하나 둘 셋, 번지!
작성일 : 19-10-25 20:33     글쓴이 : 은이설     조회 : 540     추천 : 0     분량 : 25,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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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하나 둘 셋, 번지!
 
  선희씨가 텅 빈 눈으로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다 바닥을 짚고 일어섰습니다. 어깨까지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물이 흥건한 구두를 발에 꿰고 방을 나섰습니다. 펜션 이불을 밖으로 가지고 나온 것이 사뭇 켕겼는데 현관문을 나선 순간 잘했구나 싶었어요. 새벽이 되었다고 금방 따뜻해지지는 않더라고요. 기세만 수그러들었다 뿐 맨다리에 닿는 바람이 싸늘했습니다.
  밤이 물러가는 바다 위로 새벽이 들어섰어요. 선희씨가 실눈을 뜨고 수평선을 넘겨다봤습니다. 펜션 앞 횡단보도 위에서 멈칫대다 도로를 건넜어요. 가로등 불빛이 흐릿하게 바라는 인도를 지나 모래사장과 이어진 시멘트 계단 앞에 멈춰 섰습니다. 또 한참 바다 끝을 응시하다 계단을 내려갔어요.
  끊임없이 파도가 해변을 향해 내달리더군요. 하지만 사람 하나가 걸을 만큼은 공간을 남겨두었더라고요. 모래사장 위에 선 선희씨가 고개를 돌려 어슴푸레 드러나는 해변을 살폈어요. 초승 달 모양 모래사장 끝으로 바위절벽이 보였습니다. 어둠이 덜 걷혀서인지 낮에 보다 더 멀고 더 검었어요.
  선희씨가 절벽 쪽으로 걷기 시작했어요. 물을 머금은 진갈색 모래가 발밑을 받쳐주어 걷기가 수월했습니다. 하지만 발을 내어딛을 때마다 누군가 뒤에서 잡아당기는 기분이 들었어요. 선희씨가 멈칫 돌아섰다 구두 굽 때문에 앞보다 뒤가 더 들어간 신발자국을 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습니다. 불안함이야 어쩔 수 없지만 의심은 사라졌을 거예요.
  파도가 씻어놓은 정갈한 해변을 고요히 걸었습니다. 애초부터 바다에 온 목적이 아침 일찍 일어나 인적 없는 해변 걷기였던 양 시선조차 흩트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지요. 양 손으로 엇갈려 쥔 이불이 바람에 날리면서 파닥파닥 소리를 냈습니다. 옥색 여름 이불이 선희씨 몸과 이어져 퍼덕이는 날개 같더군요. 하늘 높이 이불을 치켜들으면 바람에 날아오르지 않을까 싱거운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잠깐씩 고개를 들면 하늘은 하늘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한층 선명했습니다. 선희씨가 웅크린 가슴을 펴 신선한 공기를 들이켜고 몽롱한 눈을 부릅떠 의식을 다잡았습니다. 머리에 가득 찼던 연기가 차가운 바람에 말끔히 씻겨 나갔는지 세상이 맑아보였어요.
  선희씨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습니다. 묵묵히 발을 내딛었을 뿐인데 어느 새 해변 중간 참이었어요. 점선 모양으로 길게 나열된 발자국이 흡사 개미처럼 보였습니다. 등 뒤에서 몰래 따라 왔던 듯싶어 한 순간 당혹스러웠어요.
  선희씨가 다리를 내둘러 발자국을 흩트렸습니다. 걸어온 흔적을 지우고 싶겠지만 지울라치면 되짚어가야 하고 되짚어간 만큼 되짚어간 자국이 또 어지럽게 남을 테지요. 선희씨가 검은 점들을 넘겨다보다 바다를 향해 몸을 돌렸습니다.
  그러고 보면 밤 내내 해변은 파도의 세상이었습니다. 파도가 물러나 모래사장을 걷고 발자국을 남기지만 다시 세차진다면 처음부터 없던 듯 사라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희씨가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습니다. 파도가 달려와 선희씨 발등을 적셨어요.
  갑자기 바다가 살아 꿈틀거리는 동물로 느껴지더군요. 수천수만 개의 촉수를 들썩대는 초거대 생명체.
  선희씨가 이불을 탄탄히 다잡고 발을 내딛었습니다. 자신이 움직이는 순간 발자국이 만들어지고 발자국이 만들어지면 되돌릴 수 없음을 받아들였겠지요. 발작을 떼어 놓으면서 어딘가에는 도착해야한다고 의지를 다졌을 거예요. 그 어딘가에 도착해야 쉴 수 있으니까요.
  사위가 밝아져 바위 모양새가 눈에 잡힐 즈음 끝에 도착했습니다. 가까이서 보니까 절벽 앞으로 뾰족한 갯바위들이 넓게 펼쳐졌더군요. 선희씨는 파도가 닿지 않는 바위에 기어올라 그 중 평평한 곳에 앉았습니다. 이불을 그러쥐고 허리는 꼬부라트린 채 바다를 넘겨다보았지요. 단발머리가 바닷바람과 뒤엉켜 사방으로 나불대는데 그대로 내버려두더군요. 입은 고집스레 다물었지만 눈은 평안했습니다. 
  수평선 위로 엷고 긴 회색빛 구름자락만 낮게 퍼져 있었습니다. 태풍이 떠났더라고요. 세상이 부서져라 긴긴 밤 요란을 떨더니 슬금슬금 힘이 빠지는 파도와 바람만 남겨놓았더군요.
  멀리 바다 끝 가장자리에 붉은 기운이 어렸어요. 해 머리를 보는 순간 선희씨가 일출을 보기위해 여기까지 왔구나, 힘차게 솟아오르는 해를 보면서 기력을 회복하고 새롭게 시작할 계획이구나, 마음이 놓였습니다. 이글거리는 태양을 마주할 기대에 가슴이 뛰었지요. 
  일출 얘기가 나오니까 문득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침 첫 해를 보고파 했던 남자들이었는데…, 언제 적 일이었는지는 가물가물 하지만 둘의 대거리가 유쾌해서 웃음부터 나네요.
  아마 교사와 학생 사이, 직접적으로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 사제관계였던 것 같아요. 제가 어느 쪽에 머물렀냐면…, 그건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축하한다. 대학 붙었는데, 뭐 할 거냐?”
  삼십 초반 쯤 된 원기가 넘쳐 보이는 남자, 교사로 보이는 남자가 물었어요.
  “글쎄요. 뭐하죠?”
  고삼? 맞아요. 늙은 분위기를 풍기는 아직 어린 남자, 고삼이 되물었지요. 둘 사이에는 레스토랑 탁자가, 탁자 위에는 깔끔하게 비워진 돈가스 접시가 놓였어요.
  “할 일 없지? 선생님이랑 동해안이나 가자.”
  “동해안이요? 왜요?”
  “왜는 왜냐? 동해안에 뭐 하러 가겠냐? 그래, 네 상식 수준 좀 확인해보자. 논리적으로 추론해서 대답해 봐.”
  “어-, 바다 보는 거요?”
  “바다는 서해안에도 남해안에도 있어, 인마.”
  “그럼…, 동쪽이니까…”
  “모르냐? 머리가 휙휙 돌아갈 땐데 모르는 거야?”
  “틀렸다고 안 때릴 거죠?”
  남자애가 눈을 치떴습니다.
  “안 때려 인마, 여기가 어디 학교 교실이냐?”
  남자교사가 실실 웃었습니다. 남자애가 꽤나 귀여운지 눈을 떼지 못하더군요.
  “일-출? 일출 맞죠?”
  “아이, 새끼. 느리기는.”
  남자교사가 한 대 쥐어박을 듯 손을 들어 보이며 장난스럽게 말했어요. 이런 상황에 꽤나 익숙한지 남자애는 과장된 동작으로 피하는 척을 했고요.
  “일출은 왜요?”
  “왜는? 인마, 대학 들어가기 전에 기념으로다 일출을 봐줘야지. 다들 그래, 인마.”
  “일 년에 삼백육십오 번 뜨는 해 봐서 뭐하게요?”
  “국 끓여먹으려고.”
  “선생님, 방학이라 할 일 없죠? 심심하죠?”
  “안 심심하거든, 새꺄. 처리해야할 업무가 산더미야. 선생은 방학에 만날 노는 줄 아냐? 암튼 나랑 갈 거야, 말거야?”
