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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작가 : 은이설
작품등록일 : 2019.10.25

제 이름은 설입니다. 몸이 없어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남들처럼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제 처지가 이 모양이라 사람들 몸에 들어가 생활합니다. 다른 존재에 의지하면서 지낼 수밖에 없는 붙살이지요. 그리고 동거인이 염원하는 누군가의 몸 안으로 동거인과 함께 이동하면서 삶을 유지하지요.
최근에는 제 이야기를 누구에게라도 들려주고 싶더라고요. 속이 답답해서…, 털어놓고 싶은 사연이 무궁무진하거든요.

 
여섯 잠
작성일 : 19-10-25 20:31     글쓴이 : 은이설     조회 : 613     추천 : 0     분량 : 12,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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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잠

  기다란 헤드라이트 불빛이 방안 깊숙이 들어왔다 벽을 훑으면서 빠져나갔습니다. 선희씨 말고도 자지 않는 사람이 더 있더라고요. 선희씨 혼자만 깨었던 건 아니었어요. 일순 안도감이 밀려들었습니다. 밤이 깊어졌다 해서 잔다, 자야한다는 법이 없잖아요.
  선희씨가 몸을 일으켜 겉옷이 걸린 선풍기를 향해 무릎으로 기어갔습니다. 얼마나 말랐는지 옷자락을 만져보더군요. 선풍기 바람에 말린 터라 솔기는 눅눅했지만 걸칠 만은 하더라고요. 선희씨가 차가운 브래지어를 두르고 흰색과 재색이 섞인 격자무늬 반팔 셔츠와 무릎까지 내려오는 남색 큐롯 팬츠를 입었어요. 손으로 비틀어 짰던 옷이라 꼬깃거렸는데 손으로 누르고 잡아당겨 대강 모양을 잡았지요.
  큐롯 팬츠를 보니까 김성수씨와 다퉜던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사건이라고 칭할 만큼 그리 대단치는 않지만 인상에 강하게 남았거든요.
  큐롯 팬츠는 앞에서 보면 치마인데 뒤에서 보면 바지인 여자들 아래옷입니다. 고지식한 남자들은 이도저도 아닌 모양이라 저게 뭔가 시원찮게 여기기도 하지요. 조신해 보이는 치마라고 무심히 보아 넘겼다가 풀떡이는 바지임을 알아차린 순간 누구는 속은 기분까지 든다더군요.
  한창 더운 칠월 중순에 선희씨와 남편 김성수씨가 회사 임원진 부부동반 모임에 갔습니다. 고풍스럽게 꾸며진 최고급 한정식 식당이 점심 장소였지요. 연못에 분수까지 갖추어진 한옥이어서 분위기가 꽤나 멋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식사가 방에서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남자들이야 양복 윗도리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 놓고 와이셔츠 차림으로 편안히 앉아 차려주는 음식을 양껏 즐기면 그만이었지만 동반한 부인들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죠. 격식을 갖추어야하는 행사 아닌 행사다보니 다들 치마를 입었는데 평평한 바닥에 앉으면 속이 보이기 십상이잖아요. 회사 분위기가 고리타분해서인가 부인들까지 주로 입은 옷이 무릎까지 오는 정장치마더라고요.
  손수건을 꺼내 무릎을 가려대고 보통 조심스럽지 않았습니다. 손수건이 없는 사람은 종업원을 불러 앞치마를 달라했는데 덮고 앉으니 어째 볼품이 없었지요. 워낙 그러려니 받아넘겨서 그렇지 솔직히 여자 입장에서는 정장치마를 입고 바닥에 앉기가, 특히 어려운 사람들 앞에 앉기가 여간 고되지 않잖아요. 위아래가 정해진 회사 임원 모임이니 포갠 다리가 저리다 한들 앞으로 죽 뻗을 수가 있나, 화장실 가려면 무릎을 꿇고 일어나고, 무릎을 꿇고 앉고. 일 년에 두어 번 마련되는 자리라 참아주지 고개가 절로 내둘러지지요.
