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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작가 : 은이설
작품등록일 : 2019.10.25

제 이름은 설입니다. 몸이 없어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남들처럼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제 처지가 이 모양이라 사람들 몸에 들어가 생활합니다. 다른 존재에 의지하면서 지낼 수밖에 없는 붙살이지요. 그리고 동거인이 염원하는 누군가의 몸 안으로 동거인과 함께 이동하면서 삶을 유지하지요.
최근에는 제 이야기를 누구에게라도 들려주고 싶더라고요. 속이 답답해서…, 털어놓고 싶은 사연이 무궁무진하거든요.

 
둘 아버지가 필요해
작성일 : 19-10-25 20:24     글쓴이 : 은이설     조회 : 499     추천 : 0     분량 : 13,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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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아버지가 필요해

  형철씨는 여타 동거인들보다 다소 어렵게 선희씨 안에 터를 잡았습니다. 형철씨와 선희씨가 서로에게 익숙해지기까지 일주일이나 걸렸어요. 안정된 다음부터 남편 김성수씨에 대한 선희씨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멀리 떠났다 장성해서 돌아온 아들 마냥 공손하고 믿음직하게, 그러면서 힘 좀 쓴다는 듯이 행동했지요. 허세가 과해서 거북살스럽다 못해 낯부끄럽더군요. 
  대표적으로 이런 행동을 했어요. 서둘러 걸어가 현관문을 열고는 옆으로 비켜서서 김성수씨가 들어갈 때까지 점잖게 기다리기, 김성수씨가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보면 그 밑 거실 바닥에 앉아 프로그램 내용에 대해 덧붙여 설명하기, 잠자려고 안방에 들어가면서 안녕히 주무시라고 공손히 인사하기 등이었습니다. 많은 집안에서 예사로이 부딪치는 장면이지만 선희씨하고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하기는 생판 다른 형철씨하고 선희씨가 조화를 이루기 쉽겠습니까.
  선희씨 역시 순간순간 멋쩍었겠지만 김성수씨는 남성스러워진 부인이 낯설고 어색해 참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습니다. 정중하고 깍듯한 태도에 싫다고는 못했지만 그러는 선희씨가 멀게 느껴졌을 테지요. 멀어지다 못해 훌쩍 떠나버리면 어쩌나 불안했을 겁니다.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손 안에 두어야 안심이 되는 사람, 김성수씨한테는 그런 사람이 선희씨였으니까요. 당사자는 아니다 부정했지만 제 눈에는 확연히 보이더군요.
  김성수씨가 열흘을 못 견디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당신은 일타이피해서 좋겠어. 한꺼번에 능력 출중한 남편에다 존경하는 스승까지 얻었으니 호박도 아니고 수박이 넝쿨째 들어온 격이지 뭔가. 아니, 아니. 일타삼피인가? 인물까지 훤하니 옆에 달고 다니면서 자랑할 만하잖은가. 그렇다고 감지덕지해서 너무 어려워하지는 말아. 모두 나하고 결혼한 당신 복이야, 당신 복. 당신이 천복을 타고나서 훌륭한 남편을 만났으니까 나한테까지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고. 감사해하는 마음은 충분히 알았으니까 괜히 무리하지 말고 하던 대로 해.”
  “복? 그럼 복이 넘치는 여자한테 차 한 대 뽑아주면 어때요?”
  선희씨가 대뜸 차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형철씨가 전면에 나섰구나 싶더라고요. 승용차에 대한 욕심이 대단했거든요.
  “차? 차는 무슨. 당신은 운전 못하잖아.”
  예상치 못한 곳, 원하지 않던 방향으로 불똥이 튀자 김성수씨가 당황해 말까지 더듬었습니다.
  “면허증 따놨겠다 한 일주일 주행 연수나 받으면 차고 남지, 나라고 평생 못 할 줄 알아요? 가만, 작년에 했던 말은 허튼소리였나 보네. 싫으면 싫다고 해요.”
  선희씨가 거침없이 응수했습니다.
  “허튼소리라니, 내가 뭘 어쨌다고?”
