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에서 낮잠 중인 10년 꿇은 복학생. 나루.
부모님이 '강나루'처럼 사람들에게 필요한 남자가 되라고 지어주신 이름.
고 3 이다.
학교명은 중요치 않다.
아니, 그 이름 지겨워 죽겠다.
여튼 산적두목마냥 수염도 덥수룩하고
45살 노총각 아저씨같은 이 복학생은
당연히 신병교육대 옆 짜장면집도 못가봤다.
- 어쩔거나 이 청춘아~~~
- ㅋㅋㅋㅋㅋ
- 야! 쟤 깨워라~ 나 들어오고 30분 지났거든!
- ㅋㅋㅋㅋㅋ
국어시간 30분이 흘러가는 동안
창가쪽 맨 뒷자리에서
열린 창틈으로 살랑거리는 바람을 충분히 느끼며
산적수염쟁이는 계속 자고 있는 것이다.
반 동창들은 키득거리느라 배를 잡는다.
하루 이틀이 아니다.
아저씨가 자는 것을 보는게.
친구라는 생각이 드는 고딩은 없다.
아저씨가 자고 있는 것이다.
사실 국어쌤도 마찬가지다.
아저씨가 자는 것을 보는게.
제자라는 생각이 든 적이 없다.
동년배가 자고 있는 것이다.
- 으라차!!
- 슈웅~!
국어쌤의 우람한 팔뚝에서부터 시작한
풀파워가 담긴 분필.
투심 패스트볼이다.
동년배의 뚝배기가 코앞이다.
- 빠각!!!
- 앜! 아악!
- ㅋㅋㅋㅋㅋ
산적두목은 정신이 빠사질것같다.
너무 아프다.
죽음이 몰려온다.
"아~뜨뜨뜨뜨아~! 쌤요~!"
"이제 일나야지 아이씨~"
- ㅋㅋㅋㅋㅋㅋㅋㅋ
한바탕 웃음 소리가 끝날때쯤
교실 앞문이 '스륵' 하고 열린다.
- 뚜벅 뚜벅 뚜벅
백옥 같은 빛을 뚫고 문 안으로 들어서는 여자.
빛보다 더 백옥 같은 여자의 실루엣에
교실 안 모두는 동시에 입이 ‘쩍!’ 벌어진다.
통 넓은 진홍색 비단 바지.
끝단이 나팔꽃처럼 퍼져내려와 발등까지 감싼다.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올라오는 통넓은 진홍색 비단 팔아대
비단 곳곳에 멋드러지게 수놓아진 황금같은 꽃자수
가슴을 가로로 횡단하는 손가락만한 흰 가죽끈이 젖꼭지를 간신히 가린다.
아래로 빨간 꽃이 수놓아진 흰 비단천이 가슴 밑을 웃돈다.
언더붑 최강자 등판!!
양 젖꼭지부분에서 올라오는 두갈래 흰 가죽끈이
봉긋한 능선을 매끈하게 타고올라가서는
가녀린 목덜미를 맵시있게 휘감는다.
11자 복근이 선명한 백옥같은 피부.
허리춤까지 날리는 핏빛 긴 생머리
허리춤 양쪽엔 검자루 하나씩 서늘하게 걸쳐있다.
걸음걸이마다 온몸의 비단천들이 바람결처럼 나풀거린다.
바람결에 슬며시 고개를 드는 황금꽃이 비단천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듯하다.
교탁 쪽으로 걸어오는데 봉긋한 가슴이
남학생들의 눈을 가득 압도한다.
큰 눈 안으로 용암처럼 시뻘겋게 타오르는 눈동자가
국어쌤을 집어삼킬듯 노려본다.
- !!!
국어쌤은 온몸이 굳어간다.
벌벌 떨리는 손가락을 겨우 까딱거리며
'어버버' 거릴뿐이다.
여학생들은 수근거리며 질투심에 눈빛을 야리고,
남학생들은 낯선여자의 와꾸에 헤벌레 삼매경이다.
- 뚜벅 뚜벅
굽 낮은 깜장 꽃신이 교탁 앞 1m를 남겼을쯤
창가에 산적두목을 향해 눈길을 슬쩍 할퀸다.
"!!!..."
산적두목과 낯선 작안의 첫 만남.
- 스슥
꽃신이 한번 뛰어올라 국어쌤의 머리끝을 넘는다.
- 사뿐
교탁을 발끝으로 살짝 터치 후
다시 뛰어오른다.
가로막힌 창문을 향해 질주한다.
- 콰자장!
깨지는 창문 소리와 더불어 운동장 바닥에 사뿐히 착지하는 꽃신.
서서히 허리춤의 검을 뽑는다.
쌍검 여신 포스 제대로다.
