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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작가 : 은이설
작품등록일 : 2019.10.25

제 이름은 설입니다. 몸이 없어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남들처럼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제 처지가 이 모양이라 사람들 몸에 들어가 생활합니다. 다른 존재에 의지하면서 지낼 수밖에 없는 붙살이지요. 그리고 동거인이 염원하는 누군가의 몸 안으로 동거인과 함께 이동하면서 삶을 유지하지요.
최근에는 제 이야기를 누구에게라도 들려주고 싶더라고요. 속이 답답해서…, 털어놓고 싶은 사연이 무궁무진하거든요.

 
하나 마트료시카
작성일 : 19-10-25 20:22     글쓴이 : 은이설     조회 : 685     추천 : 0     분량 : 25,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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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마트료시카

  아까부터 죽 혼자 앉아계시네요. 적적하지 않으세요?
  그렇게 휘둘러 찾지 않으셔도 됩니다. 선생님 옆에 있어요. 제가 좀 별스러워서 목소리는 카랑카랑 시원스러운데… 몸은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눈에는 보이지 않아요. 이름은 설이고요. 제가 좀… 앉아도 될까요?
  투명인간이냐고요? 그건 아닙니다. 전혀 달라요. 저는 독립해 지내지 않거든요. 동거인을 한 명 두고 그 안에서 삽니다. 오늘은 날씨가 하도 싱숭생숭해서 밖으로 나와 봤습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기운이 달리는 바람에 오래는 못 머물지만 숨 정도는 돌릴만하거든요.
  태풍 얘기 들으셨어요? 아침에 인터넷 뉴스를 읽었는데 남해안에 상륙한 태풍이 북상하다가 밤 동안 빠져나갈 거라네요. 여기 동해안을 거쳐서 말입니다. 바다가 지금은 저리 순하지만 조만간 대단해질 겁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앞으로 밀었다 뒤로 당겼다, 해변에 앉아 넘겨다보면 마냥 시간가는 줄을 몰라요. 저것만치 드센 파도를 작년 이맘때에도 구경했는데… 처음 대면하는 것 마냥 새롭습니다. 파도 하나하나가 제각각이라 그런가. 그런데 또 눈에 안 닿으면 잊게 되더라고요.
  저 아래에서는 까마득히 잊고 지냈어요. 파도가 치거나 말거나 바다 밑은 고요하거든요.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엎어지는지 뒤집어지는지 죽는지 사는지 감감합니다. 너무 몰라서 탈이지요.
  얼마 전까지 바다 밑에서 살다 왔어요. 여름에 들어가서 겨울에 나왔으니까 한 반 년 머물렀네요. 백상아리하고 동거했는데 우여곡절이 꽤 많았지요. 
  붙살이로 여기저기 옮겨다니다보니 상어 속까지 들어갔었습니다. 지나고 나면 죄다 물러지기 마련이지만 나쁘지만은 않았다싶어요. 혜진씨를 만난 덕분에 이런 넋두리도 가능하겠지요.
  저기, 저 앞에 운동화 신고 첨벙거리는 여자가 혜진씨에요. 바닷물에 들어가서 사진 찍는 사람 말입니다. 덩치가 상당한…, 네 맞아요, 감색 모자 쓴. 여행 작가인데 제 현재 동거인이지요. 인지도가 높은 편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신명나게 작업합니다.
  어떤 동거냐 하면…? 별다른 의미는 없고 그냥 단순히 같이 산다는 뜻입니다. 지금이야 잠깐 바람 쐬러 나왔지만 혜진씨 몸 안에서 생활하는 중이니 혜진씨한테는 제가 동거인이고 저한테는 혜진씨가 동거인이지요. 엄밀히 말하면 혜진씨가 주인이고 저는 곁방살이, 더부살이입니다. 비좁은 육신 하나를 두고 수십이 모여 사는 격인데…. 아니지, 다들 흩어졌으니 그건 아니네요. 이젠 저하고 백상아리하고 둘만 남았군요.
  셋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선희씨를 더하면 셋이고 빼면 둘인데 확신을 못하겠습니다. 제가 이리 흐릿하고 부족합니다. 쯧. 태생적으로 가진 것이 없어요.
  아닙니다. 딱히 필요하거나 바라는 것 역시 없어서 혜진씨한테 크게 불편을 끼치지는 않아요. 거치적대지 않도록 이리저리 어울려 구르다 때가 되면 동거인하고 함께 동거인이 원하는 존재 안으로 옮겨갈 뿐입니다. 지금은 김혜진이라는 여자 안에서 머물지만 언젠가는 다른 사람하고 같이 살아야할 거예요. 그 순간까지는 혜진씨 신경 안 쓰이도록 조용히 지켜보기나 하면 되고요. 미주알고주알 참견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고, 사람마다 사는 방식도 다 다르고.
  그러고 보면 선희씨가 무척 혼란스러웠을 거예요.
  선희씨요? 전동거인입니다. 작년 이맘때 이 자리에서 함께 했는데. 그 당시 선희씨 안에는 숱한 인사들이 들어 있었어요. 동거인이 다른 사람 안으로 옮겨가면서 속에 든 사람들을 죄 끌고 가야하는 형편이라… 구조적으로 한 차례 이동할 때마다 한 명씩 불어납니다.
  마트료시카 아세요? 러시아 민속인형, 인형 안에 다른 인형이 숨었잖아요. 꼭 그 형상이에요. 인원으로 따지면 마트료시카 수십 배가 될 지경이지만 말입니다. 
  선희씨, 형철씨, 이교수님, 송씨 아줌마, 민아 엄마. 요 근래 제가 머물렀던 동거인들이에요. 더 오래 전부터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지만 새 사람들이 끼어들면서 잊고 잊히고, 지금은 또렷이 기억나는 게 너 댓 정돕니다. 그래도 그 이들하고 거쳐 온 시간을 더해놓으니까 근 삼십년 가까이 되네요.
  달고 들어간 인물들을 참작해서 선희씨한테 살갑게 대해줬어야 했는데, 제가 한참 부족해서 맘 같이 못했습니다. 혜진씨한테는 잘해줘야지요. 맘은 이리 먹어놓고 어찌어찌하다보면 혜진씨 덕분에 육지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자꾸 까먹어요. 얼마를 더 살든 잊지 않도록 조심해야지요. 
  바다에서는 백상아리하고 지냈어요. 제가 좋아서 같이한 건 아니고 선희씨가 백상아리 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별 수 없었지요. 당시에는 막으려 했어요.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육지에서 살아야한다, 육지에서만 살 수 있다 믿었으니까요. 막상 닥치니까 적응이야 했지만 그 전까지는 상상도 못했어요. 
  선희씨가 폭풍우치는 날 바다에 왔다 작심한 일입니다.
  인생 서너 개는 건너온 듯싶은데 고작 일 년 지났네요. 그 때는 분위기가 사뭇 무거워서 입 한 번 뗄 수 없었습니다. 장소도 같고 날씨도 거기서 거기지만 동행인이 달라 그랬겠지요. 집 떠나서 혼자 왔다는 사실만 빼면 선희씨하고 혜진씨는 성격, 나이, 처지, 비슷한 구석이 거의 없어요.
  선희씨 모습이 계속 아른거려서 마음이 착잡합니다. 선희씨도 이 자리에 앉아서 바다만 뚫어져라보았지요.     
  선희씨, 선희씨하니까 젊은 사람 같은가요? 대놓고 선희씨라 부르기에는 영 미안스러울 만큼 연배가 있어요. 그렇다고 할머니 소리에 고개가 절로 돌아가는 노인은 아니고요. 젊지도 늙지도 않은 어중간한 나이인데, 아무튼 저는 선희씨가 선희씨라는 호칭을 선호해서 이리 부릅니다.
  동해안 바닷가 여행이 선희씨하고 처음 한 여행이었어요. 서너 달 남짓 함께 보냈을 때였는데 반갑고 기쁘더라고요. 선희씨가 폐쇄적으로 생활했거든요. 낯선 사람 낯선 곳 낯선 일을 극구 피했지요.
