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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작가 : 은이설
작품등록일 : 2019.10.25

제 이름은 설입니다. 몸이 없어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남들처럼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제 처지가 이 모양이라 사람들 몸에 들어가 생활합니다. 다른 존재에 의지하면서 지낼 수밖에 없는 붙살이지요. 그리고 동거인이 염원하는 누군가의 몸 안으로 동거인과 함께 이동하면서 삶을 유지하지요.
최근에는 제 이야기를 누구에게라도 들려주고 싶더라고요. 속이 답답해서…, 털어놓고 싶은 사연이 무궁무진하거든요.

 
다섯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작성일 : 19-10-25 20:30     글쓴이 : 은이설     조회 : 1,542     추천 : 0     분량 : 23,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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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송씨아줌마가 그립습니다. 기쁘고 슬픈 거, 좋고 싫은 거, 무엇이든 숨기고 꾸미지 않아 같이 웃고 울었는데. 
  나이가 엇비슷한 중년 여성인데 송씨아줌마하고 달리 선희씨는 이해하기 버거웠습니다.
  흐-음. 외떨어져 지내니 그럴 밖에요. 꼭 직업을 갖지 않아도 취미, 친목, 봉사 흥미로운 활동들이 얼마나 숱한데, 외부 사람들하고 어울려야 그 과정에서 보고 듣고 심사를 파악하련만 도통 움직이지를 않았어요.
  김성수씨와 몇 마디하고 수필 강좌에서 글을 쓰지만 입맛이나 다시는 정도지요. 아예 없는 이보다야 낫지만 한참 부족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심정을 드러내면 공감해줄 텐데 옆에서 지켜만 보자니 속만 타더라고요. 갑자기 엉뚱한 짓이나 벌이려들면 어쩌나 싶었어요.
  엎었다 젖혔다 마음이 어지러운데 선희씨는 땅 속에 든 애벌레마냥 꼼짝을 안했습니다. 답답해서 못 참겠더라고요. 듣든 말든 선희씨 귀에 대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누웠지만 말고 일어나 글을 써 봐요. 다음 주 수요일까지 수필 한 편을 완성해서 발표해야 되잖아요. 속이 들끓어서 잠이 안 오면 글을 쓰는 게 최고라니까. 당장 시작해요, 당장!’
  제 충고가 통했나보더라고요. 꼼짝을 안 하던 선희씨가 몸을 일으켰어요. 출입문 쪽으로 걸어가 형광등을 켜고 요 위에 가방을 들어다 놓고 그 앞에 앉더군요. 손바닥만 한 수첩을 찾아 들고 벽에 기댔습니다. 수첩에 꽂아놓은 펜을 빼서 오른손에 쥐었어요. 무릎을 세워 수첩을 받치고 작은 글씨로 또박 또박 써내려갔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뭘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작 두 줄 써놓고는 뚫어져라 쏘아보았습니다. 폭풍우 치는 바닷가 낯선 방에 누워 줄곧 매달린 고민이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이었다니, 선희씨나 형철씨나 이교수님이나 일면 모두 똑같더라고요.
  크루즈여행에서 돌아온 뒤 이교수님이 한 동안 이 문제로 고심을 했어요. 핵심 주제는 농촌으로의 이주였는데 끝내 시도하지 못했습니다. 수십 수백 번 전원생활 노래를 불렀지만 강하게 밀어붙일 만큼 확신도 자신감도 부족했거든요.
  형철씨 역시 깜냥대로 고뇌에 차 있었습니다. 이교수님이 자신의 뜻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통에 밖으로 드러내지 못했을 뿐이지요. 이제와 말이지만 CAD 배우기나 재형저축 가입, 공무원 시험 준비는 형철씨 바램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이교수님의 영향력이 약해진 것을 계기로 뒤늦게나마 형철씨가 무언가 되려 의지를 세우는 걸까? 아니면 선희씨 자신이 변신을 추구한다는 단서일까?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다 번뜩 장면 하나가 뇌리에 스쳤습니다.
  형철씨가 비슷한 글을 썼어요.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무엇이 될 수 있을까.
  헬스장 샤워실에서 이교수님이 형철씨 안으로 들어간 금요일 저녁이었어요. 제 입장에서는 형철씨 눈으로 세상을 본 첫째 날이었지요. 형철씨가 거주하는 원룸에 갔는데 발을 들여놓기가 꺼림칙했습니다. 꼬맹이 서넛 뛰어논 거실바닥같이 대판 어질러 놓았더라고요. 이제부터 쓰레기 구더기에서 뒹굴어야하나 한심해하던 터에 번쩍거리는 광고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잉크냄새 나는 종이조가리가 침대 위에 버젓이 놓였는데 그 위에 사인펜으로 어지러이 상념을 적었더군요.
  ‘될 수 없는 인생? 되지 못하는 인생?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짧은 문장 네 줄을 읽고 맘이 착잡했습니다. 아무 저항 없이 이교수님을 받아들인 이유가 이것이었구나, 고개가 끄떡여졌어요.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도록 성심껏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주말 이틀을 보내고 사무실에 출근해서 메일을 확인했는데 광고지 낙서에 사연이 있더군요.
  ‘정대리님, 전번 환영회 끝나고 칵테일까지 사주셨는데 실수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무 것도 될 수 없는 인생이라고 한 말 잊어주세요. 술김에 튀어나갔어요. 건방진 행동에 대한 대가로 시간이 되시면 오늘 저녁은 제가 사겠습니다.’
  이수진이라는 여직원이 보낸 메일이었습니다. 이 주 전부터 출근한다더군요.
  ‘뭘 그런 걸 가지고. 저녁 먹고 이차는 내가 쏘겠습니다. 퇴근하고 만나요.’
  형철씨가 즉시 답장을 보냈습니다. 데이트에 대한 기대로 한껏 부풀었는데 그 날 저녁에 여지없이 깨져버렸지요.
  이수진은 형철씨보다 열 살 정도 어렸어요. 그런데 대화하는 품새나 응대하는 태도가 나이보다 성숙하더라고요.
  둘은 스파게티를 먹으면서 사무실 분위기와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수진에게 호감을 품었는지 형철씨는 계속 사적인 영역으로 대화를 몰고 가더군요. 하지만 이수진은 일정한 선을 그어두고 요령껏 탁탁 끊어냈습니다. 치근거리는 고객을 대하듯 사무적이었지요.
  이수진이 계산을 마치고 커피를 마시러 가자 제안하더군요. 스파게티전문점을 나서면서 형철씨가 저녁을 맛있게 먹었으니 맥주를 사고 싶다 은근슬쩍 장소를 바꿔보려 했지만 이수진은 완고하게 커피를 주장했어요. 별 수 없이 형철씨는 스파게티전문점 바로 옆 커피전문점에 들어갔습니다. 함께 걸을 기회마저 없더군요. 커피전문점은 손님들로 가득해 시끄러웠고요.
  “정대리님, 뭐 드실래요?”
  이수진이 가방만 의자에 내려놓고 주문을 서둘렀습니다.
  “가볍게 아메리카노 먹겠습니다.”
  정대리 형철씨가 의자에 엉덩이를 드밀며 시들하게 응답했습니다.
  “앉아 계세요.”
  이수진은 계산대에 가서 주문을 넣고 돌아왔습니다.
  “저번에는 제가 실수했어요. 환영 회식이라고 계속 술을 따라 주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취했었나 봐요. 주제넘게 굴어서 죄송해요.”
