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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11-01 05:42
[응모] 독자의 입장에서 글을 쓰다 - ‘영웅협행(英雄俠行)’을 읽으며/ 무협/ Dimitri
  글쓴이 : 과하객
조회 : 3,526  
감상평
                          독자의 입장에서 글을 쓰다
                -Dimitri 님의 ‘영웅협행(英雄俠行)’을 읽으며-
                                                             
 1.
 독자와 작가처럼 아이러니한 사이도 드물다. 작가는 독자에게 다음 스토리를 의문사로 남기려 하고 독자는 작가의 글에서 허실을 발견하려 애쓴다. 독자는 새로운 작품을 접할 때 ‘반갑군. 무언가 놀랄 만한 게 있겠지’하는 기대를 갖고 읽게 되고, 요구하는 수준 이상의 전개를 보이지 못하는 글에는 가차 없이 “엥이! 또 그 소리, 이건 판박이잖아?”하고 콧소리를 내는 것이다.
 초반에 범인이 밝혀져 버린 미스터리 극은 히트하지 못한다. 작가가 장치한 미로 속에서 열쇠를 찾는 재미로 책을 보는데 결과가 읽힌 글에 발길이 멈칫해지는 게 어찌 독자의 태만일까. 독자는 책을 통하여 상식 밖의 새로운 세계를 접하려 하고 작가는 독자를 만족시킴으로 본분을 유지할 수 있는 신분이니, 작가와 독자가 신경전을 벌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작가는 불행하다. 수없이 많은 글을 읽어본 경험이 있는 일류 독자들과 두뇌싸움을 해야 한다. 독자들 중에 초학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론을 주도하는 건 입방정이 심한 초일류들이다. “형편없는 작품이기만 해봐라, 흠씬 두들겨 줄 테다.”하고 벼르고 있는 독자들과 실랑이를 벌여야 하는 직업이 작가이니 섶을 지고 불속에 뛰어드는 격이라고 할까. 다른 작품에서 보았던 유사한 전개를 찾아내는 것을 독자에게 허락된 심술로 볼 때, 독자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어야 하는 극한의 직업이 작가인 것이다.
 이는 독자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상식 밖의 장면 전개로 어깃장을 놓아야 잘 쓴 글이 되는 이유가 된다. 픽션을 표방하는 모든 문학작품 중에 걸작으로 불리는 글은 예외가 없이 ‘있을 법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주인공’을 등장시켜 장면을 전개한다. 이는 만고불변의 공식으로 당연히 무협소설의 경우도 해당되는데, 예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하다고 할 수 있다.
 무협소설이 무엇인가. 현실에 없는 세계임을 전제로 깔고 현실성 있는 감동을 주어야 하는 장르문학의 대표 주자가 아니던가. 더구나 무술세계에 특화된, 한정된 소재 안에서의 감동주기이니 더욱 작가의 노심초사가 필요하게 되는 이유이다.
 중국 무협의 아류로 탄생한 한국무협은 태생부터가 남의 이야기를 빌렸다는 약점을 갖고 있다. 남의 나라 이야기를 빌리고 타민족의 남녀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글로 우리나라 사람을 감동시켜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작가들은 용케도 한 세계를 구축해 왔다. 보다 적확해야 하고, 보다 뛰어난 무공과 협의에 충실한 주인공, 그리고 악마적인 상대역을 등장시켜야 성공할 수 있는 풍토 속에서 수없이 많은 명작과 평작을 쏟아냈던 게 우리나라 무협소설계의 현실인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사회적인 환경에 제약을 받아야 했고, 소위 순수문학을 한다는 사람들에게 변두리 문학으로 백안시되었던 무협작가들의 세계는, 그들이 쓰던 작품 속의 주인공처럼 역경 속의 미로 찾기에 다름 아니었다고 본다.
  대하극을 표방하고 수십 권을 끌어가던 작품이 어느 부문에서 답보상태를 보일 때, 다음 권 읽기를 포기했던 경험이 얼마나 많은가. 반대로 잘 쓴 글을 밤새워 읽었던 경험과, 읽은 후 주인공의 운명에 취해 미소가 끊이지 않던 경험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걸작을 뽑아내어 대중예술의 발전에 기여해 온 무협문학의 작가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이유이다.