  최근 몇 년 동안은 집을 떠난 적이 없는 듯싶더라고요. 수필 강좌 수강생들이 여행을 화제로 잡담을 나누던 중에 어디 다녀온 데 없냐고 물어볼라치면 고개만 절레절레 내둘렀으니까요.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표를 끊기 직전까지 선희씨가 여행길에 오를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선희씨는 그날 아침 일곱 시 경에 바다로 향할 작정을 했어요. 아파트를 나서고 버스표를 구매하면서도 정확한 목적지는 정해 놓지 않았지요. 시내버스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리다 소나무 숲하고 길게 뻗은 해변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에야 가방을 둘러메고 내릴 채비를 했으니까요. 계획에 없던 여행에 우연한 장소 선택이었습니다.
  일기예보에 자극을 받아서 바다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나 싶어요. 남편 김성수씨를 배웅하고 안방으로 돌아와 텔레비전 리모컨을 집어 전원을 끄려던 참이었지요. 김성수씨가 옷을 갈아입으면서 텔레비전을 크게 켜놓았더라고요. 선희씨는 시끄러운 걸 제일로 질색하는데 말이지요. 
  기상캐스터 차림새가 도드라지다 못해 우스꽝스러웠어요. 노란 우비에 파란 장화, 땡땡이 우산까지 치켜들고 흥분해서는… 그런데 전하는 내용을 들어보니까 의도가 무언지 납득은 되더군요.
  “오늘 오전 서남해안에 상륙한 태풍 지오는 중부내륙을 거치면서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 것이 예상됩니다. 강한 비바람을 동반한 상태로 내일 새벽에는 동해안을 빠져나가 소멸하겠습니다.”
  기상캐스터 손짓에 맞추어 회오리 모양을 한 태풍이 뱅글뱅글 돌면서 동해안 쪽으로 빠르게 이동했습니다. 뒤집힌 곤충 한 마리가 맴을 도는 모습하고 흡사하더라고요. 똥파리인지 매미인지 자그마한 날것이 배를 까놓고 헛되이 발광하면서 힘없이 날려가는 듯 보였지요. 선희씨가 금세 침울해져서는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하루 온 종일 까라져 지내는 사람이, 그런 자신을 견딜 수 없어 하는 사람이 기꺼워할 만한 장면이 아니었지요.
  “이번 태풍은 중형 규모로서 북쪽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공기의 세력이 약해 그 위력이 줄지 않고 있는데요, 특히 남부지역에 상당한 피해가 예상됩니다.”
  연약한 곤충 이미지가 한 순간 싹 지워져버렸습니다. 태풍이 엄청난 에너지를 품은 바람, 공기 덩어리라는 상식이 그제야 떠올랐어요.
  “육지를 강타할 태풍에 대비해 축대와…”
  기상캐스터가 경직된 어투로 연신 던져대는 정보들이 신경에 거슬렸는지 선희씨가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꾹 눌렀습니다. 일상 해오던 대로 이불을 판판히 정리한 다음 침대에 들어가 누웠습니다. 뒷골이 뻣뻣하고 머리가 찌릿찌릿 울려서 눈부터 붙여야했지요.
  쉬이 잠들지 못하고 수차례 뒤척이더니 급기야 벌떡 일어나더군요. 침대 옆에 벗어 놓은 슬리퍼를 찾아 신고 주방으로 갔습니다. 저는 술병을 꺼내려는가보다 짐작했어요. 정말이지 나쁜 버릇인데 선희씨는 잠이 안 오면 술을 마시거든요.
  다행히 술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아침 식탁을 치웠지요. 김성수씨 밥과 국그릇은 깨끗이 비었지만 선희씨 몫은 고스란히 남았는데 반찬까지 몽땅 들어다 음식물쓰레기통에 버리더라고요. 평소에는 잠부터 서너 시간 잔 뒤에 식은 밥을 아침 겸 점심으로 먹었기 때문에 무슨 일인가 의아했어요. 
  선희씨는 일사천리로 씻고 바르고 옷을 차려입었습니다. 문화센터는 어제 갔다 왔고 무슨 약속이 잡혔던가, 선희씨 일정을 곰곰이 따져보았지요. 제가 파악하는 한 집 밖으로 나갈 거리가 없었습니다. 집과 문화센터 밖에 모르는 선희씨인데 대체 어디를 가려는 걸까 궁금했어요. 그 당시 들어서는 주변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아야하는 상황을 아예 피하려들었지요. 전화가 오면 발신자만 확인하고 모른 체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어요.
  단순히 옷만 갈아입지 않고 손가방 중에서 제일 큰 걸 집어다 세면도구까지 챙겨 넣었어요. 신발장을 열고 굽이 낮고 평평한, 여름용으로는 상당히 덮겠다 싶은 구두를 꺼내 놓았지요. 신고 다니던 샌들이 서넛 나와 있었는데 다들 굽이 높고 뾰족해서 마땅찮았나 보더라고요.
  그런데 화장실에 들렀다 문을 나설 때까지 화장을 안 했어요. 가는 장소가 어디든 집 밖으로 나갈 때에는 립스틱에다 마스카라까지 꼼꼼히 챙겨 바르고 그 나이, 그 위치에 맞는 격식을 갖추는 사람인데. 날이 더워지면서 옷이야 편하게 입었지만 그래도 화장은 빼먹지 않았는데 마음이 급했던 건지 귀찮았던 건지 변화를 주고 싶었던 건지 엘리베이터에 붙은 거울만 흘깃 넘겨보았지요.
  아파트단지 건너편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 시내버스를 타더군요. 저는 영문을 모른 채 그저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요. 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안으로 들어가 삼척 행 버스표를 끊었습니다. 동해안으로 여행을 가려는 구나, 막판에야 외출한 이유를 파악했어요.
  삼척? 빈 의자에 앉아 버스표를 내려다보는데 목적지가 뜻밖이더군요. 아침에 분명히 태풍이 분다는 일기예보를 들었는데 동해안 삼척이라니. 태풍이 빠져나간다고 했지 지진해일이 덮친다고는 안했으니까 일단 선희씨를 믿고 수긍하기로 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에는 태풍에 대해서 긴가민가했어요. 소나무 숲을 가로질러 바다를 마주하고 서니까 확연히 실감되더군요. 얼굴을 쓸고 가는 바람이 예사롭지 않았어요. 열기에다 습기까지 가득해서는 조만간 일이 벌어지겠구나 싶었지요. 무어든 일을 치러내야 속이 시원한 것 같았어요.
  그런데 바람을 맞으면서 한참 앉았다보니까 조마조마한 마음 대신에 하얀 치맛자락이 떠오르더라고요. 태풍 사진하고 수피들 춤이 비슷하거든요. 그냥 그러려고 태어났다는 듯이 뱅글뱅글 쉬지 않고 돌잖아요.
  수필 수업 시간에 댄스 동영상을 시청한 적이 있어요. 기다란 원통 모자를 쓴 수피댄서들이 하늘 쪽으로 양팔을 길게 뻗고 맴을 돌더군요. 하얀 치맛자락이 활짝 펼쳐지다 공중에 들려졌는데 그 모습이 꽤 인상 깊었습니다. 춤추는 내내 허공에 떠서 내려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어요.
  파도가 세지다 못해 해변 깊숙이 밀려와 종아리를 때리기 시작하니까 바다고 뭐고 눈에 들어오지 않더군요. 갑작스레 초조해졌어요. 선희씨가 워낙 자신을 내보이지 않는 성격이라 관심을 두지 않고 지냈는데 불안한가 싶어 걱정이 되더군요. 하기는 낯선 곳에 와서 제집같이 행동한다면 그게 되레 이상하지요. 더군다나 가정밖에 모르던 전업주부잖아요.
  어쩔 수 없지요. 붙살이가 제 태생이라 동거인의 기분에 영향을 받습니다. 받는 정도는 이어진 상태에 따라 각기 다르지만요. 어떤 이하고는 강하게 연결돼 같이 울고 웃고, 어떤 이하고는 끊어졌다시피 해서 구경꾼 역할이나 하고요.
