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깊이 세상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곳까지 내려가 세이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환하고 다정하게 웃었다.
‘생이 다하여 끝이 난 것이라면, 다시 태어나 새롭게 시작하면 돼. 죽어가는 너를 대신할 새로운 존재가 필요했었던 거구나. 조금만 더 빨리 너에 대해 자세히 알고 이해했더라면, 라이트리아였던 생에서 나는 주저 없이 너를 대신 했을 텐데. 너무 늦었지?’
세이나는 두 팔을 벌리고 슬피 우는 존재를 포근히 끌어안았다.
‘착하고 상냥한 아이, 네가 품고 있는 모두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이리도 아프게 우는구나. 이제 괜찮아.’
육신도 형상도 없던 무언가가 뭉치면서 작은 빛을 뿌리며 세이나의 품에서 작은 아이의 형태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점차 작아지며 아이에서 아기로 아기에서 작은 구슬처럼 작아지더니 그대로 세이나의 배로 스며들었고, 세이나는 몸을 웅크려 두 손으로 배를 감싸 안았다.
지상에 불안한 눈빛으로 공중에 떠 있는 세이나를 지켜보는 론과 모두는 지쳐서 바닥에 앉아 있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야! 이건 정말 아니잖아!”
론은 버럭 성질을 내면서 세이나에게 빠르게 달려갔다.
흐릿해진 세이나가 몸을 둥글게 말더니, 그녀의 발끝부터 빛가루로 화하기 시작하면서 모두의 시선에서 점점이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다급한 외침과 함께 허겁지겁 손을 뻗어보아도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고, 완전히 그녀의 존재가 사라진 자리에서 허망히 무릎을 꿇었다.
“이건.. 정말 아니잖아.”
바닥에 손을 짚고 흙을 움켜쥐며 화를 내는 론의 주변에도 다들 비슷한 심경인 허망함에 고정되지 않은 눈을 허공에 둘 뿐,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새끼는 어쩌라고.. 네가 없으면 그 새끼는 어찌 버티라고. 안 죽는다며! 너를 기다리는 인간이 한 명 뿐인 줄 아냐고!”
아무리 주먹을 땅에 내려쳐도 화가 잔뜩 난 론의 잔소리는 들어야할 이가 없어 공기 중에 흩어질 뿐이었다.
모든 재앙의 촉매제가 되었던 제로드와의 싸움에서 이긴 바이안은 깊게 베어진 뺨을 타고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닦았지만 쉬이 피가 멎지는 않아서 다시 흘렀다.
“하아아~~”
숨을 깊고 길게 내쉬었다.
자신이 해야 할 첫 번째 역할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세이나와의 약속을 하나 지켜내었고, 이 후의 약속들은 모든 것들이 무사히 제자리를 잡았을 때다.
우르르릉 격렬하게 흔들렸었던 지진이 마지막을 알리려는 것인지, 작은 여진이 미세하게 흔들리다가 멈추더니, 처음에 퍼지면서 스쳐지나갔던 따스한 기운이 땅에서 솟아올라 온 대륙을 감쌌다.
“세나...”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은 허상일까 진짜일까.
반투명한 빛에 싸여 비치는 세이나의 모습은 상상속의 동화에서 나오는 정령의 모습이 이러할까 싶을 정도로 신비하고 아름다웠다.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있는 바이안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쓸고 입술을 마주치지만 아무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바이안은 그녀를 안으려 팔을 굽혔지만, 처음부터 없었는지, 그의 눈에서 사라졌다.
“아....”
빈 품이 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그의 두 눈에 굵은 빗줄기가 되어 땅으로 후두둑 떨어진다.
여태껏 몸살을 앓아 뜨겁게 열이 올랐던 대지를 식히기 위한 비가 그의 눈물을 덮고 가렸다.
“으아아아아악!”
핏줄이 터질 정도로 움켜쥔 주먹과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고 크게 괴성을 지르는 바이안은 이 빗소리가 숨겨주겠지, 이 빗줄기가 나의 눈물을 가려주겠지, 그리 되 뇌였다.
얼마만큼 울부짖었을지 모르는 시간, 조금씩 약해지는 빗줄기에 제로드가 숨져 사라진 곳을 바라보는 바이안은 홀로 나직였다.
“솔직히 너의 말을 전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네 놈이 나와 비슷하다고 한 그 말은 틀리지 않아. 왜 하필 세나인지 그저 원망스럽다.”
솔직한 말을 짧게 끝낸 바이안은 등을 돌리고 멀리서 자신의 명을 기다리는 이들을 향해서 걸어갔다.
“단지, 네 놈과 나의 다른 점은 하나다. 약속. 그리고 서로의 바람을 이루기 위한 맹세.”
살아남은 모든 병력들이 바이안이 지나갈 때마다 길을 터주며 허리를 숙였다.
“그저, 그 차이일 뿐이다.”
세이나의 마지막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모두의 대표로 론이 조금 앞으로 나와 바이안의 앞에 섰다.
두 사내의 시선이 얽히며 마치 자신이 예감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묻는 바이안의 눈빛을 받은 론은 가만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래...”
지금이라도 이성이 비틀릴 것 같아 이를 세게 물면서 눈을 천천히 감았다 느리게 뜬다.
그녀가 원하던 대로 새롭게 시작될 땅에서 모두를 지탱해주겠노라.
이제부터 태어날 많은 미래들에게 이러한 과거가 더는 없도록 이끌어주겠노라.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잊혀지지 말고 잊지 말자.
“재상.”
“예. 폐하.”
미리 대기하고 있던 케리프는 그의 부름에 곧 바로 대답했다.
“전 대륙에 퍼져있는 이들에게, 지금까지의 피해와 현재 상황에 관한 연락을 넣어 보고하고, 복구에 필요한 물자와 금액을 정리해 올리게.”