  “음-. 내가 왜 가야 되는 데요?”
  남자애가 샐샐 웃으며 약을 올렸어요.
  “아이, 새끼. 새 인생 새 출발. 심기일전! 대학 입학 기념이라고 내가 안했냐? 싫으면 말고, 나도 바쁘다.”
  남자교사가 고개를 홱 돌려버렸습니다.
  “바쁜데 왜 가요?”
  무엇이 궁금한 걸까요? 무슨 답을 원하는 걸까요? 남자애가 되바라지다 싶게 쏘아 보며 물었습니다. 순간적으로 남자애와 눈길을 부딪은 남자교사가 당황스러운 듯 시선을 피했습니다.
  “실은 혼자 갈려고 계획을 세워놓았는데 너한테 필요한 경험이라서, 교사된 마음에 학생 배려해서 묻는 거다, 인마.”
  남자교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스레 말했습니다. 시선은 계속 딴 곳을 행했지요.
  “싫으면 관둬, 인마. 교사로서 제자를 아끼는 마음에 제안한 건데, 기회를 한 번 줘볼까 했는데 안 되겠다.”
  “아니에요. 실은 가보고 싶어요. 동해안에 가서 일출을 본 적이 없거든요.”
  “성질나서 내가 확! 혼자 갈려고 했는데 봐줬다.”
  남자교사가 비죽비죽 웃었어요. 남자교사와 남자애는 언제 어디서 만나 어떻게 갈지에 대해 대화를 나눴습니다. 남자교사가 차근차근 설명해주고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었는데 말하는 내내 신이나 보였어요.
  “이번 주 금요일이다. 선생님이 미리 기차표 끊어 놓을 예정이니까 늦지 말고 출발 이십 분 전까지 대합실로 나와. 그리고 너한테 필요한 용품만 간단히 챙겨. 사진기하고 간식은 선생님이 준비할 거야.”
  남자교사가 뒤로 물러나 의자에 등을 기댔습니다.
  “알았어요. 저야 뭐, 선생님 믿고 가니까. 아직 학생이니까.”
  남자애가 귀염을 떨었습니다. 고삼 남자애치고는 쾌활했어요.
  “이제 가자. 주인이 눈치 준다.”  “선생님, 술 사주세요.”
  “뭐 술? 이 새끼가 컸다고 선생님 앞에서 술타령을 하네.”
  “합격 축하주 마시고 싶은 데 사주는 사람은 없고…”
  “노래방이나 가자. 술도 판다니까 맥주 주문해서 간단하게 한 잔해. 안주가 시원찮겠지만 뭐. 저녁 먹어서 배부르니까 상관없지? 이번엔 노래방 가서 가볍게 마시고 다음에 대학 다니다가 연락 해, 그 때는 근사한 술집에 가서 선생님이 멋지게 먹여 줄 게.”
  계산을 마친 남자교사가 레스토랑을 나서며 말했습니다.
  “네. 선생님. 그런데 노래방이 뭐예요?”
  남자애가 학교에서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습니다.
  “에이, 촌 놈. 돈 내고 노래하는 유흥업소인데 못 들어봤냐? 지금껏 공부 밖에 모르던 놈이 뭘 알겠냐. 가 봐. 가 보면 재밌을 거야.”
  노래방이 막 생겨나던 무렵이었나 봅니다. 하기는 옛날이야기니까요.
  남자교사와 남자애는 노래방을 물어물어 찾아갔어요. 안 그런 척 했지만 남자교사 역시 처음 가보는 곳이라 기대가 큰 눈치였지요. 기회가 되면 남자애하고 꼭 한 번 가야지 별렀던 듯싶더라고요. 좋은 건 좋은 사람하고 나누어야 두 배 세 배 기쁘잖아요.
  털털한 남자교사와 예쁘장한 남자애가 일출을 보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밤기차를 타고 새벽 일찍 동해안에 도착해 일출을 본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날씨만 궂지 않았다면 성공했겠지요.
  선희씨 사연을 풀어놓다 엉뚱한 데로 빠졌군요. 제 이야기에 제가 취해서 그만, 그러려니 이해해주십시오. 
  그래도 즐거운 기억이라 즐겁네요. 아주 가끔 불현 듯 영화 속 장면처럼 추억들이 떠오를 때가 있어요. 내가 겪고 보았던 상황임은 분명한데 어느 시절이었는지는 막연합니다. 길을 걷다가 밥을 먹다가, 맥락 없는 추억이 불쑥 튀어나오면 괜스레 우습다가 서글프지요.
  선희씨와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조금이라도 대기가 흐리거나 안개가 끼면 온전히 볼 수 없는 일출을 호젓하게 둘이서 만끽했거든요.
  수면 위에서 빨갛게 불타던 해가 자신이 내쏘는 햇살 뒤로 멀어졌습니다. 선희씨는 손 그늘까지 만들어 해를 쫒았어요. 눈이 아리고 시려 눈물이 주르르 흐를 때까지 올려다보다 바닥에 끌리는 이불을 부여안았습니다. 바위를 건너고 건너 파도와 맞닿는 자리로 옮겨 앉았습니다.
  태풍이 지나가 힘은 줄었지만 파도는 파도지요. 바위에 부딪쳐 수직으로 치솟은 파도가 머리와 어깨에 쏟아질 때마다 자갈 비를 맞은 듯 얼얼했어요. 하지만 개의치 않더군요. 그대로 견디더라고요.
  젖은 이불이 축 늘어지고 바닷물이 윗도리에 스며들 즈음에야 굼뜨게 일어섰어요. 무거운 이불을 벗어 모래사장에 던져 버리더군요. 셔츠가 젖어 살에 달라붙었는데 눈길조차 주지 않더군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만 두 손으로 쓸어 넘겨 꼭 눌러놓았지요. 바위에서 내려서면…, 절벽에 오르는 과정만 남았는데 머리며 옷이며 신경 쓸게 무에 있나요.
  막지 않았습니다. 선희씨가 무얼 하든 선택을 존중하자 마음먹었지요. 설령 절벽에 올라가 강선희를 바다에 던진다한들 묵묵히 지켜볼 작정이었어요. 솔직히 두려웠지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한 사람은 하루를 버텨내기가 버겁고, 한 사람은 지나온 시간 태반이 잊히고 지워질 만큼 너무 멀고, 너무 길게 떠돈 걸요.
  제가 선희씨 안에 들어왔을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생각했어요. 진진하게 아프지만 말고 곰겨서 터트리라는, 마칠 시기가 되었으니 지난 일들 차분하게 갈무리하라는. 선희씨에게 저는 종기를 찌르는 가시였고 저에게 선희씨는 끝을 준비하기 위한 호스피스 병동이었습니다.
  선희씨와 함께 밤을 지새우면서, 체념에서 미련으로, 미련에서 체념으로 수백 번 널을 뛰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야한다 싶다가 죽어도 나쁘지 않겠다 싶다가, 바다에 나와 절벽을 보면서 깨달았지요. 죽는 날이구나. 죽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날이구나. 선희씨가 절벽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갈 적마다 저는 손에 쥔 실오라기를 하나씩 끊어냈답니다.
  그 당시 그 자리에서는 선희씨와 저 둘에게 더 이상의 바람은 없다, 절벽에 오르는 여정만 남았다 여겼습니다. 선희씨가 애초에 이 곳 해변을 선택하고 이른 새벽 모래사장을 가로지른 이유는 절벽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을 때 절벽 위에 서야한다는 일념뿐이었어요.
  바위 끝을 부여잡으며 뒷걸음질로 한 발 한 발 내려서던 선희씨가 중간 지점에서 엉거주춤 멈추어 섰습니다. 바위와 바위 사이 작은 모래톱에 푸르죽죽한 물체가 놓여있었어요. 백상아리, 참치나 날치가 아닐까 고개를 빼고 내려다봤지만 분명 백상아리였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사진에서만 본 백상아리가 머리를 땅 위에 두고 기우뚱 누운 모습이 낯설다 못해 비현실적이더군요.
  선희씨는 되올라가 백상아리가 엎드린 모래톱으로 내려갔습니다. 해변과 바다 중간에 어슷하게 걸친 백상아리를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서서 유심히 살폈습니다. 족히 삼 미터를 넘는 길이에 엷은 푸른빛이 도는 등, 틀림없는 백상아리였어요.