  선희씨하고는 어땠냐면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데…
  글쎄요, 냉정히 말하자면 구경꾼 보다는 낫겠지만 연민이나 호감은 생기지 않더군요. 그렇다고 절대 반감을 갖지는 않았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가당치 않은 경우지요. 공존의 법칙에 어긋나잖아요. 자신을 부정하는 존재가 자신 안에 박혔다면 그게 곧 파멸 아니겠습니까. 설혹 반감이 생겼다한들 선을 넘어서면 안 되고요.
  입장이 입장인지라 내가 왜 이러나 의아스런 순간이 간혹 닥치기는 합니다.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부족한 존재로 태어났으니 도리 없지요. 일정한 대가를 치르고 몸을 빌려 쓰는 세입자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기댈 수밖에 없는 처지라 부지불식간에 눈치를 보다 순간적으로 동화되어버립니다.
  타고난 자리가 협소하지만 그렇다고 받기만 하는 건 아니에요.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인 도움을 줍니다. 받은 당사자들은 모르지만 저도 나름 역할을 합니다. 당사자들은 당연히 될 일이라 된 것이다 여기는 듯싶더군요. 제 존재를 제대로 모르니까 그렇겠지만… 가끔은 서운할 때가 있지요.
  가장 최근에 지원을 해준 동거인이 형철씨인데 형철씨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그저 단순하게 자기가 희망했기 때문에 선희씨 안에 들어갔다 믿더라고요. 제가 그리 만들어 준 건데 말입니다.
  형철씨는 선희씨 직전에 저와 함께 짝을 이루었던 젊은 남자예요. 맘고생 좀 하다가 선희씨 안으로 옮겨가서 그럭저럭 안착했지요. 선희씨를 무척 부러워했던 형철씨가 저 사람이 되고 싶다, 저 사람으로 살고 싶다 염원을 했기 때문에 이동이 촉발되었어요. 과정이 원만히 이루어지도록 제가 옆에서 도와주었고요. 그 결과로 형철씨하고 저하고 둘 모두 선희씨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가진 핵심 능력입니다. 저와 함께 하는 동거인이 다른 사람 몸에 자리를 잡도록 만들지요. 선망하는 바로 그 누군가가 되어 살아갈 수 있게끔 합니다. 백 프로 장악할 수야 없지만 그 사람의 일부로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펼치고 새로운 인생을 즐기는 게 가능해요.
  기존의 동거인을 다른 사람 안에 넣어주면서 자연스럽게 저는 새로운 동거인과 만나게 되고요. 저와 새로운 동거인, 그리고 저의 기존 동거인과 기존 동거인 안에 들어 있던 예전 동거인들, 겹겹이 층을 이루어 지내게 되는데, 추구하는 바는 각자 다르지만 모두에게 이익이 됩니다.
  그래요, 압니다. 받아들인 사람 입장에서야 부담이 상당하겠지요. 
  하지만 한 해 두 해 지내다보면 다들 비슷해지더라고요. 받아들인 사람 역시 선망하는 대상이 생기고, 그 대상이 되고 싶고. 자족이 최고라고 사방에서 외쳐댄들 말처럼 쉬워야지요. 나보다 남이 더 근사해 보일 때가 어디 한두 번인가요. 저 자리에 가서 저 옷을 입고 저 사람처럼 웃고 싶다 부러워하고, 나하고는 상관없다 부러 외면하고, 그러다 손짓 하나 더해지는 순간 입은 옷 홀랑 벗어던지고 뛰어들 작정을 하지요. 사람 사는 일이 죄다 거기서 거기 아닙니까.
  변신이야 마지막 과정이고, 일상 역시 중요하지요. 제가 조목조목 따져봤는데 동거인들이 짐 노릇만 하는 건 아니더라고요. 워낙 다양한 인물들이 함께 하다보니까 다방면에서 대처하는 능력이 향상되는 듯싶던데. 선희씨 여행만 해도 단독으로 결정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크든 작든 형철씨가 영향을 미쳤겠지요. 마찬가지로 이교수님, 송씨아줌마, 민아엄마 또한 힘을 보탰을 거고요. 다 같이 선희씨 안에서 숨 쉬고 사는 사람들이니까요.
  흐음, 숨 쉬고 사는 무지한 목숨들이 선희씨 뒤로 길게 이어져 있었어요. 마트료시카 얘기를 또 하게 되네요. 이교수님이 선물로 받자마자 죄 열어서 크기순으로 세워놓았는데 기분이 묘하더라고요. 인형 안에 작은 인형이, 그 인형 안에 더 작은 인형이, 더 작은 인형이, 제 동거인들이 저렇게 줄을 섰겠구나 싶어서 애잔했어요. 
  선희씨가 형철씨 존재를 알아차렸다면 기겁했을 겁니다. 송곳만치 예민했는데 그 당시에는 몰랐어요. 다행이었지요. 워낙 다들 눈치 못 채고 지내다가 몸을 옮기고 나서야 자기 안에 다른 사람이 존재함을 깨닫는데 선희씨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하지만 자기 안에 누가 머물렀는지는 볼 수 있었어요. 
  바닷물만 넘겨다본 통에 파도하고 바람만 세진 줄 알았는데 등 뒤를 보니까 산등성이 위로 먹구름이 가득 들어찼더라고요. 잠깐 사이에 사위가 어둑해졌지요. 선희씨가 부리나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모래사장을 가로질렀습니다. 물 묻은 구두에 모래가 들러붙어서 걸음이 무겁고 둔했지요. 선희씨가 구두를 벗어 들고 맨발로 걷더군요.
  도로 위로 올라서고 나서 구두에 달라붙은 모래를 털고 휴지를 꺼내 안까지 닦아냈어요. 더러운 휴지를 손에 쥐고 미련이 남았는지 바다를 향해 돌아서더군요. 최대한 서둘러 막차를 타고 집에 가든지 아니면 하루 밤 묵을 방을 찾던지 바로 결정해야 되는데 밀려드는 바다만 바라보았지요.
  선희씨 형색이 엉망으로 망가지는데 개의치 않더군요. 중구난방으로 불어대는 바람에 기다란 머리카락이 눈을 가리고 얼굴을 때리고, 옷자락이 사방팔방으로 나불대다 위로 치올라가 맨살도 드러내고. 
  나이가 오십을 훌쩍 넘겼으니 파마나 커트 머리가 편할 텐데 선희씨는 간수하기 어려운 단발머리를 고집하더라고요. 젊은 시절 사진이나 나이 든 다음 사진이나 머리 모양이 한결 같았어요. 머리끝은 안으로 둥글게 말고 앞머리는 왼쪽으로 길게 늘이는데 정갈, 반듯, 그 자체였지요. 머리를 매만질 때면 선희씨한테 연민이 일었어요. 안간힘을 쓰는 게 느껴졌거든요. 하루가 다르게 부쩍 쇠약해져서는 드라이기를 든 팔이 후들후들 떨렸지요.
  머리를 수그린 선희씨가 옷자락을 손으로 눌러 가라앉히면서 닦아둔 구두에 발을 집어넣었습니다. 도로를 가로 질러 바다 가까이 붙은 펜션형 민박집 쪽으로 걸어갔지요.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던 심장이 두근두근 빠르게 뛰더군요. 하기는 혼자 바닷가에 와서 숙소를 잡으려니 알게 모르게 두려웠을 겁니다. 남편 김성수씨하고 아들 김연빈하고는 국내외로다 가족여행을 수차례 다녔겠지만 준비 없이 단독으로 떠나는 여행은 처음이었으니까요.
  바람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선희씨 몸이 이쪽저쪽으로 내둘려졌습니다. 선희씨는 다리에 힘을 주고 재게 걸어서 펜션 안으로 황급히 들어갔어요. 후, 숨을 가다듬으면서 문 옆에 놓인 쓰레기통에 휴지를 던져 넣고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졌지요. 모양새가 차분해진 다음에야 안내라고 써 붙인 쪽창을 두드렸습니다. 어깨에 걸린 가방 손잡이를 꽉 쥐고 관리인이 나오기를 기다렸지요.