  이수진이 메일에 썼던 대로 사과를 되풀이했습니다. 직접 얼굴을 마주한 상태에서 깨끗하게 마무리 지을 의도로 저녁까지 샀음을 알겠더군요. 아무 것도 될 수 없는 인생이라고 악담을 해 놓았으니 양심에 가책이 느껴졌겠죠. 그리고 형철씨가 보이는 과도한 관심을 일찌감치 차단하고 싶었을 겁니다.
  “사실인데 뭘. 나란 사람 내세울 구석 없는 거야 수진씨보다 당사자인 내가 훨씬 잘 알지.”
  형철씨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위로를 바라는 말투였어요.
  “그래도 저한테 참견할 자격은 없잖아요. 정대리님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데.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다시는 이런 실수 없을 거예요.”
  이수진이 똑 부러지게 말을 받더군요. 일부러 그랬는지 모르지만 너무 경우 바르게 굴어 차가운 인상을 받았습니다. 
  “정대리님은 회계일 하시면서 어려운 점 없으세요?”
  이야기가 감정적으로 흘러 부담스러운지 이수진이 업무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두 사람은 커피 잔을 비울 때까지 겉만 빙글빙글 도는 중심 없는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중간에 답답한 침묵이 들어서면 형철씨가 아닌 신입여직원 이수진이 새로운 화제를 끌어다 어색함을 무마하더군요.
  “수진씨, 저녁에 커피에 너무 잘 먹었어. 다음에 내가 저녁 살 게.”
  형철씨가 커피 전문점을 나와 아쉬운 듯 말했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으세요. 저는 당연히 갚아야할 빚을 갚았으니까 괜한 신경 쓰지 마세요.”
  이수진은 쌓였던 죄책감이 말끔히 털어진 듯 홀가분해 보였습니다.
  형철씨는 집에 데려다주겠다, 차에 타라 제안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했습니다. 외국산 중형차를 끌고 이수진 옆을 지나치면서 낯 뜨겁겠다 싶었어요. 차문을 열다 이수진 얼굴에 어린 표정을 보았거든요. 비싼 외제차를 끌고 다니는 형철씨를 한심하게 여기는 듯했습니다.
  그 순간 형철씨 의식 속에서 애지중지하던 보물이 애물단지로 전락했습니다. 형철씨는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한 후에 낙서를 하는 대신 자산 내역을 정리했습니다. 직장생활 십 년차인데 모아 놓은 재산이 없어 정리고 뭐고 금방 끝나더군요. 셈이 빠른 이수진에게 무시당할 만했지요. 무엇이든 최대한 빨리 손에 쥐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형철씨 입장에서 이교수님과의 만남이 시의적으로 적절했던가, 의문이듭니다. 공무원이나 건축업이나 이교수님 뜻일 뿐 형철씨는 무엇이든 되겠다는 맹목적 의지만 세웠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는 달큰한 귀엣말에 이리저리 흔들리게 마련이잖아요. 형철씨 스스로 고민을 하고 목표를 찾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더라면 김성수씨를 보자마자 선희씨가 되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았을 거예요.
  흘겨 써놓은 문장 두 줄만 망연히 내려다보던 선희씨가 수첩 사이에 펜을 끼웠습니다. 수첩을 접어 쥐고 무겁게 몸을 일으켰지요. 걸쇠를 내리고 베란다 문을 열었습니다. 비바람이 뭉텅이로 사납게 달려들었어요. 선희씨가 양손으로 벽과 문틀을 잡은 채 태풍에 맞섰습니다.
  온몸이 비에 젖고 부들부들 떨려올 즈음에야 베란다 문을 닫았어요. 수첩과 머리와 옷에서 차가운 물이 뚝뚝 떨어졌지요.
  선희씨 얼굴이 후련해보였어요. 막혔던 가슴에 숨구멍이라도 뚫렸는지 비바람을 맞고서야 표정이 생겼습니다. 비록 자신을 향한 냉소였지만 무표정보다는 낫다 싶더군요. 선희씨가 속까지 젖은 수첩을 흘깃 내려다보고 가방을 향해 휙 던졌습니다.
  선희씨는 겉옷에 속옷까지 죄다 벗어 세면대에 넣고 뜨거운 물을 받아 차례대로 헹구어 한 옆에 짜놓았습니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손에 비누를 묻혀 몸을 씻었지요.
  다행히 수건 두 개가 갖추어졌더라고요. 하나를 가져다 몸을 닦고 방바닥에 폈어요. 축축한 옷가지들을 가져다 내려놓았지요. 남은 수건으로는 머리카락을 마저 훔쳤고요. 일상으로 돌아간 듯싶었어요. 몸을 놀리니까 되레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반듯하게 개킨 옷 위에다 머리 턴 수건을 덮고 그 위에 올라서서 꾹꾹 눌러 밟았습니다. 춤을 추는 것 같았어요. 발만 떼었다 놓는 수줍은 춤이었지요. 살이 빠져 죽 늘어진 가슴에다 트고 주름진 아랫배가 우세스럽고 민망했지만 기분은 한결 나아졌습니다. 
  선희씨가 천천히 한 바퀴 돌았습니다. 팔을 옆으로 길게 뻗어 치켜 올렸어요. 제대로 춤을 추려는 걸까? 폭풍우 소리만 요란하고 이렇다 할 음악이 없는데 어떻게 하려고? 궁금하더군요.
  수피 댄스! 수필 수업 중에 감상했어요. 강사가 글감을 소개한다면서 틀어준 동영상이었는데 이슬람 신비주의자들이 신과 교감하기 위해 추는 춤이라고 설명까지 곁들였지요. 선희씨가 눈 한 번 돌리지 않고 몽롱하게 넘겨다보았는데….
 선희씨가 그 날 쓴 글이라고는 고작 ‘열망’, 두 글자뿐이었습니다. 강사가 발표자로 지목하자 미안하다면서 손만 내저었지요. 무언가를 열망해서 동작을 따라하는 건가 싶었습니다. 가슴 속 열망을 이루어내기 위한 동작이든, 가슴 속에 열망을 만들어내기 위한 동작이든, 무료해서 무작정 따라해 보는 흉내이든 춤을 추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선희씨가 열 번을 못 채우고 바닥에 널브러졌습니다. 현기증에 구역질까지 치밀었어요. 기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뱅글뱅글 돌았으니 그리 될만 했지요. 눈조차 뜨지 못하고 숨만 몰아쉬었습니다.
  한참 동안 죽은 듯 엎어졌던 선희씨가 비척비척 허리를 세웠습니다. 밀쳐두었던 상에서 빵 봉지를 집어다 이로 물어뜯었어요. 길쭉한 빵을 입에 밀어 넣었지요. 먹어야 힘이 나고 힘이 나야 움직이니까요. 움직여야 밤이 지나고 밤이 지나야 새 날이 오잖아요. 이대로 멈추면… 새 날이 못 오잖아요.
  선희씨가 빵을 문 채 다급히 일어섰습니다. 개수대 안에 빵을 뱉어버리고 컵을 꺼내 밍밍한 물을 받아 마셨습니다. 가슴을 쳐서 숨을 틔웠어요. 물을 한 잔 더 마시면서 숨을 골랐지요.
  수건을 걷어내고 눅눅한 옷을 집어 들었어요. 겉옷은 선풍기를 틀어 그 망 위에 걸고, 속옷은 텔레비전 받침대 서랍에서 찾아낸 드라이기로 말렸어요. 요 위에 주저앉아한 손에 팬티를 쥐고 뜨거운 바람을 쏘였습니다.
