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04-12 16:06
[스토리테마파크] /가족, 영원한 동반자/ 죽은 아이를 스스로 묻는 아버지, 비통함에 잠식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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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작협
조회 :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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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ory.ugyo.net/front/sub01/sub0103.do?chkId=S_PHS_1024 [383] |
1604년 7월 9일, 오후에 내성(奈城)에서 종이 왔다. 장모님이 초이틀부터 이질(痢疾)을 앓아 몹시 고생한다고 전했다.
김령은 몹시 놀랍고 걱정되었다.
7월 11일, 김령은 밥을 먹은 뒤 내성으로 향했다. 날이 저물어 당도했다. 장모님의 증세는 조금 잦아들었다. 서늘한 달이 매우 좋았다.
7월 16일, 장모님의 병이 여러 날이 지났지만 차도가 없어 온 집안이 우려하고 있다. 권책(權策) 군과 정사경(鄭思敬) 군이 와서 종일
대화했다. 열엿샛날 저녁 달빛이 더 아름다웠다. 김령은 종 청산(靑山)을 집으로 되돌려 보냈다.
내일 집사람이 장모님을 문안하러 와야 하기 때문이다.
7월 17일 오후에 집사람이 도착했다. 장모님의 증세는 15일부터 조금씩 덜해졌다.
7월 26일, 그런데 김령의 큰 아이가 23, 24일경부터 이질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다.
8월 1일, 김령은 아이의 병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아 몹시 우려했다.
8월 4일에는 아이의 병이 이미 위급한 선을 넘어 버렸다. 오시가 못 되어 갑자기 손을 써 보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김령은 비참하고 아이가 가련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류계화(柳季華)가 하회(河回)에서 그의 처가에 당도하여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8월 5일, 아침에 류계화가 위로하러 왔다. 오후에는 평보 형도 김령을 방문했다. 저녁에 여러 가지 장례 도구를 준비했다.
내일 길을 나설 예정이기 때문이다. 계화가 밤에 와서 같이 잤다.
8월 6일, 새벽에 죽은 아이를 들것에 담아 메고 조상 묘소가 있는 선산(先山)으로 길을 나섰다.
평보 형과 급하게 달려 방잠(芳岑)에 당도해서 선영(先瑩)의 왼쪽 산자락에 묻을 곳을 결정했다. 오후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집사람도 뒤를 따라왔다. 돌아갈 때 홍우형(洪遇亨)이 보호해서 집까지 따라갔다.
8월 7일부터 14일까지 김령은 일기조차 쓸 수 없었다.
배경이야기
◆ 조선시대 어린이의 장례
상례란 가족 내 구성원의 사망을 당하여 망인을 송종(送終)하는 의식 절차를 말한다. 망자와 가족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집행되는 것이 상례이므로, 상례는 가족의 유형, 친족조직, 재산상속과 제사상속 입양제 등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상례의 유형이나 그 의식절차는 한 사회의 가족제도의 변화와도 긴밀한 관련이 있는 것이며, 나아가서 가족 친족의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한 사회의 풍속 형성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더구나 종교의 신앙이나 이상과 관련하여 상례의 진행과 장법의 유형이 결정되는 것을 본다면, 상례가 사회 구성원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작지 않은 것이다. 또한 상례의 집행에 있어서 송종(送終)에 필요한 상구(喪具)와 상복(喪服) 및 제찬(祭饌) 등을 준비하거나 장만하는 데 필요한 경비도 여타 의례에 비하여 그 규모가 크기 때문에 경제적 관점에서 그 규범의 적절한 양식에 대한 논의가 수반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한국에서는 상례는 효(孝) 의식과 관련된 윤리 도덕의 문제를 안고 있는 의례로서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다. 