  모임에 참석한 부인들 중에서 제일 수월하게 앉은 사람이 선희씨였습니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벙벙한 큐롯 팬츠를 입었거든요. 치마로 보이지만 바지인 옷이라 불편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나마 의례적인 인사말을 건네고 받고, 지리멸렬한 이야기에 고갯짓을 하고, 에둘러 쏟아놓는 자랑에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사교성이 부족한 선희씨가 그 자리를 어떻게 견뎠는지…, 지금 생각하니까 참 대견해요. 할 말이 딱히 없는 데다 입조차 열기 싫고, 그런데 표정관리는 해야 되고, 선희씨는 시간이 가지 않아 안달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기존에 참여해왔던 행사이고, 치러야 되는 의무다 여겨 인내했지만 짜증에 화에 부글부글 끓다 못해 터지기 직전이었어요. 심리적으로 취약한 상태였는데 다행히 점심상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더군요. 그러고 보면 인간이라는 동물이 약아빠지기는 했어요.
  오후 늦게야 다과까지 마무리되었습니다. 선희씨는 한 옆에 떨어져 서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숨만 가쁘게 내쉬었지요. 남들과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숙여 보이고 입 끝을 당겨 올리며 이를 악물었어요. 대체 내가 왜 이 곳에서 이 사람들과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아야 되나, 회의가 밀려들었을 게 분명합니다. 제가 그랬으니까요. 막판에는 두통이 심해 머리가 터지기 직전이다, 빤한 핑계를 대서라도 집에 가고 싶더라고요.
  사장 부부가 떠날 때까지 몇 차례 인사치레를 되풀이하고 진이 빠질 대로 빠져 간신히 차에 탔습니다. 차 안이 찜질방만치나 푹푹 쪘는데 창문을 올린 채로 내버려두었어요. 사람들 웃는 얼굴이 징글징글했지요. 오로지 식당을 벗어나고 싶다는, 조용히 혼자 눕고 싶다는 바람뿐이었습니다.
  “대체 그 옷 꼴이 뭐야! 치마면 치마고 바지면 바지지.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나?”
  방금 전까지 얼굴에 가득했던 웃음기를 싹 지우고 김성수씨가 역정을 냈습니다.
  “이 옷이 어때서요?”
  무릎에 놓아둔 가방을 부여 쥐며 선희씨가 날선 목소리로 대꾸했습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지그시 누르고 김성수씨를 노려보았지요.
  “친정에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임원진 식사 자리인데 제대로 입어야지, 품위 떨어지게. 내 이미지까지 덩달아 나빠지잖아.”
  “지금 나를 혼내는 거예요? 이 사람이 정말! 죽기보다 싫은 걸 참고 따라와 주었더니 고마운 줄을 모르고. 내가 지금 어떤 심정인지 알기나해요? 미치기 직전이에요!”
  “아니, 나는. 다음에는 참고하라고. 나이 먹더니 편하자고 든다, 뒷소리나 들으면 기분 언짢잖아. 그러니까 이왕 가는 행사 조금만 조심하자 이거지.”
  위기를 감지한 김성수씨가 기세를 누그러트리고 말머리를 돌렸습니다. 선희씨가 최근에 신경이 날카로워졌음을 상기했겠죠. 똑 같이 맞대응해서 나아질 상황이 아님을 직감했더군요.
  그 뒤로 며칠 동안 선희씨와 김성수씨는 밥 먹으라는 말 한 마디 없이 지냈어요. 선희씨는 선희씨대로, 김성수씨는 김성수씨대로 심사가 단단히 틀어졌더군요. 특히 김성수씨는 불안해질 대로 불안해져서 텔레비전이고 컴퓨터고 집중이 안 되는지 거실과 서재만 오락가락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선희씨의 변화에 대해 언급을 안했어요. 조용히 묻어두고 싶었을 텐데, 제 스스로 해결되기를 기다렸을 텐데, 너무 게을렀지요.
  선희씨는 김성수씨와 다툰 뒤 외출할 때는 큐롯 팬츠만 입었습니다. 김성수씨에 대한 불만을 옷으로 표현하는 건지, 아니면 달라지고 싶은 마음과 의지를 스스로 확인하는 건지, 또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인터넷으로 큐롯팬츠 두 개를 구매해서는 번갈아 입더군요. 전보다는 옷맵시가 줄었지만 가뿐해 보이기는 했습니다.   