그 순간,
교실 안 창가에서 정신 반 나간 산적두목 복학생 어깨에 살포시 얹어지는 손.
- !!!
돌아보니 허연 팅커벨 같이 생긴 소녀.
벚꽃색으로 물든 긴생머리는
수양버들마냥 길게 뻗어 산적두목의 손등을 '살랑 살랑' 간지럽힌다.
연분홍 눈동자와 마주친 산적 두목
잠깐 드는 생각.
'누구인가~?!'
옅은 미소를 머금는 소녀.
딱 디즈니 숲속 요정이다.
소녀는 살며시 나루의 목덜미를 잡아챈다.
"읏! 샤~"
"!!! 에훼이이~!"
- 콰자자자장!
논개처럼 나루와 함께 창문 밖으로 뛰어내린다.
- 사뿐
얼떨결에 운동장에 내려온 나루
하나도 안 아프다.
허겁지겁 뒤를 돌아보니 싱긋 웃고 있는 소녀.
"안녕ㅎㅎㅎ"
"...아, 안..!!"
- 휘휙~!!!
바람소리만 남기고 낯선 작안의 여자를 향해 뛰어가는 이름 모를 소녀.
황당하게 홀로 남겨진 나루.
그 앞에 펼쳐지는 핏빛 전투.
먼지와 섞여 어렴풋한 그림자들이 보인다.
검은 형체들이 아지랑이처럼 서서히 피어오른다.
'저,저,저게 머지...'
수능 영어 독해 문제 보는듯한 산적두목 얼굴.
그러는 와중에도, 잡것들과 한데 엉켜 핏빛 전투중인 낯선 여자와 소녀.
전투현장이 서서히 나루쪽으로 밀려온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그 현장이 점점 뚜렷해진다.
하나, 둘... 여러명으로 늘어난다.
"좀비... 실화임!!!"
그렇다. 좀비떼다.
두 히로인이 좀비떼를 패고 있다.
뚝배기 컷, 장기적출 컷 등등
본격 좀비가 불쌍해지는 잔혹 스릴러 고어물.
불쌍하지만 불사인것처럼
계속 땅을 뚫고 솓아나서 덤벼드는 좀비들.
쓰러뜨리는 수보다 더 불어나기 시작한다.
약 300마리쯤 되보인다.
- 나 왔다.. 일찍 시작했네..
- 두리번 두리번
사방을 뒤지다 올려본 옥상.
이유는 모르지만 블루투스로 듣는듯이 잘 들린다.
검정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서있는 여자.
- 스륵
바람에 실려 보내는 도포 자락.
홀연히 드러나는 흰색 저고리
무릎 위까지 올라간 볼륨감 통통 튀는 검은 치마.
흰 버선에 검정 꽃신
- 뚜벅 뚜벅
옥상 끝자락까지 걸어온다.
걸을때마다 백옥 허벅지가 치마 밑단을 ‘스르륵’ 밀어 올린다.
눈썹과 맞닿은 은발 긴 생머리의 앞머리.
은빛 눈동자 속 깊은 진동이 천지에 파도친다.
윤기 나는 우윳빛 얼굴 속 물보라 치는 분홍 볼터치.
취두에서 용두까지 매끄럽게 내려앉은 눈처럼 흰 콧날.
살포시 여신 자태를 잡고 서는 여자.
절대자가 빗어낸 마네킹처럼 또는 조각상처럼..
온몸에서 폭발하는 고혹미.
운동장 안 모두의 마음을 흔들어댄다.
나루의 뇌속에 한가득 쌓이는 의문점.
'누구인가~?!'
‘쿵쿵쿵’ 소리에 교실 안 창문이 울린다.
- !!!
돌아보는 학생들.
창가로 걸어오는 거구의 아가씨.
메이드복. 무릎까지 내려온 앙칼진 금발 머리.
금불상처럼 온화하면서도 부리부리한 황금빛 눈매.
테닝한 듯한 구릿빛 피부.
야성적이고 근육질이지만 육감적인 몸매.
등에 메여 있는 2m가 넘는 대형 뿅망치.
잠깐 움츠렸다가 높이 뛰어올라 창문 여러 개를 ‘와장창’ 뚫고 뛰어내린다.
- 휘우우우웅~!!
모래바람이 회오리치며 운동장을 급히 빠져나간다.
나란히 서있는 진홍 비단, 분홍 팅커벨, 금발 메이드.
‘으르렁’거리며 다가오는 검은 좀비들.
진홍 비단이 시뻘건 머릿결을 쓸어내리며 모델워킹으로 걸어나간다.
"이 새끼들 오늘 정말... 못. 생. 겼. 다..."
금발 메이드가 따라나서며 한 마디 거든다.
"왜 그래~ 적응해야지~ 그래도 우리 귀~한 밥줄이잖아~ 후후후~"
손목 시계를 만지작거리며 뒤따르는 분홍 팅커벨.