  널따란 머리 아래로 초승달 모양으로 갈라진 주둥이가 보였어요. 주둥이 안쪽으로는 살기를 뿜어내는 이빨들이 다닥다닥 솟았고요. 저 정도 강한 이빨이면 두껍고 질긴 가죽이든 허벅지 통뼈든 작살을 내겠다 싶더라고요. 파란 바다에 붉게 퍼지는 핏물이 눈앞에 선해 소름이 돋고 한기가 끼쳤습니다.
  근 이틀 잠을 못자더니 이성이 흐려졌더라고요. 선희씨가 파도에 떠밀려온 막대기를 집어 백상아리 머리통을 쿡쿡 찔러댔어요. 성질이 난 백상아리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종아리를 물고 늘어지면 어쩌나 겁이 났습니다. 기력은 고갈되었지만 숨은 붙었는지 백상아리가 주둥이를 한 뼘 남짓 벌렸다 닫았습니다. 겹으로 늘어선 창 끝 같은 이빨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지요. 뭍에 쓰러졌다고 괄시하거나 방심하지 말라는 서슬 퍼런 경고였어요. 등골이 서늘하더군요. 심장이 뛰는 한 백상아리는 백상아리잖아요.
  선희씨가 매서운 눈으로 백상아리를 쏘아보았습니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따가운 눈빛을 감지했을까요? 백상아리가 주둥이 끝을 움찔거렸습니다. 선희씨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다 바다물이 들어가 미끈거리는 구두를 벗어 도로 쪽으로 내던졌습니다. 그리고 곧장 파도에 쓸려와 해변 구석에 쌓인 쓰레기더미로 걸어갔지요.
  문짝만한 널빤지를 끌어다 백상아리 머리통 밑에 밀어 넣었습니다. 온 몸에 힘을 주고 널빤지를 들어 올렸습니다. 바다 쪽으로 뒤집어엎을 작정인가 본데 널빤지는 모래에 박히고 백상아리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어요. 유독 크고 무거운 머리 쪽이 해변에 얹혀 몸을 돌려놓지 않으면 뒤엎기 힘들었어요.
  일 톤은 족히 넘어 보이는 백상아리를 선희씨 혼자 들려하다니 애초부터 무모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포기 않더군요. 주먹을 꽉 쥔 채 두 다리를 벌리고 서서 백상아리를 노려보았어요. 맹수만치 눈빛이 사나웠어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해변에 밀려온 백상아리 한 마리 때문에 선희씨 심장이 두 배는 빠르게 뛰고 혈관 속 피가 세 배는 힘차게 돌았어요. 원더우먼이 되고 싶은 걸까? 돌연변이 샤크우먼이 되고 싶은 걸까? 안 되지. 절대 불가능해. 도리질을 쳤습니다. 선희씨는 평범한 오십대 중년 여성이잖아요. 도로 위로 올라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상어 한 마리가 파도에 쓸려왔다, 경찰서에 신고해 달라, 부탁이나 하면 할 도리는 다하는 거잖아요.
  선희씨 스스로 원더우먼이다 주문을 걸었을까요?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이 뜨겁게 달아오르다 돌연 힘이 솟구쳤어요. 선희씨가 널빤지를 백상아리 밑으로 쑤셔 넣고는 바짝 붙어 섰습니다. 양 손을 머리 아래쪽에 대더니 힘껏 밀었습니다.
  “으-!”
  앙다문 입술 사이에서 새된 소리가 터져 나왔어요. 신음이 비어져 나올 때마다 백상아리는 바다 쪽으로 나아갔지요. 선희씨가 기합을 넣고 두 발이 모래 속 깊이 박히도록 힘을 쥐어짜면 백상아리는 그 만큼 바다와 가까워졌습니다.
  저는 여전히 이 기묘한 상황을 납득할 수 없었어요. 바다에서 지내기 질력 나 육지로 올라온 놈일지 모르는데, 거친 삶에 지칠 대로 지쳐 죽으려고 찾아든 놈일지 모르는데, 없는 힘을 만들어서까지 억지를 부려야하나 의구심이 일었습니다. 먹고 먹히는 것처럼, 살고 죽는 것처럼, 이 또한 자연의 순리일 뿐인데 지나가던 사람이 임의로 개입하면 안 되잖아, 거부감이 치밀었지요. 죽고자 하면 죽도록 내버려 두는 행동 역시 상대를 위한 배려인데 말입니다.
  그래요, 압니다. 단지 운이 없어서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고, 어 하다 후미진 모래톱에 얹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겠지요. 장시간 육지에 머물러 일 분 후에는 숨이 끊길지 모릅니다. 인간과는 전혀 다른 수생동물이라 의사 표현은 못하지만 바다로 돌아가고 싶어 상심하잖아, 과도한 감정이입까지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일개 여행객일 뿐인 선희씨가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잖아요. 백상아리는 백상아리이고 선희씨는 선희씨 아닌가요? 선희씨가 환경운동가, 해양학자가 아닌 이상 백상아리를 바다로 돌려보낼 의무는 없잖아요. 솔직히 저는 선희씨가 백상아리에 집착하는 것이 영 못마땅했습니다. 목표지점으로 성실히 나아가다 뜬금없이 멈춰 서서는 엉뚱한 행동을 하는 격이잖아요. 가야할 길은 멀고 시간은 없는 데 허튼 짓이라니요.
  백상아리 머리가 반 이상 바다에 잠겼습니다. 아무리 기력이 남아돈들 이제 그만 발길을 돌려야 했지요. 은인과 먹잇감을 구분할 만큼 백상아리가 똑똑하다면 모를까 너무 위험하잖아요. 게다가 허기까지 가득 찼을 텐데, 뭔 봉변을 당하려고. 저는 어떻게든 선희씨를 멈춰 세워야한다 의지를 세웠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희씨는 널빤지를 찾아다 백상아리 옆구리에 바짝 붙였습니다. 백상아리가 해변 쪽으로 더는 밀리지 않도록, 큰 파도가 밀려왔다 널빤지에 부딪혀 되돌아갈 때 물살에 실려 가도록 조치했지요. 헤엄칠 깊이까지만 가면 나머지는 본능이 알아서 할 테고요.
  분명 멈추어야 하는데, 결국 멈추지 않더군요. 선희씨는 막대기 두 개를 가져다 백상아리 주둥이를 벌리고 턱을 바쳤습니다. 불그스름한 혀와 무시무시한 이빨 뒤로 백상아리의 내부가 보였어요. 무릎을 꿇고 들여다보니 작고 어두운 바다 동굴 같았지요.
  선희씨가 뒤돌아섰습니다. 허리를 깊숙이 구부리고는 백상아리 주둥이에 엉덩이가 닿도록 뒷걸음질 쳤습니다. 고개를 돌려 위치를 확인한 다음 한 손에 하나씩 막대기를 부여잡더군요.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백상아리 주둥이 안으로 물에 불은 발을 집어넣었어요.
  ‘뭐야! 뭐하냐고! 미쳤어?’
  저는 다급하게 외쳤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잖아요. 선희씨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남은 한발을 끌어올리더군요. 다행히 바지 단이 뾰족한 이빨에 걸려 한 쪽 다리가 들어가다 말았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어떻게 사람이 백상아리 안으로 들어가나. 호기심을 채웠으니 정신이 돌아오겠지, 정신만 돌아오면 식인상어라는 이름을 퍼뜩 떠올리고 백상아리에게서 도망칠 거야, 일순 안심했습니다. 
  선희씨가 백상아리 밖으로 다리를 빼냈어요. 막대 두 개를 단단히 고쳐 받치고 서너 걸음 물러서더군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자락을 내려다보다 바지 단추를 풀었습니다. 남색 큐롯 팬츠를 벗고 흰색 팬티를 벗고 격자무늬 반팔 셔츠를 벗고 살구색 브래지어를 벗었습니다. 벗는 족족 발밑에 내려놓더군요.
  안 돼. 고개가 절로 저어지더군요. 충격으로 넋이 나갈 지경이었어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바닷가에서 옷을 홀딱 벗어 제키다니. 이건 사회적 존재로서 자살 행위와 마찬가지잖아요! 성인 여성으로서 체면이고 뭐고 모조리 내려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절대 하면 안 되는 행동인데.