  옷장이나 화장대를 보면 백화점에 종종 다녔나 본데, 저하고는 한 번도 가지 않았습니다. 택시를 타고내리는 일조차 싫고 귀찮은지 아파트 단지 앞 마트에서 찬거리나 사는 정도로 끝내더군요. 동해안으로 떠날 즈음에는 그 마저 없었지만요. 생필품 대부분을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배달받았어요.
  옷을 매만진 선희씨가 베란다 문 앞으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바람이나 파도는 여전하지만 흩뿌리던 비는 그쳤더라고요. 가로등 밑 웅덩이에 둥그런 파문은 없고 바람 따라 물결만 일렁였어요. 선희씨가 베란다 문을 한 뼘 남짓 열었습니다. 얼굴에 닿는 바람이 시원했어요. 누그러졌구나 싶더라고요.
  선희씨가 뒤돌아서서 출입문 앞으로 갔어요. 벗어놓은 구두를 찾아 신고 잠긴 문을 열었지요. 가방은 두고 빈손으로 방을 나섰어요. 어두운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딛고 현관문을 어깨로 밀어 열고 펜션 밖으로 나가 도로를 가로질렀습니다.
  걸을 만큼은 수굿해진 줄 알았는데 바람이 보통 거세지 않았어요. 바람에 잡아 채여서 머리카락이고 옷이고 죄다 떨어져 나갈 것 같았지요. 그런데 선희씨는 머리를 푹 수그린 채 해변과 이어진 계단 쪽으로 비틀비틀 걸어갔습니다.
  어두운 모래사장 위로 내려서다 우뚝 멈추어 섰어요. 차가운 바닷물에 발목까지 빠져버렸지요. 바닷물이 해변 끝까지 밀려들어와 있었어요.
  선희씨가 시멘트 계단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어요. 두 팔로 가슴을 안고 몸을 둥글게 말았습니다. 사방에서 파도가 부서지고 물이 튀어 얼굴에 떨어지고 일렁이는 바닷물이 종아리를 때려대고, 여간 무섭지 않았어요.
  몇 시나 되었을까? 이만치 밤을 견뎠으면 새벽빛이 어릴 만도 한데 눈앞이 온통 검기만 했어요. 바다인지 하늘인지 해변인지 구분이 서질 않아 갑갑했습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공간에 뚝 떨어져 버린 듯 막막했어요. 냉기가 다리를 타고 올라와 으슬으슬 추웠습니다. 팔다리가 뻣뻣해지고 텅 빈 배 속까지 꽁꽁 얼어붙었지요.
  더는 못 견디겠는지 선희씨가 몸을 일으켜 세웠어요. 허리를 펴지 못한 채 어기적어기적 돌아서서는 손으로 계단을 더듬어 한 발 올라섰습니다. 감각이 없는 다리를 질질 끌며 펜션에 들어섰지요. 계단을 하나씩 오를 적마다 현기증이 일어 펜션 벽을 붙잡아야했어요.
  선희씨는 안에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주저앉았습니다. 숨을 가다듬고 원기가 설핏 돈 다음에야 신발을 벗었지요. 방바닥에 엉덩이를 올리고 허리를 편 다음에 흠씬 젖은 구두를 벽에 기대 놓았어요.
  개수대 앞에 쓰러졌다 비칠비칠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갔습니다. 따뜻한 물을 틀어 발을 씻었어요. 방구석에 밀쳐두었던 수건으로 설렁설렁 물기를 훔쳐냈지요. 이불을 집어 몸에 두르고 베란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방바닥을 내려다봤어요. 베란다 문 앞이 빗물로 너저분했어요. 선희씨가 베란다 문을 열어놓고 태풍과 맞서는 동안 바닥에 떨어진 빗물이었는데 밖을 내다보면서 징검징검 밟아 놓아 지저분해졌지요.