 2. 
 Dimitri 님의 ‘영웅협행(英雄俠行)’을 감히 소개하고자 한다. ‘영웅협행’은 한국 무협소설계의 주류인 정통무협소설로 작품의 수준이 중국 일류 작가의 그것에 덜하지 않다고 본 탓이다.
 이 작품은 한국무협의 미덕과 약점을 고루 갖추고 있다. 연재에 쫓겨 날림으로 쓸 수밖에 없었음을 호소하는 작가의 변은 집필환경의 어려움을 대변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시적소에 인용되는 역사적 인물과 사건은 작가의 문재가 초고수급에 이르렀음을 말해 준다.
 출생부터 예사롭지 않은 주인공이 고난 끝에 무공을 배우고 강호를 유랑하며 협의의 행각을 벌이고 삿된 세력을 평정한다. 젊고 잘난 주인공인지라 여인들이 추종하여 애틋한 사연이 있고, 기연과 고된 수업의 조화로 절정무공을 이룬 후 원수를 갚고 해피엔딩을 향해 달려간다. 이러한 일괄된 공식을 충실히 대변할 때 우리는 정통무협소설로 인정해 왔다. 그런 면에서 영웅협행은 정통무협소설을 표방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오랜만에 대하는 수작이었다.
 영웅협행의 주인공은 약관의 청년 조무이다. 작가는 주인공 조무의 출신을 당대의 명문 혜가장으로 하고 출생부터 고난을 주어 이야기의 흥을 돋운다. 명문의 후예가 출생의 비밀을 안고 태어나 고난을 당한 끝에 절정무공을 이루고, 은원을 해결하고 강호의 정도를 회복한다는 정통무협소설의 공식에 충실한 것이다. 
 혜가장주 혜일평의 딸 혜초선은 아버지의 뜻에 반하여 이족인 여진족 조정에 출사하는 부친을 가진 조수문과 사귄다. 고지식한 부친을 설득하지 못한 혜초선은 혜가장을 나와 조수문과 함께 강호로 뛰어든다. 이들 부부는 아들 조무를 얻지만 행복한 세월은 잠깐으로 혜가장의 전래 비보 기경회통과 기효신서를 노리는 악인들에게 추적을 받아 남편 조수문이 죽는다.
 홀로 된 혜초선을 추적하는 악인들 중에 이민족 여진족에 출사하는 해릉법왕이 있다. 어린 아들 조무를 안고 도망치던 혜초선은 초고수급 무예인인 혜릉법왕을 당하지 못하고 위기에 빠진다.
 궁지에 몰린 혜초선이 혜릉법왕과 함께 죽기를 꾀하여 가문의 절초를 펼친다. 다행히 공격이 성공하여 적에게 타격을 주지만 어찌하랴, 적은 자신보다 내공이 강한 자로 더 심한 반격을 받은 것을.
 적보다 더한 내상을 입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혜초선의 모성애는 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군관 장위를 감동시켜 아들 조무를 부탁하게 되고, 가문의 보물 유류검을 신물로 남긴다. 의협심 많은 장위에 의해 아들 조무는 구함을 받지만 자신은 죽음을 피하지 못하는 것이다.
 위인이 신실한 장위는 혜초선의 부탁을 받아들여 조무를 키운다. 조무를 아들로 삼은 장위는 조겸이라는 이름으로 변성명을 하고 친구이자 수하인 의친과 함께 표국을 경영한다.
 그러나 해릉법왕과의 악연은 끝나지 않는다.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동료 표두 의친과 함께 표행에서 돌아온 조겸은 해릉법왕이 이끈 악인들에게 표물의 행방을 추궁 받는다. 표물 중에 기경혜통과 기효신서의 비밀에 관계된 물건이 있었던 것이다. 정도의 인물 조겸은 표국의 도리를 지켜 표물의 행방에 대해 함구하고 분노한 혜릉법왕의 수하들에 의해 표국은 폐허로 변한다.