다시 말하면 상례는 사회의 풍속, 가족제도 및 인간관계, 경제의 문제, 그리고 윤리 도덕 등과 관련되면서, 사회 구성원의 사고의 논리 및 가치관의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고, 죽음을 대하는 의식(儀式)을 통해서 삶의 의식(樣式)을 결정하는 문화적 요소로서도 매우 중요하다. 이 점은 상례 뿐 아니라 제례, 관례, 혼례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죽음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상례만큼 삶의 이유와 방향에 대한 자각을 가져다주는 힘이 큰 의례는 없다고 할 수 있다.상례는 종교와 문화에 따라 다양한 방법과 유형이 존재하는데,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그리고 현대까지의 기간 동안 한국의 상례는 그 유형의 변화가 컸다. 무속이 지배적 종교이던 시기, 불교가 융성했던 시기, 유교가 융성했던 시기에 따라 각각 해당 종교의 이념과 의식체계에 입각한 상례가 정착되었던 역사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 조선시대의 상례문화
조선시대에 유교식 상례 문화가 보편화되는 계기는 위로부터의 법제 제정과 실천의무의 강제도 있었지만, 사족(士族)들의 유교식 상례의 준행과 예학의 자발적 추구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유교식 상례의 기준은 <주자가례>에 두어 왔다. 일반 사대부가(士大夫家)의 의례에서 <주자가례>의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의식 절차와 그 틀은 유지된 셈이지만, 조선시대 중엽부터 고조되는 합례적(合禮的) 생활의 완벽화에 대한 사족들의 요구에 <주자가례>는 부응하지 못한다. 즉 <주자가례>는 그 항목과 이념상에 미비한 점과 불완전한 점이 있었던 것이 중요한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에 일차적으로 주목한 집단은 성리학자들이었다. 성리학자들의 예학은 그 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강구된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조선의 성리학자들의 예학은 <주자가례>의 틀을 그대로 보전하고 미비한 내용들을 <의례>, <예기> 등의 경전으로부터 충족하여 보다 고례에 충실한 유교식 의례를 거행하려는 경향이 강화된다. 이황(李滉)과 김장생(金長生) 같은 학자들은 그 노력을 했던 대표적 학자들이다.<주자가례>의 미비함을 느끼고 그것을 보충하거나 보완하는 작업의 한 예로서 김장생(金長生)가 신의경(申義慶)의 편찬을 보완하여 만든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들 수 있다. <상례비요>의 <주자가례> 보완작업은 대략 5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의례<儀禮>를 쫓아서 증보한 것. 초종(初終)에서 설치(楔齒), 철족(綴足), 습(襲)에서 설빙(設氷), 소렴(小斂)에서 수질, 요질, 주인지배빈습(主人之拜賓襲)질, 대렴(大斂)에서 포교금의(布絞衾衣), 조석곡전(朝夕哭奠)에서 조곡(朝哭), 석곡(夕哭), 치장(治葬)에서 고계기(告啓期) 등을 둔 것. 둘째, 예기<禮記>를 쫓아서 보입(補入)한 것. 성복(成服)에서 심상삼년(心喪三年)을 보입하고, 대상(大祥)에서 음주식육(飮酒食肉)을 <예기>간적(間傳)에 의거하여 담후로 옮기고 대상(大祥)의 천주(遷主), 복침(復寢)을 <예기>상대기(喪大記)에 나오는 길제이복침(吉祭而復寢)의 예문에 의거하여 길제 뒤로 옮긴 것 등. 셋째, 역복(易服)에서 <예기>상대기의 정현(鄭玄)의 주를 쫓아서 심의(深衣)로 고친 것. 넷째, 가례의절<家禮儀節>을 쫓아서 보입한 것. 길제, 개장(改葬) 두 장은 <주자가례>에 없던 것인데 <가례의절>로부터 보입한 것이다. 다섯째, 시속(時俗)을 따른 것. 성복(成服)에서 효자가 출입할 때 물최(墨衰)를 입는 것은 고례도 아니고 국속도 아니므로 속제를 쫓아서 방립생포직령(方笠生布直領)으로 대신한다는 것이다. 사계의 <상례비요> 뿐 아니라 이 시기에는 鶴峯(학봉 김성일), 西厓(서애 유성룡) 등의 상례고증<喪禮考證>과 같은 상례관계 예서가 편찬되었다. 