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나를 죽이기 위한 이들과 세이나를 지키기 위한 이들이 한 참을 대립하고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빛 무리에 눈을 뜨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서로를 노리는 검을 잠시 멈춰야만 했다.
페르디난드는 어떤 식으로 어떻게 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예상보다 빠르게 진척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더 늦기 전에 세이나를 막아야 한다 생각했다.
하지만 기이하리만치 몸은 세이나를 목적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제임스!!”
그의 다급한 부름에 제임스는 보이지 않아 눈을 감았지만, 대략적으로 세이나가 어디 즈음에 있는지 감각으로 예측을 하고 억지로 다리를 떼었다.
하지만 페르디난드의 음성을 들은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론은 땅을 더듬어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들을 한가득 손에 들어 허공에 뿌렸다.
목표한 놈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면 뭐 어떠랴, 있는 대로 집어 던져버리지 뭐라는 작전이 통했는지, 쾅쾅 터지는 돌의 파편들에 무언가가 맞는 소리와 신음 소리가 들렸다.
“등신~”
이미 여러 차례 공방을 주고받아 흐르는 피를 대충 닦으며 장난스레 비죽이자, 제임스는 론의 목소리에 고개를 고정하고 파편에 정통으로 맞아 터진 이마를 꾹 눌러 지혈했다.
페르디난드는 이번에도 실패했음을 직감하자,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해야한다 판단하여 앞으로 달려갔다.
“컥!”
하지만 날카로운 검에 찔려 무릎을 꿇었다.
하일은 찌른 감각이 확실하게 느껴지자, 회심의 미소를 지은 채로 검을 뽑아냈다.
“마력도 기척도 확실하게 조절할 수 있다면, 반대로 타인의 기척을 느끼는 것도 당연히 가능하지. 오히려 앞이 보이지 않은 상황이 내 능력의 절정을 찍은 건가?”
물론 아직 범위가 넓지 않아 불만스럽다 투덜대고 있자니, 로이에가 씩씩 성을 냈다.
“저 새끼 내가 끝내고 싶었는데, 뺏어가기 있어요? 단장님이면 다냐?”
페르디난드의 신음을 들은 로이에의 발광에 하일은 길게 한 숨을 쉬면서 골치가 아프다 이마를 짚었다.
이 자리는 대련하는 자리가 아니고 죽고 죽이는 전쟁 통 속에 있건만, 누가 누구를 공격하든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로이에는 페르디난드에게 자신의 능력이 대 놓고 막히는 것이 억울했던지, 상당한 감정이 쌓여있어서 갑자기 튀어나와 쓱싹하는 하일에게 화가 저절로 옮겨갔다.
“후후후. 긴장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기사들은 내 살다살다 처음 보는구나.”
하일은 처연히 웃는 페르디난드가 있는 방향으로 검을 들어 올리며 납득했다.
“모시는 주군이 그러할 진데, 그 밑의 수하들도 다를 바가 없지 않겠나?”
“하... 주인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위하여 이리 뛰었건만, 내가 부족하여 못 이루는 구나.”
이미 피를 많이 흘려 움직일 힘도 없던 그는 하일의 검에 쉬이 숨이 끊어졌다.
하일은 근처에 서로를 적대하고 있는 두 개의 기운이 론과 제임스인 것을 파악하고, 나머지는 그에게 맡긴 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이, 겁나게 빠른 놈.”
론은 비뚜름하게 제임스를 불렀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적당히 대답이라도 나오면 어디 즈음에 있는지 예측할 수 있겠지만, 멍청한 인간이 아닌 이상 대답할 리가 없었다.
“네들에게 더 이상 승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계속 할 거냐?”
서로 쉽게 움직일 상황이 아니나,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이 편하게 시비를 걸었다.
“뭐, 나는 처음부터 이기든 지든 관심이 애초에 없는 놈이라서 글쎄.. 계속 해도 상관없고, 그만해도 상관없달까.”
론 못지않은 제임스의 빈정거림에 얼척이 없었다.
“이야~ 너 여긴 왜 있는 거냐?”
“그러게. 왜 여기 있을까?”
서로의 목적을 위해 대치하고 있는 사이라고 하기에는 모든 것에 귀찮아하는 것 같은 제임스에 오히려 반대로 그의 속이 궁금해진다.
제임스도 처음 제로드의 손을 잡았을 적에는 다른 간부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가족들의 시신을 끌어안고 절규하고, 가족을 지키지 못한 나약한 자신에 절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복수하고 싶은 그런 마음만 가득 차있었다.