 설상가상 감추어온 신분까지 들통이 난 조겸은 필사적으로 저항해 보지만 중과부적이라 동료 의친을 잃게 되고, 혜릉법왕은 조겸의 아들 조무와 의친의 딸 의령의 목숨을 담보로 협박을 계속한다. 
 조겸과 조무 부자, 의령이 혜릉법왕에게 죽임을 당할 찰나, 기효신서와 기경회통을 노리는 또 하나의 무리인 점창파의 장로 하소천이 개입한다. 두 세력 간의 싸움 도중 이미 중상을 입은 조겸은 동료 표두 의친의 딸 의령을 구하고자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게 되고, 부자간의 생이별이 이루어진다.
 하소천은 점창파의 장문인 호송자의 사제로 무공이 뛰어났으나 성격이 편협하여 사질인 막충교와 장문인의 자리를 다투는 처지이다. 하소천과 그가 이끈 왜국 무사들에게 해릉법왕이 퇴치된 후 점창파로 끌려 온 조무는 사부 담봉우를 만나 무공을 이룬다. 담봉우는 여난(女難) 때문에 하소천에게 감금되어 있던 절정고수로 무학을 모르는 조무를 키워 일기비전(一騎祕傳) 칠주검문을 잇게 한다.
 이하 주인공 조무에게 고난과 기연이 잇따르고, 무공을 잃는 절망의 상황까지 몰린다. 그러나 주인공은 역시 주인공, 조무는 우여곡절 끝에 대협으로 불릴 만큼의 절정무공을 이룬다. 당대 최고수인 무림사대가 중의 일인 담봉우의 제자이자 역시 사대가에 속하는 혜일평의 외손자로서 양가의 무예를 이은 데다 각파의 무공비기를 모아 놓은 목련신교에서의 기연까지 겹쳐 일류고수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다.
 허나 주인공이 탄탄대로만 걸어서야 무협지가 될까. 마교를 공격할 때 만난 대적 마교 교주 백지단이 친부 조수문임이 밝혀져서 좌절을 겪은 조무는 스스로 실종되어 강호의 전설을 키운다.
 무림비보 기경회통과 기효신서를 노리는 정사 간의 많은 고수들의 다툼과 명-청 교체기의 혼란 속에 모든 은원을 버리고 야인으로 살아가려 하는 조무를 세상은 그냥 두지 않는다. 이름까지 바꾸고 숨어살던 조무는 어쩔 수 없는 사건을 기화로 다시 강호로 나오게 되고, 그 와중에 일생의 반려가 될 여인 홍련풍 자혜를 만난다.
 홍련풍 자혜는 살수집단 천하회의 회주 사룡패의 딸이지만 정파의 인물들보다도 더한 협녀이다. 영웅과 협녀가 난세에 만났으니 어찌 풍파가 없으랴. 조무의 풍도에 반한 홍련풍 자혜는 자신을 돕다가 무공을 잃은 조무를 보호하여 서장의 대류사로 무극이라는 신비 인물을 만나기 위해 떠난다. 
 무극을 찾으라는 스승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 무공을 잃은 조무가 대류사를 찾는 과정에 간난신고가 잇따르고, 홍련풍 자혜가 자신을 희생하여 연인을 보호하려 애쓰는 장면은 이 작품의 백미이다. 남녀 주인공이 서로 상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무협문학의 본령이 일편 애사(哀史)로 펼쳐지는 것이다.
 영웅협행은 현재 연재중인 작품이다. 대류사에서의 기연으로 무공을 회복한 조무가 모든 은원을 해결하기 위해 서천의 목련신교로 떠나는 과정에서 연재를 멈춘 작가의 뜻을 필자는 ‘완벽한 대단원의 구상’으로 풀고 있다. 작가 스스로 “완전판을 다시 엮고 있는데 모든 결함을 극복한 멋진 작품이 될 것입니다.”로 예고를 한 터이지만, “여기까지 만으로도 충분히 작품성이 있다.”로 본 것이 필자가 외람되이 감상평을 쓰게 된 경과이다. 
