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알 것 같다. 글을 쓴다는 게 무언지. 난 신기루를 좇고 있었다. 글을 쓰면서 밥 먹는 것을 너머 어깨를 으쓱하는 대작가를 노렸다. 아니라고 하면서도 아니라고 머리칼을 쥐어뜯으면서도 사실 그랬다.
내 안에 깊숙이 자리해서 날 바라보니, 그게 맞다. 이런 제길.
돌아가 보자, 내가 왜 글을 썼는가.
그래, 어떤 꿈을 좌절시키고, 에이 글이나 쓰자 했던 것이다. 모자란 놈 같으니라고. 글이 어떤 고귀한 꿈의 대타라도 된단 말인가.
아니다, 어쩌면 글이란 게 좌절의 공간일지도 모른다. 부족한 자신에 대한 증오와 변명의 조각일지도.
글을 왜 썼을까. 딱 두 가지로 좁힌다.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누런 종이의 깨알 같은 글씨를 읽는 맛, 현실은 정해진대로 돌아가는데, 복잡한 감정이 얽히고 설킨 인물의 낭만들,,,
난 그것에 매료됐었다. 뭐랄까. 숨을 쉴 수 있었다. 소설 안에서는 내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내 자아에 대한 표현 도구로써, 나는 소설을 사랑했다. 정확히 말하면 시를 사랑했다. 글을 사랑했다. 사정과도 같은 것이었다. 상대의 몸매가 섹시한지, 오래도록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테크닉이 기막힌지, 그따위 것은 관심 밖이었다. 그저 사정을 하는, 그 카타르시스에 나는 주목했다.
이제 알 것 같다는 말, 글에 대한 담론, 내 두려움, 그런 것을 논하는 게 이제는 지루하다. 누구는 어깨에 힘을 빼라고 했지만, 그런 의미에서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난 오래전에 행동하지 않는 문학은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선언한 바 있다. 이미. 그러면서도 내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딱 하나다. 방송작가를 해왔듯 오래 달리고 싶어서다. 문학을 하면서 밥을 먹고 싶어서다. 이런 지루한 고민 없이는 문학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소설을 쓰기 위한 워밍업인 것이다.
죽어버린 수많은 작가 또한 홀로 이러한 글을 썼으리라. 공개하지는 못했겠지만, 영혼의 불을 꺼뜨리지 않으려 발버둥쳤을 것이다.
내 초라한 서재에, 책이 나뒹군다. 침대에 이불이 나뒹군다. 아이의 인형이 버려 있다. 선풍기가 잔잔히 입김을 불고 있다. 싸구려 노트북에 내 글귀가 새겨진다. 곡조의 선율이 가득이다. 이장혁이 몽롱한 보이스로 날 애무한다.
그렇게 나는 글을 쓸 것이고, 그대는 날 찾아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린, 웃음으로 눈물로 종종 만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