  선희씨가 두어 번 팬티를 쥐어본 뒤 눅진한 그대로 아랫도리에 걸쳤습니다. 브래지어를 집어 드라이기 바람을 쐬었는데 천이 두꺼워 쉬이 마르지 않았어요. 축축한 브래지어를 선풍기 위에 걸쳐놓고 요 위에 누웠습니다. 벗은 몸에 선풍기 바람이 닿아 싸늘했어요. 선희씨가 얇고 까슬까슬한 이불을 끌어다 머리 위까지 덮었습니다.
  안팎으로 바람이 불었어요. 이불 속이 나름 안온해 태풍이고 선풍기고 윙윙대는 소리가 싫지 않았습니다.
  젊은 엄마하고 한 시절을 함께했었어요. 송씨아줌마 안으로 옮겨간 예쁘장한 여자인데….
  맞아요, 민아엄마.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 전이 아닌데 수년을 동거 동락한 이의  이름이 가물대는 걸 보면 제가 이제 늙었나 봅니다. 그래도 이리 주절댈 기력이 남았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네요. 선희씨가 이불 속에서 꼼짝을 안할 때는 꼭 무덤에 갇힌 기분이었거든요,
  언젠가 민아엄마가 러브호텔에서 하루 밤 묵었습니다. 민아엄마 혼자였어요.
  그렇죠, 남녀가 쌍으로 드나드는 호텔에 여자 혼자 머무는 경우가 흔치는 않죠. 솔직히 남자하고 같이 들 작정이었는데 맘처럼 안 되어서 모양이 우습게 되었습니다. 허우대 멀쩡한 남자를 꼬여서 보란 듯이 즐겨보려던 계획이 참담하게 실패했어요. 불륜이고 바람이고 아무나 하는 짓거리가 아니더라고요.
  토요일이라 오전 수업만 하고 돌아온 중학생 딸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점심을 먹여 할머니한테 데려다놓고, 약해지는 의지를 다지면서 저녁 여덟시 넘어 외출을 했습니다.
  남편은 뭐했냐고요? 어린 여자애한테 수작을 부리는 중이었겠지요. 술집인지, 호텔인지 꼭 집어 낼 수는 없지만 분명 맞을 거예요. 워낙 여자를 탐하도록 타고난 위인이니까요. 민아엄마가 투숙한 호텔 옆방에서 여자랑 놀았을지도 모르고요.
  민아엄마 남편은 바람둥이였어요. 개인 사업을 했는데 수완이 뛰어나 돈을 수억 벌어 들였지요. 그런데 돈 버는 능력만큼 여자 후리는 능력 또한 출중해서 탈이었습니다. 처음 한두 번 들킬 적에는 민아엄마하고 대판 싸웠답니다. 그런데 추궁과 변명에 이골이 난 뒤로는 주말이면 대놓고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민아엄마 입장에서는 펄쩍 뛸 상황인데 달리 어쩔 방도가 없어 속만 끓였습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위자료 받고 이혼을 하지 왜 그 모양으로 시답잖게 굴었냐고요? 민아엄마 자신이 문제였으니까요. 바람둥이 남편을 놓을 수가 없었어요. 증오는 증오대로 켜켜이 쌓여갔지만 애정은 처음 그대로 변하지 않았거든요. 집착이라면 집착인데, 손등에 붙은 벌레마냥 대차게 떨어내지 못했지요. 남편이 먼저 그 사실을 감지했는데…, 떨어내든 말든 개의치 않는 태도가 더 문제였습니다. 아무렴 딸 민아가 맘에 켕기기는 했겠지만 딱 고만큼 뿐이었어요.
  이박 삼일로 딸 민아가 수학여행을 떠나 부부만 남은 날이었어요. 민아엄마가 남편 앞으로 걸어가 마주 앉았습니다. 식사 약속이 취소되어 간만에 일찍 들어왔지요.
  “당신 결혼한 사람 맞아?”
  민아엄마가 숨을 들이켜고 나서 차갑게 물었어요. 요 며칠 벼르던 터라 말투가 매서웠습니다.
  “몰라서 물어? 당신하고 결혼했잖아.”
  남편이 유들유들 웃으며 받아 넘기더군요. 그리고 곧장 리모컨을 집어 텔레비전을 켰지요.
  “얘기 좀 하자고!”
  민아엄마가 리모컨을 빼앗아 텔레비전을 껐습니다.
  “얘기 해, 얘기. 뭐?”
  “여자들 만나고 다니는 행동 당장 그만 둬.”
  “또 그 소리야? 미안해. 안 그러면 돼지?”
  “이혼해. 당신 같은 인간하고는 더럽고 징그러워서 한 집에서 못살겠어.”
  “이혼? 뭐가 문젠데? 내가 돈을 안 벌어다줘? 내가 당신을 개 패듯이 패? 아니잖아. 단지 여자들하고 잠 좀 같이 잔다 뿐이야. 그것도 한 여자하고는 열 번 이상 안 잔다고. 열 번 이상 같이 잔 여자는 당신뿐이야, 당신.”
  남편이 눈을 부라리며 빠르게 말을 뱉어냈습니다. 당당했어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러면 결혼은 왜 했는데? 그냥 이 여자 저 여자 끼고 다니면서 연애나 하지 결혼은 왜 했어? 나 골탕 먹이려고 결혼한 거야? 내가 힘들어하는 꼴 보니까 기분이 끝내줘? 나를 보면서 즐기는 거야? 즐기는 거냐고!”
  민아엄마가 사납게 다그쳤습니다. 나이가 사십 가까이 되어서 그런가, 전 같지 않더군요. 분에 못 이겨 사지를 떨고 말이나 더듬던 민아엄마가 아니었어요.
  “그건…”
  “정조의 의무 몰라? 부부 사이에는 지켜야할 정조의 의무가 있다고!”
  “그러면 당신도 놀아. 놀면 되잖아. 죄 없는 나만 볶지 말고 당신도 능력껏 남자랑 놀라고.”
  민아엄마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며 또박또박 끊어서 남자랑 놀라는 소리를 했습니다. 남편이라는 위인이 말이지요.
  “뭐?”
  상상조차 못한 대응이었어요. 다른 남자와 놀아나라고 하는 남편이 일순 괴물 같았지요. 민아엄마는 허심이 빠져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허탈했어요. 부부 사이에 남은 마지막 끈마저 남편이 툭 끊어버렸잖아요.
  “대신 내가 아는 인간은 만나지 마. 당신하고 짝 이뤄서 남들 입에 오르내리면 기분 더러우니까.”
  남편이 일어서며 비아냥거렸습니다. 인상을 우그러트리고 방에 들어가더군요. 충격에 빠진 민아엄마가 자근자근 입술을 씹으며 허공만 노려보는 사이 남편은 미끈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놀러 나갔습니다.
  민아엄마는 시커먼 두엄 탕에 고꾸라진 것 같았어요. 온 집안에서 구린내가 진동하는 듯해 창문이라는 창문은 죄 열어 제켰지요. 밤새 소파에 앉아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빠져나가야하는지 머리를 쥐어뜯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혼란스럽고 막막하기만 했어요. 남편을 미워하고, 민아를 염려하다 부족한 자신에 대해 책망했지요. 민아가 잘못되면 당신 탓이다, 민아가 당신을 증오하고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남편을 향해 악담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다 민아에 대한 미안함만 커져 괴로워했고요.
  민아엄마는 남편을 비난할 수도 자신을 옹호할 수도 없었어요. 남편이 보여준 당당함에 자신의 사고방식이 잘못된 걸까, 집에서 살림만하다보니 고리타분해졌나, 끊임없이 회의와 의심이 솟구쳤습니다. 남편이 자신을 술집여자들보다도 못하게 여긴다, 자학했어요. 여자도 부인도 아이엄마도 아닌 바닥을 구르는 쓰레기 같았지요.