물론 각각의 예서마다 서로 다른 입장이 있는 것은 사실이더라도 근본적으로는 유교식 상례의 보다 완벽한 실천을 위한 의례 절목의 구비와 모색이라는 점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학의 실천적 기풍과 학문적 심화는 이후 조선시대 상례에 있어서 유교식 의례의 토착화에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상례(常禮)뿐 아니라 변례(變禮)까지도 포함하는 관혼상제의 의례의 목록집(상변통고<常變通攷>)이 편찬되고, 한글가사체 상제례 홀기의 제작과 사용, 한글번역본 <초종례요람>과 같은 예서의 편찬 등의 현상은 예학전통의 심화와 유교식 상례문화의 자생적 번성의 기틀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18, 19세기 영남지역의 현상이지만 그 분위기는 다른 지역에서도 공통된 현상이라고 추정된다. 영남지방에서는 조선이 멸망한 뒤까지도 지속적으로 가례서(家禮書)들이 발간되고, 18,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영남의 각 지역별 문중별로 가가례(家家禮)의 현상을 보이고 또한 가가례의 다양한 내용을 담은 가례서들이 편찬 발간되기도 하였다[경북예악지]. 성리학자들에 의하여 정착되고 보급된 <주자가례>중심의 상례문화의 가장 커다란 특징은 종법제에 커다란 비중을 둔 점이다. 사계의 예학에서는 복제(服制)를 통해서 불이통(不二統), 무이존(無二尊), 무이참(無二斬)을 수립하고, 통(統)에서는 인정보다는 의리(명분)을 중시하는 경향을 낳게 되었다. 이에 비해서 영남지역의 예학은 의리와 더불어 인정과의 조화를 중시한 점이 상대적으로 크다고 인정되지만, 전반적으로 성리학의 예학으로서 기호지방의 예학과 대동소이한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사계의 예학에 근원을 둔 기호지방의 예학과 예문화는 退溪(퇴계 이황), 寒岡(한강 정구) 愚伏(우복 정경세) 등에 근원을 두는 영남지방의 예학 예문화와 상호 경쟁하거나 교유하면서 조선 후기의 예문화를 이끌어 왔다. 이 과정에서 <주자가례>식 상례문화가 일반화되고, 유교식 복제가 준행되면서 가족의 유형, 친족조직, 재산상속과 제사상속, 입양제 등이 종법제에 근거한 유교식 가족구성의 원리로 확고하게 정착되었다.
- 예장(禮葬)
예장은 조선시대에 세자와 세자빈에 대한 장례다. 왕과 왕비의 장례는 '국장(國葬)', 황제의 장례는 어장(御葬)이라고 칭했다. 종친.공신(功臣).종 1품 이상의 문.무신 가운데 공이 큰 이가 죽어도 나라에서 예를 갖추어 '예장'으로 장사를 지내기도 했다. 국장과 예장은 규모에서 차이가 날 뿐 절차는 유사하다. 국왕이나 세손이 서거하면 당일에 장례의 집행을 담당하는 도감(都監)이 설치되고 이곳에서 각종 업무를 담당할 관리가 차출됐다. 국장의 절차는 '국장도감 설치→빈전 마련→성복(상주들이 상복을 입음)→발인→하관(관을 구덩이에 내림)→반우(신주를 궁궐로 가져옴)→국장도감 해산'의 순서로 진행됐다. 이렇듯 예장(禮葬)은 훙서한 날로부터 시신을 매장하고 신주(神主)를 혼궁(魂宮)에 모시기까지 약 3개월이 소요되었다. 예장도감(禮葬都監)은 이 기간 동안 설치되어 예장과정의 전반을 주관하였는데, 이 외에도 빈궁혼궁도감(殯宮魂宮都監), 묘소도감(墓所都監) 등이 함께 설치되어 업무를 분담하였다. 사도세자는 영조(英祖)의 둘째 아들로, 생모(生母)는 영빈 이씨(映嬪李氏)이다. 부인은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이다. 이복형인 효장세자(孝章世子, 후에 진종(眞宗)으로 추존)가 일찍 죽고 난 후 태어난 지 1년 만에 세자(世子)로 책봉되었고, 10세에 혜경궁 홍씨와 가례(嘉禮)를 올렸다. 세자시절 소론(小論) 계열의 학자들로부터 학문을 배워 그 영향을 받았고, 10세 때 경종(景宗) 때 발생한 신임옥사(辛壬獄事)를 노론(老論)이 잘못 처결하였음을 비판하였다. 1749년(영조25)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게 되자, 이후 세자가 왕위에 오를 경우 자신들의 입지가 위축될 것을 우려한 노론에 의해 자주 비난을 받았다. 결국 1762년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실덕(失德)과 비행을 지적한 10조목의 상소를 올렸고, 이에 영조는 크게 노해 세자를 휘령전(徽寧殿)으로 불러 자결을 명했다. 그러나 세자가 끝내 자결하지 않자 그를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뒤주 속에 가두어 8일 만에 죽게 했다. 