  반바지에 러닝셔츠만 입고 길게 모로 누워 텔레비전을 보던 사십 중반 남자가 예 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서서는 방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바다 쪽으로 트인 방 있나요?”
  펜션 관리인이 슬리퍼 신을 짬조차 주지 않고 선희씨가 물었습니다. 가슴이 두방망이질 쳐서 지켜보는 저까지 조바심 나더군요. 관리인이 대답도 하기 전에 슬그머니 눈길을 돌려버렸어요.
  “전망이야 모두 끝내 주죠. 근데 한 분이신가요?”
 관리인이 선희씨를 유심히 쳐다보았습니다.
  “방은 얼마나 합니까?”
  한 분이냐는 참견이 귀에 거슬렸던지 선희씨가 짐짓 사무적으로 물었습니다. 만만하게 여겨질까 봐 양 입술을 꽉 붙이고 관리인을 쏘아보았지요.
  “에 그게, 하루에 오만 원인데…”
  관리인이 말끝을 흐렸습니다. 깎아줄까 말까 속으로 재는 눈치였지요.
  “주세요. 조용한 방으로요.”
  방값은 그렇다 쳐도 방 상태가 어떤지 확인조차 안 해보고 선희씨가 선뜻 달라고 했습니다. 성급하게 결정을 내린 적이 없는데, 낯선 곳, 더군다나 낯선 사람과 마주하다보니 서둘러 매듭짓고 싶었겠지요.
  “따라오시죠. 제일 좋은 방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며칠이나 묵으실 예정이신가요?”
  앞장서서 계단을 오르던 관리인이 흘깃 뒤돌아보았습니다.
  “일단 하루요.”
  일단 하루라, 경우에 따라 오래 머물 수 있다는 의미인데 선희씨 의지가 어떤지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사소하든 아니든 당최 속내를 보이지 않아 일이 벌어지는 순간에 조차 사태를 파악하기가 어려웠어요. 그 날은 유독 더 선희씨 따라 잡기가 힘에 부쳤습니다.
  “이 방입니다. 일단 먼저 살펴보세요.”
  관리인이 202호 문을 열고 뒤편으로 한 걸음 물러섰습니다. 안으로 들어선 선희씨가 방 내부를 대충 훑어보고는 계산부터 하려들었습니다.
  “방값은 지금 드리면 되나요?”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 선희씨가 지갑을 꺼내 오만 원 권 한 장을 빼들었습니다.
  “어…뭐. 쉬시다가 불편하신 점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관리인이 미적미적 지폐를 받아들었습니다. 펜션을 관리하는 사람으로서 응당 해야 할 업무가 남았는지 개운치 않은 기색이었지요.
  “네. 없어요.”
  선희씨가 건성으로 대답했습니다. 표정이며 말투가 차갑기 그지없어서 지켜보는 제가 무안하더군요. 관리인은 바지주머니에 지폐를 접어 넣으며 자리를 떴습니다.
  “방 열쇠는 텔레비전 위에 있습니다!”
  탁탁 슬리퍼를 끌면서 서너 걸음 걸어가던 관리인이 외쳤습니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으려던 선희씨는 움찔 놀라 동작을 멈추었지요.
  “오늘 밤에 태풍이 지나간다니까 베란다 문은 꽉 잠가놓으셔야 합니다!”
  선희씨가 출입문을 닫으려는 데 관리인이 계단을 내려가다 급히 되돌아 오르며 고함을 질렀습니다.
  “저기 안 그러면…”
  관리인 가까이 오기 전에 선희씨는 재빨리 문을 닫았습니다. 안내를 마치지 못한 관리인은 머뭇대다가 일층으로 내려가더군요. 선희씨가 문을 당기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은 해보였지만 머쓱했을 겁니다.
  선희씨가 방 안쪽에 가방을 내려놓고 바람을 맞아 덜컹거리는 베란다 문을 열었습니다. 문 앞에 놓인 파란색 슬리퍼를 신고 바람 속으로, 아니 태풍 속으로 성큼 나섰습니다. 바람이 고운 싸리 빗자루마냥 온 몸을 쓸고 지나갔는데 더없이 시원하고 개운했어요.
  바로 이것 때문이었구나, 단박에 이해되더라고요. 뭉치고 굳은 속을 뻥하고 뚫어줄 바람이 필요했던 거예요. 내달려오는 바람에 부딪쳐 선희씨가 휘청 몸을 가누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두 팔로 베란다 난간을 부여잡고 꿋꿋하게 서서 바다를 쏘아보더군요.
  검푸른 파도가 겹겹으로 능선을 이루며 번쩍 일어섰다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바다가 쟁여놓았던 힘을 육지를 향해 터트렸지요. 사나워진 바다가 무섭기는커녕 볼수록 후련했습니다. 동해안에 오기를 정말 잘했다 생각했지요. 선희씨가 베란다 바깥쪽으로 상체를 기울이고 난간을 쥔 손가락 마디마다 힘을 넣었어요. 낮이고 밤이고, 집 안이고 밖이고 늘 쳐져 지냈는데 가슴 가득 공기를 들이켜면서 턱을 치켜들었습니다.
  여행을 계기로 선희씨가 달라지기를 바랐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매일이 우울하면 무슨 수로 남은 생을 버텨내겠습니까. 숨탄것들이면 그게 무엇이든 신나고 즐겁기를 원하잖습니까. 선희씨 역시 신나고 즐겁고 싶어서, 무기력한 일상에서 한 걸음 벗어나고 싶어 바다를 찾았던 거예요.
  뒷목이 뻐근하도록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크고 차가운 물방울이 얼굴에 툭 떨어졌습니다. 중형 태풍 지오는 강한 바람과 폭우를 동반한다, 기상캐스터가 예보한대로 비가 내렸어요.
  소름 돋은 팔뚝을 쓸어내리다보니 허기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당장 수행해야하는 일거리가 눈앞에 보였어요. 맛있는 음식을 사다가 분위기 내면서 느긋하게 먹고 싶어졌지요. 오래 간만에 찾아온 허기라 반갑고, 하고 싶은 일과 기대가 생겨 유쾌하기까지 했습니다. 무표정한 얼굴에 생기가 어린 걸 보면 선희씨 또한 같은 마음이었을 거예요.
  비 맞은 윗도리가 눅눅해졌는데, 속옷이고 겉옷이고 여벌옷이 없는데 미적거리더라고요. 옷도 옷이지만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저녁을 준비해야할 텐데 선희씨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빈속으로는 잠이 오지 않을 걸 뻔히 알면서 어쩔 작정인지 걱정이 되었어요. 낯선 방에서 무슨 수로 밤을 견디려는지, 길으면 길었지 그 어느 날보다 짧지 않을 밤을 어떻게 넘기려고, 쯧. 속을 든든히 해서 최대한 편안한 상태로 밤을 맞아도 잘까말까 한데. 안타까움에 냅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녁에 먹을 음식부터 사러 가야해요. 비가 억수로 올 거란 말입니다. 시골 동네라 인적이 끊어지면 식당이고 가게고 몽땅 닫는다고. 움직여요, 움직여!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발을 내딛으란 말입니다. 당장 출발해요! 태풍이 오잖아요.’
  제 말을 들었는지 느꼈는지 선희씨가 몸을 돌렸습니다. 방으로 돌아가 지갑을 꺼내 들고 문을 열었지요. 계획 없이 떠난 여행이라 한들 최소한으로 챙길 부분은 챙겨야 하잖아요. 형체가 없어 눈에 보이지 않고 부족한 것투성이지만 저라도 선희씨와 함께 하게 되어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선희씨 안에 든 사람들이 은근슬쩍 도와주었는지 몰라요. 형철씨는 형철씨대로, 이교수님은 이교수님대로, 각자 방식에 맞추어 선희씨가 원만히 지내도록 이끌었겠지요. 선희씨가 잘 살아야 안에 머무는 사람들 모두가 잘 사는 거니까요.