  이불을 내려놓고 수건을 가져다 깨끗이 훔쳐내더군요. 그리고 베란다 문 앞에 앉았습니다. 꾸부정하게 굽은 어깨에 이불을 걸치고 가로등 너머 검디검은 어둠을 쏘아보았어요. 표정이 없어 얼굴이 꼭 바닷가 절벽 위에 놓인 바위 덩어리 같았지요. 시간에 대항하는 오래된 바위 말이에요. 대항, 선희씨는 끝날 줄 모르는 밤에 대항하려는지 언젠가는 오겠지만 아직은 오지 않은 새벽을 조용히 기다리려는지 무릎을 세워 안더군요.
  붙살이로 태어나 누군가의 몸에서 다른 누군가의 몸으로, 징검다리를 건너 듯 이어온 세월이 꼭 선희씨가 노려보는 어둠 같았습니다. 고통과 바람, 연민들이 쌓여 들들이 엉켰을 텐데 그저 새까맣게만 보였거든요.
  하기는 그 숱한 사람을, 그 숱한 시간을 한 줄로 늘여 세운들 즐거울 게 뭐겠습니까. 한 때는 행복했다가 금세 나락으로 떨어지고, 한 때는 만족했다가 또 다른 욕심에 애가 닳아 동동거리고, 끝없이 반복되고 반복되는 도돌이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잖아요.
  십 분이 지났는지 한 시간이 지났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어요. 선희씨는 무릎 위에 턱을 얹고 바깥세상만 응시했지요. 선희씨가 밤에 대항한다, 말했던가요? 어쩌면 잠에 대항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면 길고 깊은 잠에 빠져들겠지 기대했다가, 그 기대가 부서져내려 오기가 생겼나 봐요. 잠에 매달리지 않겠다, 작심을 한 듯싶었어요.
  선희씨는 잠을 못자더군요. 밤 새 침대 위에서 이쪽저쪽으로 뒤척이다가 엎드려 누웠다 바로 누웠다 종내에는 일어나 앉기를 반복했습니다. 허리에 휘감긴 잠옷을 풀고, 흐트러진 이불을 수차례 정리하다보면 창문이 희뿌연 하게 밝아왔어요.
  어둠이 가시고 벽지의 무늬가 드러날 때 주방으로 나가 반쯤 감긴 눈으로 굼뜬 손을 놀려 아침밥을 준비했습니다. 남편 김성수씨는 일곱 시 전에 출근하는 사람이라 새벽밥을 먹어야했으니까요. 주방에서 달그락 식기 부딪는 소리가 울리면 김성수씨가 서재 문을 열고 나와 욕실로 들어갔어요. 김성수씨는 서재에서 일하고 자고 옷만 안방에서 입었답니다.
  양복을 갖추어 입은 김성수씨가 차려놓은 밥상에 앉아 아침을 먹고 출근하면 선희씨는 맥을 놓고 앉았다 반찬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안방으로 들어가 잠을 잤습니다. 짧으면 한 시간, 길면 서너 시간 잤는데 일상을 유지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양이었어요. 언젠가는 그마저 방해를 받았고요.
  “냄새 나게 시리 상 안 치우고 뭐 해?”
  김성수씨가 서재로 걸어가다 큰 소리로 짜증을 냈어요. 서류를 놓고 갔는지 한 시간 만에 집으로 되돌아왔더군요.
  “또 자는 거야?”
  김성수씨가 안방 문을 열어 제켰습니다. 그 바람에 선희씨가 잠에서 깼어요. 간신히 눈을 붙였는데 깬 거예요.
  “늙은 아줌마라고 대책 없이 늘어져도 돼? 고작 두 사람 먹은 자리에 설거지거리가 몇 개나 된다고 이 따위야!”
  바쁜 아침에 헛걸음질을 쳐서 화가 났는지, 그 사이 골칫거리가 생겼는지 김성수씨가 연신 신경질을 부렸습니다.
  선희씨가 무겁게 몸을 일으키고 앉아 김성수씨를 돌아보았습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을 텐데 그럴만한 기력이 없었어요.