사도세자예장도감의궤(思悼世子禮葬都監儀軌)는 1762년(영조38) 윤5월 21일 사도세자의 훙서 이후, 7월 23일 그 신주를 혼궁에 봉안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예장의 제반 절차를 비롯하여, 관련 관서 간의 협조 과정, 장례에 필요한 각종 기물의 종류와 규격 및 그 제작에 소요된 물품의 종류, 수량과 그 조달 과정 등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예장에 쓰인 기물들을 그린 채색도가 다수 수록되어 있다. 조선후기 세자의 예장 모습을 생생히 파악할 수 있으며, 당시 사회사, 경제사, 문화사, 생활사 등 각 방면의 연구에 활용 가치가 높은 자료이다. 세자의 예장 절차에 관한 규정이 조선 중기까지 마련되지 않았다가 1752년·1758년에 편찬된 『국조상례보편』에 처음으로 등록되었다. 이후 조선 왕실의 상장례는 1758년본 『국조상례보편』에 따라 치러졌고, 이 전례서에 따라 치른 최초의 소상이 바로 정조의 첫째 아들 문효세자의 예장이었다. 그렇다고 문효세자의 상장 의례를 추진하면서 『국조상례보편』에만 전적으로 의존한 것은 아니었고, 기본적인 규정은 『국조상례보편』을 따르되 실제 행례할 때에는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예장을 전례로 삼았다. 문효세자는 1786년 5월 11일에 훙서했고, 윤7월 19일에 효창묘에 가서 장례를 치렀다. 윤달을 계산하지 않으면 훙서한 지 3월만에 장례를 치렀다고 볼 수 있다. 우제는 오우제까지 지내고, 喪期는 삼년이 아닌 기년이었기에 소상제를 기점으로 ‘자최기년복’을 입었던 정조가 상복을 벗었다. 이후 대상제, 담제를 차례로 지냈고, 마지막으로 거행되어야 할 입묘 절차는 담제를 지내는 날 거행되어야 했지만, 문희묘의 건립이 지연되면서 미뤄졌다. 문효세자 보다 4달 뒤에 졸한 생모 의빈성씨의 사당과 함께 공역을 추진하면서 완공이 미뤄지다가 마침내 1789년에 가서야 문희묘에 봉안될 수 있었다. 세자의 예장이기 때문에 의절 담당자의 직위, 소용되는 물품수, 동원되는 인원수 및 각 의절을 거행할 때마다 국왕의 국장보다 한 등급 낮춘 채 진행되었다. 실제 행례할 때 효장세자의 예장을 전례로 삼았기에 정조는 ‘참최삼년’이 아닌 ‘자최기년’의 상복을 입고 기년으로 아들의 장례를 치렀다. 이를 통해 현종대 복제 예송이 이 시기까지 여파가 미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상장례를 치르는 동안 문효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역적과의 공모, 독살설의 제기 등 정치적으로 크게 문제될 만한 일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정조가 관련 의혹을 일축하고 의혹의 확산을 막고자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정치적으로 큰 문제없이 조용히 넘어갔다.
- 어린이의 장례
1669년 두 외손녀의 상례: 법도 밖의 지극한 인정(人情)송시열은 윤단에게 시집간 딸에게서 난 혜온과 차온 두 손녀가 있었다. 두 외손녀는 연달아 “시집갈 나이”에 죽었으니 미혼으로서 19세에서 12세 사이의 장상(長殤)과 중상(中殤)에 해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송시열은 이들을 위해 제문을 써 곡진한 슬픔을 표현했다. 1669년 3월 22일자로 송시열이 쓴 혜온의 제문을 보면 외할아버지인 송시열이 외손녀 초상의 상주가 되어 장례를 치러 주었음이 드러난다. 주자가례에 따르자면 외손에 대한 복제는 시마삼월이다. 게다가 상사(殤死)에 해당한다면 강복을 하는 것이 주자가례의 법이니 시마삼월을 내려 입으면 복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송시열은 외손녀 초상에 상주가 되어 빈소를 마련하고 조석으로 상식을 올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제문의 내용에서도 확인된다. 혜온의 어머니와 동생이 초상을 다 치루지 않은 상태에서 서쪽으로 돌아가고 난 뒤에 혜온의 관을 지킬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송시열이 빈소를 자신의 집으로 옮기고 상식을 하며 초상을 치루었던 것이다. 그리고 1년 뒤에 혜온의 동생 차온이 죽자 송시열은 불쌍한 외손녀 자매의 뒷날을 위해서 신주를 만들게 된다. 처음에 언니 혜온이 죽었을 때에는 신주를 만들지 않았다가 동생인 차온까지 죽자 언니인 혜온의 신주를 만들어 동생의 신위를 겸했던 것 같다. 