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04-11 13:37
[스토리테마파크] /가족, 영원한 동반자/ 출가한 딸의 와병 소식에 잠을 설친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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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작협
조회 : 1,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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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ory.ugyo.net/front/sub01/sub0103.do?chkId=S_CEJ_0063 [232] |
1612년 5월 20일, 오천(烏川)의 사위 집에서 김택룡에게 편지를 보내 왔다. 편지에는 딸의 병이 아직 낫지 않았다는 말이 있었다.
김택룡은 걱정스런 마음을 담아 답장을 보냈다. \
5월 25일, 김택룡은 오천(烏川)에 가서 아픈 딸을 만나볼 계획을 세웠다. 5일 뒤 5월 30일, 김택룡은 오천으로 가기 위해 식사를
마치고 출발했다. 오천에 도착해 판사(判事) 김지(金址)와 상사 김평 · 김령(金坽)을 만난 다음, 탁청정(濯淸亭)에 내려가니
좌수 김호(金壕) 어른과 사위 김광찬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김택룡은 집으로 들어가 딸을 보고 병에 대해 물었다. 오늘부터
소뿔로 배꼽에 뜸을 떴다고 하였다. 김택룡은 저녁을 먹고 나가서 김부생(金富生) 과 사위 김광찬과 함께 정사(亭舍)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여독 탓인지 아픈 딸에 대한 근심 탓인지 매우 피곤하여 밤새도록 뒤척였다.
6월 7일, 오천에서 김택룡에게 편지를 보내 왔다. 김택룡의 아내가 먹을 사물탕(四物湯) 네 첩을 함께 보내 왔다.
그리고 김택룡에게 삼약(蔘藥)을 부탁하였으므로 마련해서 보내며 답장도 썼다.
6월 22일, 오천 사람이 김택룡을 찾아 와서 사위 김광찬의 편지를 전해 주었는데, 딸의 기운이 아직도 평안하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다음 날 23일, 김택룡은 춘금을 정서(井墅)로 보내, 서울에서 온 박참봉(朴參奉)의 문안 편지와 아들 김숙과 오천(烏川) 딸의
병록[病錄, 병의 증세를 적은 기록]을 가져오게 했다. 그 곳 마을 사람이 가지고 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6월 25일, 김택룡은 어제 받은 명약(命藥)을 오천(烏川)으로 보냈다. 서울에 부탁하여 구한 것이었다. 저녁에 오천에 갔던 춘금과
일춘이 함께 돌아 와서, 김서방의 답장과 김좌수(金座首)의 편지를 받았다.
7월 21일, 김택룡이 오천에 편지를 보냈다. 갔던 하인이 돌아와 딸아이의 병이 왔다 갔다 하며 낫지 않아 온 집안이 걱정하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7월 24일, 오천(烏川) 사람이 와서 김광찬 일가의 두 편지를 받고 딸의 증세가 점차 평상을 회복해 간다는 것을 알았다.
곡식을 보내 궁한 사정을 도왔다. 답장을 보냈다.
배경이야기
◆ 조선시대 부녀지간의 정
조선시대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최근 조선시대 양반 여성들의 생활에 대한 많은 일화들이 소개되면서, 사실 알고 보면 권력자에 가까웠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결혼에 있어서도 우리나라에서는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 즉 사위가 처가에 머무르는 혼인 풍속이 전통이었기 때문에 신부가 혼례를 치루고 바로 시집으로 가는 친영(親迎)의 예가 완전하게 정착하기는 어려웠었고, 두 가지 형태의 혼인이 결합되어 반친영의 예가 주로 시행되었다. 예컨대, 사위가 처가에서 머무를 만큼 머무르다가 신부를 데리고 본가로 돌아가는 식이었다. 그래서 사위에게 처부모도 친부모나 다름없었으며, 시집간 딸이라도 제사 윤행의 방식에 따라 부모의 제사를 직접 지낸다든지 또 엄연한 상속권을 가지는 구성원으로서 친정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살았다.
김택룡의 일기를 보면 그가 시집 간 딸들과 얼마나 자주 연락하며 집안 사정을 공유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딸과 언문편지를 직접 주고받는 일도 많았을 뿐더러 사위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간의 상황을 알리고 또 상의하며 지내는 것이 매우 일상적이었다. 여기에서는 김택룡이 시집 간 첫째 딸이 병이 든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나타나있다. 오죽 답답하면 직접 찾아가서 살펴보기까지 했을까? 딸아이의 병록(病錄)까지 구해다가 약을 짓는 그 마음에서 딸에 대한 절절한 부정(父情)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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