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대전에서 경박스러운 웃음소리를 내는 것이냐.”
금빛으로 물든 황궁 안 대전.
대신들이 줄지어 늘어선 그곳에서 심기 불편한 황제가 어린 황자들이 장난치는 것을 보고
호되게 꾸짖었다.
“소자 잘못하였습니다. 폐하.”
황자들이 넙죽 엎드리며 절을 하였고 대신들은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어린 황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탁탁탁탁
누군가가 대전 계단을 바삐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바마마 아바마마”
앳된 목소리가 들리며 붉은 치맛자락 휘날리며 황제의 곁으로 달려오는 어린 여자아이가
있었으니
웅장한 대전과 황제의 위압감 그리고 줄지어 늘어선 대신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 가득 환한 미소 잔뜩 머금은 채 황좌가 있는 대전 끝 중앙으로 달려간다.
“오~ 우리 태자비”
언제 호통을 쳤냐는 듯 인자한 미소를 드리운 황제가 두 팔을 벌리며 황제의 위엄을 내려놓고 맞이하는 10살
여자아이.
황제는 여자아이를 안아 올리더니 황자에 앉히고 태자비를 자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바마마 소녀 많이 기다리셨사옵니까?”
“예끼 요 녀석 짐이 기다리다 목이 빠지는 줄 알았느니”
“그런데 어찌 나와 보지도 않으셨사옵니까. 궁문에 아니 계셔서 서운했사옵니다.”
“안 그래도 대전회의 끝나는 대로 나가보려했다. 아침에 온다더니 네 녀석이 늦어 그런 게
아니더냐.”
감히 황제에게 마중 나오지 않았다 투정을 부리는 아이는 바로 이 나라 ‘채국’의 태자비
‘채화’였다.
맹랑한 아이의 말에도 황제는 전혀 노하는 기색이 없고 여러 대신들도 이미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어린 황자들은 부러운 시선으로 볼 뿐이었고, 이제 막 들어온 신임 관리들만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바라볼 뿐이었다.
대전회의가 끝난 후,
“태자가 없는데 어찌 태자비가 있답니까?”
대전을 나오면서 신임관리들은 나이 지긋한 대신에게 모여들었다.
“아 자네들은 아직 잘 모르겠군. 그게 10년 전 일이니까.”
“10년 전 일이라니요?”
그가 하는 이야기에 신임 관리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10년 전
[부인의 복중 아기씨는 장차 천하를 거머쥘 주인을 만드실 분이시옵니다. 아기씨는 큰 복을 불러일으키는 분이시니 귀하게 모셔야 할 것이옵니다.]
황후의 생일 연회를 맞이해 여러 대신들과 귀빈들이 모인 자리.
황실과 나라의 길흉화복을 점쳐온 예언가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였다.
황후의 여동생이며 재상의 딸 그리고 대장군의 부인.
승안부인.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 대한 예언으로 장내는 조용해지고 서로 황제의 눈치만 살피는데 정적을 깨는 황제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하하하하. 이런 경사가. 이미 집안 어른들이 나라의 충신이요 기둥이 되는 이들이거늘 태중 아이 마저 나라의 빛이 된다니. 참으로 기특하도다.”
“망극 하옵니다.”
황제의 말에 재상과 승안부인은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를 숙였고 승안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배를 두 손으로 살포시 가린다.
“이 아이가 사내아이라면 재상으로 키울 것이오. 만약 여자아이라면 태자비로 세우겠소.”
황제의 말에 연회장에 있는 모든 이들이 웅성거렸다.
아직 태자가 없는데, 태자비라니.
하지만 황명에 거역할 수는 없는 노릇,
게다가 예언가가 이리 확언을 하였다.
“천하를 다스릴 분의 옆에 앉게 되실 것이니 태자비이실 것이옵니다.
예언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검은 하늘에 유성우가 쏟아져 내리더니 낮보다 밝은 광채가 갑자기 하늘에 드리웠다. 그리고 승안부인의 단말마 비명이 들려온다.
“아악~”
그렇게 채국의 태자비 ‘채화’가 모두의 관심과 축복 속에 태어났다.
한편, 어둡고 습한 황실의 다른 이면인 냉궁.
누구의 관심도 환영도 받지 못한 또 하나의 생명이 태어났다.
“아가, 제발 울지 마렴. 아가.”
이제 막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가 문 밖에 새어나갈까 젖을 물리며 내내 문밖으로 시선을
향한 채 조바심을 내는 여인.
황제의 아이를 회임했지만 불운을 가져온다는 이유로 회임한 채 실가닥 같은 빛 한줄기 들어
오는 냉궁에 갇혀 밥을 넣어주는 시녀의 도움으로 간신히 아이를 낳은 영비였다.
그녀가 낳은 아이는 황실의 귀한 황자였지만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살기 위해서태어난 사실조차 비밀에 붙여져야만 하는 신세였다.
“마마 감축드릴 일이 아니옵니까. 저희에게도 희망이 되지 않겠습니까?”