  “한 번 게을러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거 몰라? 사람이 잠만 늘어가지고 어디다 써 먹나, 쯧쯧.”
  김성수씨는 연신 타박을 놓으며 서재로 들어갔습니다. 서류 봉투를 찾아 들고는 온다 간다 말 한 마디 없이 휑하니 나가버렸어요. 선희씨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이불자락만 어슷하게 내려다보았습니다. 한참 동안 침대 위에 삐뚜름히 앉아 있었어요. 그 날 선희씨는 어렵사리 잡았다 무참히 놓쳐버린 잠 때문에 더욱 우울하고 무기력하게 하루를 견뎌야 했습니다.
  남편 김성수씨는 선희씨가 불면증을 앓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더군요. 언제부터인가 방을 따로 썼으니까 그럴 만하다 수긍 못할 바는 아니지만 참으로 둔하고 무심한 남편이었습니다. 선희씨가 안방으로 들어가면 잠을 자는구나, 주방에서 소리가 들리면 일어났구나, 이리 단순하게만 받아들이고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았지요. 
  당사자인 선희씨야 당연히 불면증에 대해 인식했지요. 화장대 서랍에 수면제를 보관했는데 언제였는지 몇 번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병원에도 다녔던 듯 했어요. 그런데 제가 함께한 날부터 세 달여 동안은 병원을 찾지 않았습니다. 증상이 여간 심각하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고민이야 끊이지 않았겠지요. 아침나절에 쪽잠을 자고 나면 잠깐은 견딜 만했다가 오후가 되면 눈앞은 아득하고 머리는 터질 지경인데 자신을 좀 먹는 병을 어떻게 모른 척하겠습니까.
  헬스장에도 등록해 다녔어요. 형철씨가 안착한 다음이었지요. 운동을 하면 호전되겠지 스스로 판단했거나 아니면 꾸준히 운동을 해오던 형철씨가 자극했을 텐데 차도가 없어서 이 주일 만에 중단했습니다.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고, 잠을 못자니 체력이 딸려 지속할 수 없었지요. 가뜩이나 부실한 몸에서 살만 뭉텅 빠져나갔답니다.
  “다이어트 그만 해.”
  리모컨을 눌러 채널을 바꾸며 김성수씨가 불쑥 말했습니다. 텔레비전 앞에 기운 없이 앉았던 선희씨가 화장실 가려고 걸음을 떼어놓던 참이었지요. 선희씨가 느리터분하게 고개를 돌려 김성수씨를 보았습니다.
  “무슨 말이에요?”
  “무슨 말이긴, 살 그만 빼라고. 당신 살 빼려고 헬스장 다니는 거 아냐? 나이 먹어서 아줌마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미스코리아 나갈 거 아니잖아. 그 정도면 날씬해.”
  거실 탁자 위에 놓인 헬스장 이용 안내문을 보고 김성수씨가 넘겨짚었습니다. 다이어트에 미스코리아라니, 선희씨 입장에서는 참으로 허심 빠질 노릇이었지요.
  “신경 꺼요.”
  선희씨가 차갑게 응수했습니다.
  잘못된 행동이었어요. 사이가 좋든 나쁘든 남편은 남편인데 김성수씨한테는 불면증에 대해 말해야했습니다. 그랬으면 병원에 가서 당장 치료부터 받자 말로든 힘으로든 잡아끌었을 테고, 외떨어진 바닷가 허름한 펜션에 들어 잠을 청할 까닭이 없었을 겁니다.
  대체 어디가 어긋나 그 지경이 되었던 걸까요? 병원에 가기 싫어 김성수씨한테 알리지 않았는지, 김성수씨가 아는 게 싫어 병원에 가지 않았는지는 딱히 모르겠습니다. 미운 남편에게 허점을 보이고 싶지 않은 부질없는 자존심 때문이었겠지요. 스스로 고칠 수 있다 자만했겠지요. 아니면 피폐해지는 자신을 즐겼던 걸까요?
