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원님의 로맨스, <인연>을 읽고 쓴 감상입니다.
몇 년을, 아니 몇 십 년을 같은 꿈에 허우적거리는 사람들.
그런데 꿈속에 나왔던 장면, 인물, 배경, 사건이 그대로 드라마로 제작되어 눈앞에서 재연되고 있다면?
굳이 뒷내용을 보지 않아도 다음에 펼쳐질 상황을 이미 알고 있는 자신,
눈앞에 펼쳐지는 바로 저 장면을 실제 경험한 듯한 같은 기시감.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시대극 드라마 <주작의 나라>는 현재 기록에도 거의 남아 있지 않는 작은 소국,
당나라에 의해 멸망된 주나라의 실존했던 인물들을 한곳으로 모이게 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드라마 극본을 작성한 그녀, 정소진이 있었다.
천 년이 넘는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만난 그들이 새롭게 써 내려가는 이야기. <인연>
전생을 기억하는 여자 소진이 자신이 겪은 전생 담을 극본으로 작성해 드라마로 내보내면서부터
현생에서의 그들의 인연 이야기는 시작된다.
저마다의 이유로 매번 같은 시대, 같은 인물들이 나오는 꿈을 꾸는 사람들.
그리고 드라마로 그려지고 있는 사건들과 인물들이 바로 자신의 꿈속 내용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며 그들은 극본을 쓴 소진을 찾는다.
당신은 누구야?
누군데 그때의 상황을 다 알고 있는 거야?
그리고 나는 왜...... 이런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거야.
의문에 대한 답은 그 꿈이 바로 자신의 전생의 기억이라는 답안을 내렸고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 어느 날 전생을 함께 한 이들과의 믿기 힘든 만남이 이루어진다.
승상의 처조카로 유명했던 남방의 흑요석, 한림원의 붉은 매화로 불린 아름다운 정영소.
벽안군의 호위 부대인 청운장의 교위였던 연청.
청운장의 군사 훈련을 담당하며 정혜 공주와 약혼했었던 사마 상검명.
정효 공주를 사랑했지만 신분의 벽에 가로막혔던 의관 제은형.
색목인의 자식으로 왕에겐 내쳐진 아들 이지만 다음 대의 왕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큰 왕자, 벽안군.
승상인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며 벽안군을 사모하노라 그의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홍난란.
그때에 이루지 못한 사랑을,
그때의 후회를,
그 순간의 아픔을 잊지 못해 그들은 이렇게 환생을 해서도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천 년이 넘은 시간을 거슬러 동시대에,
그것도 중국 사람들이 중국 영토도 아니고 전혀 관련 없는 대한민국, 서울 땅덩어리에,
또 거기다 한두 명도 아니고 이건 뭐 떼거지로 환생을 해 전생을 함께 공유한다는 것이
말이 될까.... 싶지만 이 모든 것이 제목에서도 말하는 인연, 운명 같은 바로 그 인연이 아닌가 싶었다.
전생, 환생 이란 조금은 흔한 소재로 뜻밖의 재미와 놀라움과 감동과 뒤통수 빡!!!을 선사해준
작품이라고 나는 감상해본다.
종이책 3권, 이북으로도 몇 천장을 훅 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단 한 번도 지루하단 생각 없이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극의 전개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전생과 현생의 교차 방식, 그리고 서로는 몰랐던 각자의 시점에서 그려내는 내용들,
추리를 부르는 그들의 정체 등이 어찌나 소름 끼치게 잘 짜여 있던지
책을 읽던 그 순간만큼은 제대로 홀릭을 실천했던 것 같다.
사실 이 작품은 처음엔 다소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시작부터 무수한 인물들 - 드라마 작가 소진, 탑 배우 강원, 정신과 의사 주호, 이혼한 회계사 은수,
대기업 후계자 재우, 또 그의 동생 연우 등이 한꺼번에 줄줄이 비엔나로 등장하는데다가
또 주나라 시절의(전생) 인물들까지 함께 나오는 터에 도대체 누가 누구인지 헷갈려서라도
메모가 필수인 상황을 만들기에 이른다.
그러다 지금의 나는 누구이며 전생에선 누구였소. 하는 각자의 설명과 함께
어느 정도 인물 관계의 선이 그어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아주 본격적으로 눈을 멀게 하고
감탄사를 부르는 흥미의 쓰나미가 덮쳐오기 시작한다.
사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작품에선 현생과 전생의 인물관계에 대한 추리가 엄청난 텐션을 선사하기
때문에 적어도 이 책을 읽어 볼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인물 관계에 대한 스포만큼은
모르는 상태로 읽기를 강조해본다.
그들이 그려낸 트릭에서 오는 숱한 반전과 상상을 초월하는 구성은 중간중간 전율하게 만드는 그것!
읽으면서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던 부분들이 마지막에 와서야 숨겨져 있던 퍼즐 한 조각이
끼워 맞춰진 듯, 드디어 하나의 완벽한 그림으로 나타나는데 와우... 그 순간의 소름이란.......
그 시대에 이루지 못했던 사랑, 혹은 아팠던 마지막의 모습을 서로의 이야기와 입장을 알게 되면서
이해하고 파악하며 비로소 전생의 기억을 하게 된 이유를 깨닫게 되는 그들.
아주 선한 사람도, 아주 악한 사람도, 완벽한 사람도 없었던.....
그래서 아주 인간적? 이었던 그들의 그때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인물을 밝히는 것 자체가 스포가 되는지라 두루뭉술하게 표현했지만 정말 오랜만에 극찬에 극찬을
할 만한 작품을 만났음에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출간한지 10년이 훨씬 지난 책이지만 올드미라곤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를 놀라게 했고
작가님의 창조 능력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된 귀한 작품 <인연>이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책과 나의 <인연>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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