  ‘그만해. 제발 멈춰! 제기랄, 멈추라고. 옷을 입어, 당장!’
  목이 터져라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희씨가 무엇을 하려는지 확연히 보였으니까요. 하지만 절대 안 되는 일이잖아요.
  ‘당신은 사람이잖아, 사람. 인간이라고! 미치지 않은 이상 상어 속으로 들어가면 안 돼! 상어는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선희씨는 저의 주장을 무시하고 백상아리 앞으로 걸어가 막대기를 부여잡았습니다. 저는 눈을 감고 최대한 작게 몸을 움츠렸지요. 하지만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감각을 통해 선희씨 몸놀림이 고스란히 느껴졌어요.
  양쪽 무릎을 혀 위에 올려놓고 선희씨가 다리를 죽 뻗었습니다. 몸을 옴짝거려 백상아리 속으로 밀어 넣더군요. 선희씨가 숨을 쉬기 위해 치켜들고 있던 머리를 바닷물에 담갔습니다. 검은 단발머리가 물속에서 해초처럼 흔들렸어요.
  ‘그만해! 정신 차려! 죽고 싶어? 죽고 싶으냐고. 이러다 죽어. 상어에 먹혀 죽으면 어쩔 거냐고.’
  저는 체념을 못하고 다시 악을 썼습니다.
  ‘밖으로 나와! 나오라고! 왜 하필 죽는 장소가 백상아리 몸뚱이냐 말이야. 백상아리는 네가 오를 절벽이 아니라고!’
  절벽…. 숨차게 고함을 내지르다 과거 기억 하나가 번쩍 치고 올라왔어요. 위기를 맞은 순간에 하필 허심 빠지는 추억이라니요. 맥이 탁 풀리더라고요. 선희씨는 물속에서 삼십초를 못 견딜 텐데, 길어야 일 분일 텐데 찰나의 시간 동안 저는 옛일 한 토막에 빠져버렸습니다.
  “하나! 둘! 셋! 번지!”
  젊은 남자 하나가 절벽 난간을 튕겨내며 공중으로 몸을 날렸어요.
  하-아, 맞아요. 설핏 애티가 풍겨나지만 바로 그 남자교사에요. 이제야 온전히 기억나는군요. 
  일출을 보기 위해 동해안 여행을 계획했던 남자교사와 남자애는 말대로 노래방에 갔어요. 맥주와 마른안주를 시켜놓고 번갈아가면서 노래를 했지요. 남자교사는 대학생 시절에 한창 유행했던 노래를, 남자애는 그 해에 발표된 최신 가요를 불렀어요.
  남자교사와 남자애는 주인 여자가 나가자마자 시원한 맥주를 한 캔씩 잡고 건배를 했습니다. 입을 떼지 않고 한숨에 들이켰지요. 아무튼 축하주였으니까요. 노래 한 곡을 부르고나면 쌉쌀한 맥주로 목을 축였어요. 노래를 하니 흥이 나고 흥에 취해 맥주를 마시고 맥주에 취해 노래를 하고, 따분할 틈 없이 즐거웠습니다.
  결국 노래 열 개를 채우기 전에 남자애가 소파에 벌렁 누워버렸지요. 워낙 공부만 파고든 순둥이 모범생이었으니까요. 성인인 남자교사야 그냥저냥 술기운이 오르고 긴장이 풀어지는 정도였고요.
  “에이, 새끼.”
  남자교사는 입을 벌리고 자는 남자애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습니다.
  남자교사는 연신 노래를 불렀습니다. 초저녁이라 조용한 노래방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어요. 노래방 기계에 채워놓은 동전이 떨어졌을 때는 더 바꾸어올까 잠시 고민했지요. 하지만 일어나기로 했습니다. 반주가 멈추자마자 찾아든 정적에 흥이 시들해졌거든요. 찌그러진 맥주 캔에 흐트러진 마른안주까지 너저분한 탁자 위를 보니 순간적으로 울적했어요.
  “준석아, 일어나. 나가서 시원한 음료수 좀 마시고 집에 가자.”
  남자교사가 술에 취해 잠든 남자애를 툭툭 쳤습니다. 남자애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휙 돌려버리더군요.
  “일어나라고 인마. 집에 가야지, 여기가 네 방인 줄 아냐.”
  남자교사가 남자애 머리를 가볍게 쥐고 흔들다 찰싹, 찰싹, 볼을 두드렸습니다.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볼이 자두처럼 매끄러웠어요. 남자교사가 손등으로 부드러운 볼을 쓸어내렸습니다. 남자애는 성가신지 머리를 내둘렀지요. 남자교사의 눈길이 술기운으로 붉어진 입술에 박혔습니다.
  “주, 준석아.”
  남자교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불렀습니다. 남자애는 입술을 달싹대며 대답하는 시늉을 했지요. 남자교사가 허리를 숙여 붉은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습니다. 그리고 살짝 입술을 깨물었지요.
  “뭐야.”
  남자애가 잠결에 남자교사 얼굴을 밀쳐냈습니다. 남자교사는 소스라치게 놀라 번쩍 몸을 일으켰지요.
  “아이 씨.”
  남자애가 눈을 찌푸려 떴습니다. 잠이 가득한 눈으로 남자교사를 올려다보았지요.
  “선생님이 나한테 키스했어요? 더럽게.”
  남자애가 술이 덜 깨 웅얼대며 비적비적 일어나 앉았습니다.
  “무, 무슨 소리야.”
  남자교사가 주춤주춤 물러나 앉았습니다.
  “아닌 데. 선생님이 나한테 키스했는데. 에잇, 짜증 나. 교사가 학생한테 변태 짓이나 하고.”
  남자애가 출입문을 향해 비틀비틀 걸어갔습니다.
  “아냐…, 인마.”
  남자교사는 아니다 부정했지만 남자애가 문을 닫은 뒤였습니다.
  환한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남자교사는 멍하니 출입문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 부리나케 노래방을 뛰쳐나갔지요. 남자애에게 선생님이 키스한 게 아니라고, 네가 꿈을 꿨을 뿐이라고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했으니까요. 선생님은 절대 게이, 동성애자가 아니라고, 절대 남자를 좋아하는 인간이 아니라고 확신을 심어주어야 했어요.
  남자교사가 거리로 뛰쳐나가 골목골목을 살폈지만 남자애는 없었습니다.
  남자애는 남자인 교사가 남자인 자신에게 입을 맞추었다는 불쾌감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을 겁니다. 게이 선생이다, 내가 하필 게이하고 친하게 지냈다니, 남자 교사가 세상에서 제일 싫고 미웠겠지요.
  남자교사는 허둥지둥 발을 내딛었습니다. 숨고 싶은데 도망치고 싶은 데 세상 어디에도 그럴만한 장소가 없었지요. 자신이 남자에게 끌린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들킨 이상 숨거나 도망치는 행동은 불가능했습니다.
  남자고등학교 수학교사로 근무하는 남자는 사내아이들에게 유독 마음이 갔습니다.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얼굴이 잘생겼든 못생겼든 하나같이 귀여웠지요. 그건 자신이 타고난 교사이기 때문에, 학생을 존중하는 교사이기 때문에 모든 아이들이 예쁘고 사랑스럽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맘을 보여주면 괜한 오해를 살까 싶어 부러 거칠고 투박하게 학생들을 다루었지만 오 년 남짓 이어지는 교직생활은 그 어떤 교사보다 만족스러웠습니다.
  남자애는 그 중 싹싹해서 눈에 드는 아이였어요. 다른 과목에 비해 수학을 못했는데, 그래서인지 이학년 올라가면서 남자교사 옆을 맴돌았습니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모르는 문제를 가지고 찾아와 살갑게 매달렸지요.
  마다하지 않았어요. 남자교사는 남자애가 원하는 대로 수학 시험 점수가 오르면 떡볶이를 사주고, 전체석차가 순위 안에 들면 닭튀김을 사주고, 대학에 붙어 시내 레스토랑에서 돈가스를 사주었습니다. 학생이 대견한데 교사로서 그 정도 친절은 문제 될 게 없으니까요.