  선희씨 입장에서는 민감한 부분이라 어쩔까 싶지만 내친 김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선희씨에게 나쁜 버릇이 생겼습니다. 술을 마셨어요. 너무 잠을 못자니까 수면제 대신 들이켰을 텐데 정도가 극히 심했습니다. 맥주나 와인 같이 도수가 낮은 술이 아니라 남편이 부하직원들에게서 선물로 받은 독한 양주를 마셨거든요. 모임에 나가면 인사치레로 술잔만 받아놓고 입에 대는 척하다 그만이었는데 극단적으로 변해버린 거예요.
  처음에는 효과가 나는 듯싶었어요. 물 컵으로 반잔을 마시면 두어 시간은 기절하듯 잤으니까요. 하루 이틀 먹는 양이 쌓이면서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지 예상이 되시나요? 그대로입니다. 효과가 급격히 떨어졌지요. 한 잔, 두 잔 마시는 양은 늘었는데 잠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 더운 여름 날 술기운이 올라와 몸은 뜨겁고 잠은커녕 신경만 곤두서고. 선희씨는 이불을 부여잡은 채 안절부절 했어요.
  “돌아버리겠어.”
  결국 눈을 떠버리더군요. 도망치듯 침대를 빠져나와서는 옷을 훌렁 벗어던졌지요. 욕실로 달려가 차가운 물을 틀어놓고 바닥에 누웠습니다. 버텨내기가 어려우니 달리 해결책이 없었겠지요. 허리를 꼬부리고 누워 깜빡깜빡 졸다 잠이 들었어요. 쏟아지는 물을 잠결에 들이켜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버둥거렸습니다.
  샤워기 밑에서 알몸으로 퍼질러진 자신이 어떻게 보였을까요? 한심하고 처참하고 끔직한데 멈출 수는 없고 감당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물건처럼 자신을 팽개쳤겠지요. 몸이 식고 차가워져 오들오들 떨려오면 세면대를 붙들고 일어나 물을 끄더군요.
  지켜보는 입장에서 안타깝고 불쌍했는데 말릴 수 없더라고요. 무슨 수단을 써서든 자야만 했으니까요. 그나마 자지 못했으면 선희씨는 한 순간 무너져 내렸을 거예요.
  그런 와중에 무슨 기력으로 수필 강좌를 수강했느냐고요? 일주일에 수요일 하루, 수필 수업을 듣는 날에는 술을 마시지 않았어요. 침대에 쓰러졌다 시간이 되면 정신을 다잡아 몸을 세웠지요. 커피를 진하게 내려 마신 다음 외출준비를 했어요. 씻고 화장을 하고 옷을 갖추어 입고, 집을 나서기 전에 커다란 머그컵으로 한 잔을 더 들이켰습니다.
  오후 두 시에 시작해서 네 시경에 끝났으니까 집에 돌아오면 다섯 시 조금 안되었어요. 그러면 김성수씨가 퇴근해서 귀가하기까지 서너 시간 남는데, 오후에는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유혹이야 컸겠지만 초조한 눈길만 보냈지요. 집에서 혼자 술이나 홀짝이는 여자로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어디 있나?”
  열두시가 채 안 된 때였어요. 출장 갔다가 곧바로 퇴근했는지 김성수씨가 구두를 벗으며 외쳤습니다. 독한 양주를 마시고 불덩이가 된 몸을 뒤채던 선희씨가 반사적으로 일어나 욕실로 튀어 들어갔습니다. 곧장 욕실 문부터 잠갔어요. 넘어질듯 비틀대면서 샤워기를 틀더군요.
  “화장실이야?”
  김성수씨가 안방에 고개를 들이밀고 선희씨를 찾았습니다.
  “네.”
  선희씨가 힘들여 대답했지요. 선희씨는 한 시간 이상 샤워기 밑에 쪼그려 앉아 있었어요. 정수리에 차가운 물을 맞으며 술이 깨기를 기다렸지요.
  “무슨 샤워를 그리 오래 해?”
  선희씨가 옷을 입고 나가자 식탁에 앉아 맥주를 마시던 김성수씨가 물었습니다.
  “때 밀었어요.”
  김성수씨가 보내는 시선을 모른 척 외면하며 선희씨가 짧게 응답했습니다. 주방으로 걸어가 접시에 땅콩을 담아 김성수씨 앞에 내려놓았지요.