  “차 사줄 테니 주행 연수 받으라면서요? 아침저녁으로 운전하기 귀찮으니까 출퇴근시켜 달랬잖아요? 모르는 척 하기는.”
  선희씨가 말을 마치면서 눈까지 흘겨보였어요.
  “그랬나…? 그때는 당신이 안 산다고 했잖아. 갑자기 차는 뭐 하러 사겠다는 거야? 이 여자가 늙어가지고 바람이 났나? 요 며칠 요상하게 굴더니…”
  거리를 두는 행동도 모자라 차를 산다니 정을 떼어내고 멀리 도망가는 건 아닐까 적잖이 두려웠나봅니다. 김성수씨가 되레 언성을 키우고 말았지요.
  “바람?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돌연 차갑게 얼어붙은 선희씨가 바짝 날을 세웠습니다. 
  선희씨는 소파에 올라앉아 리모콘을 움켜쥐고 텔레비전을 껐어요. 소파에 기대 앉아 해양 다큐멘터리를 보며 설명을 곁들이던 중이었는데 차 문제가 바람 문제로 비화 되자 형철씨가 욕심을 접고 뒤로 물러났지요. 그와 동시에 선희씨는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 팔짱을 낀 채 발등만 내려다보았습니다.
  “당신이 그런 소리할…”
 선희씨가 말을 맺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그건 당신 오해라고 했잖은가.”
  김성수씨가 난감한 얼굴로 말을 끊어냈습니다.
  “오해는 무슨 오해.”
  “점잖은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나. 옛날 일 가지고.”
  “당신한테나 옛날 일이겠지, 나한테는 어제 일 같아요, 어제 일!”
  선희씨 목소리에 독기가 서렸더군요. 민아엄마가 나이를 먹었으면 이리 무서워졌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없는 듯 지냈는데 여자 몸에 들어 왔다고 눈을 뜬 건 아닌지 의구심이 일었어요. 
  “그래, 그래. 옛날 일이든 아니든 당신이 납득하고 오해였다 인정하지 않았는가. 흥분은 가라앉히고 차분히 대화하자고. 당신 이성적인 사람이잖아.”
  “인정? 누가 인정을 해요? 남 보기 부끄러워서 넘어가주는 척 했을 뿐이라고요. 그런데 이제는 못 넘어가겠어요.”
  “말실수 가지고…, 당신답지 않게 왜 이리 감정적으로 행동하나. 연빈 엄마, 열 좀 식히고 내 얘기 좀 들어봐.”
  김성수씨가 팔을 뻗어 선희씨 손을 잡았습니다.
  “그 더러운 걸로 뭐하는 거예요!”
  선희씨가 김성수씨 팔을 뿌리쳤습니다.
  “더러워? 이 사람이 미쳤나.”
  김성수씨가 벌떡 일어섰습니다. 선희씨는 흔들림 없이 김성수씨를 노려보더군요. 둘 사이에 무언가 결단이 이루어질듯 긴박한 분위기였습니다. 한 차례 숨을 몰아쉰 선희씨가 먼저 입을 떼었지요.
  “그럼…”   
  띵 띵 띵 띵 띵. 바로 그 순간 현관에서 버튼음 다섯 개가 경쾌하게 울렸습니다. 문 쪽을 돌아본 선희씨가 짧고 거칠게 고개를 내둘렀습니다.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일어섰지요. 파국으로 치달을 뻔했던 상황이 삼 초 만에 종결되었어요.
  “연빈이 왔니?”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에 맞추어 선희씨가 다정한 목소리로 아들을 반겼습니다.
  “네, 저예요.”
  아들 김연빈이 신발을 벗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취업 시험을 준비할 목적으로 다니는 대학 앞에 오피스텔을 얻어 따로 지내는데 주말이라 집에 다니러왔지요.
  “왜 이렇게 늦었어. 저녁 먹어야지?”
  인사말이 오가는 동안 자상한 엄마로 바뀌었더군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김성수씨는 한 발작을 못 떼고 식식거렸는데 말입니다. 허리춤에 손을 얹고 베란다 쪽만 응시했지요.
  “뭐하고 계세요?”
  아들 김연빈이 얼굴을 돌린 채 뻣뻣이 서 있는 김성수씨를 의아한 눈으로 보더군요.