"오늘은 좀 빨리 끝내자구~"
나루를 쓸쩍 한 번 보면서 미간을 쪼인다.
"새 식구랑 스케줄이 빡빡하거든~"
만사 귀찮은 표정의 진홍 비단이
쌍검을 뽑아들고서 중저음으로 비장하게 주문을 읊조린다.
"타올라라..."
- 화아아아악~!!!
지옥의 맹렬한 불길이 쌍검을 휘감아 돌며 타오른다.
노여움을 참지 못하고 분개하는 진홍 동공의 머릿결이 씨뻘겋게 회오리친다.
걸음걸이마다 분노의 공포가 지천으로 대방출!!!
- 우우우우~
빠짝 쫄은 좀비떼들...
목과 어깨를 자연스럽게 스트레칭 하며 '쿵쿵쿵' 걸어가는 금발 메이드.
"잡도리 타임~! 돈 벌러 가세~!"
중저음으로 중후하게 주문을 읊조린다.
"눈부시게..."
- 꽈꽈꽝!!!
금빛 낙뢰가 벼락같이 금발 메이드의 뽕망치에 내려꽂힌다.
토르 육감 여신 버전.
분홍 팅커벨이 손목시계를 연신 만지작 거린다.
"아라숑~ 아라숑~ 기다리숑~."
중저음으로 차분하게 주문을 읇조린다.
"너를 위해..."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세 여자를 감싸돈다.
드래곤볼 선두마냥 기운이 샘 솟는 세 여자.
바람에 실려 운동장에 스며드는 음악.
'House of the rising sun'
블루투스처럼 선명하게 귀에 때려박힌다.
런 타이밍을 놓친 좀비떼들이 눈치보며 뒷걸음질이다.
그 순간,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세 여자.
불타는 쌍검이 빛의 속도로 춤춘다.
살이 찢기고, 피가 터져 나오는 좀비들.
불타오르는 땅 위의 주검들.
풍차 돌듯이 휘몰아치는 뽕망치.
번개 스윙에 머리가 터지고, 허리가 두 동강 나는 좀비들.
타들어가는 땅 위의 주검들.
- 벌써 시작했군...
먼 발치 학교 옥상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은발 여신.
자세를 고쳐 잡고 전투자세를 취한다.
양 손에 생겨나는 은빛 활과 화살.
하늘 위를 향해 활시위를 당긴다.
하늘 자욱히 내리깔린 은빛 구름.
중저음으로 날카롭게 주문을 읊조린다.
"사라져라..."
화살이 ‘슝~!’ 하고 구름 위를 뚫고 사라진다.
몇 순 후, 바람 소리가 인다.
- 휘이이이잉~!
다음 순간, 땅 위로 쏟아져 내리는 무수한 은빛 화살들.
- 후두두두둑!!!
좀비들 몸에 수십 개의 화살이 박힌다.
땅바닥으로 고꾸라진다.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땅 위로 사뿐히 뛰어 내리는 은발 여신.
세 여자 손에 든 무기들이 사라진다.
진홍 비단이 투정 섞인 인사를 건넨다.
"언니! 왜 이렇게 늦게 와!
금방 갔다 온다면서... 괜히 땀 뺐네..."
"출장이냐 또?"
"응 언니. 요즘 자주 그러네..."
분홍 팅커벨이 진홍 비단에게 바싹 다가선다.
"킁킁. 윽!! 웩!!! 겨 땀 작렬~!!!"
"뭐! 이게~! 내가 어, 어디가! 냄새가 난다고! 그러냐!!"
"하! 하! 하! 맡아 봐뢋!"
팅커벨의 양 손은 이미 코를 틀어 막고있다.
눈치보다 슬쩍 맡는 진홍 비단.
흠칫 놀란다.
잔뜩 움츠려 떨고 있는 나루를 보면서
은발, 금발, 분홍발이 차례대로 얘기한다.
"쟨 누구야?"
"새 식구ㅎㅎ"
"오늘 결정 났어. 마스터님이 데리고 오랬어."
차가운 은발의 눈길.
천천히 눈 까는 나루.
"난 청이야!ㅎㅎ"
슬쩍 올려보는 나루.
분홍발이 눈길, 손길로 금발, 은발, 진홍발을 순차적으로 가리키며 뒷말을 이어나간다.
"민이 언니가 젤 큰 언니고, 순이 언니가 둘째 언니고,
시뻘건 언니가 셋째 향이 언니ㅎㅎ 그리고 내가 막내 청이ㅋㅋㅋ"
"..."
- 휘이이이잉~!
나루와 네 여자.
황망한 모래바람에 휩싸인다.
바람이 사라지고
운동장엔 아무도 없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