“추리는 대로 바로 올리겠습니다.”
이미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인지, 일은 일사분란하게 하나씩 빠르게 정리되어 갔다.
황궁으로 귀환하고 보니, 이 곳도 상당히 피해를 봤기에 성의 여기저기 금이 가고 무너진 건물도 있지만, 다행이 본궁은 거의 멀쩡했기에 곧 바로 업무를 시작하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집무실에 들어가 순차적으로 올라오는 보고서를 훑는 속도는 빨랐다.
[이 통신이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황제폐하께 무한한 광영이 드리우시길.....]
대륙이 크게 두 개로 갈라진 후, 어찌된 것인지 통행구는 자신들이 있는 대륙 외에는 사용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통신구도 썩 상태가 좋지 못한 것인지, 서로 만나기 요원해진 곳들에서의 마지막 통신은 처음에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고, 떨어지고 비어진 문구를 간신히 정리하고 수복했다.
첫날에는 피해의 복구를 어디부터 시작해야할지 난감할 정도로 버벅댔지만, 한 달이 두 달이 되어가면서 빠르게 속도를 올렸다.
죽어갔었던 세상이 언제였냐는 듯이 새로운 터전을 만들고 가꾸어 가는 이들의 면면은 밝고 활기찼다.
똑 잘려 서대륙으로 불리기 시작한 어느 한 도시에 보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고함을 치면서 싸우는 두 명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네가 왕 하라고!”
“싫습니다! 제가 어찌 왕을 하란 말입니까?”
고함소리가 커지면서 청년과 중년인의 얼굴이 바짝 들이 밀어졌다.
“해. 하라고. 해!”
“지상인인 저보다는 백작님이 어울리십니다. 맞잖아요!”
“사람들은 나보다 너를 더 따르잖아. 네가 해!”
복창 터져 죽겠다며 답답한 가슴을 주먹으로 퉁퉁 치던 중년인은 마지막 키를 꺼내들었다.
“내 딸.”
“싫.. 네?”
싫다고 하려다 멈칫한 청년의 반응에 회심의 미소를 주욱 그어 올렸다.
“내 딸이랑 진즉에 눈 맞은거, 내가 모를 줄 알았나?”
“그..”
마치 나쁜 짓을 해서 들킨 사람처럼 쩔쩔 매고 있자니, 중년인은 짐짓 위엄어린 모습으로 당당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결혼 허락해 줄 테니까, 대신에 너 왕 해.”
급작스럽게 올라온 갈등에 아버지의 옆에서 둘을 어찌 말리나 좌우로 파닥이고 있던 여인의 얼굴을 붉게 물들여 터트려버렸고, 청년은 백기를 들고 뜨거운 자신의 얼굴을 버석한 손으로 쓸었다.
“하겠.. 네.. 감사합니다.”
동대륙 남부의 어느 작은 터에 서로 힘을 합쳐 건물을 짓고 나무를 날라 새로운 마을을 꾸리고 있었다.
“아으.. 우.”
망치를 들고 열심히 못질을 하는 청년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갈긴 여인은 얼얼한 뒤통수를 쓸면서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청년에게 당당하게 새참을 들어 올렸다.
“하하하하. 언제 봐도 유쾌한 부인이라니까.”
주변에서 자신들의 몫까지 준비해준 여인과 청년을 향해 호탕하게 웃었다.
“눈독 들이지 마시죠. 임자 있습니다.”
호감어린 시선을 가리면서 자신의 부인을 뒤로 스윽 숨기고 그들을 흘겨봤다.
“아, 누가 뭐랬나? 남의 부인 안 건드려.”
“잘 어울린다고 해줘도 지랄이여. 으미~ 혼자 사는 놈은 서럽다. 서러워.”
여인은 사람들의 입모양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뭐라 했는지 읽더니, 부끄러워 청년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으...”
자신을 부르는 소리라는 것을 눈치 챈 청년은 그런 부인을 포옥 안고, 영광인줄 알라 콧대를 세웠다.
“내 부인이 착해서 식사 하는 줄 아십쇼. 솔직한 심정으로는 저 혼자 다 먹고 싶으니까.”
의기양양해 하는 청년을 올려다보던 부인의 죽빵 스매시에 저절로 나가 떨어졌고, 모두는 자신들의 외로움을 쿡쿡 건드리는 괘씸죄를 추가해 음식을 게걸스럽게 해치웠다.
복수의 식사에 자신의 몫이 현저히 줄어 우울해 하고 있자, 등을 있는 힘을 다해 퍽퍽 두드리며 위로해주는 부인에게 저녁밥을 곱빼기로 해달라 조른다.
새롭게 올라온 크고 작은 섬들의 생태가가 어찌 될 것이며, 무엇이 있을지 떠날 준비를 하는 학자들부터 모험가등 많은 이들의 관심과 호기심에 건설되고 있는 항구들에 사람들이 몰리기도 하는 등, 여기저기에서의 새로운 바람과 변화에 올라오는 업무의 양이 황제의 집무실에 발을 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쌓인 서류 탓에 사람이 반대로 치였다.
“재상...”
“부르셨습니까...”
꺼져가는 목소리가 기운이 빠져 흘러 나왔고, 들려오는 대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옥보다 더한 지옥을 뭐라 부르는가?”
“...소신도, 알고 싶습니다.”
동변상련의 둘은 거의 동시에 한 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아...”
“하아...”
손가락이 부러질 정도로 펜을 놀리던 손을 잠시 멈추고 천장을 응시했다.
“참으로 평화롭습니다.”
꺼낸 말과는 전혀 다르게 거뭇하게 꺼진 케리프의 눈가가 어째서인지 촉촉이 젖어 그렁거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