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05-19 03:36
[스토리테마파크] -백성과 신하의 만류를 묵살한 왕의 피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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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스토리야
조회 : 1,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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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ory.ugyo.net/front/sub01/sub0103.do?chkId=S_LKH_0004 [279] |
적의 칼날은 피하지 않을 수 없다
1592년 5월 7일, 선조는 왜적들의 난을 피해 평양에 도착하였다. 약포(藥圃) 정탁(鄭琢)은 당시 내의원제조(提調)로서 왕을 호종하여 함께 평양에 왔다.
정탁은 선조의 파천 날 새벽까지 왕궁의 약방에서 끝까지 일을 마무리하고 선조를 호종하기 위해 임진강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선조는 이미 임진강을 건넌 뒤라 나루 근처 주막에서 하루를 묵고 그 다음날 강을 건너 임금을 호종하였고, 평양까지 따라온 것이다.
평양에서 선조는 정치적으로 여러 인사를 단행하였다. 비록 여러 가지로 정세는 어수선했지만 선조는 평양에 머물며 백성들을 위로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과거를 실시하여 군사들을 충원하려 하였다.
그러나 6월 1일 임진강 방어에 실패했다는 도순찰사(都巡察使) 김명원(金命元)의 장계가 이르렀다. 행재소의 경계는 삼엄해지고 급한 마음에 선조는 파직했던 유성룡(柳成龍)을 다시 불러들이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아직은 여유로운 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동강이 적을 막아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선조는 마음을 놓을 수만은 없었다. 이에 6월 6일 내전(內殿)과 세자빈을 보다 안전한 함흥부(咸興府)로 곡절 끝에 보냈다. 또한 명나라에서 온 관료들을 맞이하여 조선의 상황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정탁은 왕의 곁에서 하나하나 지켜보았다.
6월 8일 왜적들이 대동강에 나타났다. 선조는 덜컥 겁을 먹었다. 선조는 곧장 파천하려 하였다.
다음 날인 6월 9일 대가(大駕)가 영변으로 출발하려 하였다. 그러자 평양의 백성들이 왕의 행차를 막아섰다. 비록 왕을 호위하는 무사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평양 백성들의 민심 역시 흉흉하고도 사나워 함부로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고, 선조도 그러했다. 6월 6일 내전이 함흥으로 갈 때도 백성들은 내전을 시종하기 위해 먼저 나아가는 하인들을 겁박하고, 호조판서 홍여순(洪汝淳)은 성난 백성들에게 두들겨 맞아 부축을 받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백성들이 대가가 떠날까 하여 먼저 막은 것이다. 6월 9일 결국 대가는 평양을 떠나지 못하였다.
6월 10일, 선조는 다시 떠나려고 승여(乘輿)가 준비되었는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유성룡이 들어와 더 이상 서쪽으로 행행(行幸)하지 마시기를 간언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뜻은 꺾이지 않았다.
정탁은 다시금 선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승정원으로 나아가 다음과 같이 청하였다.“국운이 불행하여 바다의 왜적들이 자기의 세력만 믿고 침범하니 전하의 행차[大駕]가 서쪽으로 옮겨와 겨우 한 모퉁이에서 보존되고 있기에 신은 이루 통곡하여마지 않나이다. 그러나 전하의 행차가 평양부[本府]에 머무르시어 평양의 성과 해자를 굳게 지켜 회복을 도모하심이 진실로 좋은 책략입니다. 그런데 조정의 의론이 한결같지 않아 혹 적의 칼날이 이미 핍박하여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며 전하의 생각 역시 그러하다고 여기는 이가 있다면 비록 대신의 말이더라도 받아들이지 마옵소서. 장차 오늘 전하께 올리는 계언(啓言) 때문에 신은 먹어도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가 않을 것입니다. 서울을 지키지 못한 것은 이미 지난 일이라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행히 이곳 성곽은 그럭저럭 완비되어 있고 인민(人民)들이 많으며 창고의 식량도 아직은 공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동강[浿江]의 물은 이른바 중국 장강(長江)과 같이 천혜의 참호입니다. 게다가 인민들이 성왕(聖王)의 길을 힘써 막는 것을 보면 모두가 적개심을 품고 있으니, 평양성의 남녀노소 모두가 나아가 성을 지킬 것입니다. 인심(人心)이 이와 같으니 이는 실로 크게 길한 징조입니다. 하물며 지금 이일(李鎰)이 이끄는 군사들이 이미 이르렀고, 명나라 군대 역시 장차 구원하러 올 것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이것으로 깊이 들어온 적을 깨부수어 중흥의 공이 세워지는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곳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간다면 대사(大事)를 그릇 치게 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대가(大駕)가 움직이자마자 평양의 군민(軍民)들은 일시에 허물어져 흩어져 성이 함락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흉적이 추적해 오는 칼끝도 아마 막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동하는 도중에 예측하지 못한 변고도 반드시 없다고 보장하지 못하니 어찌 마음이 서늘치 아니하겠습니까! 주상께 어가를 옮기자고 청하는 자들은 아마 깊게 생각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엎드려 성상의 명철한 판단을 바라오니 반드시 대가의 행차를 멈추어야 합니다. 신은 더위에 토사곽란을 며칠 앓아 지금에야 아뢰옵니다. 황공하기 그지없나이다.”
정탁의 말은 참으로 간절하였다. 정탁은 평양 백성들의 민심은 흉흉한 것이 아니라 적을 막고 평양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즉 백성들은 충분히 왕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라 항변한 것이다. 그리고 왕이 파천하는 즉시 평양성은 함락되어 전국토가 왜적의 수중에 들어갈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승정원을 통한 왕의 대답은 몹시 간단하였다.
“적의 칼날은 피하지 않을 수 없다.”
출전 : 피난행록(避難行錄)
저자 : 정탁(鄭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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