  남자교사는 도시에서 가장 크고 번화한 유흥가 골목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남자와 남자가 만나고, 여자와 여자가 만나고, 여자가 남자를,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길 위에서 남자교사는 사람들과 부딪지 않게 어깨를 사리고 아무 일 없는 듯 무표정을 가장하며 앞만 노려보았습니다.
  지치고 그 만큼 걸음이 무거워지던 어느 순간부터 남자교사는 자신이 허공으로 사라지기를, 먼지만큼 작아져 땅에 묻혀버리기를 소망했습니다. 그 당시 남자교사 몸 안에 머물던 저는 숨을 죽인 채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 어떤 식으로든 무마가 되겠지 허술히 대응했어요.
  솔직히 저는 훨씬 이전에 눈치 챘어요. 하지만 남자교사가 여자가 아닌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거슬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벼이 삶의 방식 중 한 가지로 받아들였지요. 워낙 다양한 사람들을 겪었으니까요.
  남자교사가 유흥가 한가운데 위치한 공원 안길을 터벅터벅 걸어갈 때였습니다. 멀리 공원 입구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아가씨가 시야에 들어왔어요. 노란 원피스를 입고 손에는 앙증맞은 선물 가방이 쥐였더군요. 남자교사는 자신이 노란 원피스를 입고 파마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아가씨를 여러 차례 지나쳤음을 상기했습니다. 아가씨는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두 시간 째 서 있었지요.
  남자교사는 노란원피스를 입은 아가씨가 불쌍했습니다. 대놓고 애처로이 행동하고, 대놓고 오지 않는 남자를 기다리고, 대놓고 사랑을 표현하는 아가씨가 사무치게 부러웠습니다. 어딘가로 도망쳐야 한다면, 어딘가로 숨어야 한다면 맹목적인, 창피함이 없는, 날내를 풍기는, 그런 사랑이 가능한 곳으로 도망쳐 숨고 싶었지요.
  남자교사의 육중한 몸이 작아졌습니다. 처음에 저는 어리둥절한 채로 지켜만 보았어요. 아무런 징후 없이 육신만 쪼그라들었으니까요.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당혹스럽다 못해 불안하더군요. 말을 걸지 않을 수 없었어요.
  ‘뭐하는 겁니까? 그만 하세요.’
  그런데 남자교사는 멈추지 않았어요. 몸이 동전 만하게 줄어들었을 즈음에야 저는 아차 싶었습니다. 자신을 없애는 중임을 뒤늦게 깨달았지요. 동거인인 남자교사가 사라지면 붙살이인 저 역시 사라진다는, 죽음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위기였어요.
  ‘멈춰요. 멈춰!’
  반사적으로 고함을 쳤습니다.
  ‘그만-! 멈춰-!’
  남자교사가 콩알만 해진 순간 비명을 내질렀습니다. 남자교사가 전에도 한 번 죽으려했다는 사실이 뇌리에 스치더군요. 깊은 물속에서 겪었던 고통이 그대로 되살아났어요. 눈앞이 아득해지면서 끝내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교사로 발령받기 두어 해 전이었는데, 수심이 깊은 다목적 댐에 뛰어내렸어요. 이십대 중반, 혈기왕성한 시기에 절벽 위에서 몸을 던졌지요. 그 직전까지 저는 남자교사가 모험심이 강한 도전가인 줄, 남성미 넘치는 마초인 줄 착각했는데 그 사건을 계기로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초가 아니라 마음이 여린 동성애자임을 말이에요. 동성애자임을 감추기 위해 의식적으로 마초 흉내를 냈더군요.
  번지점프 아시나요? 다리 위에서 발목에 줄을 매달고 밑으로 뛰어내리는, 목숨을 걸고 대범함을 과시하는 비이성적 행위잖아요.
  아무튼 남자교사는 갖지도 않은 마초 근성을 자랑하기 위해 번지점프를 뛰었어요. 고육지책으로 뒤집어쓴 가면이었는데 주변 사람들은 가짜인 줄 모르고 대단하다 감탄만 쏟아놓더군요.
  국내에 들어 온지 얼마 안 된 시기라 전국에 딱 한 곳, 다목적댐에 조성된 유원지에만 번지점프대가 설치되어 있었어요. 남자교사는 매주 주말마다 기차와 버스를 타고 유원지에 도착해 번지점프를 했습니다. 뛰고 또 뛰고, 수 없이 뛰어내렸어요. 비용이 수월찮게 들었는데 다른 씀씀이를 줄여 어찌 어찌 마련하더라고요.
  봄 내내 허공으로 자신을 날리더니 비가 오던 초여름 날에 유원지에서 내리지 않고 종점까지 내처 버스를 타고 갔습니다. 비가 와서 댐 구경이나 하고 돌아가려는가 보다 심상히 여겼는데 오판이었어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산길을 걸어 절벽 위로 올라갔지요.
  “조용히 뛰어 내릴 만하네.”
  낮게 중얼거리더군요. 오전부터 비가 내리던 터라 관광객이 한 명도 없었어요. 난간 밖으로 허리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았어요. 깎아지른 절벽 밑이 검푸르렀습니다. 남자교사가 다리를 걸어 난간을 넘었어요. 그리고 두 손으로 난간을 부여잡고 외쳤지요.
  “하나! 둘! 셋! 번지-!”
  공중으로 몸을 날렸습니다. 줄을 묶지 않아 거칠 것 없는 몸뚱이가 바닥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지요. 수면과 부딪는 순간까지 저는 사태 파악을 온전히 못했습니다. 짙은 어둠, 조여 오는 숨, 버둥거리는 팔다리. 그제야 알았습니다. 투신자살. 남자교사가 댐에 투신했음을, 번지점프는 자살을 위한 연습이었음을 깨달았지요.
  남자교사 안에 머물던 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무어라도 가졌다면 포기뿐이었지요. 그래서 포기했답니다. 점잖고 차분하게 죽음을 맞자, 힘을 풀고 눈을 감았어요.
  그런데 또 그게 아니더군요. 한참 만에 눈을 떴는데 물 위에 둥둥 떠 있더라고요. 볼 위로 떨어진 차가운 빗방울이 귓바퀴를 간질이며 흘러내리는데 헛웃음이 났습니다. 제대로 죽자 물속으로 파고들 여력은 없고, 물에 푹 젖어 비를 맞는 모습이 어찌나 우습던지 눈물이 났습니다. 남자교사가 사지를 내둘러 개헤엄을 쳐서는 땅 위로 올라서더군요.
  그 뒤로는 번지점프를 하지 않았답니다. 괜스레 어깨에 힘이나 주는 마초 흉내 역시 내지 않았고요. 죽다 살아나서 그런가, 타고난 형상이 밖으로 드러났습니다. 저는 남자교사가 생긴 대로 지내기를 희망했습니다. 하지만 본인과 가족들은 저와 달랐지요. 끊임없이 동성애자임을 부정했어요. 인정하지 않으려 발버둥 치던 상황에서 키스를 해버렸으니 남자교사가 절망할만했습니다. 숨고 싶은 마음, 도망치는 행동 모두 당연한 수순이었고요.
  죽는 줄로 착각해 기절했다가 간신히 의식을 되찾았어요. 어질어질한 머리로 앞뒤좌우를 살펴보니 노란 원피스를 입은 아가씨 안이었습니다. 남자교사가 미세입자만치 몸을 줄여 아가씨 몸속으로 날아들었더군요. 어찌나 교묘히 숨어들었는지 기운조차 감지되지 않았지만 결과가 이리 말해주었지요.
  저는 숨부터 깊게 들이마셨습니다. 생존했음에 일단 안심했지요. 저의 거듬 없이 남자교사 혼자 이동했다는 사실에서는 씁쓸했지만요. 그런데 워낙 남자교사가 뛰어내리기를 반복했던 인물이었다는 점에 생각이 미치더군요.
  아주 특이한 인물이었어요. 죽었다 살아난, 세상 어느 누구보다 절박한 사람이었지요. 그래서 스스로 가능했던 겁니다.
  송인화, 민아엄마 이름이 송인화에요. 이제야 겨우 입에 올리게 되었네요.