 이 작품에는 정통무협적인 미덕이 곳곳에 숨어 있다. 주인공 조무의 신실함은 의형 막충교와 일본인 무사 츠키하라 등 진실한 친구들로 보상 받고, ‘영웅이 아니면 남자로 보지 않는다’는 고고한 성품의 미녀 홍련풍 자혜의 사랑을 얻는다. 의협의 길을 걷는 주인공이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행 끝에 모든 은원을 매듭짓고 강호정의를 회복한다는 정통무협소설의 공식이 완벽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모든 문학작품이 그렇지만 우연과 필연이 올바른 이유로 조화될 때 소설은 예술로 승화된다. 작가는 이 문제를 역사적 사실들을 장치하여 풀고 있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를 비롯하여 원숭환 이자성 오삼계 모문룡 등 역사적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명문정파에 속하는 혜가장의 소장주가 명장 원숭환의 참모로 활약하고 조카인 조무가 암중에 돕는 등으로 주인공의 협행과 관련시키는 것이다. 
 원숭환의 영안성(永安城)과 모문룡의 가도(椵島)가 스토리의 중요 배경으로 등장하고, 명정하지 못한 황제 숭정제와 그를 둘러 싼 간신들의 음모궤계에 의해 충신들이 희생되는 과정이 정통역사소설 못지않게 실감나게 펼쳐진다. 나라의 명운이 다하는 단말마의 상황 속에서 고난을 겪는 민초들의 신음소리가 작품 곳곳에서 들리는 스토리는 이 작품을 일독성(一讀性) 무협소설로 그치지 않겠다는 작가적 의지의 반영이다. 
 특히 일본인 무사들과 닌자들, 조선인 무사 송시윤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명나라 말기의 왜구들의 횡포는 역사에 기록된 바 있거니와, 우리나라와 관련된 모문룡의 사건도 그 못지않게 역사서가 상세히 다루고 있는 사실인데, 작가는 이를 소설에 장치하여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패잔병을 모아 가도에 주둔하며 조선국 조정과 백성을 괴롭힌 역사적 사실을 적절히 배합시켜 중국 배경의 소설에 낯선 조선인 무사를 등장시키는 장면을 합리화하는 솜씨는 박수를 받을 만하다.
 작품 속에 녹아 있는 작가의 역량은 무학(武學)의 우주론에서 또 한 차례 감탄을 자아낸다. 초현실적인 존재 무극과의 문답으로 기존의 일원론 이상의 우주론을 펼쳐내고 갑작스런 초현실적 전개의 당위성을 입증한다. 이 특장의 장면으로 작가는 판타지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정통무협의 본령을 충실히 지켜냈다.
 필자는 특히 ‘대궁시대 23회’의 전개에서 우리 장르문학의 무궁한 미래를 보았다. 이만큼의 지식과 이만큼의 세계관을 가지고 이 정도의 문장력을 갖추기까지 얼마나 많은 습작 과정을 겪었을까 생각할 때 작가의 역량에 감탄이 절로 나왔고, 더불어 우리나라의 장르문학이 나갈 좌표를 제시해 준 데 대해 감사를 보냈다.
 필자는 문학에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의 구분을 두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 축이다. 다루는 시대와 세계가 다르지만 진리는 언제나 한 가지 아니던가. ‘세태를 반영하여 문제점을 부각시키고 독자의 이해를 구한다’ 는 대명제를 갖고 경주해 온 작가세계에서 장르의 구별은 기득권 세력의 자기변호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 작품 영웅협행에서는 그러한 세태에 대한 작가의 분노가 곳곳에 드러나 있다. 살수 집단 천하회의 회주 사룡패와 그의 딸 자혜를 사파라고 몰아붙이는 정파 인물들을 보면서 무협소설을 변두리 문학쯤으로 치부하고 백안시하던 문단 주류의 얄팍한 처세를 되새기게 되었고, 대궁시대라는 정사에 없는 시대 상황을 만들어 이야기를 끌어가는 작가의 글 솜씨에서 상상력의 싸움으로 기량을 겨루어보려는 작가의 날선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다.
 궁극의 무술은 예술과 통한다고 한다. 즉 무예(武藝)인 것이다. 이를 뛰어넘어 도의 과정에 이르면 무도(武道)가 되는데, 필자는 영웅협행의 주인공 조무가 어느 경지에까지 오르는지 연재의 마지막 장면을 큰 기대를 갖고 기다릴 생각이다.