뒤틀린 인성과 시야에 힘이 생기고 처음 행했던 살육은 자신의 가족을 죽인 단체였다.
하지만 너무나도 쉽게 죽어버린 이들의 시신을 밟은 그에게 남은 것은 텅 빈 허망함이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멸망시킨다는 제로드의 말에 적극적으로 손을 들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의미를 잃었기에 그에게 약조하고 얻은 힘을 그가 원하는 방향대로 쓰고는 있다 하더라도 솔직히 자신은 죽지 못해 산다는 것이 맞는 말이었다.
어이없어 헛웃음을 흘리던 론은 혼자 남은 그가 세이나를 굳이 노릴 생각이 없다는 것은 확실히 느꼈다.
조금 많이 떠들었다고, 흐릿하지만 주변이 보이기 시작하자 시야에 서로가 잡혔다.
순간의 발도에 빠르게 론에게 짓쳐 들어간 제임스의 검이 론의 어깨 죽지로 내리쳤고, 론은 뜨거운 고통에도 불구하고 한 손으로 그의 검을 꽈악 움켜쥐었다.
“빨라서 못 죽이면 잡아서 못 움직이게 해야지.”
상체를 보호하는 제임스의 갑옷에 손을 얹은 채로 회심의 미소를 그렸다.
“...확실히. 변형시키는 능력이 내 스피드 못지않네....쿨럭!”
몸을 보호하기 위한 갑옷이 론의 마력을 타자마자 무수히 많은 날카로운 송곳으로 변해 그의 전신에 촘촘히 박혀 튀어 나왔다.
제임스는 자신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오히려 이제야 죽을 수 있다 만족해했다.
꺼져가는 시야에 론의 등 뒤에 두명이 나타나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아빠~ 빠빠.”
지금까지 아내는 자신에게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었는데, 처음으로 딸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어주면서 딸과 함께 손을 열심히 흔들었다.
‘빠빠.’
처음으로 온전한 모습을 하고 예쁜 꼬까옷을 입고 있는 사랑하는 두 여인과 손을 흔들어 헤어짐에 인사했다.
‘아.. 저리 예뻤구나.’
다행히도 소멸하기 전에 가물 했던 본연의 얼굴을 보게 되니 기분이 좋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말라 죽은 제임스가 힘없이 땅으로 쓰러졌고, 론은 한 손으로 깊게 베인 어깨를 지혈하며 그와 떨어졌다.
자신들의 싸움은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아마도 바이안 뿐일 것이었다.
뒤를 돌아 세이나를 올려다 본 론은 그녀의 심상치 않은 변화에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세이나의 영혼을 담은 육신이 점점 흐릿해지면서 지금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투명해졌기에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싶지 않지만, 육신의 소멸의 전조현상 같아 불안해졌다.
“돌아버리겠다.”
“젠장.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게 하나도 없다니.. 미쳐버릴 것 같다.”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바로 하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자신들은 그저 무사히 잘 될 것을 바랄 수밖에 없는 것에 화딱지가 올라온다.
“살자. 살아주라.”
세이나를 향한 론의 독백이 허공에 흩어진다.
엇비슷한 능력과 실력에 피범벅이 된 둘은 서로에게 살기를 죽이지 않고 노렸다.
“네 아비 보다 실력이 월등히 높구나.”
“생각보다 약해.”
덕담처럼 주고받은 제로드는 바이안의 말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후회 할 것이다.”
“안 해.”
강한 의지는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음을 보여주는 바이안의 눈빛에 제로드가 반대로 흔들렸다.
“나와 비슷하다, 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제로드는 다름을 이제는 납득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틀렸구나. 너와 나는 너무 많은 것이 달라.”
“......”
대답을 바라지는 않았기에 바이안의 침묵에도 제로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처음엔 비슷한 공통점이 있으나, 끝에서는 선택한 길과 방향이 너무도 상반되는구나.”
깊고 어두운 과거를 회상하며 바이안과 자신을 비교했다.
“끝이 보이니, 우리도 슬슬 끝을 내야겠지.”
대지가 얌전해져 편안해지고 있음을 이미 느끼고 있었던 제로드는 진정으로 그녀가 멸망을 막았음을 깨달았다.
“아이야. 마지막의 검을 나누기 전에 말을 해주고 싶구나.”
검을 세워 올리며 마치 자신의 아이에게 조언을 주듯 말투가 상냥했다.
“너의 여인이 죽고, 지금이 아니라 할지라도 홀로 남은 너는 종래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외로움과 공허함에 사로잡힐 것이야.”