  남자교사가 목표로 삼은 대상이 송인화라는 아가씨였습니다. 약 일 년 후에 두 시간 째 기다리던 남자와 결혼했지요. 결혼 생활이 어땠는지는 들어 아실 거예요. 여자가 자존심 없이 붙잡고 늘어져 남자가 지레 질렸지 않았나 싶은데, 그 바보짓에는 남자교사가 한몫 했을 겁니다. 대체 어디에 숨어서 힘을 썼는지 도가 지나쳐 민아엄마를 남편에게 집착하도록 만들었지요.
  후-, 남자교사 이야기가 나온 이상 부정할 수가 없네요. 제가 돕지 않아도, 제가 희망하지 않아도 이동이 가능해요. 몸 주인이 절실히 원한다면 그 열정만으로도 변신할 수 있어요. 절벽에서 뛰어내린다고 죽는다는 보장 역시 없고요.
  선희씨 의도가 뭐였을까요? 죽음? 변신? 백상아리 안에서 죽기일까요? 백상아리를 통한 변신일까요? 전에 한 번 죽으려다 실패했는데, 방법을 바꾸어 재차 시도했던 걸까요? 아니면 죽음마저 실패해 변신을 꾀했던 걸까요?
  차마 얘기 못했는데, 안 할 수가 없네요.
  형철씨가 선희씨 안으로 들어간 다음 날 밤에 사고가 터졌습니다. 선희씨가 약을 먹었어요. 의사가 처방해준 대로 한두 알 먹지 않고 오 분여에 걸쳐 수면제 두 통을 삼켰지요. 잠자다가 잠자듯이 죽고 싶었나 봐요.
  하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잠자라고 만들어진 약이라 그런지 한꺼번에 털어 먹는다고 죽음까지 가는 건 아니더라고요. 수면제 기능이 개선되었겠지요.
  이박삼일 출장 동안 전화 한 통 걸지 않은 김성수씨 때문에, 그 무심함 때문에 선희씨는 이틀을 내리 자다가 고통 속에서 깨어났어요. 후유증으로 일주일 동안 운신을 못했지요. 회사 업무만 살뜰히 챙겼던 김성수씨는 몸살이 났나보다 무심히 흘려버리더군요.
  선희씨만 괴로웠던 건 아니었습니다. 형철씨와 저는 선희씨가 의식을 잃은 이틀 동안 각자의 방식대로 각자의 고통을 견뎌야했어요. 형철씨는 선희씨가 못난 자신 때문에 자살을 시도했다 판단해 가책에 시달렸고, 저는 과도한 짐을 떠안겼구나 미안하고 불안했어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역시 부정할 수 없고요.
  선희씨가 깨어난 뒤에도 형철씨는 안절부절 허둥댔습니다. 그럴수록 선희씨는 정신을 놓치고 까부라졌지요. 형철씨와 더불어 들어간 전동거인들 역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거고요.
  맞습니다. 선희씨는 살고자 했어요. 살기위해 백상아리 안으로 들어갔어요. 죽음은 이미 한 차례 겪었으니까요. 폭풍우 치는 날 바다를 찾고 어둑새벽에 해안을 걷고 백상아리를 바다로 밀어내 그 안에 자신을 넣은 것. 처음부터 끝까지 생존을 위한 탈출 과정이었습니다.
  죽고 싶어 한다 여겼던 제가 바보였어요. 늙고 지쳐서 착각했던 겁니다. 제 마음을 선희씨한테 덮어씌웠더라고요. 선희씨는 변신을 통해 살아남으려고 했어요. 그 대상이 인간 세상이 아닌 바다에 있던 것뿐이에요. 왜 하필 바다였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요.
  물속에 머리를 넣은 채로 호흡을 멈춘 선희씨가 고개를 들어 뒤로 젖혔습니다. 한껏 공기를 들이켜고 바닷물 속으로 머리를 넣었어요. 부여잡은 막대기를 바깥으로 밀어냈습니다. 백상아리 주둥이가 닫히면서 날카로운 이빨이 팔뚝을 깊게 그었어요. 선희씨 팔뚝에서 비린내 나는 피가 뭉실뭉실 피어났습니다.
  그 상황에서 제가 달리 어쩌겠습니까. 싫다는 데, 사람이 싫고 땅이 싫다는 데, 하지만 살고는 싶다니 별 수 없더군요. 원하는 대로 해주어야지요. 
  ‘나를 삼켜. 나를 삼키라고. 나를 먹으라니까!’
  목청껏 소리를 질렀습니다. 선희씨가 죽음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삶을 찾도록 도와주고 싶었어요. 붙살이일망정 저 또한 주체로서 주체적으로 움직여야했지요. 살아있는 이상 살아야하니까요.
  선희씨 피가 백상아리 코끝에 이르렀습니다. 백상아리가 번쩍 눈을 떴어요. 마지막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습니다. 가슴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습니다.
  ‘나를 삼켜-! 나를 먹으란 말이야. 나를 꿀꺽 삼키라고!’
  백상아리가 콧구멍으로 핏물을 깊이 빨아들였습니다. 축 늘어졌던 심장이 벌떡 일어서더군요. 백상아리가 피 냄새의 진원지를 찾아 눈을 희번덕거렸습니다. 선희씨는 피가 흐르는 팔을 거두어 겨드랑이에 끼고 힘살을 풀었어요. 흐늘거리는 사지를 바닥까지 축 늘어트리더군요. 곧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 동안 거의 못 잤거든요.
  저 혼자만 남아 위액이 꿀렁거리는 백상아리 안에서 어쩔 줄 몰라 버둥거렸습니다. 무섭고 겁이 나서 제일 기다란 송곳니를 붙잡고 매달렸지요.
  백상아리가 한바탕 요동을 치더니 물 위로 둥실 떠올랐습니다.
  변신에 동의한 이상 상황에 맞추어 새로운 호흡 방식부터 익혀야했어요. 저는 폐 안에 남은 공기를 조금씩 나누어 뱉다가 하나 둘 셋을 세고 호흡을 멈추었습니다.
  백상아리는 바다 속으로 파고들더군요. 오도 가도 못하는 육지가 진저리났을 테니까요.
  저는 눈을 크게 뜨고 지금까지와는 생판 다른 바다 속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고요하고 평온했지요. 백상아리가 되고자 한 선희씨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백상아리 눈으로 바라본 바다는 잠을 자지 않아도 잠을 자는 듯 푸근했습니다.
  백상아리가 꼬리지느러미를 휘저어댈 때마다 선희씨는 덩달아 함께 흔들렸습니다. 선희씨 피부에 비늘이 돋기 시작했어요. 가슴 밑으로는 벌써 아가미가 뚫렸더군요. 물고기로 변신 중이었지요.
  허! 헛웃음이 났어요. 결국 이거였더군요. 선희씨는 자신의 몸을 아예 다른 종으로 바꾸고자했어요. 백상아리는 선망한 동물이 아니라 커다란 고치일 뿐이었어요.
  유영을 하던 백상아리가 재빨리 방향을 틀어 청새치를 덮쳤습니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사냥이었어요. 그런데 동강이를 낸 청새치를 삼키지 못하고 몸통을 비틀어댔습니다. 바깥세상에만 눈을 두다 못 보았는데, 선희씨가 앞으로 밀려 나와 목구멍을 막았더라고요.
  위액이 꿀렁대고 우-악! 굉음이 울렸어요. 놀라 깬 선희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짝 긴장했습니다.
  우-왁! 백상아리 주둥이가 활짝 벌어지면서 인간 물고기로 진화한 선희씨가 바다 한가운데로 튕겨져 나갔습니다. 선희씨가 팔다리를 내저어 균형을 잡는 사이 백상아리는 너덜거리는 청새치를 낚아챘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천천히 돌아섰는데 선희씨는 어디로 헤엄쳐 갔는지 보이지 않더군요.
  육지 시간과 바다 시간은 한참 달랐어요. 낮인지 밤인지, 여름인지 겨울인지 눈에 보이는 마디가 없어 느리고 무덤덤했습니다.
  멈춘 듯 흘러가다 이교수님하고 형철씨를 만났어요. 선희씨가 이교수님을 토해내고 이교수님이 형철씨를 토해냈겠지요. 예전의 몸으로 돌아갔는데 달라진 환경에 맞추느라 등과 배에다 커다란 지느러미를 만들었더라고요. 짝을 이루어 함께 다니는 모습에서 유유자적하는 여유가 느껴졌습니다.