 3.
 지금 내 책꽂이에는 박영창님의 ‘무림파천황’이 꼽혀 있다. 제5공화국의 서슬 푸른 어떤 기관이 금서로 묶어 놓았던 ‘무림파천황’. 필자는 이 논란 많던 금서를 민주화 후에 제일 먼저 구해서 읽어보았지만 무엇이 문제였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5공 시절의 많은 정책이 유치찬란한 권력 놀음인 것은 공인된 사실이지만 ‘무림파천황’의 경우는 최소한의 제재 근거도 찾을 수 없었고, 이는 박해를 당한 당사자인 박영창님도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바였다. 아마도 다른 작가들에게 가이드라인을 정해 주고 싶은 시범케이스의 박해였지 싶은데, 일테면 여기까지는 용인하고 여기서부터는 혼낼 테니 미리 조심하라 하고 엄포를 놓으려다가 폭주를 해버린 사례가 아니었나 추리해 본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속담이 있다. 제 발 저린 도둑이 권력을 잡을 때 그들의 권력 보전본능은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의 무협소설계는 제 발이 저린 마왕들에게 억압을 받으며 키워온 풍운강호의 시장인 것이다.
 필자는 김광주선생의 번역본 정협지를 효시로 와룡생의 군협지 비룡 비호 등이 장안의 지가를 올리던 초기 무협 시절 소년기를 보냈고, 한국무협이 대본소를 채울 때 청년기를 보낸 사람이다. 이제 노년에 접어들어 웹소설로서의 무협이 종횡사해(縱橫四海) 하는 요즘을 볼 때 격세감이 있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군협지에 열광하던 독자가 자라서 스스로 한국무협을 등장시켜 황금기를 이루었고, 시대적 암울함을 한 바탕의 통쾌한 무협세계 섭렵으로 훌훌 털어 버리게 하였다. 제5공화국 시절 그 많던 대본소를 꽉 채웠던 무협지를 모조리 읽어 치우고 신간을 재촉하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러나 애석할 손,  일독성 대본소 소설이 대량 생산되던 시절, 한국무협은 진정한 독자를 잃었다. 머리가 굵어진 후 한동안 한국무협을 멀리했는데, 천편일률적인 전개에 실망을 한 탓이었다. 나중에 무림파천황의 금서소동이 밝혀진 후에야 그 시절의 작가들에게 재갈이 물려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때문에 저간의 시정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혼자 가슴앓이를 했던 필자 자신의 단견을 스스로 꾸짖은 바 있다.
 기정무협소설의 사전적 의미는 무엇일까. 아래 인터넷에서 찾은 답변 하나를 들어본다.

 화창한 날씨, 관도, 잡털 하나 없는 백마를 타고 달리는 주인공, 미녀를 둘러 싼 무림대회, 무명의 주인공이 등장하여 멋있는 활약, 주루에서의 무용담, 절세기연의 연속, 권선징악, 이런 게 (펼쳐지는 세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괄호 안의 ‘펼쳐지는 세계가’는 필자가 보충한 내용이다. 인터넷 상의 이 답변은 우리 독자들이 무엇을 꿈꾸어 무협소설을 읽는지 대변해 준다. 문학성, 혹은 예술성에 대한 언급이 없는 소설 읽기, 어처구니없지만 이게 현실인 것이다. 우리 독자들은 재미를 위해서 무협소설을 읽어왔고, 작가들은 그에 호응하여 걸작과 평작을 쏟아내 왔다.
 빼어나게 잘난 주인공이 몇 십 갑자의 무공을 갑자기 얻고 간난신고 끝에 무림을 평정하고 미인을 얻어 금의환향한다는 판에 밖은 듯싶은 줄거리에 우리가 취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내일을 기약하기 힘든 암울한 현실에서 이룰 수 없던 꿈이 거침없이 이루어지는 무협세계에 심취한 탓 아닐까. 잘난 주인공의 멋진 활약과 반듯이 부셔야 할 악인의 등장, 그들의 비열함에 대한 분노, 배우자 역으로 등장한 빼어난 미인들에게 보내는 애틋한 마음……. 한 동안 한국무협은 비슷한 줄거리에 등장인물의 이름만 바꾼 판박이 작품을 대량으로 쏟아냈고, 소위 순수문학계가 하류 내지 변두리 문학으로 질시하게 된 원인을 만들었다.