  “어째 선물로 받아 둔 양주가 듬성듬성 비네?”
  김성수씨가 양주병을 넣어둔 주방 장식장을 살폈습니다.
  “아는 사람한테 선물로 줬어요.”
  선희씨가 식탁 맞은편으로 멀찍이 떨어져 앉아 말했지요. 술이 깼는지, 깬 척을 하는지 일단은 멀쩡해 보였습니다.
  “보니까 한두 병이 아닌데 나한테 좀 물어보지 그랬나. 간만에 힘 좀 빼고 맛이나 볼까 했더니, 쳇.”
  김성수씨가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찜해 두었던 양주가 사라져 기분이 상했더군요.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요. 평소엔 나 몰라라 하던 양반이.”
  “아껴둔 거야, 나 몰라라가 아니라. 고이 모셔놨더니 얼굴도 모르는 사람 횡재나 시키고 이게 뭔가!”
  “그럼, 내가 먹었다고 치면 되잖아요.”
  “안 먹었는데 어떻게 먹은 게 되나? 술이나 입에 댈 줄 알면 몰라.”
  김성수씨가 말을 뱉으면서 냉장고로 걸어가 맥주 캔을 꺼내 들었습니다. 불과 서너 시간 전에 선희씨가 양주를 세 잔 가득 따라 마셨다는 걸 눈치 못 챘더라고요. 선희씨가 아무리 사용한 컵은 씻어놓고 먹다 남은 양주병은 눈길이 안 닿는 구석에 감추었다지만 술 냄새가 조금은 났을 텐데, 정말 무신경한 사람이었어요. 예전 선희씨 모습만 뇌리에 새겨놓고 믿으려들었을 거예요.
  “커피 마실 건데 같이 탈까요?”
  맥주를 든 김성수씨가 자리에 앉는 순간 쌩하니 일어선 선희씨가 냉장고에서 진하게 내려놓은 에스프레소 병을 집어 들었습니다.
  “시원해? 시원하면 마시고.”
  대작해주는 사람이 없어 흥이 안 나는지 김성수씨가 맥주 캔을 옆으로 치웠습니다. 선희씨는 투명하고 길쭉한 잔 두 개를 꺼내놓고 하나는 바닥에 깔리게, 하나는 그득하게 커피를 부었습니다. 그리고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 넣었지요. 김성수씨가 마실 커피에는 찬물을 가득 탔고요.
  “아니, 무슨 커피를 그렇게 마셔? 사약 먹는 거야?”
  선희씨가 자기 몫으로 새까만 커피를 내려놓자 김성수씨가 눈을 휘둥그레 떴습니다.
  “이렇게 마시고 밤에 잠이 와? 잠 못 자서 고생하는 거 아냐?”
  “괜찮아요. 인이 박혀서.”
  선희씨는 달랑 얼음 두 개를 띄웠을 뿐인 에스프레소 커피를 벌컥 들이마셨습니다. 김성수씨는 선희씨를 건네다 보며 연신 고개만 내둘렀지요. 도저히 용납 못할 별종을 만난 듯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더군요.
  선희씨는 수필 수업을 듣는 수요일과 김성수씨가 집에 머무는 휴일에는 에스프레소 커피를 연신 물처럼 마셔댑니다. 김성수씨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더 추가되는군요. 선희씨라는 이름을 쓰는 선희씨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어요. 남편 김성수로는 무능했지만 인간 김성수로는 마음 편했을 겁니다.
  선희씨가 다른 사람 안으로 숨어든 뒤에 김성수씨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 경험 상 심리적으로 타격이야 받았겠지만 짐작보다 크지는 않았을 겁니다. 누군가가 사라지고나면 주변 사람들은 멀리 이사를 갔다는 식으로 변화를 받아들이더라고요. 사람들마다 차이는 나지만 어느 결에 부재 한다는 사실까지 기억에서 지워버렸어요.