  예전 동거인들이 떠올랐습니다. 모두들 언젠가는 한 때 선망했던 사람들 안에서 빠져 나와, 무사히 바다에 적응하고 두 번째 삶을 꾸려가기를 바랐습니다. 저 혼자만 반가워라하겠지만 꼭 한 번씩은 만나고 싶었습니다. 당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눈에 들어오는 순간 대뜸 알아 볼 것 같았어요. 보통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으니까요.
  까마득히 먼 옛날에 소년과 함께 했었는데, 유독 그 소년이 궁금하더라고요. 앉은뱅이 소녀 안에서 나왔을까? 나왔겠지? 아니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할까? 산골에서 태어나고 자라 바다를 본 적이 없는데, 그래도 잘 지내겠지? 수영은 할 수 있을까? 어린아이니까 금방 배우려나? 별별 생각을 다했지요.
  키가 딱 절굿공이 만했는데…. 사고를 치고 들어온 날이면 부엌 아궁이 앞에서 꼬불치고 잤어요. 요 대신 가마니를 깔고 이불 대신 가마니를 덮었지요. 베개 몫으로는 어머니가 깔고 앉는 짚방석을 찾아다 베었습니다. 아귀가 안 맞아 삐딱하게 벌어지는 부엌문에는 네모난 밥상을 기대어두었어요. 수수 빗자루 만하게 벌어지는 문틈으로 냉기와 바람이 솔잖게 들어왔거든요.
  아궁이 안에 불기가 남아 있는 초저녁에는 그냥저냥 견딜만했습니다. 눕자마자 쉬이 잠들었지요. 하지만 재 안에 든 불씨가 꺼지고 아궁이 온기마저 사라지면 부엌은 한데나 매일반이었어요. 강낭콩마냥 둥글게 몸을 말고 자다가 여차해서 감은 눈을 떠버리면 잠은 그 길로 끝이었습니다. 추운 것도 추운 거지만 죽었는지 살았는지 집적대는 쥐란 놈 때문에 잠을 깨기 일쑤였어요. 또 그 놈 때문에 밤을 견뎌내기가 힘들었고요.
  기나긴 대결이 시작된 겁니다. 소년은 밤과 맞선 싸움에서 이겨본 적이 없어요. 춥고 배고픈데다가 고무신짝만 한 쥐가 갖은 부산을 떨어대면서 앞뒤좌우로 튀어 다니고, 방으로 몰래 기어들어가 윗목에 끼어 눕고 싶지만 아버지 매타작이 무섭고, 안절부절 이쪽저쪽 돌아눕다 끝내 일어나 앉고 말지요. 부엌문 틈으로 달빛이 비쳐들면 그나마 나을 텐데 그날따라 그믐인지 먹구름이 꼈는지 빛 한 자락 찾을 수 없습니다. 온통 어둠뿐이지요.
  어머니든 아버지든 동생이든 식구들 기척이 들리면 혼자가 아니구나, 안심이 되었을 거예요. 하지만 어머니 잠꼬대는 들리지 않고 멀리서 산짐승들만 우-우 울어댔어요. 하 어두워 누운 건지 앉은 건지, 부뚜막 옆인지 나뭇간 앞인지 분간이 안 되는데 쥐들은 찍찍 짹! 사방에서 을러댔습니다.
  간신히 용기를 쥐어짜서는 조심조심 손을 뻗어 바닥을 더듬지요. 어렵게 부지깽이를 찾아 들지만 부엌바닥이나 쳐댈 뿐 밖으로 쫒아 낼 수가 없었어요. 잠시 잠깐은 조용한데 그 순간이 또 무서워요. 등 뒤에 몰래 숨었다 하나 둘 셋에 공격하는 거야, 쥐들이 떼거리로 모여 작전을 짜는 것 같거든요.
  추위와 두려움에 오그라든 몸뚱이가 기울어지고 부릅떴던 눈이 슬금슬금 내려앉으면 그 즈음에야 부엌문 밖이 희멀건 해졌습니다. 날이 밝았다고 안심해서 자느냐면 어림없지요. 아버지 기침 소리에 잠에서 깨자마자 소년은 후다닥 밖으로 튀어나갔습니다. 지게를 메고 갈퀴를 찾아 산에 올랐어요. 밤 새 떨어진 나뭇잎을 잽싸게 긁어모아 갈비를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들기 전에 한 짐 거리를 묶어놓아야 했지요.
  부엌에서 자는 일은 호랑이만치 무서운 아버지가 내린 벌이었습니다. 전 날 소년은 동무들과 어울려 다니다 땔감을 지게의 반에 반도 못 채웠거든요.
  “이 노무 새끼! 산에 땔감 하러 간다고 하루 종일 코빼기를 안 보이더니 고작 요 거여!”
  아버지가 소년의 등에서 지게를 벗겨 마당에 패대기쳤습니다. 아버지 서슬에 얼어붙은 소년은 고개를 뚝 떨어뜨린 채 지게작대기만 부여잡았지요. 
  “아무리 노는 게 달아도 할 일은 해 놓고 놀아야하는 법이여.”
  아버지가 지게작대기를 빼앗아 처마 높이만치 쳐들었어요. 소년은 어깨를 움츠렸지요. 금세 등짝에 불이 났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오늘은 방에 들어오지 마라. 추워봐야 나무가 중한지 알지.”
  아버지가 지게작대기를 땅바닥에 내던지고 방에 들어간 뒤에야 소년은 쭈뼛쭈뼛 고개를 쳐들었습니다. 화끈거리는 등짝은 비벼댈 엄두조차 못 내고 코가 빠질 대로 빠져 뒤란으로 갔어요. 아버지 눈에 띌까 겁나 굴뚝 뒤에 숨어 앉았지요. 저녁 밥상 근처에는 얼씬 할 수 없었어요. 아버지가 할일은 제쳐두고 놀기만 한 놈이 무슨 밥이냐! 역정을 낼 게 뻔했으니까요.
  입을 비죽 내밀고 마른 풀이나 분지르던 소년은 어머니가 챙겨준 누룽지로 시장기만 해결했습니다. 어둡기 전에 서둘러 저녁설거지를 마친 어머니가 가마니를 끌어다주자마자 아궁이 앞에 바짝 붙여 깔았지요.
  꼭두새벽에 나간 덕분으로 소년은 갈비를 한 짐 만들어서 지게에 얹고 왔습니다. 어머니가 막 아침 밥상을 들이던 참이었지요.
  “아버지! 땔거리 해왔는데요!”
  소년이 기세등등하게 외쳤어요. 성큼성큼 토방으로 올라가 부엌문 앞에 지게를 받쳐놓았답니다.
  “아침 먹어라.”
  방 안에 아버지가 아무 일 없던 듯 말했습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소년은 쏜살같이 마루에 올라섰어요. 
  부엌에 들어간 어머니는 소년이 먹을 밥과 수저 한 쌍을 들고 나왔어요. 마음이 놓이는지 입가에 웃음기가 어렸지요. 밥숟가락을 든 소년은 보리밥 한술을 양껏 떠서 입에 쑤셔 넣다가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을 지워버렸습니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꿈틀할 무렵, 소년은 동무들과 동네 뒷산으로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나무하러 간다 해놓고서는 일상 그랬듯 놀기가 먼저였어요. 땔감 모으기는 뒷전이었지요. 아직 수염이 나지 않은 소년이었으니까요.
  토끼 발자국을 쫒다 등에 지고 다니던 지게를 벗어 바위 밑 오목한 자리에 내려놓았어요. 산자락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중에 삭정이를 주워 지게에 얹어놓았는데 나무 가지에 걸려 거추장스러웠거든요. 남들 눈에 안 띄도록 얌전히 숨겨놨다가 내려가는 길에 챙겨 가면 되지, 나름 셈을 했지요.
  햇살은 약해지고 바람은 차가워져 집에 가야했어요. 되짚어 내려간다고 갔는데 벗어놓은 지게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게를 찾는다고 온 산을 헤맸지만 이 바위였는지 저 바위였는지 헷갈리기만 했어요. 산골짜기에 어스름이 내려앉으면서 동무들이 그만 찾고 돌아가자 계속 보채더군요.