“희망이라 했느냐. 이 아이 앞에 닥쳐올 화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마마......”
“남들의 이목을 생각하자면 앞으로 이 아이에 대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아야 한다. 그러려면 이 아이의 입부터 막아야 해.”
영비는 앞에 닥쳐올 일을 생각하는 듯 불안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10년 후
비화원
꽃과 나비가 가득한 그곳이 시끌벅적하다.
“채화야. 이것 봐. 하얀 나비야.”
“내가 잡은 것 좀 봐. 난 더 많이 잡았어.”
나비잡기 놀이를 하는데, 황자들이 서로 잡은 나비를 채화에게 보여주었다.
황후와 비빈들은 서로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의 관심 속에 있는 소녀 채화는 답답할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한 아이가 들어왔다. 나비를 잡을 채도 들고 있지 않고 따로 떨어져 연못의 물고기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
“얘 넌 환관이니. 호위니?”
신분을 알기 어려운 옷을 입은 자신 또래의 사내아이는 대답도 하지 않고 쳐다도 보지 않는다.
“채화야 얘는 말 못해.”
그때 다가온 귀비의 아들인 1황자 류환이 말했다.
“말도 못하는 애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냉궁 황자도 황자는 황자니까.”
귀비와 총애 다툼을 하는 숙비의 아들답게 화려한 옷을 입은 2황자 치환이 무시하는 투로 말했다.
“그럼 말을 못하면 듣지도 못해?”
“그건 우리도 몰라. 관심이 없어서.”
“저런 애는 두고 우리랑 놀자.”
황자들 중 13살로 나이가 가장 많은 류환이 채화를 잡아 끌었지만 채화는 관심을 끊을 수가 없었다.
뒷모습이 어젯밤 자신의 꿈에 나왔던 아이였기 때문이다.
채화는 예지몽을 꾸는데, 꿈이어서 그런지 자고 일어나면 뿌옇게 잘 기억이 나지 않고는 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꿈에 어떤 아이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채화에게서 뒤돌아 선 채 울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채화는 문뜩 확인해보고 싶었다.
“오라버니들 폐하를 내일 동비궁에 초대해 함께 다과회를 열거야. 하지만 공간이 협소해 다과회에 그 많은 비빈마마들을 초대할 수는 없어. 그러니 나비들을 가장 많이 잡아오는 황자를 초대할까 해. 어머니와 함께.”
황실에서 모두가 공공연히 아는 사실. 황제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는 황태자비 채화의 말이라면 황제는 아무리 바쁜 공무중이어도 움직일 것이다. 실제로 채화가 단순한 감기만 걸려도 나라의 기운이 쇠한다며 벌벌 떠는 부황이니.
그 말을 듣자마자 황자들은 자신의 환관들과 궁녀들까지 모두 동원해 나비를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말을 궁녀들로부터 전해들은 비빈들도 눈에 불을 켜고 궁녀들을 지시하기 바빠졌다.
그제서야 그들의 시선을 따돌린 채화는 연못의 아이에게 다가갔다.
“뭘 그렇게 보는 거야?”
그 아이가 바라보는 곳을 같이 바라보았다. 그저 맑은 물에 얼굴에 비춰보였다. 그리고 채화의 얼굴이 그 옆에 놓였다. 하지만 무관심.
이것은 안 들리고 들리고를 떠나서 완전한 무시였다. 신선한 경험이다. 모두에게 관심만 받고 사는 채화에게는 더욱 호기심이 어리는 일이었다.
“어! 벌이다.”
“..........”
물론 벌은 없지만 쳐다나 볼까 하고 장난을 친 것이다.
괜한 오기였다.
그 아이의 볼을 잡아 당겼다. 볼이 붉어져도 아이는 옆을 쳐다보지 않았다.
채화는 점점 대담해졌다.
툭
아이의 몸을 밀쳐 넘어뜨렸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화를 내며 쳐다보겠지. 옆으로 넘어져서 물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옆에 있는 나무의 가지를 붙잡지 않으면 빠질 뻔했다.
하지만 아이는 슥 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뒤돌아서 휘적휘적 더 인적이 없는 곳으로 가려고 했다.
“야 너 사실은 들리지? 말도 하지?”
계속되는 무시에 오히려 화가 나는 것은 채화였다. 퉁퉁 부은 얼굴로 뒤돌아서가는 화를 흘겨보며 말했지만 화는 더욱 멀어지려 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마지막 수를 쓰는 채화였다.
풍덩
무슨 일인지 보지 않아도 예상이 되는 일이었다. 물에서 허우적거리는 소리와 숨이 넘어가는 듯한 소리가 오십보 떨어져 있는 화의 귀에도 너무나 잘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화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 것은 점점 허우적거리는 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뭐 저런 멍청이가 있어.’
한 번만 더 무시하면 되는 일이었다.