실상 신주를 만드는 것은 망자와 그에 대한 봉사를 받들 후계의 관계를 밝혀 명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당에 부제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미혼으로 제사를 받들 자손이 없이 죽은 외손녀를 위해 외할아버지가 상례를 주관하고, 실제적인 쓰임이나 효용이 거의 없었을 것으로 보이는 신주를 만들었던 것은 그들에 대한 사랑에 기반한 인정(人情)이 주자가례는 물론이고 어떠한 예경의 법조문도 넘어섰기 때문으로 보인다. 전통적 유교 윤리관에서는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손을 불효자로 여겨 정상적인 장례절차 없이 화장이나 공동묘지에 지석도 비석도 표지도 없이 매장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경기도 양주군 양주읍 광사리 선산에서 이장작업을 하던 해평윤씨 문중에서 350년 전 조선의 꼬마무덤이 발굴 되었다. 이 무덤에는 작은 소나무 목관과 흰 광목에 싸인 주검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물에 젖어 얼어붙은 옷들을 손바닥 체온으로 녹이며 하나씩 조심조심 벗겨 나가니, 그 주검은 어른의 중치막(옆이 트인 포 종류의 겉옷)과 멱목(주검 얼굴을 덮는 천) 아래로 편안히 잠든 것처럼 보이는 어린아이 얼굴이었고, 곧게 탄 가르마와 어제 땋은듯한 검은 머리채가 남아 있었다. 수백 년 전 어린이의 모습이었다. 해골의 치아 발달과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 토양의 꽃가루 분석 등을 종합한 결과 아이는 300~350년 전(1650년대) 5월의 어느 따뜻한 봄날 5살의 나이로 숨진 것으로 밝혀졌다. 무엇보다 세간의 관심을 끈 것은 여기서 나온 옷가지들이다. 아이는 어머니 것으로 보이는 장옷을 요처럼 깔고 아버지의 중치막을 이불삼아 덮고 누워 있었다. 어린 자식을 차가운 땅 속에 묻으며 애통해하던 부모의 심정이 나타난 대목이다. 지석도 비석도 표지도 없는 무덤의 경우 여기서 나온 ‘출토복식’은 시대를 알려주는 가장 유력한 물증이다. 이 무덤은 각종 과학적 조사 자료가 되기도 할뿐더러 옛 사람들의 개인적 취향과 시대적 유행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요즘엔 장례 때 삼베로 ‘수의’를 따로 지어 입히지만 옛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평소 입은 생활복을 그대로 입혀 묻었기 때문이다. 이런 매장문화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품이 넉넉한 옷 대신 몸에 꼭 맞는 옷이 유행하면서 ‘수의용’ 옷들을 따로 만들면서부터다. 일제시대에는 각종 물자가 부족해 삼베 일색이 됐고, 오늘날엔 오히려 똑같은 모양의 삼베수의가 수백만원을 호가하며 팔리는 상황이 돼버렸다.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도 일찍이 자식을 잃었었는데, 그 때 가슴에 맺힌 한을 시에 담아 표출하였다.
哭子 (곡자-자식 죽음에 슬피 울다)....許蘭雪軒 (허난설헌)
去 年 喪 愛 女(거년상애녀)...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잃고 今 年 喪 愛 子(금년상애자)...올해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네 哀 哀 廣 陵 土(애애광릉토)...슬프디 슬플 광릉땅이여 雙 墳 相 對 起(쌍분상대기)...두 무덤 마주하고 있구나 蕭 蕭 白 楊 風(소소백양풍)...쓸쓸한 바람 백양나무 사이로 불고 鬼 火 明 松 楸(귀화명송추)...무덤가에는 도깨비불 번쩍이는데 紙 錢 招 汝 魂 (지전초여혼)...지전으로 너희 혼을 부르고 玄 酒 存 汝 丘(현주존여구)... 너희 무덤에 현주를 놓는다 應 知 第 兄 魂(응지제형혼)...응당 너희 남매의 혼은 서로를 알아 夜 夜 相 追 遊(야야상추유) ...밤이면 밤마다 어울려 놀겠지 縱 有 服 中 孩(종유복중해)... 비록 뱃속에 아이가 있지만 安 可 冀 長 成(안가기장성)...어찌 잘 자라기를 바라랴 浪 吟 黃 坮 詞(낭음황대사)...하염없이 황대사를 읊으며 血 泣 悲 呑 聲(혈읍비탄성)...피눈물로 슬픈 울음소리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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