  소년은 나무는커녕 메고 간 지게마저 잃어버린 채로 산을 내려왔습니다. 꼬부랑 할미로 변신해 앞을 막아선다는 백년 묵은 여우가 아버지 불호령보다 갑절은 무서웠거든요. 무덤을 파헤쳐 하얀 해골을 꺼내서는 바위에 슥슥 삭삭 갈아 머리에 뒤집어쓰고 앞으로 세 번, 뒤로 세 번 재주를 넘으면 머리가 하얀 할머니로 감쪽같이 바뀐다잖아요.
  동무들이 하나 둘 곁을 떠날 때마다 가슴이 철렁 철렁 내려앉았어요. 강아지 한 마리라도 옆에 두면 힘이 될 텐데, 끝내 소년만 남았지요. 터벅터벅 고샅길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 새 집 앞이었어요.
  차마 마당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싸리문에 붙어 서성였지요. 아버지가 추궁하기 전에 무릎을 꿇고 빌자 다짐에 다짐을 했지만 등짝에 떨어질 매가 무서워 걸음을 떼지 못하더군요. 일찌감치 돌로 받쳐놓은 싸리문을 잡았다 놓았다 잡았다 놓았다 머뭇대기만 했습니다.
  아주 잠깐 도망치면 어떨까 궁리를 했어요. 하지만 금세 포기했지요. 무서운 왈패들이 떠돌아다니는 아이들을 잡아다 광산에 팔아먹는다는, 컴컴한 동굴 안에서 칡뿌리만 먹으며 돌을 깨야 한다는, 채찍으로 맞다가 눈까지 멀어버린다는, 죽어야 시체가 되어 밖으로 나온다는 동무들 얘기가 귓가에 쟁알쟁알 울렸거든요. 더군다나 아직은 손이 곱게 추운데다 들고 나온 옷가지가 없고, 마른 고구마 한쪽 챙겨놓지 못했으니 며칠은 꼬박 굶어야한다는 데에까지 분별이 미쳤고요. 아주 어리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소년은 집 주위만 빙글빙글 돌았답니다.
  손톱만큼 남았던 해 그림자까지 산등성이를 넘어가버렸어요. 소년은 싸리문을 만지작대다 옆집 소녀를 보았습니다. 소녀는 방문을 활짝 열고 문지방에 기대있었어요. 달은 떴는지 별은 몇 개나 나왔는지 헤아리느라 어깨를 밖으로 쏙 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지요. 소녀는 뒷간조차 혼자 못 가는 아이여서 마당에 내려설 수 없었거든요. 병아리가 몰려다니는 안마당과 낮은 담 너머로 보이는 삐죽한 산과 방에 앉아 올려다보는 둥그런 하늘이 소녀가 아는 전부였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언니 동생이 이렇더라, 저렇더라, 애잔한 마음에 오며가며 들려주었지만 단지 이야기일 뿐 진짜 세상이 아니잖아요.
  소년은 소녀를 따라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습니다. 한 팔을 문지방 밖으로 내놓은 소녀가 살포시 손에 쥔 홍시만 쏘아보았지요. 겨울이 끝나가는 초봄이라 구경조차 어려운 최고로 맛난 보물이었어요. 배 안에 허기가 그득 들어찬 소년은 새빨간 홍시가 먹고 싶었습니다. 그래 소년은 뜨거운 눈길로 탐스러운 홍시를 노려보며 안절부절 싸리문만 쥐고 흔들었지요.
  “석이 왔냐!”
  방에서 아버지가 불렀습니다. 노기가 잔뜩 서려 있었지요. 소년을 기다리느라 점점 커져버린, 소년이 네라고 하는 순간 뻥하고 터질 노여움이었어요.
  소년은 대답을 못하고 옆집 담 밑에 웅크리고 앉았습니다. 머리를 아래로 기울여 동그란 수채 구멍으로 자신을 보는 소녀를 보았지요. 소녀의 손바닥에 얹힌 홍시를 보았어요.
  소년에게 소녀는 나무를 할 일도 지게를 질 일도 맞을 일도 없는 방에 앉아서 맛난 홍시만 먹는 아이였습니다. 소녀에게 소년은 담장 밑 옥잠화 향기를 맡을 수 있는, 뒷간에 걸어 갈 수 있는, 동무들과 어울려 놀 수 있는 아이였고요. 철모르는 아이들이여서 방을 벗어나지 못하는 답답함과 등에 짐을 져야하는 고단함을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집에 왔으면 냉큼 들어와야지 뭐하고 있어! 당장 들어와!”
  아버지가 고함을 내질렀습니다. 바짝 마른 싸리가 똑똑 부러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 없지요.
  아버지가 쫒아 나올까 겁이 나 심장이 오그라든, 그래서 숨조차 못 쉬던 소년이 홍시를 한 입 베어 무는 소녀를 바라보았습니다. 소녀가 되고 싶어 몸이 저렸어요. 정수리부터 발가락 끝까지 스멀스멀 간지럽다 화끈화끈 달아올랐지요.
  혼나지 않고 맞지 않고, 땔감 없이 들어가도 매일 매일 아낌 받는 아이가 되고 싶었습니다. 소녀가 되어 따뜻한 방 안에 앉아 달디 단 홍시를 빨아먹고 싶었습니다. 소녀가 될 수 없다면 소녀가 먹고 있는 홍시가 되어 소녀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었어요. 소녀 안에 머물고 싶었지요. 소녀 안에서 소녀의 단것들을 함께 누리고 싶었습니다.
  “나도 홍시야. 말랑말랑한 나를 먹어. 갱엿만치 단 나를 삼켜.”
  소년이 중얼거렸어요. 입술을 오물댈수록 추위에 얼어붙은 몸이 몰캉몰캉 흐물흐물 풀어지는 것 같아 손을 꼽으며 되풀이했어요.
  “내가 홍시야. 나를 먹어. 나를 삼켜.”
  소년의 동그란 눈이, 동그란 입술이, 동그란 얼굴이 붉게 부풀어 올랐습니다. 삐죽 마른 몸까지 동그래졌지요.
  “지금 삼켜.”
  소년은 홍시보다 더 붉은, 더 달디 단 즙이 되어 소녀의 입 안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가슴과 배 사이 중간 즈음에 주저앉았지요. 그리고 소녀와 함께 남은 홍시를 마저 삼켰습니다. 달콤함을 마음껏 즐겼지요. 엄한 아버지와 차가운 부엌 바닥과 등을 내리누르던 지게는 깨끗이 잊었어요. 따뜻한 아랫목에 다리를 뻗고 누워 이리저리 뒹구는 모습만 상상했습니다.
  소년을 품은 소녀는 미치도록 산과 들을 그리워했을 겁니다. 해가 마루에 들자마자 몸 안에 든 소년이 다람쥐마냥 산을 타고 족제비마냥 들판을 내달리고 싶어 발을 동동 굴렀을 테니까요. 동무들 발자국 소리에 누구야, 누구야 이름을 불러댔을 테니까요. 나랑 같이 가자, 나 좀 데리고 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려고도 안 한 채 밤으로 낮으로 징징거렸겠지요.
  하루 종일 칭얼대는 울보 소년 때문에 소녀는 덩달아 업어 달라 쉼 없이 보챘을 거예요. 문지방을 넘으면 마루로, 마루를 내려서면 마당으로, 마당에 서면 대문 밖으로 나가자고 식구들 목에 매달렸겠지요.
  맑은 햇볕이 내리쬐고 산들 바람이 불던 날, 마음을 홀리는 사람을 만나 그 안으로 파고들었을 겁니다. 자전거를 타고 쌩하니 달려와 편지를 전해주던 우편배달부였을까요?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새우젓을 팔러 왔다 하루 밤 묵어 간 젊은 아낙이었을까요? 읍내에서 여름 방학이라 놀러온 밤빛으로 그을린 사촌 동생이었을까요?
  지금은 기억할 수 없지만 언젠가 운이 닿으면 알게 되겠지요.   
  소녀가 나와야 소녀 안에서 소년이 나올 텐데, 앞 뒤 구분 못하도록 쌩하니 나와서 함께 어울려 다녔으면 좋겠습니다. 바라는 대로 몸을 바꾸어서 바다든 육지든 맘껏 뛰어다녔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어리니까 가능하겠지요. 늙을 대로 늙은 나야 그리 못하지만 아이들은 다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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