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드는 자신의 마지막 명령을 기다리는 모두의 집중된 시선에 손을 들어 올렸다.
“가라.”
단 한마디지만, 그 소리와 동시에 군대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앞으로 내 달렸다.
지금까지 쭉 전장에 참전하지 않았던 페르디난드도 전장 속으로 달려가면서 생각했다.
‘주인님의 계획에 오점인 그녀를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죽여야 한다.’
그는 서로를 죽고 죽이는 아수라장 속에서 틈을 비집고 들어가 세이나를 기필코 죽이기 위해 움직였다.
모든 병력들이 나아가고 있는 와중에도 제로드는 홀로 가만히 서 있기만 하다가, 느릿하게 검을 빼들고 여유롭고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아이야. 너랑은 이리 될 수밖에 없나 보구나.”
한편, 군세를 막아내고 있는 이들의 사이를 뚫고 달려가는 바이안의 눈은 목적하는 존재를 찾기 위해 날카롭게 쏘아진다.
“네 놈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일 것이다.”
만일 이 전쟁에서 자신들이 승리한다 하더라도 그가 살아 있다면, 이런 일이 또다시 일어 날 수 있기에 이번의 싸움에서 그와 승패를 확실하게 보아야했다.
두 세력이 마지막을 향해서 부딪혀가기 시작했지만, 또 다른 위협이 적아 구분 없이 모두의 싸움에 끼어들었다.
사람이 일어 설 수도 없을 정도의 지진이 쉴 세 없이 일어났고, 달려가는 이들의 발밑이 갑자기 푹 꺼지며, 갈라지고 뚫린 땅속으로 속수무책으로 추락했다.
혼돈과 아수라장이 펼쳐지는 장위에 서로를 죽이기 위한 광기는 지옥도를 연상케 하였다.
잠옷처럼 얇고 부드러운 하얀 원피스를 입고 서 있는 세이나와 조금 많이 떨어진 거리에 서서 경계하고 있는 기사들과 하나하나 순서대로 눈을 맞췄다.
14명의 기사들은 세이나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을 때 심장에 자신의 주먹을 가져가 작게 허리를 숙였다.
짧은 것 같으면서도 긴 시간을 함께 해오며 이제는 가족처럼 느껴지는 그들은 세상 그 어떤 기사들보다 제일 든든했다.
세이나의 정면에 서 있는 론이 등을 보이고 멀리 일어나고 있는 먼지구름에 경계의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엄지를 세운 손을 들어 올렸다.
“하여간, 긴장감을 어디다 뒀는지. 원~”
론의 변함없는 행동에 키득키득 웃다가 세이나는 조금 큰 소리로 말을 걸었다.
“순진한 히데아 울리고, 고생시키면 그냥 마 콱! 주리를 틀 거니까 그리 알아.”
대답은 듣지 않았어도 그의 등짝이 격하게 움찔이는 것에 만족한 세이나는 이제는 진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싶어, 천천히 숨을 들이 마시고 내쉬면서 자신을 감싸 안고 있는 힘을 밖으로 풀어냈다.
하얀 빛 무리가 세이나에게 뿜어져 나오면서 점점 투명해져가며 범위를 넓혀 갔다.
세이나를 지켜 서고 있는 이들을 시작으로 멀리 떨어져 싸우고 있는 이들부터 마력을 쓰지 못하는 이들까지 그 신묘한 기운을 모두가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재해는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욱 몸부림을 치는 것처럼 갈수록 거세져만 갔다.
느리지만 빠르게 커지고 퍼지는 그 힘에 제로드와 싸우기 위해 달려가는 바이안도 느꼈던지, 달리던 발을 멈췄다.
“세나...”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꺼내던 그는 힘을 내고 있는 세이나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자신도 그러쥔 검에 힘을 더욱 쥐면서 멈췄던 발을 떼어 다시 달려갔다.
세이나를 중심으로 보호하고 있는 모두는 따뜻하면서도 상냥한 기운에 자신들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세이나를 보다 론은 버럭 소리질러버렸다.
“야익!! 공중에 뜬다고 말하지 않았잖아!”
천천히 허공에 몸이 뜨고 있는 세이나를 발견한 론은 아주 확실하게 표적이 되어주고 있는 상황에 길길이 날 뛸 수밖에 없었다.
“아하하. 우리 주군의 존재감 최고다. 역시 주인공은 가만히만 있어도 가장 눈에 띄지.”
로이에는 세이나를 추켜올리면서 시원하게 모두에게 질문했다.