  결국 민아엄마는 남편처럼 놀아보기로 했습니다. 아직은 젊어, 아직은 아름다워, 남자들이 나를 좋아할 거야,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어요. 피부 관리를 받고 미용실에 가고, 옷과 화장, 액세서리로 최선을 다해 꾸몄지요. 지인들을 불러낼 엄두가 나지 않아 혼자 차를 끌고 나이트클럽에 갔습니다.
  화사하게 꾸미고 돈까지 넉넉하게 챙겼는데 들어갈 수 없었어요. 손을 끌어주는 이가 한 명만 나타났으면 못이기는 척 따라 들어가 술을 마시고 춤을 추었을 거예요. 호텔에 가자면 못 이기는 척 따라 나섰을 거고요.
  그런데 전광판 불빛만 요란했지 입구를 지키는 웨이터까지 민아엄마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차 옆에 붙어 서서 친구를 기다리는 척만 했는데 눈썰미 부족한 웨이터가 먼저 들어가서 자리부터 잡으라는 기본적인 영업활동조차 하지 않았어요.
  차를 떠나 술집과 노래방뿐인 골목을 느릿느릿 걸어봤지만 팔을 잡거나 말을 걸어주는 남자가 없었습니다. 어깨에 멘 핸드백 끈을 부여 쥐고 지나가는 행인들을 넘겨다보았어요. 눈을 맞추고 시선을 교환할 기회를 찾았지만 아무도 바라보아주지 않았답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어요. 유흥 객들로 북적이고 흥청거리는 골목에서 민아엄마만 홀로 심각했으니까요. 초조한 눈빛에 표정은 굳고 걸음은 허둥댔지요.
  골목 끝이 러브호텔 밀집 지역이었어요. 민아엄마는 외떨어진 자신이 너무 무참해 가장 화려한, 가장 큰, 가장 깔끔한 호텔에 들어갔습니다. 남자하고 약속이 잡힌 양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객실을 얻었지요. 문은 잠그지 않았습니다. 자신에 반해 자신을 원하는 남자가, 세련되고 멋진 남자가 따라 들어올 거라 믿었으니까요.
  침대 끝에 다리를 꼬고 앉아 무심한 척 손톱을 들여다보며 귀를 기울였습니다. 자신을 찾는 전화가 오겠지, 누군가 은밀하게 문을 두드리겠지 기대하고 기다렸어요. 민아엄마가 문을 열어놓았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걸까요? 민아엄마가 자신과 함께 해줄 사람을 간절히 원함을 남자들이 모르는 걸까요? 누구든 기꺼이 맞아들였을 텐데 기척조차 없더군요. 민아엄마가 얼마나 예쁘고 매력적인지 지켜봐주는 구경꾼 하나 없었어요.
  옷을 벗어서 의자 등받이에 차곡차곡 걸쳐놓았습니다.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한 뒤 수건으로 몸을 감싸고 나왔지요. 머리에만 수건을 두른 채 알몸으로 침대에 들어갔습니다.
  뜨거워진 살에 차가운 시트가 닿아 기분이 상쾌했어요. 매끄러운 시트가 몸에 감기면서 아랫도리가 달아올랐지만 곧바로 의기소침해졌습니다. 남자 없이 러브호텔에 들어와, 남자 없이 흥분한 자신을 남편이 조롱하는 듯싶었지요.
  텔레비전을 켜고 성인방송이 나오는 채널을 찾았습니다. 하얀 시트를 넓게 펼쳐 몸을 덮었어요. 젖가슴을 쥐고 밑을 더듬었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습니다. 숨겨진 카메라가 자신을 찍는 건 아닌지, 누군가 몰래 구경하는 건 아닌지 신경이 곤두섰지요. 민아엄마는 끝내 성적 쾌감을, 성적 방탕을 포기했습니다. 가랑이 사이에 손을 집어넣은 채 밀려드는 자괴감으로 얼어버렸어요
  보란 듯이 남편을 배신하고, 결코 바르게 살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고, 여자로서의 능력을 확인하고 싶었는데 실패한 겁니다. 민아엄마는 휑한 침대 위 살얼음장 같은 시트 안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시트를 젖히고 튕기듯 일어나 텔레비전 음량을 최고로 키웠습니다. 발가벗은 남녀의 끈끈한 교성이 객실에 가득 찼어요. 민아엄마는 성행위와 성행위 중인 남녀와 그들이 느끼는 쾌감에 질투가 나서 주먹을 움켰습니다.
  침대에서 뛰쳐나와 욕실로 갔어요. 새하얀 욕조 안에서 다시 한 번 자위를 시도했지만 깊숙이 손을 놀리면 놀릴수록 쾌감은 멀어지고 아리기만 했습니다. 화가 치밀어 올라서, 그 화를 어쩌지 못해 젖가슴을, 아랫배를, 허벅지를 쥐어뜯었습니다.
  새빨갛게 손자국이 난 몸뚱이를 사납게 노려보다 샤워기를 틀더군요. 한참 동안 등짝 위로 뜨거운 물을 맞으며 웅크려 있었지요.
  핸드백에서 파우치를 꺼내 준비해온 화장품들을 순서대로 거울 앞에 늘어놓았습니다. 수건 한 장 두르지 않은 알몸 그대로 서서 정성껏 공을 들여 화장을 했어요. 손톱에 뜯긴 자국에다 뜨거운 물에 익어 가슴부터 종아리까지 벌겋게 부었더군요.
  마스카라와 립스틱까지 바르고 나서 하릴없이 객실 안을 서성였어요. 의자에 앉아 두꺼운 커튼을 열고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옷을 벗었는데 누구 한 사람 눈길을 주지 않더군요. 호텔 안도 호텔 밖도 적막했습니다. 할 일이 없었어요. 술을 마실 수도 잠을 잘 수도 자위를 할 수도 없었지요.
  호텔에서 세 시간 남짓 머물다 민아엄마는 거리로 나왔습니다. 골목 안은 변한 것 없이 휘황하게 번쩍이더군요. 나이트클럽은 나이트클럽대로 뭇사람들을 유혹했고 유흥 객들은 유흥 객들대로 한껏 상기되었지요.
  민아엄마는 차를 끌고 시내를 돌고 또 돌았습니다. 남편보다 먼저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어요. 남편이 자신의 부재를 발견하기를, 텅 빈 집이 얼마나 쓸쓸하고 썰렁한지 실감하기를, 자신이 없는 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님을 처절히 깨닫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무너지고 내려앉은 폐허 위에서 또다시 무언가 기대하려드는 자신을 발견하고 깊이 절망했지요.
  방향 없이 무작정 헤매 다니다 아파트 단지 이면 도로에 차를 세워 두고 눈을 감았습니다. 이혼에 대해서, 딸아이에 대해서, 위자료에 대해서, 뭇 사람들이 보낼 시선에 대해서, 그리고 혼자임에 대해서 휘몰아드는 대로 따지고 비난하고 억울해했지요. 그런데 여전히 남편을 떠나기가 무섭고 아득했습니다. 나약한, 그 만큼 초라한 자신이 견딜 수 없게 미웠어요. 민아엄마는 부여잡은 핸들 위에 머리를 얹고 밤이 지나기만을 고대했습니다.
  난데없는 웃음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어요. 눈에 익은 남녀가 다정히 옆을 지나갔습니다. 김집사님과 송집사님, 교회에서 유명한 잉꼬부부였지요. 송집사님, 그러고 보니 그 시절에는 송씨아줌마라고 부르지 않았군요. 아저씨하고 아주머니 두 내외가 다정하게 집사님이라고 불렸어요. 이름하고 사는 모양새하고 어찌 그리 한 묶음인지.