  “별일 아니다.”
  김성수씨가 털썩 소파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습니다. 아들과 눈길을 교환하고 안부를 확인하는 일상사조차 힘에 부쳐했어요. 텔레비전을 켜면서 한숨을 길게 뱉어냈지요.
  “하는 공부는 잘 되니? 조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쉬엄쉬엄해라.”
  멍한 눈으로 텔레비전만 넘겨다보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광고가 시작된 뒤에야 건너 쪽 자리에 떨어져 앉은 김연빈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필요한 게 생기면 재지 말고 엄마한테 전화해.”
  목소리에 매가리가 없었어요. 시선은 여전히 텔레비전을 향한 채였고요.
  “네.”
  의례적인 말로 받아들였는지 김연빈이 건성으로 네 소리만 했습니다.
  김성수씨는 저녁이 준비되는 시간을 이용해 어렵사리 심적 안정을 찾았습니다. 식탁에 앉아 몇 숟갈 뜬 다음에야 선희씨를 쳐다볼 수 있었지요. 집어 먹기 편하도록 조기 살을 발라놓는 선희씨 모습에 허리를 펴고 깊이 숨을 들이켰습니다. 뿌루퉁한 표정이 조금씩 풀어지더군요.
  “나는 몰라도 엄마한테는 꼬박 꼬박 전화 넣어. 엄마가 네 걱정 무지 한다. 엄마한테는 너 밖에 없다는 사실 알지? 뭘 하든 엄마한테는 이야기해야 돼.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부모가 챙기고 있어야 기뻐해주든지 도와주든지 하지 않겠냐. 특히 힘들고 곤란한 문제가 생기면 혼자 해결하려 들지 말고 꼭 상의해. 엄마나 나나 널 위해 네 곁에 머무는 사람들이다. 잊지 말고 꼭 전화해.”
  김성수씨는 아들 김연빈에게 훈계하는 형식을 취해 쉽고 가볍게 선희씨에 대한 고민을 내려놓더군요. 속을 들여다보면 훈계라기보다는 엄마가 딴 생각 못하도록 전화 자주 하라는 절박한 요청이었지요.
  이들 셋은 여유롭고 편안하게 주말을 보냈습니다. 일요일에는 고급 중식당을 찾아가 점심 식사를 했는데 근심과 갈등은 끼어들 수 없는 화목한 가정 그 자체였어요. 당사자들이야 어찌 판단할지 몰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이들 셋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선희씨 요청으로 시작된 자동차 구매 건은 뜨뜻미지근하게 의견이 오가다 유야무야 흐지부지 없던 사안이 되었습니다. 선희씨는 남들 따라서 면허증만 받아 놓았지 애초부터 운전에는 관심이 없더라고요.
  자동차 이야기는 선희씨가 아니라 형철씨가 꺼냈을 거예요. 아버지 같은 김성수씨한테 최신 승용차 한 번 받아보나 기대했을 텐데 상당히 실망했을 겁니다. 다들 나한테 왜 이러냐고! 억울하고 분했을지도 모르고요.
  형철씨는 차를 팔고 난 다음 무척 서운해 했습니다. 이년 째 붓던 적금을 깨 마련한 은회색 세단이었어요. 월급의 반을 5년 상환 할부금으로 내야할 만큼 형철씨한테는 부담이 되고 과분하다 싶은 외제차였는데, 자식마냥 친구마냥 아꼈습니다.
  텔레비전에 광고가 뜰 때마다 왜 나한테는 차 한 대 빼주는 부자 아버지가 없나 한탄을 해댔습니다. 자동차를 팔고 그 대신 들어온 기천이 넘는 돈은 새까맣게 잊어버렸지요. 드라마에서 재벌가 아들딸들이 비싼 차를 몰고 등장하는 장면만 나오면 오만상을 구기면서 텔레비전을 확 꺼버렸어요. 시기와 질투로 마음을 가누지 못하던 형철씨가 치킨과 생맥주를 배달시키면 그 순간부터 제가 심란했고요. 늦은 밤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먹고 난 뒤에는 형철씨가 자신을 비하하면서 미칠 듯 괴로워했거든요. 몸매를 망가트리는 지름길이 바로 야식이잖아요.
