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킨’과 ‘닥터 후’의 ‘셰익스피어’적 만남.
아, ‘검은 왕 : 마검의 주인’의 작가가 위와 같은 대가의 영역에 이르렀다 칭송을 하려는 게 아니다. 소설을 읽은 감상을 간명하게 표현하려 궁리하다보니, 저명한 위인과 유명한 작품이 가진 이미지를 빌려오는 게 문자로 승화하기가 편해 보였다. 본 소설의 저자인 ‘국수먹을래’님의 입장에서는 끼니로 먹은 국수가 체해버릴 것 같은 부담이 느껴질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307화의 분량을 완독했다는 건 족히 칼국수 두세 그릇을 대접한 셈이니, 독자에게 한 끼 정도의 까방권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제목이 그러한 대로 마검이 나온다. 마검이 나왔으니 일단 성검도 있다. 역사는 왕들과 영주들이 통치를 하는 시절에 머물러 있고, 인간에게 태생적인 질투심을 품은 신화의 잔재들이 남아있다. 사실 여기까지만 들어도 작품의 큰 골조를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클리셰가 으레 그런 대로 주인공은 야만과의 접경에 자리한 영지의 젊은 승계자이며, 당연 그가 영주의 자리를 물려받게 될 때 괴물들의 군세가 인간들의 영역을 침공한다. 제목대로 주인공은 마검의 주인으로 예비 되어 있던 자고, 마검은 괴물들의 군세와 함께 그를 찾아온다. 그리고 작가가 섬세하게 변주를 채워 넣은 본격적인 부분들을 뛰어넘어 종장으로 가자면, 정석대로 주인공의 위업에 신화와 역사는 결별을 고한다.
그러니까 영웅서사시. 말하면 중대한 스포일러가 될 몇 가지 장치나 반전을 포함하면 더욱더 영웅서사시의 규격에 들어가는 작품이다. (물론 시가 아니라 소설이지만.) 거기에 RPG적 요소까지 따져보자면, 판타지로서의 정체성은 ‘던전 앤 드래곤’보다 ‘반지의 제왕’에 가깝다. 좀 더 상세한 좌표로는 ‘반지의 제왕’과 ‘얼음과 불의 노래’의 사이 정도. 상당히 보수적인 작품인 셈이다.
하지만 정통 판타지에선 드문 요소를 차입해 쓰는 진취적인 시도가 없는 건 아니다. 혹여 ‘검은 왕 : 마검의 주인’을 읽게 될 운명에 엮인 독자들을 배려해 비유로 읊어보자면, 타임로드와 타디스의 톨킨적 변형이랄까. 부연하자면,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선이 인간의 단면적인 통념과 일치하지 않는 세계관이다.
물론 그게 ‘닥터 후’처럼 빈도 높게 전용되는 것도 아니다. 너무 편리한 도구는 비장미나 필연성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소설엔 어울리지 않으니까. 작가는 그걸 ‘회색의 간달프’가 통과해야했던 모리아의 심연에 가져다 놨고, 운명의 산 분화구에서 등장한 골룸처럼 사용했다. 그래서 소설이 이득을 봤냐면, 본인의 생각엔 그렇다.
이 정도면 톨킨과 닥터 후를 들먹거린 머쓱한 글줄의 사유는 밝힌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셰익스피어.
그런데 사실, 저 대문호를 장르소설과 결부시키기는 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진술이 아닐까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셰익스피어하면 떠오르는 건 극문학이니까. ‘to be or not to be’의 그 감성이 ‘검은 왕 : 마검의 주인’에서 느껴진다는 주장은, 작가가 그런 시도를 했다고 동의를 하지 않는 이상 그냥 감상자 본인의 주관일 뿐이다. 하지만 설혹 그게 오해였다고 해도, 이 소설이 근자의 장르시장에서 독특한 개성을 지닌 작품이라는 진술을 뒷받침할 정도는 될 것이다.
일단, 인물들의 대사가 그렇다. 등장하는 군상들이 내뱉는 말이 지나치게 고풍스러워질 때가 있다. 심지어 그런 언변을 갖추는 게 가능할까 의심스러운 사람조차도. 때론 담백한 서술에 끼어드는 작가의 방백이 그렇다. 악의 야만스러움조차도 신전의 프레스코 벽화를, 경전의 구절을 닮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철저히 계산된 시점에 놓여 있다. 마음대로 자라나는 이야기에 작가가 손을 빌려준 그런 소설은 아니다. 극적 운율과 절제를 가지고 배치된 장면이 고조에 이르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인물은 세상사의 어떤 맥락을 대변하는 화신처럼 말을 읊조린다. 과장된 톤, 과잉된 감정, 그 순간만큼은 보는 사람이 딴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밀어붙이는. 그건 연극의 방식이 아닐까?
두 번째는, 한편으로는 이 소설이 영웅서사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순문학은 내면이 이끌어 나가고, 장르는 사건이 이끌어나간다고 하던가? 그렇다면 장르가 보다 영웅서사시에 어울릴 것이다. 기책과 무력에 감탄하고, 적의 목이 떨어지는 것에 환호하는 건 곧 사건을 따라가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건 ‘오디세이’지 ‘햄릿’이 아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 소설이 전개가 느리다고 한다. 신화적 거악에 휩쓸린 혹은 그 자신들의 악에 치이는 대중들의 심정을, 신화적인 무구 마검의 주인이지만 결국인 인간인 주인공의 번민을, 독자는 치밀하게 들어야 하니까. 치밀하게 듣지 않으면 기나긴 장고 끝에 완성되는 극적 장치들에 마음이 달아오를 수가 없다. 아기자기한 것은 넘기자고 무시하기엔, 서사가 그걸 데칼코마니처럼 찍어낸다.
마지막으론 주인공 세인의 르네상스적 캐릭터가 괜히 셰익스피어를 떠올리게 한 것일지도.
이로써 무안한 첫 줄에 대한 감상자의 변명은 끝났다.
결국, 누군가에겐 무난함을 버리고 불호(不好)를 취한 소설이란 인상만을 남겨버린 것이 아닐지 모르겠다. 하지만 불호가 악은 아니지 않은가. 2018년의 12월에 가까워오는 지금, **오 페이지에서 약 20만 명이 이 작품을 읽었으니, 아주 마이너한 취향이라고 평가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내심을 가지고 보라’는 말은 반가운 말은 아니지만, 보상이 확실하다면 못할 일은 아니다. 전심전력으로 독서에 매진할 기회가 있다면, 다독으로 파헤쳐야할 놀이거리는 충분하다. 비장한 가운데 위트도 있냐면, 그렇다.
나의 검은 왕이여, 만세.
PS. 멜라니가 정복왕이 된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아비게일의 빵을 먹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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