  김성수씨 역시 서운함과 허전함으로 맘을 끓이다 조금씩 인정하기 시작했을 겁니다. 결국에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듯 잊었겠지요. 선희씨가 돌아오리라 기대하던 밤이 제일 괴로웠을 거예요. 기대가 스러지면 마음 속 돌풍도 시나브로 잦아들잖아요.
  독한 술과 과도한 카페인, 선희씨는 둘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습니다. 어느 쪽에 서 든 도움은커녕 야금야금 갉아 먹혔지만 내려올 수가 없었어요. 남편인 김성수씨는 막연히 불안해만 했지만 선희씨는 무너지는 자신을 직시했습니다. 어쩌면 발밑까지 무너져 내릴 순간을 기다렸는지 모르지요.
  ‘눈을 파버리다’
  수필 강사가 토해놓은 열변을 듣고 선희씨가 적어 놓은 글이에요. 그런데 실은 이 문장 밑에 몇 줄을 덧붙였어요.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후다닥 내갈기고 재빨리 덮어버렸지요.
  수업이 끝나 수강생들이 서로서로 수고했다, 잘 가라 작별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선희씨는 펜을 쥐고 글을 썼습니다.
  ‘눈과 귀, 코와 입을 닫고 동굴로 들어가다’
  ‘잊기위해 기억하다, 기억하기위해 잊다’
  ‘죽기위해 살다, 살기위해 죽다’
  예사로 읽을 만한 내용이 아니잖습니까. 다른 건 뭐 그러려니 쳐도 살기위해 죽다는 그냥 넘길 수 없잖아요.
  죽기야 언제든 죽겠지만 당장은 죽고 싶지 않은 것이 뭇 생명들의 의지인데 살자고 죽는다니 대체 선희씨에게 무슨 생각이 떠오른 걸까?
  진짜 죽고 싶은 걸까? 나는 붙살이인데 어쩌지? 선희씨와 같이 죽어야하나? 선희씨 안에 든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종말을 맞아야하나? 선희씨는 죽고자 하는데 안에 든 사람들은 살고자 한다면? 선희씨가 바다를 보는 내내 가지가지 고민을 했습니다.
  가뜩이나 불면증을 앓는 사람인데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중구난방으로 충동질 해대는 통에 미쳐가는 건 아닐까? 휘몰아치는 잡념들로 어지러웠지요.
  아무렴 선희씨가 죽자고 동해안 바닷가에 오지는 않았겠지, 어떻게든 살자고 왔겠지. 어떻게든 변하고 싶고, 어떻게든 다르게 살고 싶어서 때를 기다리는 거다, 지금과는 다른 삶을 영위하기 위해 군내 나는 것들을 떨어내는 과정이다, 저 혼자 묻고 저 혼자 대답했습니다.
  잠을 자지 못할 뿐이다. 요 위로 돌아가 잠에 빠지면,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 내일 아침까지 푹 자면 비틀린 일상들 모두 제자리로 돌아갈 거다. 이리 믿고 싶어서 이리 믿었습니다.
  “강선희. 선희씨.”
  선희씨가 자기 이름을 불렀습니다. 잠을 자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에 강선희라는 이름과 어울리는 문장을 찾았나 보더라고요. 수필 과제가 계속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에요. 자신의 관심 대상인 강선희를 소재로 수필 한 편을 쓰고 오는 주 수요일에 사람들 앞에서 발표해야 되니까요.
  느릿느릿 고개를 들고 눈을 찡그려 바다를 쏘아보았어요.
  잠과의 대결에서는 패배했지만 어둠과의 대결에서는 승리했더라고요. 바다 끝에서부터 빛줄기가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선희씨가 베란다 유리문에 이마를 대고 힘살을 풀었어요.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천천히 내뱉었지요.
  공기를 배속까지 밀어 넣고 그 힘으로 목을 세우고 상체를 일으켰습니다. 먹구름이 내려앉아 어디가 바다이고 어디가 하늘인지 경계를 그을 수는 없지만 분명 새벽이었습니다. 이제 잠은 지나간 일이라고, 이 순간부터는 오늘을 살아야한다고, 밤이 되어 하루가 끝나면 그 때 다시 잠을 자면 된다고 위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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