  제가 너무 분수없이 자동차만 밝히는 철부지로 형철씨를 몰아붙였네요. 마음하고 다르게 뭇 사람들처럼 비난만 했습니다. 순박하고 착하고, 긍정적인 자질과 가능성 또한 다분했는데…. 운동을 열심히 해서 근육이 탄탄했고 그 부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지요. 게다가 꾸준히 관리한 덕분에 손이 정갈하고 고왔어요. 유행에 뒤처지지 않게 옷을 말끔히 갖춰 입었고, 담배를 피우지 않아 입에서 큼큼한 냄새가 나지 않았습니다. 친절이 몸에 배서 싫다는 말을 할 줄 몰랐지요.
  곰곰이 되짚어 보니까 형철씨만 꺼리를 가졌던 건 아닙니다. 선희씨 본인에게도 자동차를 구매할 동기가 형성되어 있었어요. 선희씨가 문화센터 수필 강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깜빡했네요. 열심히 했으니 그 만큼 강하게 영향을 받았을 거예요. 새것을 익히면서 새것을 욕망했어요.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스스로 만들든지 달라고 떼를 쓰든지 어떤 식으로든 행동으로 옮겨야 했고요.
  ‘배우는 일에만 열심인 내가 나의 문제이다’, 선희씨 수필에 나온 문장이에요. 선희씨는 배우는 일이 문제라고 자신에 대해 평을 할 정도로 항상 무언가를 익히러 다녔더군요. 일 년 전에는 수필 쓰기가 그 대상이었고요. 수필 수업이 주제별 쓰기와 발표로 진행되기 때문에 선희씨는 일주일에 한 편 정도 글을 쓰고 발표했습니다. 워낙 열정을 다하는 분위기라 더불어 묻어가더군요. 선희씨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이었지요.
  어딜 가나 거침없어 보이는 인물이 한두 명 섞이게 마련이잖아요. 수필 강좌를 듣는 수강생 중에 사십 초반 정도 된 여자가 그랬습니다. 넘치는 살만큼이나 성품이 호탈해서 친구하고 수다를 떨듯 진솔하게 글을 쓰더군요. 여자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발표한 글이 선희씨한테 인상 깊었나 봐요.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다 딴생각에 빠져 박수칠 시점을 놓쳤지요. 차를 운전해서 여행하는 상상을 했지 않았을까 싶어요. 여자가 쓴 수필 제목이 ‘행복을 주는 여행’이었거든요.
  일 년에 한 차례, 삼사일 정도 날을 잡아서 자동차를 끌고 여행을 떠난다더군요. 해마다 방향을 달리 정해 어느 해는 서해안으로, 어느 해는 동해안으로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닌다, 들이든 산이든 바다든 그때그때 기분에 맞추어 차를 몰면서 먹고 싶으면 먹고, 쉬고 싶으면 쉬다가 보고 싶은 대상이 머리에 떠오르면 그 즉시 찾아간다는 얘기였습니다. 홀가분하게 혼자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편한 친구와 함께 움직인다더라고요.
  그게 뭐 대단한 취미라고 선희씨 가슴이 두근댔습니다. 두근거림을 들키지 않기 위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책상만 쏘아보았지요. 어느 순간 설렘까지 설핏 느껴졌는데 미간에 주름만 깊게 세우더군요. 누가 탓한다고 마음을 감추려들었습니다. 설레는 자신이 유치하고 창피했겠지요. 솔직해지기 겁났을 지도 모르고요.
  선희씨가 수필 강좌를 다니면서 어떤 글을 썼냐면….
  유난스런 구석이 있어서 주제 하나로 글 두 개를 썼습니다. 그렇다고 내용이 크게 다른 건 아니고 발표할 글에는 내밀한 감정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했어요. 대신 그 부분에 그럴 듯하지만 머리에 남지 않는, 흔히들 구색 맞추기로 대충 끌어다 넣는 문장들을 집어넣었습니다.
  갑자기 글귀 하나가 떠오르는데, 발표하지 않고 숨긴 수필 후반부 문장인데 단순하고 강렬해서 뚜렷하게 기억합니다.