제로드에게 있어서 세이나가 죽는 다는 결론은 바뀌지 않았기에, 확신을 담아 말을 전했다.
“설혹, 네 말처럼 세나가 죽는다 하더라도, 그럴 시간도 틈도 나에겐 없다.”
세이나가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만일 정말 오늘이 그녀의 마지막이 된다 하여도 바이안은 그의 말처럼 되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가슴에 못 박았다.
“약속과 맹세. 어릴 적 네 놈에 의해 죽었다 싶었을 때도, 그 약속으로 나는 살았다. 지금이라고 못하지 않아.”
굳건한 바이안의 눈동자에 제로드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강하구나. 하지만 그렇기에 부러지기도 쉽다는 것을 명심하거라.”
뒤로 뺀 발과 앞으로 지탱하는 발에 힘을 주고 동시에 서로에게 검을 휘둘렀고, 거대한 힘이 또 다시 주변을 초토화 시켜갔다.
끝나지 않을 두 거인의 싸움은 서로 마지막을 위해 더욱 힘을 쥐어짜냈다.
둘은 이미 엄청난 공방에 힘이 부친 상태이기에 한 쪽에 빈틈이 생기면 한 번에 끝나리라.
게다가 역시 오래 산 제로드와 경험의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어서인지, 순간적으로 비틀거린 바이안의 얼굴에 찔러 들어오는 검이 코앞까지 당도했고, 서둘러 고개를 틀어 피했지만, 조금 늦었는지 턱에서 눈과 귀 사이로 검날이 깊게 베어나갔다.
뒤로 피하면 이대로 자신은 끝이라 바이안은 그 반대로 제로드의 품으로 파고들면서 검을 찔렀고, 옆으로 빙글 피하는 그의 방향에 맞춰 함께 몸을 돌려 팔꿈치로 찍어갔다.
투두두둥 타인들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엄청난 싸움에 자욱한 모래바람이 일어 둘을 가렸다.
공방이 멈추고 내려앉은 정적에 바람이 불어 모래구름을 흩트렸다.
깊게 베어 내장이 튀어나오려는 배를 움켜쥐고 바닥에 힘없이 앉아 있는 제로드의 목을 바이안의 검이 눌렀다.
승패가 결정이 났다.
바이안은 그의 목을 치기 위해 마지막으로 검을 들어 올렸고, 훙 휘두르는 그 사이에 작은 여인이 튀어 나왔다.
“주인님!”
텅빈 눈으로 가만히 그의 검을 보고 있던 제로드는 자신의 앞을 막으며 끌어안는 우루루에 처음으로 당황하여 그녀를 안고 반대로 돌려 안았다.
등이 길게 갈라지며 한 움큼 피를 토한 제로드가 만든 그늘에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쓸었다.
“왜 온 것이냐.”
“주인님..”
바이안은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주춤 했지만, 한 발 뒤로 물러나는 것을 선택했다.
우루루는 흐르는 눈물을 가만히 놓아두고 끝까지 자신을 나무라는 제로드에게 억지로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주인님이 안 계시면 저도 없어요. 주인님이 없으면 저는 살 필요가 없어요.”
제로드는 힘이 다하여 우루루의 품에 쓰러졌다.
그런 그를 고쳐 잡아 얼굴을 자신의 무릎에 얹고 그의 머리를 쓸었다.
“아무것도 없다더니 너에게도 남아 있지 않는가.”
묵직한 바이안의 목소리에 제로드는 힘없이 웃다 그의 어리숙한 배려에 저리 물렁해서 어찌 살지 싶은 생각까지 했다.
“우루루.. 오늘은 꿈을 꿔 보고 싶구나.”
“....네.. 주인님. 행복한 꿈을 꾸세요.”
“그 마지막은 너였으면 한다..”
처음으로 자신을 온전히 봐주고 생각해주는 그의 소망에 우루루는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마력을 사용하여 머릿속에 자신의 생각과 바람을 담아 집어넣었다.
“당신이 굳이 손을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현자의 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제로드는 죽은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숨이 멎자, 재가 되어 바람에 흩어져 사라졌다.
우루루는 처연히 웃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제로드가 죽었기에 영혼을 묶기 위해 새겨진 문양은 이미 그녀의 목에서 사라졌다.
가만히만 있어도 얼마 못 버티고 죽을 것이기에 우루루는 미련 없이 등을 돌리고 멀어져갔다.
다른 기사들이 간부인 그녀를 잡으려 했지만, 바이안은 쫒아가지 말라 명령했다.
바이안도 이미 모든 것이 끝이 났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