 그런데도 한국무협이 살아남은 이유는 새로운 작가와 독자가 창출된 탓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작가가 등장하여 새로운 독자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던 것이다. 무협소설은 우선 재미있어야 한다는 주의의 마니아층(mania層)이 늘어나고. 단순한 독자에 더 단순한 작가가 횡행하던 시기에 ‘무림파천황’을 금서로 묶었던 위정자들은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재미만 따지는 글을 ‘마공서’라고 부르고 공식을 충실히 따른 작품을 ‘정공서’로 부른다고 한다. 필자는 이러한 구별이 구태여 필요한가 싶지만 굳이 우열을 선택해야 한다면 타당성 면에서 정공서 쪽에 손을 들어 주고 싶다. 소위 순수문학과 한판 싸움을 벌이려면 그들 이상의 예술성을 갖추어야 하는데, 우호적이지 않은 독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그들의 상식을 존중해 주는 게 옳다고 본 탓이다.
 중국의 4대 기서인 수호지, 삼국지, 서유기, 금병매 등에 무협지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우리의 고려시대인 송나라쯤에 태동되었다는 이 고전소설들이 몇 백 년을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재미있기도 하지만, 무협지적인 강호의 통념인 의협과 권선징악에 충실한 때문이 아닐까. 독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짚어내어 가려운 곳을 긁어준 결과가 소위 사대기서의 생존비법이 아니었나 싶다.
 급시우 송강의 의협심이 양산박 108영웅을 만들어 내고, 장판교 싸움에서 조자룡이 단기필마로 주군의 어린 아들을 구해내는 장면과, 관운장이 오관에서 육장을 베며 의형 유비를 찾아가는 장면, 손오공이 마왕들을 다스리며 불법을 구하는 장면, 무송의 분노가 서문경과 반금련을 벌하는 장면 등을 읽으며 독자들은 현실세계의 우울함을 씻어냈던 것이다.
 주인공을 자신과 일체화할 때 카타르시스가 생긴다고 하였다.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대본소에 들려 무협소설 몇 권을 빌려들고 집에 갈 때의 심정은 아마도 이루어질 수 없는 세계를 읽는 것으로 정신적 피로를 덜려는 노력이었을 것이다. 소위 사대기서가 낙양의 지가를 올린 이유가 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암울한 시기에 시대적 혁명아로 떠오른 홍길동전 전우치전 임진록 박씨전 등이 이에 해당할 듯싶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화랑 관창’ ‘주몽신화‘ 등,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우리에게도 무협소설적인 이야기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우리가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 우리의 무협지적 세계에의 동경은 역사와 궤적을 같이 해왔던 것이다.
 이처럼 유구한 역사를 가진 무협소설계는 기정무협과 정통무협을 거쳐 퓨전무협소설이 나오는 시기를 만들었다. 2000년대에 등장한 퓨전소설은 환상계와 현상계를 자유로 넘나드는 주인공을 탄생시키고 무공과 마법을 자유로 구사할 수 있는 신개념의 강호를 탄생시켰다. 정체를 규정하기 모호한 세계를 끌어들이고 발음도 어려운 주인공의 이름을 외워가며 읽어야 하는 퓨전무협에 필자의 두뇌는 항서를 쓴 지 오래인데, 요즘의 젊은 작가들과 독자들은 혀끝을 굴려야 발음되는 외국 이름들을 잘도 이해하고 읽는다. 우리는 전혀 새로운 개념의 장르소설들이 우순죽순처럼 나타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무협세계는 또 하나의 강호이다. 작가들이 만들어낸 춘추전국시대이고, 서원평과 양몽환, 노영탄과 냉운헌에 곽정 황용 양과 장무기의 시대이고, 송강과 노준의, 조자룡과 관운장, 손오공과 무송의 시대이고, 나아가서는 홍길동과 온달장군의 시대였던 것이다.