  ‘나는 많은 기회를 잃었다. 아이 뒷바라지를 한다고, 남편 내조를 한다고 나에게 온 기회를 보내버렸다. 결국 보내버린 사람은 나다. 주어진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은 나다. 모두 내 실수였다.’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 성격이라 미처 몰랐는데 자신을 책망하더군요.
  그런데 왜, 글을 쓴 바로 그날 저녁에는 김성수씨를 원망하고 질타했을까요? 집에 와서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둔갑한 듯했어요.
  “어째 매운탕에서 비린내가 난다. 밍밍해서 원.”
  김성수씨가 우럭매운탕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서는 큼 큼 냄새를 맡으며 음식 투정을 했습니다. 김성수씨의 전날 요청으로 일부러 끓인 매운탕인데 먹기 전부터 불평을 해댔지요.
  “당신 탓이에요.”
  수저를 내려놓은 선희씨가 김성수씨를 쏘아보았습니다.
  “무슨 소린가? 내가 끓인 매운탕이 아닌데 왜 내 탓이지?”
  김성수씨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당신이 먹고 싶다고 했잖아요. 나는 먹고 싶지 않았어요.”
  선희씨가 매운탕 냄비를 김성수씨 앞으로 밀쳐놓았습니다.
  “먹고 싶어서 먹고 싶다고 말했는데 잘못이라고? 당신 갑자기 왜 이래?”
  숟가락을 쥐었다 물 잔을 쥐었다 김성수씨가 갈피를 못 잡고 허둥댔습니다.
  “당신이 언제 내 말을 들어준 적 있어요?”
  “엉?”
  “나는 생선 다루기 싫어요.”
  “그랬어? 그럼 미안해.”
  김성수씨가 지레 겁을 내면서 다급히 사과했어요.
  “삼십년 뼈 빠지게 살림했는데 제대로 인정은 해요?”
  선희씨가 그 동안 서운했던 일들을 차례대로 늘어놓고 조목조목 따지고 들 태세로 몰아세웠습니다.
  “그거야 당신이 워낙 잘 하니까, 잘 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지.”
  김성수씨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를 뜰 준비를 했습니다. 하지만 선희씨는 별렀던 이야기들이 가슴속에 그득했는지 멈추려고 하지 않았어요. 집게손가락을 곧게 뻗어 김성수씨를 지목했습니다.
  “당신은 항상 나를 당신 엄마로 착각해요. 당신을 위해서 살아야한다고 철석같이 믿잖아요. 안 그래요?”
  “갑자기 무슨 말이 그런가? 내가 언제? 언제 그랬다고?”
  김성수씨가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항상! 항상 그랬잖아요!”
  선희씨가 식탁을 내려쳤습니다.
  “나 역시 아버지가 필요하단 말이에요, 아버지가! 잘 한다 잘 한다 격려해주고 어려울 땐 도와주고. 수십 년 한 집에서 지냈는데 당신이 흉내라도 내 본 적 있어요?”
  반나마 일어서서 선희씨가 고함을 내질렀습니다. 김성수씨를 향해 몸을 기울였는데 식탁을 넘어 곧장 달려들 기세였지요.
  “그거야…”
  김성수씨는 입만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모두 당신 때문이에요. 내 꼬락서니가 이 모양이 된 건 죄다 당신 김성수 때문이라고요!”
  선희씨가 이를 갈 듯 말했습니다. 부서져라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무섭게 왜 이래, 당신. 당신이 어때서. 부족한 게 뭐가 있다고. 당신 행복하잖아. 다들 당신을 얼마나 부러워하는데.”
  김성수씨가 손을 들어 다독이는 시늉을 했습니다. 어떻게든 진정시키고 싶은 심정은 이해하겠는데 적절한 행동은 아니었어요. 진지한 반성 없이 남들 인사치레만 믿으려 들었으니까요. 
  “당신이 나를 밀어줬으면, 옆에서 도와줬으면…”
  선희씨가 고개를 떨어트렸습니다. 소리 내 울면 차라리 나을 텐데 그 상태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알았어. 당신 불만은 알았으니까 뭐가 필요한지, 뭘 원하는 지 차분히 설명해 봐. 내가 할 만한 일이면 당장 해 줄게.”