  민아엄마는 손을 잡고 발작을 맞추어 걸어가는 집사님부부를 넋 놓고 바라보다 흐르는 눈물을 화장지로 눌러 닦아냈습니다. 차에서 내려 부부를 따라갔지요. 새벽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교회에 가는 중임을 짐작했으니까요.
  해가 뜨기 전이라 골목길이 어둡고 서늘했습니다. 민아엄마는 오싹한 한기를 느껴 어깨를 움츠렸어요. 그런데 부부가 걸어가는 길은 한없이 따뜻해보였습니다. 부부 안으로 달려 들어가 온기를 나눠 받고 싶었어요. 같은 걸음으로 함께 걷고 싶었지요. 하지만 김집사님과 송집사님 사이에는 비집고 들어설 틈이 없었습니다. 서로서로 옆구리를 붙인 채 한 몸처럼 걸었으니까요.
  예배 시간 내내 민아엄마는 뒷자리에 앉아 부부를 지켜보았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탐욕스러운 눈빛이었어요. 젊고 예쁜데다 돈까지 넉넉한 중산층 여성이 가난한 부부를 시기하고 선망하다니요. 아무리 정갈하게 차려 입은들 가난이 습성이 되어 고스란히 배어나는 사람들인데 이성적으로 차분히 따져봐야 했습니다. 잘난 남편을 만나 맘고생을 하던 터라 순간적인 격정에 휩싸여 섣부른 행동을 하면 어쩌나 불안하더군요.
  헌금을 마치고 신도들 모두 집에 갈 준비를 하는데 민아엄마가 부부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습니다.
  “집사님, 새벽예배 보세요?”
  “오늘만. 단풍놀이 갈 거거든, 신랑이랑.”
  송집사님이 대답을 하면서 김집사님 손을 끌어다 꼭 쥐었습니다.
  “부부가 나란히, 참 행복하시겠어요.”
  민아엄마가 억지웃음을 지었어요. 명치가 뻐근하게 조여들더군요.
  “일 년에 딱 한 번, 당일치기로 갔다 오는 데 뭐.”
  송집사님이 부러 미간을 찡그려 보였습니다. 그런들 여행에 대한 설렘은 숨겨지지 않았어요.
  “일 년에 한 번이든 두 번이든 그게 중요한가요. 맘 맞는 사람끼리 놀러 가면 얼마나 신나는데요. 암튼 부러워요, 집사님.”
  민아엄마가 나긋하게 말을 이으며 붉어진 눈으로 송집사님을 뚫어져라 쏘아보았어요.
  “부럽기는, 돈 많고 시간 많은 사람이. 언제든 내키는 대로 가면 될 걸, 왜 그래.”
  송집사님이 말끝에 살짝 눈을 흘겼습니다. 여자라서 그럴까요, 민아엄마가 걸친 귀걸이와 반지, 원피스와 구두를 재빨리 훑어보더군요. 
  “돈만 있으면 뭐해요.”
  “무슨 소리, 돈이 있으니까 예쁘게 가꾸고 꾸미고 좀 좋아.”
  “꾸민다고 누가 예쁘게 봐주기나 하나요. 제가 송집사님을 얼마나 부러워하는데요.”
  민아엄마 입술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제 예감이 빗나가지 않았더군요. 저는 민아엄마가 송집사님이 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강하게 인지했습니다. 웃음이 가득한 송집사님 얼굴에서 눈길을 거두지 못했으니까요. 그렇다고 확신이 부족한 상태에서 무작정 판을 벌일 수는 없었습니다. 자칫 이도저도 아닌 난감한 사태가 벌어지면 큰일이니까요. 동거인 육신을 무화시켰는데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 제가 제일 두려워하는 순간이지요.
  “어쩜 그렇게 두 분이 화목하신지. 저도 두 분처럼 살아보고 싶어요.”
  민아엄마가 송집사님 팔을 꽉 쥐었습니다.
  “아직 창창한데 뭐가 걱정이야. 아저씨가 타고난 기운이 넘쳐서 그래. 나이 들고 혈기가 떨어지면 저절로 교회에 찾아 올 거야.”
  송집사님이 민아엄마 손을 다정스레 두드렸어요. 민아엄마 남편이 어떤 작자인지 소문을 들었구나 싶더군요.
  “흠, 서둘러 가서 앞자리에 앉는 편이 낫지 않으려나?”
  김집사님이 딴 데 보는 시늉을 하며 슬며시 끼어들었습니다. 여자들하고 말을 섞기가 사뭇 멋쩍은 듯 했지요. 초조해진 민아엄마가 안절부절 허둥대더군요.
  “가, 가시게요?”
  모른 체 할 수 없어 시험 삼아 속삭였습니다.
  ‘나를 삼켜 주세요.’
  여차하면 되돌릴 작정으로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데 송집사님이 민아엄마를 홀딱 들이켰습니다. 민아엄마는 마음 귀퉁이에 남은 미련 때문에 겉만 물렁하게 풀려 준비가 덜 된 상태였지요.
  너무 빠른 흡입에 제가 되레 당황했습니다. 어하고보니 송집사님 안이더라고요. 진행이야 어찌되었든 민아엄마는 송집사님의 일부가 되었어요. 저는 송집사님, 송씨아줌마와 동거하게 되었고요.
  그날 그 아침에 떠난 단풍놀이는 부부가 헤쳐 온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화창한 햇살 속에서 가을 막바지에 선 나무들이 남은 힘을 한껏 끌어올려 잎을 물들였지요.
  지역관광회사에서 승객을 모집해 떠난 당일치기 여행이었습니다. 한 사람 당 이만 원을 받았는데 그 돈 이상을 누리고 왔습니다, 점심은 기본이고 출발하면서 백설기에다 꿀떡까지 간식으로 주었는데 양이 제법 되어서 반만 먹고 반은 남겨 집에 가져갔어요. 덕분에 다음 날까지 흥을 이어갔고요.
  집사님 부부는 화장실 들어갈 적 빼고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습니다. 보기 드문 광경에 동승한 관광객들이 덕담이든 농담이든 한 마디씩 하더군요. 부끄럽고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끝까지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남편을 원 없이 사랑하고, 남편에게 원 없이 사랑받고 싶어 한 민아엄마가 송집사님 안에 머물러 그리 애틋했을까요? 고지식한 노인네들이 혀를 내두를 지경으로 부부애를 대놓고 과시했어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는데 둘만 따로 떨어져 앉아 먹여주고 닦아주고 챙겨주고, 다른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행동했지요.
  돌아오는 길에 부부는 양 손을 단단히 겹쳐 잡고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단풍철이라 도로가 막혀 예정보다 긴 시간이 소요되었지요.
  “당신 환갑 기념으로다 우리 해외여행 가요. 말들 하는 거보니까 안 가본 사람이 없더라고요. 다들 한 차례씩은 다녀왔습디다.”
  송집사님이 김집사님 손등을 어루만지며 몇날 며칠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무슨, 환갑이 뭐 별거라고.”
  김집사님이 어두운 창밖으로 눈을 돌리더군요.
  “별거라니요. 기념할 날은 기념하고 축하할 일은 축하해야죠. 일생에 두 번도 아니고 딱 한 번뿐인 환갑인데.”
  “나야 일거리 들어오면 들어오는 대로 해야지 놀면 쓰나. 몇 년 만 참았다가 당신 환갑 때 갑시다.”
  “이러다 평생 해외여행 근처를 못 가면 서글퍼서 어쩌려고.”