  손바닥만 한 가게에 들어가 맥주 두 병, 스낵 과자 한 봉지, 빵 한 묶음을 샀습니다. 빵은 뒤집어보고 바로보고 한참 망설였어요. 허접스런 봉지에 담긴 길쭉한 빵이었는데 대여섯 명은 달려들어 먹어야할 만큼 양은 넘치고 유통 기한은 하루 밖에 안 남은 데다 바짝 마른 티가 역력했거든요. 라면에 시선을 두었다가 끓이는 과정이 번거로운지 결국 내려놓았던 빵을 도로 집더군요. 맛도 맛이지만 배를 채우는 게 먼저니까요.
  선희씨가 지갑을 열고 만 원짜리를 내어주면서 아주 잠깐 도수가 높은 술에 눈길을 주었습니다. 계산대 뒤쪽 선반에 진열된 국산 양주인데 사려들면 어쩌나 조마조마했어요.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설 적부터 눈에 확 띄었거든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낼 때는 한시름 놓였는데 순간적으로 실망스러웠습니다. 집을 떠나와 기분 전환을 했으니 독한 술은 필요치 않을 거다, 선희씨를 믿었거든요. 
  “찾으시는 품목 있으세요?”
  검정 비닐봉지에 물건을 담아 놓고 거스름돈까지 내민 주인남자가 물었습니다. 선희씨가 멈칫멈칫 딴청을 부리자 꺼낸 말이었지요. 그런데 주인남자가 게딱지만한 상점에 어울리지 않는다 싶게 차림새가 세련되고 멀쑥하게 생겼더라고요. 게다가 젊기까지 했지요.
  “차, 찾는 게 없네요.”
 선희씨가 허둥지둥 거스름돈을 받아들었습니다. 혼자라는 자격지심에 양주 달라는 소리를 차마 꺼내지 못했겠지요.
  “뭔데요? 혹시 모르니까 말씀해보세요.”
  젊디젊은 주인 남자가 웃으며 묻더군요.
  “됐어요.”
  선희씨가 급하게 밖으로 나왔습니다. 바람에다 비까지 끼얹어 대서 앞뒤 재지 않고 펜션으로 뛰어 왔습니다. 
  방에 들어오니까 마음이 턱 놓이더군요. 갑자기 준비하느라 우산을 미처 챙기지 못해 옷이야 축축하게 젖었지만 잠자리에다 먹을거리까지 해결되었으니 바람소리나 들으면서 느긋하고 홀가분하게 쉬면되잖아요.
  접이식 상을 가져다 방 가운데에 펴놓고 선희씨가 저녁 식사를 차렸습니다. 선반에서 접시와 컵을 내려 씻고 서랍에서 병따개를 찾고 맥주 두 병하고 과자를 상에 올렸지요. 상 앞에 앉아 맥주부터 한 잔 죽 들이키더니 벽에 등을 기댔습니다. 한 잔을 더 따라 마신 후에 몸을 길게 늘여 가방을 끌어당겼습니다.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만지작거렸어요. 전원을 다시 켜려나 궁금했습니다. 삼척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휴대전화를 완전히 꺼버렸거든요.
  선희씨는 터미널을 떠난 버스가 고속도로에 들어설 때까지 의자를 반쯤 젖혀 놓고 비스듬히 누워 있었어요. 하지만 결국 잠을 포기하고 가방을 뒤져 휴대전화를 찾아들었지요. 메시지 창을 열어놓고 남편 김성수씨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답니다.
  ‘동해안으로 여행 가요. 잘 갔다 올 게요.’
  달랑 두 줄이었는데 잘 갔다 온다는 문장은 수차례 썼다 지웠다 반복하더군요. 화면을 한참 내려다보다 잘 갔다 온다는 글이 적힌 상태로 전송했습니다. 간다는 내용만으로는 마음이 불편했을 겁니다. 사랑보다 미움이 배는 커졌지만 삼십 년이나 붙어 지낸 남편이니까요.
  동해안으로 떠나기 두어 달 전에 선희씨가 김성수씨한테 여행 이야기를 꺼냈었습니다. 부부가 마주 앉아 저녁을 먹으면서였어요.
  “여행 다녀 올 게요.”
  선희씨가 대뜸 한 마디 던졌는데 무척 긴장했더군요. 냉랭한 말투로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갔더라고요.
  “이번 주말에는 골프 약속 잡혔어.”
  함께 가자는 제안이 아니었는데 김성수씨가 설렁설렁 듣고 동문서답을 했습니다. 선희씨 여행은 자신과 함께 이루어져야한다, 이리 믿더라고요.
  “신경 쓸 필요 없어요. 혼자 갈 거예요.”
  선희씨가 혼자라는 말을 하면서 고개를 들었습니다.
  “혼자 간다고?”
  그제야 김성수씨가 내용 파악을 제대로 했습니다.
  “혼자 왜?”
  김성수씨가 선희씨를 빤히 건네다 보더군요.
  “왜라니요? 혼자 여행가고 싶어서 간다니까요?”
  선희씨가 눈살을 찌푸리고 날카롭게 받아쳤지요.
  “그러니까 왜 혼자 가냐고? 다음 주면 나하고 같이 가는데.”
  “말했잖아요. 혼자 간다고. 당신하고 같이 가고 싶지 않다니까!”
  “그럼 나는? 나는 어쩌라고? 내 밥은?”
  김성수씨가 숟가락을 움켜쥔 채 울부짖었습니다. 울부짖다, 좀 과한 표현이었네요. 그런데 꼭 울부짖는 듯 보였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엄마 치마꼬리에 매달리는 어린아이 같았지요. 선희씨보다 두 살이나 위고, 규모가 상당한 회사에서 전무 자리까지 오른 오십 후반 남자가 나는 어쩌라고? 떼를 쓰려 들다니 기가 차더군요. 대화가 어렵겠다고 판단했는지 선희씨가 쌩하고 일어나서는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선희씨 안에서 형철씨가 이 장면을 지켜보았을 겁니다. 입이 없으니 뭐라고는 못하겠지만 무릎이 턱 꺾였을 테지요. 실망을 넘어 배신감이 들었겠지요. 예전으로 돌아가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고요.
  저 역시 안타깝지만 원상복귀는 불가능합니다. 동거인의 신체를 무화시켜 다른 사람 안으로 들어가게끔 조작은 가능하지만 그 과정을 되돌려 밖으로 내보내는 능력은 갖지 못했거든요. 타고난 제 한계지요.
  무엇에 얼마나 실망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지만 형철씨가 김성수씨한테 배신감을 느꼈다는 것만큼은 알았습니다. 선희씨 행동을 보면 미루어 짐작 가능하지요. 김성수씨에 대한 선희씨 노여움이 노골적으로 표현되었거든요. 방법 역시 점차 격화되었고요.
  형철씨가 선망했던 대상이 선희씨 아니었냐고요? 맞습니다. 그런데 이유가 특이했어요. 형철씨는 선희씨 자체를 선망해서 선희씨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선희씨 남편 김성수씨가 욕심이 나서, 선희씨 남편 옆에 머물고 싶어서 선희씨가 된 의외의 경우거든요.
  밥상머리 행동만 봐도 김성수씨는 탐낼 만한 위인이 아닙니다. 삼십 중반의 젊은 남자가 선뜻 다가가 어울리고 싶을 만큼 세련된 자질을 갖추지 못했지요. 그런데 심적으로 취약한 상태였던 형철씨가 보고 싶은 모습만 보다 사단을 낸 거예요. 저는 막고 타이를 경황이 없었고요.
  선희씨는 되레 김성수씨에게서 떨어져나가고 싶어 했어요. 이십대 초반 세상물정 모를 때 만나 결혼하고 아들 낳고 키우고 어영부영하다 보니 타성에 젖어 내처 사는 거였죠. 너무 오래 되어 지겹고 신물이 나지만 또 너무 익숙해져버려서 버릴 수가 없는, 혼수 장롱 같이 애증만 켜켜이 쌓인 존재가 김성수씨라 할까요.