  안절부절 눈길조차 건네지 못하던 김성수씨가 나지막이 간청했습니다.
  “당신 탓인데, 당신 탓이 분명한데 당신은 할 수 없어요.”
  선희씨가 털썩 주저앉아 식탁 위에 이마를 대고 중얼거렸습니다.
  “무슨 말이야, 그게?”
  김성수씨가 애처로이 물었습니다.
  “이기적인 당신이 나를 너무 부려먹었단 말이에요. 고장을 내놨잖아요, 고장을!”
  선희씨가 고함을 지르며 벌떡 일어섰습니다. 안방으로 달려 들어가 문을 잠그고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어요.
  “저 사람이…”
 김성수씨는 씩씩 거친 숨만 뱉어냈습니다. 선희씨에게 이상이 생겼음을 감지한 눈치였어요.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 탈이 낫는지는 제대로 짚지 못하더군요.
  다음 날 아침 식탁에서 김성수씨가 밤 새 고심해 내린 결론을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시간 내서 병원에 가봐. 호르몬제를 처방해 먹으면 수월하게 지난다더라고.”
  갱년기 증상으로 쉽고 간단하게 마무리 지었더군요. 선희씨는 가타부타 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김성수씨는 단순한 틀 안에다 선희씨를 맞추어 놓고 그 틀대로 행동했습니다. 함께 가자는 말은 쏙 빼놓은 채 병원에 가기를 종용하고 한 차례 더 자동차를 사주려 시도했지요. 그 때마다 선희씨는 고개를 돌려버리더군요.
  남편 김성수씨에 대해 늘어놓다보니까 선희씨 수필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네요. 제목이 ‘두 명의 남편’이었지요. 다른 작품들하고는 다르게 써놓은 글과 발표한 글이 거의 흡사했어요. 집안과 집밖에서의 남편이 다르다고 에둘러 험담하는 내용이 포함됐는데 지어온대로 줄줄 내려읽다가 마지막 한 줄만 읽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지겹다보니 사는 집마저 지겹다.’ 이 문장이었어요. 남편 이야기이면서 자신 이야기다보니 밖으로 내보이기 부담스러웠겠지요.
  맞아요! 이 글을 쓴 지 이틀 쯤 뒤에 선희씨가 자동차를 사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수필 주제가 ‘나의 취미와 행복’이었는데, 남편에 대한 언급이 전부였어요. 남편이라…, 남편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면서 남편한테서 행복을 찾다니, 흠.
  가만 되짚어 보면 왜 행복하지 않을까 고민하다가 남편한테 이르렀구나 싶기도 합니다. 남편 김성수씨 때문에 집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집을 벗어나고 싶다, 이런 심리상태가 자동차로 표현되지 않았을까요? 남들과 같은 취미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남들과 똑같이 가져야한다, 남들처럼 자동차를 끌고 여행을 가보자, 그러면 남들처럼 즐겁겠지, 순간적인 충동에 휘둘렸을 거예요.
  으-음, 자동차 구입 건은 형철씨와 선희씨 바램이 맞아떨어져 이루어진 구매 충동이자 다툼을 위한 빌미였네요. 형철씨가 안에 머물러준 덕분에 선희씨가 그 기운을 받아 남편 김성수씨와 정면으로 맞섰나 봅니다. 중간에 옆길로 샜지만 종착지까지 갔다면 누가 이겼을까요? 선희씨가 이기지 않았을까요? 선희씨는 김성수씨가 아쉽지 않지만 김성수씨는 선희씨가 없으면 아쉬운 정도를 떠나 무척 괴로울 테니까요.
  선희씨는 달랑 문자 한 통 보내놓고 동해안으로 떠났는데 집에 혼자 남은 김성수씨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하소연할 데가 마땅치 않으니 초조와 불안에 속만 태웠을 거예요. 십 분 간격으로 전화를 해댔을 지도 모르고요. 선희씨는 멀찌감치 전화기를 던져놓고 거들떠도 안 보았는데 말입니다.