  “서글프기는 무에 서글프다고. 당신이 옆에 있는데.”
  김집사님이 못이 박혀 꺼칠한 손바닥으로 송집사님의 부들부들한 손등을 다독였습니다.
  “그럼, 제 환갑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가는 거예요, 꼭. 제가 차근차근 돈을 모아 놓을 테니까 그 때는 남부럽지 않게 먹고 쓰고 옵시다. 알았지요?”
  송집사님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습니다. 김집사님 역시 쭈뼛쭈뼛 새끼손가락을 가져다 걸었지요.
  “그런데 여보, 애볼 사람을 구한다는 데 소일 삼아 해볼까요?”
  송집사님이 김집사님 얼굴빛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애를 보다니 무슨 소린가?”
  “신도들 중에 젊은 엄마가 내주부터 출근해야 돼서, 갓난쟁인데 돌볼 사람이 필요하다고 그러네. 해볼까 싶은데.”
  “내 손에 힘이 들어갈 때까지는 당신 고생 안 시키네.”
  김집사님이 쌩하니 낯을 돌려댔습니다.
  “그게 어디 그래요. 당신 말마따나 할 만할 때 해야죠. 나이는 들고.”
  송집사님이 새침하게 대꾸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집안일이나 하면서 한갓지게 지내는 게 좋아. 세상에 당신하고 나 달랑 둘뿐인데 기력 떨어진 다음이야 지금부터 차차 준비해가면 되지 않겠나. 걱정하느라 지레 겉늙지 말고 편히 있어. 내가 아무렴 당신 굶기겠는가.”
  김집사님이 겹쳐 잡은 손에 힘을 주었습니다.
  송집사님은 작게 한숨만 내쉬었습니다. 돈은 풍족하지 않지만 그지없이 편안한 삶을 계속하고 싶었어요. 육십이라는 나이와 필히 따라올 경제적 어려움이 떠올랐지만, 늙은이 소리를 들어야할 시기가 멀지 않았음을 절감했지만 아직은 괜찮다 스스로 위안했지요. 지금까지 행복했으니 나중 역시 행복하리라는 막연한 믿음이 침묵하도록 만들었어요.
  단풍놀이가 송집사님과 함께 한 첫 번째 여행이었군요. 그런데 마지막 여행이었네요. 붙살이 입장에서 크루즈여행은 이교수님 여행이니까요.
  하-아, 여행은 갈 때 기분하고 올 때 기분이 많이 다르지 않나요? 갈 때는 기운이 나고 설레지만 올 때는 피곤함에 더해 아쉬움과 쓸쓸함이 더해지잖아요. 어느 결에 끝이나버리니까요.
  단풍놀이를 다녀온 뒤 만 이 년을 못 채우고 송집사님은 송씨아줌마가 되었습니다. 서글프지만 어쩔 도리가 없지요. 알게 모르게 시나브로 변하든 급작스레 돌변하든 사는 모습은 변하기 마련이잖아요. 덩달아 불리는 이름까지 달라지고요.
  이름이라, 민아엄마도 제대로 된 이름을 가졌을 텐데…. 태어나면서 얻은 이름을 죽 사용했을 텐데 좀체 기억나지 않네요. 민아엄마 스스로 이름을 중시하고 열심히 써먹었더라면 잊을 리 없는데, 남들만 해바라기하다 본래 이름은 말려 죽였나 봅니다. 바람둥이 남편을 둔 속 썩는 부인으로, 딸아이 뒷바라지에 열과 성을 다하는 엄마로, 일주일에 두어 번 백화점을 찾는 우수 고객으로만 자신을 상대했나 봐요. 
  아예 엄마라는 호칭까지 떼어버리고 민아라고만 불리기도 했어요. 외동으로 낳은 딸이 민아인데 딸 이름으로 칭해졌지요. 딸이 다니는 중학교 학부모회에서 활동할 때였습니다.
  민아엄마는 민아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그 해부터 학부모회에 가입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했어요. 학교에서 공부하는 딸을 세심히 챙기고 오며가며 지켜보는 재미에 발을 들였는데 사오 년 열심히 하다보니까 임원까지 맡게 되더군요. 회장은 아니었고 부회장, 총무, 감사, 옆에서 도와주는 역할이었지요.
  관심이 같은 데다 비슷한 입장이라 임원들 관계가 무척 돈독했어요.
  “민아야. 민아, 중간고사 잘 봤어?”
  학부모회장이 물었지요. 유일하게 아이 이름이 아닌 회장님이라는 칭호로 불리는 멋쟁이 여자였어요. 초등학교 거쳐 중학교까지 내리 오 년 회장님이었다더라고요. 사람을 어려워하지 않는 호탕한 성격에 씀씀이까지 넉넉해 엄마들한테 인기가 대단했지요.
  “만날 그래요. 학원 바꿨는데 성적 좀 올랐으면 원이 없겠네.”
  민아엄마가 시들하게 대답했습니다. 엄마 열성에 반만 호응해줬던들 우수하다는 평을 들었을 텐데 민아는 중간 이상으로 성적을 올리지 못했어요. 아빠를 닮았는지 성격이 활달하고 쾌활해서 친구들은 들끓었지만 학습 의지는 다소 부족했지요.
  “동준이하고 연하는 늦는다고 연락 왔어. 친정에 급할 볼일이 생겼다나봐. 얘들 수학여행 간식, 어떤 품목으로 할지 조사해 봤어?”
  학부모회장이 시원스레 물었습니다.
  “글쎄요. 기다렸다가 의견 들어봐서 정해요.”
  총무를 맡은 민아엄마가 시큰둥하게 대답했습니다. 워낙 학부모회 임원 넷이 상의해서 결정하고 함께 움직이는 터라 크게 문제될 행동은 아니었어요.
  학부모회장이 더는 뭐라 않고 근심스런 눈으로 민아엄마를 건네다 보았습니다.
  “민아야, 어쩌려고 그래.”
  “왜요?”
  순간적으로 긴장한 민아엄마가 작게 되물었습니다.
  “민아아빠 단속 좀 제대로 해. 그런 데 들어갈 작정이면 좀 멀리 가서, 아는 사람들 눈에 안 띄게 하라 그래. 사람들 입이 얼마나 무서운데.”
  학부모회장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반은 화가 나서 반은 걱정이 되어서였지요. 이 년째 같이 어울리면서 둘은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는 친자매만치 가까웠거든요.
  민아엄마는 어떤 상황인지 눈에 빤히 보였지만 차마 입을 떼지 못했습니다. 탁자 위에 놓인 물수건만 만지작거렸어요.
  “허 참! 낯 뜨거워서. 떡 하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기집애 옆에 태우고 러브호텔이 뭐니, 러브호텔이!”
  “언제요?”
  “저번 토요일에 등산 가다가. 하필 쏙 들어가는 장면을 옆에서 봤지 뭐니. 민아야, 어쩔 거야? 그냥 내버려둘 거야?”
  학부모회장이 친정언니나 된 듯 채근했어요.
  “어째요, 당사자가 원하는 데. 자기 원하는 대로 하고 살아야죠. 난 신경 안 써요.”
  민아엄마가 차갑게 말했습니다. 탁자 밑으로 숨긴 손이 달달 떨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눈만 내리깔았지요.
  “신경 안 써? 그게 할 소리야? 여편네가 되가지고 속에서 불이 안나? 눈이 안 뒤집혀?”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난 나대로 각자 재미있게 지내면 되지 무슨 상관이에요.”