  선희씨가 한참 동안 새카만 화면만 노려보더니 전화기를 가방 위로 툭 내던졌어요. 휴대전화가 김성수씨로 여겨졌던 건지. 동해안까지 오는 여정이 꽤나 지치고 피곤했을 거예요. 느리터분하게 팔을 뻗어 남은 맥주를 털어 마시고 상을 한 옆으로 밀쳐놓았습니다.
  곧바로 빈자리에 모로 누웠어요. 서너 차례 숨을 들이쉬고는 윗몸만 반쯤 일으켜 요를 끌어다 펴고 베개를 가져다 머리에 받쳤습니다. 침대나 소파에만 누워 지내다보니 딱딱한 방바닥이 어깨에 배겼겠지요. 자다보면 추울 텐데 이불은 왜 내버려두는지…. 술기운이 돌아 사지는 늘어지고 만사가 귀찮았겠지요.
  눈꺼풀이 뻑뻑하니 무거웠어요. 파도소리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아침까지 내리 잤으면 속으로 바래보았습니다. 몸이 까라지는 만큼 마음도 덩달아 밑으로 내려앉았지요.
  덜-컹! 덜컹! 덜컹!
  바닷바람이 부닥쳐올 때마다 베란다 유리문이 요동을 쳤습니다. 한쪽 벽면 전체가 문 두 개로 나뉜 구조라 불안하더군요. 요즘이야 워낙 튼튼한 자재 가져다 집을 지어놓으니까 염려할 필요 없지만 맘이 따라주어야 말이지요.
  저 큰 유리문이 방에 떨어져 박살나버리면 칼날 같은 파편이 살을 베고 머리에 박힐지 모르는데, 험한 꼴이 연신 떠올랐습니다. 아차, 베란다 문을 잠그지 않았더라고요. 펜션 관리인이 태풍이 오니까 문을 꼭 잠가야 한다고 당부했는데. 문을 잠그지 않으면…, 뒤에 이어질 말을 챙겨듣지 못했잖아요. 잠그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거지? 어떤 위험이, 어떤 파국이 온다는 거지? 아무렴, 아니겠지. 요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고작 베란다 문을 잠그지 않았다고 사고가 나. 머리 안이 뭉글뭉글 엉클어들었습니다.
  출입문을 단속하지 않았다는 사실까지 생각나 저 혼자 안절부절 했습니다. 여자 홀로 낯선 방에 들었으면서 문을 열어놓다니, 정신이 있는지 없는지. 행동거지가 틈 없이 깔끔한 사람인데 그 날은 딴판이라 당황스럽더군요.
  김성수씨하고 함께 거하는 집이 아니라 긴장이 풀렸겠지요. 집을 떠났는데 똑 같이 행동할 필요도 없고요.
  짐작하셨겠지만, 선희씨는 사는 일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선희씨를 찬찬히 지켜보면서 심사숙고했더라면 형철씨는 다른 선택을 했을 거예요. 아무리 김성수씨가 능력이 빼어나고 배려심이 깊어 보였던들 선희씨가 되고 싶은 바람을 부풀리지 않았을 거예요. 여타 주변 사람들처럼 선희씨와 김성수씨의 겉모습만 보았기 때문에 실수를 저질렀어요. 제 동거인들 대부분이 갖고 있는 한계인데 형철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형철씨는 선희씨와 대화를 나누어본 적이 전혀 없답니다. 시립 문화센터에서 오다가다 마주친 일이 전부에요. 형철씨는 CAD 강좌를, 선희씨는 수필 강좌를 수강했거든요. 동일 시간대 강좌들이라 얼굴 정도는 익혔지요.
  형철씨가 김성수씨와 만나게 된 사연에는 낯부끄러운 구석이 있습니다. 김성수씨는 풍기는 인상하고 다르게 유치한 버릇을 가졌거든요. 혼자서는 밥을 못 먹고, 혼자서는 병원을 못 갑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 당시 김성수씨는 위아래 어금니 네 개를 빼고 인공치아를 끼워 넣느라 치과에 다니던 중이었어요. 치과에 동행하는 사람은 결혼 후 내리 그래왔듯 부인인 선희씨였고요.
  김성수씨는 강좌 끝나는 시간보다 십여 분 일찍 문화센터에 도착해서 선희씨가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출입구가 훤히 보이는 자리에 차를 세워놓고 그 안에 앉아 밖을 살폈지요. 선희씨가 문화센터를 나서자마자 후다닥 뛰어나와 선희씨를 불렀습니다.
  “이봐!”
  선희씨는 김성수씨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은근슬쩍 외면부터 했습니다. 중병에 걸렸거나, 사지가 온전치 못하다면 모를까 뭐 하나 도와줄 거리가 없는데 옆에 붙여놓는 용도로 동행하려니 짜증스러웠겠지요. 종속당한 기분이었을까요? 남편이 선희씨한테 종속됐는지 선희씨가 남편한테 종속됐는지는 따져봐야겠지만 아무튼 졸졸 따라다녀야 하는 행동 자체에 넌더리가 났을 겁니다.
  “강의는 제대로 들었는가? 어서 차에 탑시다.”
  김성수씨가 웃음을 만들어 보이며 선희씨를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맘이야 어찌 되었든 다정한척 굴 수밖에 없었죠. 당장 치과에 가려면 선희씨가 필요했으니까요. 차를 반 바퀴 돌아가서 손수 조수석 문까지 열어주었답니다. 선희씨가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 매는 모습을 건네다 보면서 흡족한 표정을 짓더군요.
  이 장면을 형철씨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습니다. 검은색 대형 세단 승용차를 몰고 김성수씨가 문화센터 주차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더라고요.
  직장인 회계사무실로 걸어가는 내내 가지가지 상념으로 마음이 떠서는 결국 발목까지 접질렸어요. 예기치 못한 한방에 반쯤 넋이 나갔던 겁니다. 형철씨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타격을 받을 만했습니다. 진정으로 갖고 싶은 무엇을 발견했지만 그와 동시에 가질 수 없는 현실을 깨달았으니까요. 막연한 희망사항이 아니라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무엇이라서 한층 절실했는데 닿을 수 없는 거리만 확인했지요.
  그날 형철씨는 유일한 낙으로 여기던 헬스조차 못하고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 야근을 했습니다. 맡아 작성하던 회계 장부에 오류가 발생해서 잘못된 부분을 찾아 정정해야했거든요. 그런데 열시가 가깝도록 해결을 못하더라고요. 억지로 마무리는 지었는데 쉽사리 퇴근을 못했습니다. 인터넷 구매사이트에 들어가 물건 사진이나 클릭해대고 책상을 두드려대고 이 책 저 책 끄집어내 펼쳤다 닫고 펼쳤다 닫고.
  결국에는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습니다. 열한 시 십분 전, 시골노인인 엄마가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단잠에 빠질 시간이었지요.
  “엄마, 나.”
  딸각, 수화기를 집어 드는 소리가 울리자마자 형철씨는 엄마를 찾았습니다.
  “형철이냐? 그래, 별 일 없고?”
  엄마 목소리에 잠이 푹 배었더라고요.
  “네. 엄마는 저녁 드셨어요?”
  형철씨가 버릇대로 식사 여부부터 물었지요.
  “저녁? 한참 자다 일어났구먼, 다 늦게 저녁 타령은. 그나저나 지금 몇 시나 됐냐?”
  엄마가 일어나 앉는 지 말소리가 뚝 뚝 끊겨 들렸습니다.
  “열한 시 쯤 됐는데, 주무셨어요?”
  말 속에 미안함과 후회가 가득했습니다. 연세든 엄마한테 초저녁잠이 늘었음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니까요.
  “아녀. 깜빡 졸았는데 다 깼다. 근데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큼!”
  엄마가 말끝에 목을 가다듬었습니다.
  형철씨는 한층 더 시무룩해져서 대화를 잇지 못했습니다.