  망연히 거실 바닥이나 노려보면서 문제의 시초를 따지고 들다 자동차를 사고 싶다할 때 그 즉시 찬성 못한 자신을, 한 발 늦었던 행동을 후회했을 거예요.
  아들이 공부하러 떠난 다음날부터 사나흘 동안 김성수씨는 선희씨가 몰고 다니기 적당한 차를 수소문하는 눈치였습니다.
  “여기서 골라 봐. 당신 취향에 어울릴 만한 놈들로 챙겨왔어.”
  일찍 퇴근한 김성수씨가 자랑스레 자동차 카탈로그를 식탁에 펼쳐놓았습니다. 여러 대리점에 문의해봤는지 국산에다 외국산까지 종류가 다양했습니다.
  “웬 거예요?”
  자동차 사진을 보았으면서 선희씨가 시치미를 떼더군요.
  “뭐기는, 차 사달라며? 당신이 골라만 주면 일주일 안에 대령할 테니까 일단 앉아서 살펴 봐.”
  김성수씨가 식탁을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거드름까지 피우고 신이 나 보였지요.
  “운전을 못하는 데 차는 무슨.”
  선희씨가 시큰둥한 낯으로 의자에 앉았습니다. 말 꺼내고 일주일이 채 안 지났는데 태도가 영판 달랐어요.
  “무슨 소리야? 당신이 못할 게 뭐가 있나. 차 나오기 전에 강사 불러서 연수나 한 나절 받으면 충분하지.”
  김성수씨가 부러 유쾌하게 말했습니다.
  “더운 여름이나 지나고 차차 결정할 게요.”
  선희씨가 카탈로그를 식탁 귀퉁이로 밀쳐놓았습니다.
  “무슨 소리야. 이 참에 하나 삽시다. 언제는…”
  김성수씨가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차 없다고 못 다니는 거 아니잖아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요.”
  선희씨가 설렁설렁 말해놓고 느리터분하게 일어섰습니다.
  “저녁 먹어야죠?”
  개수대 쪽으로 걸어가던 선희씨가 고개만 돌려 묻더군요. 의례적인 말투에서 귀찮은 티가 배어났지요.
  “다음에 딴 소리하기 없기야.”
  김성수씨가 한 차례 숨을 몰아쉰 뒤 카탈로그를 들어다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습니다.
  선희씨 안에서 고급 외제 승용차를 몰아보겠구나 설레었을 텐데, 형철씨가 무척 상심했을 겁니다. 어쩌면 형철씨 안에 있는 이교수님이 선희씨 의지를 은근슬쩍 돌려놓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워낙 이교수님이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가정주부가 자기 몫으로 차를 구매해 몰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분통터져 했거든요. 한 삼십 년 경제학과 교수를 지내 그런지 자산 관리와 투자에 대해서는 매우 합리적인 분이었습니다. 간혹 고지식하다는 비판을 들었는데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지요.
  이교수님은 형철씨 속으로 옮기자마자 인터넷으로 통장 잔고부터 확인했습니다. 이십일만 이천백오 원, 전날에 자동차 할부금 육십구만 팔천칠백 원, 그 전전날에 카드 대금 오십칠만 사천백 원이 빠져나갔더군요. 다음 날 아침에 종이 통장을 앞뒤로 넘겨보다 형철씨에게 은행에 달려가 월 이십만 원, 오년 만기 비과세 근로자 재형저축을 들게끔 했습니다. 형철씨가 선희씨 속에서 고작 공손한 행동이나 유도한 반면 이교수님은 형철씨를 완전히 바꾸어버렸습니다. 아마 형철씨는 기가 약하고 이교수님은 기가 센 인물이라 가능했겠지요.
  그런데 CAD를 배우려 한 탓에 형철씨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소망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야심차게 새로 출발하려다 선희씨 안에 끌려들어갔으니 운이 참 없지요. 젊음은 막바지에 이르고 늙음은 막 시작된 전업주부 안에서 칠십 노인이 하고 싶은 일, 할 만한 일이 있겠습니까. 생업이든 취미활동이든 부딪치면 부딪쳤지 맞아떨어지는 구석이 없잖아요. 한 다리 건넜으니 미치는 힘마저 줄어들고 복장이나 터질 밖에요. 두 눈, 두 귀 꽉 막고 나 몰라라 내쳐두는 것이 상책이었을 겁니다.