“하늘 날 수 있는 분? 공중전 자신 있는 솨람?”
바이안이 있으면 모를까, 가능한 인간이 없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하는 물음에 기가 막혀서 코웃음 치면서도 하늘 까지 경계의 범위를 다시 잡기 위해 잠시 분주해졌다.
죽고 싶지 않은 이들은 자신의 목숨이 위협을 받으면 저절로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투지나 의지를 끌어 검을 찌른다 하더라도 자신의 목이나 심장을 향하는 날카로운 검 날에 서둘러 막았다.
반대로 죽는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광적으로 덤비는 이들은 살이 베이든, 심장이 뚫려도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검을 휘둘러 한명이라도 더 지옥으로 끌고 들어갔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병사로 지원했던 아직 어린 테가 남아 있는 소년병은 팔이 절단되어 바닥을 나뒹굴었다.
뜨겁게 달궈지는 듯한 고통과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검에 질겁하여 덜덜 떨고 있을 때, 어마무시한 검이 소년병을 겁박하는 적군의 머리통을 으깨버렸다.
“끌끌끌~ 아가야 쫄면 뒈진다.”
“어이차~ 죽고 싶지 않으면, 공포에서 도망치지 말거라.”
할아범의 뒤에서 마저 썰어대고 있던 드란체 후작은 피가 콸콸 쏟아지는 소년병의 팔을 재빠르게 묶어 지혈해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린놈이 참전 한 것만으로도 용기 있는 놈이지. 하하핫. 크게 다쳤으니 뒤로 빠져 있거라.”
드란체 후작은 자신들의 진영이 있는 방향으로 손가락질 하면서 어린 소년병을 칭찬해주고 전장에서 물러나게 했다.
“끌끌끌 갑세나.”
“갑니다. 어르신.”
할아범과 후작은 오랫동안 합을 맞춰왔던 동료처럼 호흡이 척척 맞아 떨어져 전장 속을 종횡무진 휩쓸어갔다.
그러는 도중에 갑자기 할아범의 발밑으로 쩌저적 땅에 금이 갔다.
크게 벌어지는 땅의 균열에 서둘러 검을 세로로 뉘여 검면에 올라탄 할아범은 어이없고 웃겨 죽겠다며 폭소했다.
“끌끌끌~.”
“그 엄청 커다란 검이 이럴 땐 확실하게 다리 역할을 하는군요. 쓰임세가 참으로 다양합니다.”
후작의 진지한 감탄에 검을 밟아 건너간 할아범이 다시 자신의 검을 어깨에 걸쳤다.
“그래서 내가 이 검을 쓰는겨.”
절대로 그런 이유가 아니지만, 쿵짝쿵짝 서로 장단을 주고받았다.
둘과 떨어진 거리에서도 적들과 대치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전장을 누비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신이나 보여 마치 놀러온 사람들 같았다.
근처에서 함께 싸우고 있는 기사들의 눈에 광적인 적들과는 다른 공포를 그들에게서 보고 있었지만, 확실하게 사기는 오른다.
한참을 얽히고 설켜 먼지구름을 일으키는 전장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인지, 론들에게까지 아직 적들이 미치지 않고 있어서 전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신들이 무료해 보이는 착각이 든다.
“얼라리? 역시나네.”
동료들보다 먼저 적의 접근을 먼저 눈치 챈 론은 케리프가 간부들이 직접적으로 세이나를 노릴 것이라 했었던 말에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의 머리에 감탄했다.
자신들을 일체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세이나를 목표로 달려오는 페르디난드를 발견하고 여럿이 막았지만,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치 그들이 어느 방향에서 검을 휘두르는지 알고 있는지 피하면서, 모두의 능력이 그의 몸에 닿을 때마다 힘을 잃었다.
“대가리 속에 뇌가 주름지다 못해 엉켜 풀지도 못할 꼬인 새끼야.”
로이에는 일전에 자신의 발차기를 막고 능력을 무효화시키던 페르디난드를 향해 욕하면서 덤볐다.
“확! 뇌꾸녕에 연가시를 쑤셔 박고 만다. 내가.”
페르디난드는 입도 무기인지 입으로도 싸우는 로이에에 혀를 차면서 역시 대현자의 측근들이라 만만치 않을 것이라 예상을 했지만, 쉽게 접근을 하기 어려워 미간을 절로 구겼다.
남은 동료들이 간부가 아직 한 명이 더 있음을 들어서 경계를 풀지 않고 주변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멀리서 작은 인영이 다가오는 것 같아 그를 주시했다.