 이제 영웅협행의 주인공 조무가 강호를 평정하러 나왔다. 무협세계의 변방 고려 땅의 한 작가가 탄생시킨 조무는 중원의 사슴을 잡을 것인가. 필자는 스토리의 전개가 빠르고 문장이 뛰어난 영웅협행을 읽으며 무협소설계의 미래를 보았다. 영웅협행은 연재가 끝나지 않은 작품이지만 풍운이 난무하는 무협소설계에 새로운 충격을 줄 작품이라고 감히 단언한다.

4.
 작가는 자신의 작품의 첫 번째 독자라고 한다. 이는 “작가가 너무 뛰어날 경우 독자들의 수준을 간과하고 스토리를 진행할 위험이 있다.”로도 풀이될 것이다. 즉 혼자만 너무 앞서가는 경우인데, 천재들의 작품이 당대에 빛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글을 써보라. 모든 소설의 첫 번째 독자는 작가 자신이다. 작가의 안목이 뛰어난 만큼 뛰어난 작품이 나온다는 것은 상식이다. 초고수급의 가벼운 일장이 얼치기 무예인들을 추풍낙엽으로 만드는 장면에 익숙한 우리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독자가 되어 글을 엮는 초고수급 글쟁이가 되는 수밖에 없다.
 독자들 중에는 작가보다 더 많은 독서를 한 초일류도 있고 무협문학에 갓 뛰어든 새내기 독자도 있다. 고루 만족을 시켜 줄 수 있는 타협점을 찾는 것, 일류작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고, 특급작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관문일 것이다.
 소설은 독자를 감동시키기 위한 수단이라고 한다. 필자는 이 말을 ‘설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꾸어 본다. 영혼 없는 글자에 사연을 주어 독자를 설득하는 것이니 작가의 노심초사가 필요함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독자를 설득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필자는 독자의 위치에 있을 때 무협소설을 읽었던 이유를 역으로 추적하여 결론을 만들어 보았다. 현실이 아님을 전재로 하는 글인데도 주인공의 운명에 동조하여 일희일비하고, 의외성에서 나오는 스릴과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현실적인 감동을 만들어 낸 작가들의 글재주에 넘어가서 날밤을 새워 무협소설을 읽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도 내 급소를 정확히 파악하여 적시적소를 긁어 주던지, 필자는 젊은 날의 숱한 밤을 무협작가들에게 바쳐야 했다.
 그런 점에서 영웅협행의 작가 Dimitri 님은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연재 도중에 독자의 반응에 대응하는 지문이 보이고 세계관과 인물 설명, 독문 무공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준다. 이는 독자 친향적인 작가의 성향을 말해주는 장면으로 다른 작가들이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인 듯싶다.
 우리 무협소설계는 위기상황과 제2의 전성기를 아울러 맞은 전환기에 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발표무대로 마련되어 무한에 가까운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된 작금의 상황에서 어떤 방법으로 독자들을 붙잡을 것인가. 종이책으로서의 무협소설이 명맥을 잇기 힘든 지금 떠나간 독자들을 되돌리고 새로운 독자들을 맞는 방법으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독자의 입장에서 글을 쓰다’를 제목으로 내세웠지만 영웅협행의 작가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작가입네 행세하려 들던 필자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이고, 더불어 우리 시대의 모든 작가들에게 주어진 공통된 명제일 것이다.
 맛깔나게 차려진 잔칫상에는 손님이 모이기 마련이다.  ’조자룡 헌 칼 쓰듯‘과 ’오관육장을 참하다‘는 삼국지에서 보는 의협의 백미로 세세연연 인구에 회자될 명장면이다. 바로 잘 차려진 잔칫상인 것이다. 더불어 영웅협행의 주인공 조무의 의협 행각 역시 그에 버금갈 수 있다고 희망을 걸어 보는 이유이다.
 작가가 예고한 완전판이 세간의 무협소설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줄 수 있는 명품으로 탄생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고 하는데, 모처럼 발견한 정통무협소설 영웅협행이 군협지 정협지를 뛰어넘는 스테디셀러의 반열에 오를 때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원하며, 자기희생적인 의협의 주인공 조무를 그려낸 작가 Dimitri 님에게 한국 정통무협소설계의 미래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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