  선희씨가 바닷가 어두운 방에 혼자 누웠을 때 태풍이 휘몰아치는 소리를 이교수님이 들었을라나요? 지붕을 날릴 기세로 바람이 불고, 모래 마냥 굵은 빗방울이 베란다 유리문을 때리고, 세차게 내달려온 파도가 육지를 덮치며 산산조각 나는 굉음을 말입니다. 들었다면 멀쩡한 집 놔두고 아수라장에 들어와 뭐 하자는 짓인지, 체머리를 흔들었겠네요. 
  이교수님이 궁시랑 대서일까요? 선희씨가 뒤척뒤척 잠을 못 이루고 힘들어했습니다. 하기는 자의든 타의든 낯선 방에 떨어져 나와 쓸쓸히 누웠는데 약을 쓰면 모를까 무슨 수로 편히 잠들겠어요. 더불어 저 또한 어려웠고요. 선희씨와 저는 한 몸을 쓰는 사이라 매사를 함께 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자장가로 들리면 더 없이 행복할 텐데, 오래 간만에 잠 한 번 푹 잘 텐데, 한숨만 쉬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신경이 곤두서서 바람소리가 한 가닥 한 가닥 귀를 때리고 머리를 휘감아 도는데 무얼 기대하겠습니까. 밤을 수월하게 넘기려면 소일거리라도 찾아야하는데 뭐가 적당할까, 궁리만 했습니다.
  나름 고심했는데 책 읽기, 음악 듣기, 글쓰기가 혼자서 편하게 할 수 있는 소일거리더라고요. 책하고 음악은 준비가 안 되어 어렵고, 글쓰기는 가능했어요. 수필도 배우겠다, 시간을 잊기에 그만한 활동이 없잖아요.
  글을 써 보라고 암시를 보냈건만 선희씨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어요. 수첩에 몇 줄 끼적이다보면 헝클어진 머릿속도 정리되고 나쁘지 않으련만. 식물인간이 아닌 이상 잠이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뭐든 해야 되잖아요. 차라리 식물인간이 되자 싶었던 건지.
  ‘배우기만 잘하지 써먹는 일에는 젬병이라서.’ 선희씨가 이리 둘러대는 사람이에요. 소정의 수당이 붙는 상담 자원봉사 제안이 들어왔는데 잘난 척인지 겸손인지 요상한 이유를 끌어다 거절하더군요. 그 만큼 공을 들여 익혔으면 활용해야지 어째 저리 꽉 막혔을까, 제안을 한 이가 속으로 흉 좀 봤을 거예요. 일 년 동안 상담 공부를 함께 했던 여자인데, 답답해하는 눈치였어요.
  수필 쓰기 강좌가 끝나면 또 어디로 가야 하나, 걱정이 앞서더군요. 새롭게 유행하는 분야 위주로 사방팔방 헤매 다니면서 배우기를 이어가지만 곧 막다른 벽에 부닥칠 텐데. 구체적인 목적이나 방향 없이 무작정 배우려만 들면 어쩌자는 건지. 선희씨 역시 예상했을 거예요.
  수필 동호회에 가입하면 어떨까? 일 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동인지를 엮어낸다는데, 수필이 책자로 나오면 나름 뿌듯할 텐데. 사람들과 꾸준히 교류하고 글을 쓰고 흥미롭지 않겠어? 강좌 끝날 즈음에 회비를 모아서 기념 문집을 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후속 모임을 구성할 모양이던데 선희씨가 적극적으로 나설까? 최근 들어서 무기력증이 한층 심해졌지만 뚝심 있는 이교수님이 밀어붙인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별별 생각을 다했습니다.
  아무튼 그 당시 저는 선희씨가 무의미한 학습활동을 정리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찾아 그 분야에 매진하기를 희망했습니다. 효율을 중시하고, 자기관리에 철저한 이교수님이 옆에서 도와주리라 기대 역시 했고요. 미래에 대한 전망 없이 나이만 먹어가던 형철씨를 눈에 띄게 바꾸어 놓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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