하지만 갑자기 흐릿해지면서 사라지더니 그림자가 훅하고 론에게 치고 들어와 순식간에 품을 내준 론과 부딪혔다.
“몇 명 안 남았다 했더니, 역시 제일 까다로운 새끼들이 남았다 이거냐?”
상당히 떨어져 있는 거리라 생각했지만, 그 거리가 무색하게 눈으로 쫒을 수 없는 스피드에 질렸다.
페르디난드는 기사들과 공방을 펼치면서 제임스의 등장에 작게 입술을 끌어 올렸다.
그의 순간적인 스피드에 확실히 반응이 늦다.
간신히 막아낸 론은 서둘러 제임스에게 검을 겨누지만, 제임스는 이미 론의 시야에서 벗어나 위로 뛰어 올라있는 상황이었다.
허공에서 무방비한 세이나를 노리던 제임스의 검이 카강 다른 검에 막히는 소리와 함께 퍼억 가슴에 둔탁한 충격을 받고 땅으로 떨어졌다.
“역시. 그 책사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페르디난드가 계획했던 제임스의 스피드를 살린 공격은 분명 성공한 것과 진배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그런 계획을 미리 눈치 채고 있었는지, 너무 쉽게 계획이 막혀버렸다.
게다가 설혹 눈치 챘다고 하더라도 제임스의 스피드를 막을 수단은 없을 것이라 예상을 했지만, 기사들의 장단점의 능력들을 그것에 맞춰 배치에 완벽을 기했음이 눈에 보였다.
제임스를 주먹으로 깐 하일이 곧 바로 땅에 착지했고, 그대로 그들의 인지에서 사라져버렸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 책사와 친해졌을 지도 모르겠군요. 아쉽습니다.”
열심히 입을 놀리고 있는 이라고 생각지 못하게 손과 발은 많은 공격들을 흘려냈다.
이미 존재감을 지운 하일단장에 처음 작전은 두 번은 통하지 않을 것을 예감했고, 제임스도 자신도 상당히 긴 공방이 오고갈 것을 알았다.
그렇기 때문인지, 처음처럼 적극적으로 표적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틈을 노리는 방식으로 바꿔야만 했다.
“조댕이 놀리는 건, 나랑 스타일은 다르지만 대단도 하네.”
로이에는 이죽 그를 비웃으면서 도발 했다.
“아가씨가 말이 참 거칠군요. 그러시면 인기 없습니다.”
하지만 역시 그에겐 그런 도발은 티끌도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어이. 로이에 너도 조댕이 그만 놀리고 집중해라.”
선배들의 힐책에 입을 비죽였지만,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활 타올랐다.
제로드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바이안보다 실력이 한참 떨어지는 적들은 숫자로 밀고 들어오면서 그의 속도를 떨어트렸다.
하늘로 날아가면 금방 갈 수 있겠지만, 화살 비에 그것도 요원치 못하고 있었다.
바이안은 자신의 앞길을 막는 적들에 짜증이 일고 있을 때, 노엘경이 앞장서서 길을 만들었다.
“폐하. 저들은 신경 쓰시지 마시고 가십시오.”
“맡기겠네.”
노엘경의 지휘 하에 기사들이 길을 만드는 사이로 달려가며 지금 자신이 황제이기에 말을 놓고 있지만, 엄연히 자신의 아버지의 친우인 노엘경에게 마음속으로 감사를 전했다.
“이리 다시 보는 구나.”
“......”
제로드는 자신의 앞에 선 바이안을 손수 반겨주었다.
“세상도 오늘로 마지막이고, 너와 나도 오늘이 마지막이 되는구나.”
가만히 있던 바이안은 그의 말을 정정했다.
“네 놈과 내가 오늘이 마지막이 되는 것은 맞지만, 세상이 마지막이라는 것은 아닌 것 같군.”
“글쎄. 과연 어찌 될까. 끝까지 지켜봐야 알겠지. 네가 맞는지, 내가 맞는지.”
고개를 비틀어 기울이면서 웃는 그의 표정은 여전히 자신이 모든 것에서 우위에 서 있다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너에게 남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 아이는 너의 품에 돌아오지 못하겠지. 육신도 남지 않고 그렇게 스러질 것이야.”
서로의 검을 들어 올리며 바이안은 제로드의 주절거리는 입을 바늘로 꿰매는 상상을 하면서 비죽 비웃었다.
“지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