  “민아야, 대단하다, 대단해. 그런데 있잖아. 자기는 어른이니까 그렇다 치지만 민아는 염려 안 해? 그러다 민아가 이 사실을 알아 봐. 민아, 사춘기잖아, 사춘기. 민아가 알기 전에 뭔 짓을 해서든 확 뜯어 고쳐. 엄마들 입방아에 오르내렸다하면 애들 아는 거 순식간이야, 순식간! 엄마들도 무섭지만 애들은 더 무섭다는 거 몰라?”
  학부모회장이 결연하게 민아를 거론했습니다. 종내 나올 수밖에 없는, 피한다고 피해지는 부분이 아니었어요.
  “그건 절대 안 돼요.”
  민아엄마가 후들거리는 손을 방석 깊숙이 쑤셔 넣었습니다.
  “제삼자가 주제넘지만 차라리 이혼을 해. 애들한테는 사람대접 못 받고 사는 엄마보다 사람답게 사는 엄마가 나아. 가진 돈 충분하겠다 위자료 확실히 챙겨 받고 양육비 넉넉하게 달라고 하면 되잖아.”
  “어떻게 그래요.”
  “그걸 지금…”
  학부모회장이 말을 끊었습니다. 만나기로 한 임원 엄마 둘이 식당에 들어섰거든요.
  엄마들 넷은 수학여행을 가는 2학년 아이들 간식으로 무엇을 구매해서 어떻게 챙겨 줄지 논의했습니다. 민아엄마는 햄버거를 예약하고, 빵을 맞추고, 음료수를 대량 구매하고, 교사용 간식 가방을 만드느라 수학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까지 정신없이 바빴어요. 일주일 여 동안 웃고 떠들며 보냈지만 마음 한 가운데에는 풀지 못한 문제가 똬리를 틀어댔지요.
  이틀 저녁은 민아 없이 보내야 했습니다. 민아엄마는 남편과 정면으로 맞설 작정을 했어요. 행여나 민아가 눈치채지 않을까, 조심할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곪을 대로 곪은 상처와 묻어두었던 숙제들을 남김없이 꺼내놓고 담판을 지어야한다 결심했지요. 학부모회장 말마따나 사람답게 살자 다지고 다졌다 용기를 내서 부딪쳤습니다.
  처참하게 패배했습니다. 스스로 겁내하던 이혼이라는 무기까지 꺼내들었지만 벌거벗겨진 채로 길 한복판에 내쳐졌어요.
  허허벌판에서 바들바들 떨다가 부부를 만난 거예요. 돈이 있든 없든, 나이가 많든 적든 순박한 김집사님한테 떠받들려 사는 송집사님이 우러러 보였고, 오매불망 서로만을 바라보는 부부가 더없이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반면에 자신은 실증 난 주인이 길 가에 버린 추레한 인형쯤으로 여겨졌지요. 
  제가 한 때 민아엄마와 동거했으니 누군가는 민아엄마를 부러워했다는 뜻인데…. 자기 이름조차 잃어버린 측은한 여자를 부러워한 이가 대체 누구였을까요? 젊음을 탐낸 노인이? 돈 때문에 궁지에 몰린 가난뱅이가? 바람둥이 남편을 사랑한 또 다른 못난 여자가? 누군가의 갈망 대상이었던 민아엄마 역시 세월이 지나면서 또 다른 누군가를 갈망하게 되었지요.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고 비슷한 과정을 거쳤는데, 어딜 가나 연빈엄마라고 통하던 시절을 지났을 텐데 선희씨는 이름을 지켰습니다. 선희씨, 선희씨는 본 이름이면서 수필 강좌에서 사용하는 별칭이에요.
  수필 강좌를 맡은 남자 강사는 수업을 진행하면서 자신부터 별칭을 썼어요. 그 분야에서는 나름대로 지명도를 쌓은 수필가더군요. 나이는 선희씨 정도 되어보였는데 글을 쓰는 작가라 행동거지가 별스러웠어요. 별칭 역시 귀에 확 들어왔고요. 떠돌이였거든요. 유치하고 촌스러운데, 역으로 또 그 만큼 자유분방함의 표현으로 생각되더라고요. 게다가 강의를 몇 번 듣다보니까 사람하고 별칭이 꽤 어울렸습니다.
  수업을 듣는 수강생이 스물 남짓 되는데 대대적으로 별칭을 짓고 소개하는 과정을 진행했더라고요. 황새, 연이낭자, 소리꾼 이런 어휘들로 서로를 부르는데 사뭇 자연스러웠습니다.
  선희씨. 선희씨가 이름이 아니라 별칭임을 알게 된 다음부터 선희씨를 달리 보게 되었습니다. 선희라는 인물에게 애정을 가졌구나, 선희로 살고 싶어 하는구나 헤아렸지요. 비밀 공간을 엿본 것 마냥 한결 가까워진 기분이었습니다.
  강사가 뜬금없이 별칭에 대해 묻기도 했어요.
  “선희씨는 유일하게 자기 본명을 별칭으로 쓰고 계신데 달리 맘에 둔 이름은 없었나요?”
  그날 수업 주제가 소재 선택이었는데 이와 관련된 질문인 듯싶었습니다.
  “글쎄…”
  선희씨가 말을 흐렸습니다. 워낙 빼기부터 하는 성미라 기대조차 없었는지 강사가 재깍 수업을 이어갔습니다.
  “내가 여러 차례 강좌를 진행하면서 관찰한 결과 평소 관심을 둔 대상과 별칭이 긴밀하게 연결되었더구먼요. 선희씨는 어떤가요? 맞다 싶지 않나요?”
  강사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선희씨를 보았습니다.
  “맞, 맞는 것 같네요.”
  강사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희씨가 재빨리 동조했습니다.
  “글을 쓸 때 최고 최선의 소재는 지금 내 관심이 향하는 무엇입니다. 관심이 생겨야 살피고 비판하고 즐기지 않겠습니까?”
  강사가 동의를 구하듯 한 명 한 명 짚어가며 눈을 맞추더군요. 선희씨 차례에서는 눈썹을 추켜세웠어요. 선희씨라는 별칭이 꽤나 인상 깊었나 보더라고요.
  “그런데 문제는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은 감각적으로 파악 가능한데 내 관심 대상에 대해서는 명확한 인식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요새 세상이 옛날하고 달라서 여간 번잡해야지요. 번잡한 세상을 헤쳐 나가다보니 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쌓이는데 그걸 왜 하는지는 모르겠고. 만날 정신없이 분주하고 머리는 지끈거리는데 냉정히 들여다보면 하찮고 귀찮은 것들뿐이더란 말입니다. 뭐가 보석인지 쓰레기인지 구분 못하고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휘둘리고. 안 그런가요?”
  강사가 확신에 차서 일사천리로 주워섬겼습니다. 잠시 호흡을 고르면서 서너 번 고개를 주억이더군요. 수강생들은 강사가 부려놓은 주장에 대부분 공감하는 듯했습니다. 강사에게 눈과 귀를 붙박아 놓고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어요. 선희씨 또한 마찬가지였고요.
  “싫고 좋은 거야 본능적으로 인식해서 반응하니까 그러려니 받아들이면 그만이지요. 그런데 내 가슴이 무엇을 찾는 지는 알아차리기 어려워요. 주변에 잡다한 물건들만 쌔고 쌔다보니까 시간과 노력을 거기에 몽땅 빼앗겨버리잖습니까. 텔레비전, 컴퓨터, 핸드폰. 실시간으로 얼마나 많은 정보를 보여줍니까? 많다 못해 줄줄 넘쳐나잖아요. 지들끼리 뒤엉켜서 새끼까지 까대고, 나는 싫다 도리질을 쳐댄들 눈만 떴다하면 무더기로 떠안기니. 과잉이다 못해 공해야 공해! 눈깔을 화-악 파버리든지.”
