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품은 달 – <스스로 타오르는 꽃>
언젠가 ‘스스로 타오르는 꽃’이 있다는 글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다. 그 글을 본 사람들은 내용이 진실인지 아닌지 구글링까지 하며 열심히 토론했지만, 사실 나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최근에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문제인데, 나는 정말 이기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어려서부터 나는 주인공은 착한 공주이건만, 오히려 이야기 속 악녀에게 매력을 느끼곤 했다.
갖고 싶은 걸 가지기 위해, 옆에 두고 싶은 걸 옆에 두기 위해 비열하고 치열해지는 사람. 자신의 인간성을 져버리면서까지, 온갖 위험을 감수한 채 단 하나를 위해서 뛰어드는 사람. 그 과정이 부도덕함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해를 품은 달’에서 민화 공주에게 가장 매력을 느꼈다.
<이렇듯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은 민화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민화는 자신이 떠받들어져 살아가는 것에 대해 특별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살아왔기에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인가에 욕심을 내어 본 적도 없었다. >
조선의 공주, 민화(旼花)는 이름처럼, 화평하게 삶을 즐기며 살아왔다. 여자로 태어나 승계싸움에 휘말릴 필요도 없어, 부왕의 사랑을 듬뿍 받기만 하며 자라왔다. 그런 그녀에게 ‘갖고 싶은 것’이 생긴다. 바로 세자오라버니, 이훤의 스승인 염(炎)이였다.
<“예, 예쁘다.......”
자신도 모르게 말을 흘리고 말았지만, 민화는 말을 한 것도 모른 채 계속 염을 보았다.
“무엇을 말씀하시옵니까?”
“전부 다.......”
어느새 민화의 손끝은 그의 속눈썹에 다다라 있었다. 염보다 민화가 더 놀랐다. 깜짝 놀란 그녀는 손을 등 뒤로 급히 숨겼다. 속눈썹에 닿았던 손끝이 불이 붙은 듯 뜨거웠다.>
집안도 용모도 지식도 뛰어난, 아름다운 불꽃인 염. 세자를 설레게 하는, 그처럼 뛰어나고 아름다운 여동생 연우까지 가진, 그는 그녀가 가지기엔 너무나 아까운 남자였다. 고작 2살차이인 세자의 스승이 될 만큼, 조정에서 큰 꿈을 펼칠 수 있을 만한 능력도 배경도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허염을 가지게 되어 그가 부마가 되는 건, 그의 미래를 붙잡아 끌어내리는 것이었다. 민화에게 모든걸 주었던 부왕조차 안 된다고 말한다. 너가 아무리 떼를 써도 줄 수 없는 사람이고 가지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상대의 미래를 위해 놓아줘야 하는 시간이 한번쯤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때 상대를 놓아주느냐, 놓지 않고 붙잡고 있느냐. 이 선택에 따라 결말은 갈리기 마련이다. 철없고 어리고 이기적인 민화는 망설이지 않고 선택한다. 아니 그것은 선택이 아닐지 모른다.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본인도 어쩔 수 없는 마음. 그만큼 그녀에겐 처음부터 끝까지 그만 보였던 것이다.
그가 무슨 꿈을 꾸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아끼는 지. 민화에겐 중요치 않았다. 그가 제 옆에 있는 것을 모두가 말린다는 것이, 민화에겐 가장 큰 시련이었다. 그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살짝 날아온 불티에 자신에게 처음 찾아온 그 열정이 꺼질까 욕심의 바람을 불고 또 분다. 그 열정은, 화락한 꽃이었던 그녀를 마르게 한다.
본인의 이기심 그리고 주변의 부추김에 그녀는 활활 타오른다. 마른 꽃에서 피어난 불은 스스로를 태우고, 아름다운 불꽃의 소중한 것들을 죽이고, 그 자체도 죽여 버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염을 가진다. 아무리 어렸어도 그것은 허염을 가지기 위한 그녀의 선택이였으며, 그 죄는 염의 옆에 있을 수 있다는 행복에 비하면, 그녀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또다시 저에게 선택을 하라시면 주저 없이 서방님을 택할 것이기에....... 저의 지옥불 속의 몇억 년이, 다른 이들의 천당에서의 몇억 년보다 훨씬 행복할 것이옵니다.”>
영원한 비밀은 없다. 결국, 모든 것은 밝혀진다. 그전까지 민화는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진 못했으며, 그 순간에도 자신이 잃게 한 것 보다 잃을 것에만 슬퍼했다. 이 이기적인 공주님, 화락한 공주님은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다. 민화는 후회의 눈물을 흘렸으나, 작품 내에서 아니 작품이 끝이 난 이후로도 다른 이들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보통의 이야기라면 이것이 악녀의 결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때 그녀때문에 죽은듯 사그라들었던 그 아름다운 불꽃. 그 불꽃에서 튄 불씨에 불타오른 꽃. 그 둘은 그녀의 죄가 밝혀지기 전까지, 같은 색을 피어오르며 함께 타올랐기에. 그것이 지옥불이라도.
민화는 결국 불을 얻는다. 그녀의 삶에서 단 하나, 미치도록 가지고 싶었던 그 불꽃을. 본인이 불이 되어 삼켜버렸어도. 그녀에게도 속죄의 시간은 주어졌으나, 감히 판단하자면 얻은 것에 비하면 오히려 관대하고 간편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모두를 불태워 죽이고 자신조차 죽였다. 그러나, 그래서 사랑을 얻었다. 그녀는 아주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 하나만 이루어지면 다 져버릴 수 있었을만큼 그녀는 이기적이었으니까.
소설과 드라마에서 민화의 죄는 조금 다르게 보여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어느 쪽이든 그녀의 죄에 비하면 과분한 결말이라고 평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민화가 대단해보였다. 그러지 않았다면 끝까지 평화로운 꽃이었을건만, 그것을 다 버리고 미치도록 치열하게 이기적일 수 있는 민화가.
다만, 시간이 흐르고 돌아보니 그녀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그녀가 염을 사랑한 것도, 염이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도. 둘을 불태운 사랑이 유지가 될 수 있었다는 게.
스스로 타오른다고 하여, 꺼지지 않는 불꽃을 얻을 수는 없다. 대부분은 그렇다. 재앙과도 같은 발화로 해피엔딩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게, 과연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실의 불씨는 끄지 않으면 아무도 버틸 수 없는 대형화재가 되어버리던가, 타오르기는커녕 단 하나의 실수로도 작게 붙었던 불이 꺼져버리거나,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날아가 버리지 않던가.
그래서 읽는 것이다. 로맨스 소설을. 사랑 이야기를. 이러한 판타지를. 설령 타올랐던 적이 있더라도 스스로 다시 타오르기엔, 지난 사랑에 불씨 하나 남지 않은 회색빛 재가 되어버려서. 적어도 나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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