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11-30 23:11
[응모]_벨 에포크_로맨스판타지_세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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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1,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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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주인공에게서 진심으로 도망치는 로맨스 소설을 본 적 있는가.
없다면 추천한다. 처음에 스릴러를 잘못 고른 줄 알았다. 글로 읽는 독자 입장에서도 손이 싸하게 식는데, 전력으로 도망쳐야 하는 여자 주인공은 기절하지 않은 게 대단하다고 느꼈다.
벨 에포크. 좋은 시절을 의미하는 제목과는 다르게 이야기는 꽤 살벌하다. 애초에 여자 주인공, 이사벨은 자살을 하면서 회귀를 하는데, 그 이유가 남자 주인공, 카엘을 피하기 위해서였으니 시작부터 남다르다. 독자는 카엘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기 때문에 이사벨의 감정에 동조하기가 어려운 것이 당연한데, 이사벨이 정말 죽자사자 그를 피하는 것이 묘사되어 덩달아 카엘을 꺼리게 된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께름칙하니까. 아무리 잘생기고 집안 좋아도 저런 놈은 피하고 봐야 된다고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이사벨은 그리 신분이 좋지 못하다. 고아원의 아이였으니, 오히려 아주 낮은 축에 속했다. 회귀 전에는 카엘의 어머니 샤르미나의 눈에 띄여 양녀로 입양되었지만, 회귀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샤르미나의 눈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이사벨이 카엘과 법적인 남매 관계에서 사랑을 키운 것을 한스럽게 여겨 그를 피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그녀는 아예 카엘을 제 인생에서 빼버릴 참이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뭉스럽게 전개된다. 주인공들의 진심도 독자라고 할지라도 다 알 수 없다. 추리 소설 못지 않게 머리를 써가며 속내를 읽고 다음을 예측해야 한다. 그렇게 해도 팡팡 터지는 예상 밖의 일들로 놀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가령, 이사벨이 잘 도망간 줄 알았는데, 어떻게 해도 카엘의 손바닥 위였을 때의 놀람, 참담함은 피할 수 없다.
이사벨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의류 디자이너다. 디자인과 재봉의 능력이 탁월하기에 그녀는 카엘을 피하면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길을 모색한다. 그녀는 유한 것 같지만 억세고, 아무런 욕망이 없는 것 같지만 자신의 것을 위해서는 영악해진다. 그녀처럼 주변 인물들도 방심할 수 없는 이들이다. 친구인 줄 알았는데 거하게 뒷통수를 때리는 것은 기본이요, 앙숙으로 만나서 친구가 된다는 클리셰를 무시하고 데면데면 하는 경우도 있다. 이사벨은 이를 또 이용한다. 이렇게 보자면, 카엘이 가장 진실된 인물이지 않나 싶다.
카엘은 정말 악귀처럼 그녀를 쫓는다. 대천사 미카엘의 이름을 딴 만큼 아름다운 외형으로 그려지지만, 하는 행동은 악마나 다름 없다. 이사벨을 놓아주려고 마음 먹고서도 쉬이 그러지 못하고 그녀를 잡아채고, 그녀가 제 발로 자신에게 돌아오게끔 덫을 놓는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사벨만 바란다. 그의 이런 맹목적인 바람에 동조할 만큼 이사벨이 매력적인 인물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집안 내력인지, 그의 어머니 샤르미나를 비롯해서 그도 오직 한 사람에게 매료되어 인생이 험난하다. 이사벨이 호락호락 하게 잡혀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그들은 회귀를 중심으로 해결해야 할 감정적 과제도 산재해 있다.
주인공들만큼이나 두드러지는 인물로는 카엘의 어머니, 샤르미나가 있다. 일명 샤샤. 아주 무서운 시어머니다. 어느 이야기에 떨어뜨려 놔도 대단히 존재감을 발할 것이 틀림없는 인물로, 독자는 계속 의심한다. 이사벨의 회귀 전을 샤샤가 기억하는 것은 아닐까. 그럴 리 없지만, 이야기 속에서 독자도 모르는 장치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더는 뒷통수를 맞지 않기 위해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한다.
샤샤는 카엘을 낳은 사람인 만큼 엄청난 미인이면서 동시에 마녀 같은 행동을 잘 한다. 그렇기에 그녀가 이 이야기의 진정한 악당이고, 이사벨과 카엘의 최종 보스일 것이라는 확신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의뭉스럽다. 어느 것 하나 믿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길잡이가 될 만한 단서는 있다. 이 이야기는 아웃소싱이 있다. 벨 에포크 전체의 틀은 미녀와 야수에서 시작된다. 야수의 눈에 너무나도 아름다운 미녀, 그리고 아름다운 껍데기를 쓰고 있는 야수의 추격전, 왕자를 선택할 수 없었던 잠자는 숲속의 미녀, 행복을 가지고 싶은 신데렐라. 모두 한 번 쯤은 들어봤을 법한 동화다. 그러나 그리 아름답게 풀어내진 않는다. 오히려 어렸을 때 읽은 동화에서 몰랐던 위화감을 느끼게 된다.
탄탄하고 짜임새 있는 이야기는 다음을 기대하게 만든다. 어쩌면 조금은 피로할 지도 모르겠다. 이야기 전반에서 인물들의 감정선은 매우 세밀하고 관계는 얄팍하다. 이사벨과 카엘이 연인으로 맺어지지만 그럼에도 마음을 놓을 수 없을 정도다. 주인공들이 이러할진대 다른 인물들과 그들에게서 생기는 사건이 녹록할 리가 없다. 카엘은 사실 아무것도 없는 비루한 야수였고 이사벨은 고귀한 미녀였으며 샤샤는 절대 강자가 아닌 나약한 피해자였다. 드러나는 진실은 씁쓸했다.
그리고 클라이맥스를 만드는 결정적인 사건은 조금은 허무한 인물에서 비롯된다. 자신이 에스테어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생각하는 피해망상을 가진 이는 카엘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벨 에포크를 따라오면서 좋은 꼴은 못 본 독자들은 사실 이런 불행을 예견했다. 왠일로 카엘과 이사벨이 행복해하나 싶었다. 설탕같은 시간을 쏟아붓기에 불안에 떨었다. 얼마나 불행해지려고. 그런데 상상 이상의 전개가 진행된다. 꼭 맞춘 듯 카엘이 피할 수 없는 덫이 쳐진다. 이건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다고, 절망하게 된다. 좋은 시절이라더니, 다 헛것이구나, 제목부터 믿지 말걸. 그 악독한 샤샤도 손을 놓았고 누구도 카엘을 구해줄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이사벨이 타개책을 내놓을 것이란 기대도 없었다. 그녀는 나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주인공은 달랐다. 이사벨은 속전속결로, 아주 당차고 멋지게 제 연인을 구해낸다. 없을 것 같던 길을 만들고 오직 카엘만을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가. 계략을 짜고 군을 모으며 자신이 가진 신분과 핏줄을 십분 이용한다. 선대 왕의 유언도 알뜰하게 써 먹는다. 그 모습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밖에 없다.
좋은 시절. 이사벨과 카엘에게 좋은 시절이 오기까지는 너무 힘들었다. 그것은 무지개나 다름 없다. 실재하지 않는 그것을 쫓으면서 그들은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감춰뒀던 상처를 죄 꺼내 보여야 했다. 그게 서로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되는 시련도 있었다.
힘들게 도착해 둘러보면, 무지개가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함께 거기까지 온 연인은 그 자체로 행복했다. 공포 영화 방불케하는 추격전의 끝은 달콤 쌉싸래한 ‘좋은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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