  손짓을 섞어가며 열을 내던 강사가 입을 닫고 휙 돌아섰습니다. 칠판 앞으로 성큼 성큼 걸어갔어요. 잠깐 쉬었다 천천히 돌아섰는데 머쓱한 얼굴이더군요. 흥분이 지나쳐 실수를 했구나, 창피했겠지요.
  “죄송합니다. 본래 제가 이렇게까지는 무식하지 않은데, 그리고 눈깔은 제 눈을 말한 겁니다.”
  오른손 검지로 자기 눈을 가리키며 어설프게 웃었습니다.
  강사의 너스레를 듣다 선희씨가 가방을 열고 연습장을 꺼냈습니다. 연습장 빈 면을 찾아 펴더니 ‘눈을 파버리다’라고 쓰더군요. 기록해 놓을 정도로 인상 깊은 표현이었나, 의아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한바탕 웃어 제키면서 가벼이 넘겼는데 어떤 부분에 끌렸는지 궁금했습니다.
  “음-, 이번 수업에서는 여러분의 관심 대상을 파악하도록 하겠습니다. 각자마다 다방면에서 여러 가지 내용이 나올 텐데, 그 중에서 나를 강하게 잡아끄는 것, 관심 대상 일번을 찾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것을 소재로 수필 한 편을 쓸 계획이구요, 발표까지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출발하시죠.”
  안내를 끝낸 강사가 수강생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수강생들이 방법을 몰라 서로들 수군대더군요. 그 바람에 수업 분위기가 어수선해졌지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판단했는지 강사가 칠판 앞으로 나가 박수를 쳤습니다.
  “참고로 들으세요. 연상기법이라고 부르는 방식인데, 머리에 떠오르는 낱말들을 그대로 받아 적는 겁니다. 낱말들을 모아보면 윤곽이 드러날 거예요. 그 다음에 현재 자기 생활과 연결 지으면 내 관심이 어디에 쏠렸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흐트러진 분위기를 다잡기 위해 강사가 외치듯 말했습니다. 유심히 설명을 듣던 선희씨가 연습장을 한 장 넘기고 펜을 쥐었습니다. 뚫어져라 빈종이만 노려볼 뿐 쓰지를 못하더군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고 펜을 내려놓았습니다.
  “어려워 말고 되는대로 하세요. 연상기법이 뭐 별 겁니까. 판단 과정 없이 마구 휘갈기는 거예요. 옳다 그르다 괘념치 말고 튀어 나오는 대로 받아 적으세요. 뭘 썼는지 남들은 모르니까 솔직하게 쓰시고요. 남들한테나 창피하지 자기 자신한테는 창피할 게 없잖습니까. 자기 검열 그딴 짓 하지 말고 의식을 확 열어젖힌 다음에 보이는 족족 잡아채세요.”
  선희씨처럼 펜만 만지작거리는 수강생들이 여럿 되었나 봐요. 강사가 일단 써보라는 말로 머뭇대는 수강생들을 독려했습니다.
 선희씨가 입술에 힘을 넣고 또박또박 글자를 적어나갔습니다. 
  ‘강선희.’
  본인 이름 석자였어요.
  ‘선희씨.’
  ‘죽기, 살기, 떠나기.’
  ‘나 아들 남편, 아들 남편 나.’
  ‘따분, 우울, 무력, 피곤, 갑갑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리한 어휘들인데 늘 함께 겪어온 부정적 기분들이라 순간적으로 울컥했습니다.
  ‘버스, 신발, 가방, 전화기.
  커피, 모래, 바다, 바람, 나무.
  기차, 비행기, 배, 자동차.
  선희가 걷다, 선희가 달리다, 선희가 날다.
  선희가 숨을 쉬다.’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낱말들을 멈춤 없이 받아 적었어요. 손에 힘이 과도하게 들어가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지요.
  선희씨가 빈 공간을 노려보며 모두숨을 쉬었습니다. 의식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엇인가를 끄집어내려는지 눈을 감고 어금니까지 악물더군요. 하지만 여의치 않은 듯 연습장에 펜 머리만 박아놓고 글자 한 개를 보태지 못했어요.
  “어느 정도 쏟아냈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세요. 일정한 맥락이나 흐름이 보일 겁니다. 흐름이 하나 일수도 여러 개 일수도 있는데 중요한 순으로 번호를 매기다 보면 탁 잡히는 게 나올 거예요. 그걸 소재나 주제로 해서 구상하고 쓰시면 진솔한 이야기가 줄줄 쏟아집니다. 왜냐하면 의식 곳곳마다 하고 싶은 말들이 쌓였거든요. 그걸 끄집어내면 일 단계는 성공입니다. 그 다음은 단계랄 것조차 없어요. 손만 대면 지가 알아서 흘러나오니까요.”
  강사가 수강생들이 활동하는 모습을 살피고 다니면서 느릿하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선희씨 곁을 지나치면서 기록한 내용을 슬쩍 넘겨다보려 했는데 선희씨가 팔을 끌어 연습장을 가렸어요. 강선희라는 낱말에 동그라미를 쳐놨거든요.
  강사가 멋 적은 표정을 짓고 흰색 칠판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유성 펜을 들어서는 낱말들을 연달아 줄 줄 줄 적어 내려갔습니다. 강사 별칭이 떠돌이니 오죽이나 거침없었겠습니까. 낱말들 위에다 삼각형, 사각형, 동그라미 중 하나를 덧그려서 기준별로 묶어놓고는 분석을 하더군요. 그리고 마지막에 관심대상을 세 가지 제시했습니다. 준비된 행동인지 순간적 충동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가벼우면서 진지하게 이루어졌어요. 남들 눈치 보고 재고 따지는 것 없이 분방하게 사는구나, 내심 부러웠습니다. 
  “제가 솔선수범해서 보여드렸으니 이제 여러분들 차례인 거 아시죠? 돌아가면서 발표해볼까요? 아닙니다, 농담이에요. 몇 분 안 남은 관계로 이만 정리하겠습니다. 각자 파악한 관심 대상을 소재로 해서 일 주일 동안 수필 한 편을 완성해오는 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다음 수업에 진행할까 했는데 두 시간 동안 쓰고 발표하기가 꽤 벅찰 듯싶어요. 제 경험 상 워낙 하고 싶은 말들이 넘치고 넘치는 소재라서 말이지요. 한 시간 정도 써 온 글을 다듬고 남은 시간 동안 발표하겠습니다. 괜찮겠죠?”
  안내를 마친 강사가 후다닥 박수 세 번을 쳤습니다. 수업이 끝났다는 의미였지요.
  생각해보니까 선희씨가 동해안으로 떠나기 삼일 전 수업이었네요. 선희씨 관심 대상이 강선희였으니 강선희를 소재로 한 수필 한 편이 그 당시 과제였어요. 그래서 수첩을 꺼내 몇 자 적었군요. 달랑 두 줄 뿐이라 서운하긴 하지만 첫발은 내딛었어요.
  선희씨는 팬티만 입고 이부자리 속에 누운 강선희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요? 바라보면서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선희씨가 뻣뻣한 이불 밑에서 비척비척 돌아누웠습니다. 비쩍 마른 몸을 꼼지락거렸을 뿐인데 버스럭 버스럭 낙엽 헤집는 소리가 났습니다. 덮은 이불이 인조견 재질이었거든요. 얇은 여름 이불에서 낙엽 소리라니 뜬금없었습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날 바스락대는 낙엽소리를 들으면서 선희씨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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