  “저번에 부친 반찬은 잘 챙겨 먹었지? 김치 떨어지지 않았어? 김치 담고 밑반찬 좀 해서 택배로 보내줄까? 먹고 싶은 거 없니?”
  “멸치볶음하고 콩자반.”
  다정스런 물음에 긴장이 풀어졌는지 형철씨가 반찬을 주워섬겼습니다. 
  “콩자반? 콩이라면 질색을 하는 애가 입맛이 변한 거야? 아이고야-, 우리 막내아들이 이제 나이가 들었나보네.”
  전화기 너머에서 한숨소리가 흘러 나왔습니다.
  “변하기는, 그냥 갑자기 튀어나온 거예요. 뭘 그런 걸 가지고 엄마는 나이 타령이나 하고.”
  찾는 음식이 달라진 이유는 형철씨 안에 합리성을 중시하는 이교수님이 들어갔기 때문인데 형철씨는 그 상황을 몰랐지요. 
  “반찬 보내지 마요, 엄마. 내가 알아서 사다 먹을 거니까.”
  형철씨가 심통을 부렸습니다. 우아한 옷과 균형 잡힌 하이힐, 세련된 단발머리, 날씬하기까지 한 중년 여성. 감색 정장과 반짝이는 구두, 세심하게 손질된 머리, 어깨가 곧게 펴진 중년 남성. 광택이 흐르는 최신형 고급 승용차. 그리고 이들을 받쳐주는 여유를 넘은 풍요. 머리에 가득 찬 영상들 때문에 형철씨는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뭔 일 있어?”
  엄마가 걱정스레 물었습니다. 아무리 막내아들과 엄마 사이라지만 부끄러운 속내까지 털어놓을 수는 없지요. 형철씨는 수화기를 멀찌감치 떼어 놓고 잽싸게 눈물을 훔쳤습니다.
  “아빠 제사가 며칠이에요?”
  궁색한 변명 대신에 형철씨가 제사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습니다. 요맘때였는데 음력으로 며칠이었더라, 문화센터 담장에서 넝쿨 장미꽃을 본 다음부터 관심을 두었지요. 넝쿨 장미를 보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눈에 어린다더라고요. 초상을 치른 장례식장 주변에 빨간 넝쿨장미가 만발했다던가.
  “아빠 제사? 여남은 날 남았을 텐데, 올 해는 다니러올 거지? 아버지 제사 하나 못 챙긴다고 형들이 뭐라더라. 엄마가 달력 보고 확인해서 전화 넣어줄 테니까 시간 맞춰서 꼭 내려 와. 알았지?”
  엄마가 타이르듯, 달래듯 말했습니다.
  “알았어요. 엄마.”
  형철씨는 아버지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고향에 다녀왔습니다. 두어 달 전에 애지중지하던 자동차를 팔아버려 중고등학교를 다닌 읍내까지는 시외버스를 타고 시골집까지는 걸어갔지요. 데리러 와 달라는 말을 못 꺼내 삼십분이나 걸어야했는데, 형철씨가 형들을 무척 어려워했어요. 모두 셋인데 시골집 근방에 터를 잡고 그럭저럭 생활하더군요.
  뒤 늦게 따로 저녁 밥상을 받은 형철씨는 소비는 줄이고 저축은 늘리기 위해 차를 팔아치웠다는 신상 보고부터 했습니다. 형들은 이구동성으로 현명한 처사다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지요. 차 없이 걸어온다는 소리에 사고를 쳐서 홀랑 날렸구나, 지레짐작으로 의심부터 하지 않았나싶더라고요. 서른이 넘도록 장가를 못간 놈이 돈을 모으기는커녕 실속 없이 겉멋만 들어 분에 넘치는 외제차를 굴린다, 마뜩찮게 여겼겠지요.
  형들이 형철씨하고 꽤 나이차가 났어요. 아버지 제사에 빈손으로 온, 제대로 어른 구실을 못하는 동생이 눈에 거슬렸을 터인데 기분 상할 언사는 부러 피하더군요. 못마땅한데 불쌍해서 참아주는 기색이 완연했습니다.
  제사를 마치고 음복하는 자리에서 아버지가 암으로 삼 년을 내리 앓다가 쉰다섯에 돌아가셨다는 사연을 들었습니다. 첫째 형이 내가 막 군대에서 제대한 해였으니까, 이리 서두를 꺼내놓고는 누구는 몇 살, 누구는 몇 학년 차례대로 정리해 보이더라고요. 그런데 형철씨 순서에서 다들 숙연해졌습니다. 초등학교 육학년 철없는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였으니까요.
  형철씨가 제사상에 올린 아버지 영정사진을 챙겨다 장롱 선반에 올려놓았습니다. 쉰다섯에 세상을 뜨셨다더니 사진 속 아버지가 선희씨 남편 김성수씨하고 비슷한 연배로 보이더군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던 형철씨가 주르륵 눈물을 쏟았습니다. 장롱 문을 열어놓은 채로 한참을 머뭇댔지요.
  형철씨는 마음 속 빈자리 하나를 어쩌지 못하고 밤 새 뒤척였습니다. 엄마가 건재하고 형들까지 셋씩이나 두었지만 엄마는 엄마고 형은 형일 뿐이지 아버지가 아니잖아요. 주고받는 몫이 따로 있어서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아야하는데 형철씨는 아버지의 애정과 지원을 충분히 받지 못했더군요.
  “오늘은 출근 안하냐?”
  시내에서 불고기집을 하는 큰 형이 물었습니다. 둥그런 밥상을 가운데 놓고 엄마와 큰 형, 형철씨, 셋만 남아서 아침밥을 먹었지요. 다른 두 형 식구들과 큰 형수는 밤늦게 돌아가고 큰 형만 남았는데 고장 난 보일러를 손 보고 나서 식당으로 직접 출근할 예정이라 했습니다.
  “하루 휴가 냈어요.”
  형철씨가 고개를 수그린 채 우물우물 대답했습니다.
  “월급은 좀 올랐고?”
  큰형이 반찬을 집으며 무심한 척 물었지만 속에 불만이 가득했어요.
  “그냥 그렇죠, 뭐.”
  형철씨가 얼버무렸습니다.
  “집은? 원룸에 계속 사는 거냐?”
  “옮겨야죠. 내년에는 아파트로 이사할 계획이에요.”
  “돈은?”
  “모으는 중이에요. 그리고 요새는 대출이 팔십 프로까지 되니까 맘만 먹으면.”
  “갚을 능력은 되고? 하려면 철두철미하게 따져서 해. 괜히 어수룩하게 굴지 말고. 형들은 형들 힘으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거다. 그리고 간량하겠지만 우리 형편에 너 못 도와준다.”
  큰형이 밥상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단호하게 말을 맺더군요. 숨을 한 차례 들이마신 다음 고개를 들어 형철씨를 건네다 보았습니다.
  형철씨는 뭐라 응수하는 대신 큼지막한 동태 전을 집어 입에 쑤셔 넣었지요. 큰형한테는 눈을 주지 않았습니다. 일언반구 도와달란 적이 없는데 되레 먼저 못 도와준다고 못부터 박으려드니 기분이 상했지요.
  “그만 해라. 형이 되어 가지고 오랜 만에 내려온 동생한테 야박하게 굴어야겠니.”
  두 아들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엄마가 형철씨 역성을 들었습니다. 나이 마흔둘에 형철씨를 낳았다니까 일흔여덟 되었지요. 요즘 칠십 중반이면 팔팔한 장년인데 뼈마디에 기운이 빠졌는지 폭삭 꼬부라져 보였습니다. 평생 밤낮으로 농사일을 했으니 그리 될 수밖에 없는데, 마음이 언짢더군요.
  엄마와 큰형이 수저질을 멈추고 말씨름을 했습니다. 큰형은 학비대서 대학 졸업시켰더니 서른 넘도록 원룸이나 전전하고 나잇값을 못 한다 타박하고 엄마는 제대로 도와주지 못해 저리 처졌다 반박했지요. 그러다 아버지 병수발 하느라 나다니는 동안 혼자 남은 형철씨가 라면 끓여먹던 고릿적 일까지 들먹였습니다. 눈물바람을 해서는 아예 옆으로 돌아앉았습니다.