엉뚱한 소리도 볼의 화끈거림도 어머니를 돌봐주는 궁녀 효아가 겨우 얻어다 준 천으로 어머니가 힘들게 만들어준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참았다. 이 모든 것을 인내하게 만든 저 괘씸한 태자비라는 아이 따위 물에 빠지든 죽든 말도 못하는 척 듣지도 못하는 척 해야 한다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시하려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제길. 누군가 보겠지 황태자비라며’
생각하며 비빈들과 황자들이 있는 것을 보자니 채화의 말에 농락을 당해 모두 나비를 잡느라 바쁜 눈치였다.
그리고 눈앞에 점점 수면 밑으로 가라앉는 채화가 보였다.
화는 더 가릴게 없었다.
풍덩
수영을 자신도 못 한다는 사실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물에 뛰어 들었다.
그저 손에 채화의 팔이 잡혔다는 것에 안도를 하며 눈을 감아 버렸다.
숨은 막혀오고 정신은 아득한 와중에도 채화는 살려보려 팔을 들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이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
“허억~ 켁”
물을 토해내며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에 채화가 빙그레 웃고 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역시 너 말도 하는구나.”
“너!”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채화가 물에 빠진 척 장난을 친 것이었다.
그 덕분에 자신만 물귀신이 될 뻔한 것을 생각하니 너무 화가나 무의식적으로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만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그것을 본 채화는 더욱 입고리가 올라간다.
10년을 참았는데, 어머니 앞에서조차 말을 하지 않으려 조심한 화였다.
한 순간에 채화의 장난으로 인해 말을 하는 것을 들켜버린 것에 더욱 화가나 화는 씩씩거리며 채화를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냉궁을 향해 가려했다. 그런 화의 뒤에서 채화가 말했다.
“날 구하러 뛰어든 것으로 네가 말한다는 건 비밀로 해줄게. 대신 내일 동비궁으로 너희 어머니하고 와야 해. 내가 사람을 보낼게.”
“우리 어머니는 냉궁에서 나올 수 없어”
“이 황궁에서 내가 못하는 건 없어. 사람을 보낼게 내일 봐.”
자기가 할 말만 하고 저 멀리 뛰어가는 채화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화였다.
“저 여인과 저 아이는 누구랍니까?”
“냉궁에 갇혀 사는 영비잖아요.”
“냉궁에서 어찌 나온 것이랍니까?”
“보면 모르겠습니까? 태자비가 초대한 것이라는데 어제 저 요망한 황자가 순진한 태자비를 꼬여 영비를 기어코 이 자리까지 오게 한 것 아니겠습니까?”
동비궁 다과회에 초대된 이들은 태자비의 이모인 황후와 류환과 치환의 어머니인 귀비 숙비였다. 이들은 다과회에 나타난 이외의 인물들에 당황해했다.
황후는 조용히 영비를 노려보았고, 귀비와 숙비는 자신들끼리 수군거리기 바빴다.
“황제폐하 납시오.”
“폐하를 뵙습니다.”
그때, 황제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이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류환, 치환과 함께 앉아있던 채화가 방긋 웃으며 황제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폐하 오셨습니까?”
“네가 부르는데, 어찌 오지 않겠느냐.”
“히히.”
다과회에 온 이들을 둘러보던 황제가 갑자기 멈칫 했다.
영비와 눈을 마주친 것이다.
“그대가 왜 여기 있는가?”
“그것이”
“제가 불렀습니다. 저 황자가 저를 물에서 건져주어 감사인사를 할 겸 초대 했습니다.”
“뭐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난처해하는 영비를 대신해 그들 사이를 가로막은 채화가 나섰다.
그제서야 황제의 시선이 화에게로 향했다. 존재 자체를 잊고 살았던 자신의 아들.
채화가 태어나던 날 태어난 내관이 알려준 일을 그도 어렴풋 기억하고 있었다.
냉궁에서 자신의 자식이 태어났는데, 황자라고 하였다.
하지만 온통 채화에게 관심이 가 있던 그였기에 채화와 같은 화라는 이름을 내려주었었다.
남자 아이에게 ‘꽃 화’라니.
당시에 내관들은 난처해했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 아이가 10년 만에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네가 화냐?”
“.......”
“허 어찌 대답을 안 하는 게냐?”
“저... 폐하 이 아이는 말을 하지 못 합니다.”
황제의 물음에 나서서 무릎을 꿇고 엎드리지만 대답을 하지 않는 아이에 의문을 갖는 그의 눈빛을 본 영비가 나섰다.
자신의 아이가 말을 못 한다고 들으면 어떨까. 그래도 자신의 핏줄인데, 일말의 희망을 품어보는 영비였다.
“그랬군.
그것은 수긍. 그저 눈빛 한 번 보내는 것이 다였다. 그리고 자신의 핏줄도 아닌 채화에게 고개를 돌려버리는 무심한 황제에 치맛자락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 어미를 보는 화 역시 아무것도 모른 채 영비와 화를 황제에게 보인것에 만족해하며 해맑게 웃고 있는 채화를 노려보며 주먹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