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6-29 16:09
[스토리테마파크] 저희 남편은 사도세자의 죽음과 무관하옵니다 - 상소에 거론된 자의 아내, 둥둥둥! 신문고를 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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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스토리야
조회 : 5,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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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ory.ugyo.net/front/sub03/sub0303.do?chkId=S_KSH_0064 [882] |
1792년 5월 16일, 이이상(李頥詳)의 아내가 이상(頥詳)이 남학(南學)에서 올리는 상소에 들어간 것 때문에
신문고(申聞鼓)를 쳐서 원통함을 호소하였다고 한다.
배경이야기
◆ 조선 정조대 신문고의 운영
1, 2차 만인소를 통해 사도세자 사건을 재조사해야 하며 더 나아가 사도세자를 위한 토역(討逆)을 주장하게 된다.
여기에 거명된 인물들은 현 왕의 친부를 죽음으로 몬 역적에 해당되는 것이다. 여기에 거명된다는 것은 멸문지화를 당할 수 도 있다.
그러하기 때문에 사도세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인물들은 좌불안석이었을 것이다.
이이상의 아내가 박하원의 상소에 남편의 이름이 보이자 신문고를 쳐서 남편의 억울함을 풀려하였던 것도 이러한 연유였을 것이다.
이이상의 이름은 외방 유생(儒生) 박하원(朴夏源)의 상소에 나온다. 그 상소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서명응이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을 때 솔선해 응모(應募)하여 이불을 안고 반궁(泮宮)으로 들어가 3일을 유숙하면서 재생(齋生)
가운데서 이익을 좋아하고 세력을 쫓는 자를 불러모아 꼬여내고 이끌기를 못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늙어서도 죽지 않고 있던 안형(安衡)·황만석(黃萬錫)과 궁하여 갈 곳이 없던 이이상·송재덕이 머리를 숙여 그 명을 듣고 당류(黨類)를 불러들여 고약한 무리들의 성명으로 변환(變幻)하여 관학소(館學疏) 모양으로 만들어 참독한 모의를 이루었습니다.
그가 또 이어서 흉서를 얽었는데 ‘명륜당에 앉아서[坐明倫堂]’이란 네 글자는 이것이 어떤 말이기에 함부로 써서 제생(諸生)에게 보여 읽도록 하고, 마침내는 그 글을 가지고 말을 타고 떠났습니다.
이이상은 빨리 나가서 등자를 잡고서 말하기를 ‘선생의 채찍을 잡는 졸개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그후에 명응이 이상을 소개하여 역적 홍계능에게 몸을 의탁하게 하였고, 이상은 명응을 의지하여 영록(瀛錄)에 이름이 끼게 되었습니다.
〈정조실록 35권, 16년 5월 12일〉 그러나 정조는 상소를 보지 않았고 가져다가 없애버리게 하였다.
이는 뒤에 다시 “이른바 남학(南學)의 상소에 대해서는 바로 불태워버리라고 했는데 내가 비록 보지는 못하였으나 참으로 매우 비참하더라고 하였다. 그리고 전 좌상의 문제는 참으로 너무나 개탄스러운 것이다.”하였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정조실록 36권, 16년 11월 11일〉
영조때 성균관생들이 동궁의 유람을 경계하는 상서를 올리자 관학 유생(館學儒生) 안형(安衡)·이헌·원계하(元啓夏) 등을 인대(引對)하였다.〈영조 97권, 37년(1761 신사 / 청 건륭(乾隆) 26년) 4월 22일(신묘)〉 이 때 이이상은 대표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이이상이 정조때 사도세자문제로 어떤 정치적 유배나 형벌을 받지 않는데 이는 정조가 남학의 상소를 보지 않아서인지, 이이상이 사도세자 죽음에 직접적 영향이 없었는지 모르겠으며 이를 이이상의 아내가 신문고를 통해서 무관함을 주장해서 인지 알 수는 없다. 하여튼 이이상은 삳세자문제로 어떠한 정치적 형을 받지는 않았다.
출전 : 천휘록(闡揮錄)
저자 : 권방(權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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