  형철씨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에서 도망치고 싶었어요. 하지만 멈추지 않고 꾸역꾸역 밥을 넘겼습니다. 나이 값 타령을 하는 마당에 불뚝 거릴 수는 없고 눈물이 비어져 나올 것 같아서 눈두덩에 힘만 넣었습니다.
  “느이 아버지만 이때껏 계셨더라면…”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찍어 낸 엄마가 푸념을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큰 형이 재깍 말머리를 끊었습니다.
  “그런 말씀 이제 좀 그만 하세요. 지금껏 아버지가 생존해계신다 한들 형철이 집 장만 못해주셨어요. 제 밥그릇은 제가 챙겨야지 누가 챙겨줘요.”
  큰형이 드러내놓고 엄마를 몰아붙였습니다.
  누구는 울고 누구는 버럭 대고, 밥상 앞을 지키기가 보통 곤욕이 아니었습니다. 형철씨는 도망치고픈 마음에 허겁지겁 남은 밥을 밀어 넣다 사레가 들려버렸어요.
  “큰 형이나 돼가지고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 마냥 굴어야겠냐! 매몰차기가 남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구나.”
  엄마가 형철씨 옆으로 바짝 붙어 앉아 등을 두드리면서 큰형을 나무랐습니다.
  “번듯한 전세 아파트 한 채 있어봐라, 결혼하겠다는 여자들이 줄을 설 거다. 나이는 차가지고 홀아비 노릇하는 동생이 불쌍하지 않아!”
  엄마가 그예 형철씨 결혼 이야기를 끄집어냈습니다.
  “엄마, 제발 그만 해요. 짜증나게!”
  형철씨가 와락 소리를 질렀습니다. 감추려고 했지만 울음이 묻어났지요.
  “엄마 대하는 싸가지가…”
  거칠게 수저를 던져놓은 큰형이 오만상을 찌푸렸습니다. 화난 기색이 뚜렷했는데 막내 동생이 딱하기는 한 지 눌러 참더군요.
  “엄마, 올라갈게요.”
  형철씨가 바닥에 시선을 둔 채 말했습니다.
  “뭘 벌써 가? 휴가 냈다면서. 엄마가 반찬거리라도 주물럭대려면 반나절은 걸리니까 기다렸다 점심 먹고 가. 혼자서 뭘 해먹는다고. 집에 왔으면 한 끼니라도 온전히 챙겨먹고 가야지.”
  엄마가 허둥지둥 먹다만 밥그릇을 들고 일어섰습니다.
  “그래. 옆에서 보일러 고치는 거나 도와주고 천천히 올라가라.”
  큰 형이 마지못해 거들더군요. 형철씨는 맥없이 내려놓았던 수저를 다시 쥐었습니다. 서로 간에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서 집을 나서면 엄마가 두고두고 속상해할 텐데 어쩌겠습니까.
  일찌감치 차려주는 점심을 먹고 형철씨는 버스를 탔습니다. 김치부터 비누까지 엄마가 살뜰히 챙겨준 짐 가방을 발치에 내려놓았지요. 짐을 들고 다니기가 귀찮고 창피했지만 받아들 수밖에 없었어요. 엄마와 옥신각신 하는 과정 역시 만만치 않았으니까요.
  버스가 달리는 내내 형철씨는 창밖만 넘겨다봤습니다. 중간 중간 땅이 꺼져라 한숨을 쏟아냈지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상념이 끊임없이 치고 올라와 연거푸 얼굴만 쓸어내렸습니다. 아버지가 곁에 계시다면, 건강하게 활동하고 계시다면 지금보다 월등히 성공했으리라는, 하루하루가 넉넉하고 여유로우리라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어요. 집이라 부르기 멋 적은 원룸에 살고, 간신히 백팔십 만원을 넘기는 월급을 받고,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아버지 탓인 듯싶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 잘못이 아니지요. 그렇다고 형철씨가 나쁜 짓을 했는가 하면 그 또한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불행할까요? 남들처럼 행복할 수 없을까요? 고달픈 삶만 질기게 이어지지는 않겠지요? 형철씨는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이교수님이 들어앉은 다음부터 형철씨 하루는 그 어느 시기보다 활기찼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제사에 다녀온 뒤로, 김치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는 승객들 눈총에 고개를 들지 못한 순간부터, 엄마가 챙겨준 짐 가방에서 빨간 김치 국물이 밴 양말을 꺼내 쓰레기통에 던져 넣자마자 돌변했습니다.
  아니 이교수님과 함께 하기 이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출근 십분 전에 일어나 아침을 굶었고, 시큰둥한 낯으로 고객들이 가져온 서류를 받아들었고, 딱히 약속이 잡힌 것도 아니면서 헬스조차 곧잘 빼먹었습니다. 벗어놓은 옷가지가 방바닥에 굴렀고 쓰레기통은 컵라면 용기로 넘쳐났지요.
  문화센터 CAD 수업에는 꼬박꼬박 출석했는데 그건 선희씨가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틈 없이 정돈된 옷매무새에 명품이구나 싶은 가방과 구두,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을 강단 있는 표정. 선희씨 곁을 지나치는 순간 형철씨는 부럽다 못해 질투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든든한 아버지, 아니 든든한 남편 때문에 저리 자신만만하게 사는 거다, 당치않은 오해에 빠져들었어요. 선희씨 남편 같은 어른이 옆에서 지켜준다면 끊임없이 압박해오는 질책, 무시, 궁핍, 이 따위 것들은 순식간에 사라질 듯싶었습니다. 평생 행복하리라 확신했지요. 
  형철씨 내면에서 된바람이 불어칠 때 또다시 선희씨를 데리러 온 김성수씨를 보았습니다. 최고급 승용차에서 느긋이 내려 부인을 부르고 손을 흔들고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차문을 열어주는, 텔레비전 광고에서 빠져 나온 듯 멋들어진 김성수씨를 말입니다. 김성수씨는 모든 능력을 갖춘 조력자, 세상에 널린 위험으로부터 가족들을 보호해주는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부인을 빛나게 해주는 남편이었지요.
  결국 그 자리 그 찰나에서 형철씨 이성이 붕괴되었습니다. 조만간 변신을 꾀하리라 예상을 못했던 바는 아니지만 대책 없이 밀어붙일 줄은 몰랐습니다. 당황하고 허둥대는 바람에 어느 때보다 고통이 컸지요.
  으-으윽! 삼만 볼트짜리 전선에 닿은 듯 정수리부터 발가락 끝까지 화끈화끈 저렸습니다. 육신이 산산 조각나고 세포 하나하나가 공중으로 분해되는 충격에 까무러칠 것 같았어요. 저는 요모조모 따져볼 요량은커녕 숨조차 고르지 못하고 다급하게 외쳐야만했습니다.
  ‘나를 삼켜주세요! 제발 나를 삼켜줘요. 제발---!’
  때마침 승용차에 발을 올리던 선희씨가 고개를 빼고 저를, 아니 형철씨를 보았습니다. 얼굴이 붉게 부풀어 오른, 뚫어져라 자신을 노려보는 형철씨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다 무심코 입을 벌렸어요. 그때 변신이 이루어졌습니다. 저의 부르짖음과 동시에 그 에너지를 받아 투명해진 형철씨가 선희씨 입 속으로 내달렸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조차 알아차릴 수 없도록 빠르게 진행되었지요. 형철씨는 원했고 저는 원함에 맞추어 행동했어요. 형철씨하고 저만 아는 비밀스러운, 감쪽같이 이루어진 작업이었습니다. 선희씨는 어리둥절해하다 김성수씨 재촉으로 자리에 앉았습니다. 차멀미 때문에 속이 울렁거린다면서 창문을 내렸는데…, 메슥거림만 빼면 그날은 딱히 별다른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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