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들의 군대가 사라지고 난 뒤의 전장은 어느 때보다 더욱 치열한 공방을 펼쳤다.
황제는 선봉에 서서 검을 휘두르며 자신을 따르는 기사들을 이끌었고, 전세 역전을 노렸다.
상대 병사들이 간부들과는 다르게 약하다 하더라도 그들도 인간이기를 거부한 이들답게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자신들을 향해서 적의를 드러내는 병사들을 도륙하면서도 황제의 마음속은 쓰디썼다.
세상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이들이 이렇게까지 많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며, 군대로 모여 송곳니를 드러내고 비틀린 광기에 절은 눈빛에 질려하는 이들도 무척 많았다.
“흔들리지 마라. 광기에 먹히면 그것으로 끝이다!”
마력을 담은 황제의 일갈에 마음을 추슬러보지만, 죽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고 목이나 심장을 내주면서도 득달같이 달려드는 그들은 한편으로는 시체들의 군대보다 더 공포스러웠다.
군을 세 갈래로 나누어 중앙에 황제, 우측에 할아범, 좌측으로 노엘경이 진두지휘하면서 밀어 붙였지만, 후퇴를 모르는 적군들은 오히려 더욱 몸을 들이밀기에 바빴다.
전쟁을 대처하는 자세가 상극인 싸움에 목숨에 미련이 없는 이들에게 큰 작전은 도움이 되지 못 한다 파악한 케리프는 삼면으로 압박해 들어가면서 전멸을 노리는 것이 가장 효율이 있다 작전을 내렸다.
다만, 변수는 몇 남지 않은 간부들의 행보와 머리로 보이는 이가 어떠한 작전을 세웠냐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케리프의 예상대로 조금씩 자신들 쪽으로 유리해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방심할 수 없어 망원경을 들고 전장을 계속해서 주시했다.
압도적인 마력과 힘으로 중앙에서 밀어 붙이고 있던 황제는 적들의 뒤에서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면서 자신에게 걸어오는 존재에 신경을 곧추세웠다.
다수의 기사들이 그에게 달려들었지만, 한번 휘두르는 검격에 한 순간에 목숨을 잃었고, 황제는 모두에게 그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 명한 뒤에 그와 대치했다.
“선조님께 예를 보여야 하는가 싶습니다.”
제로드는 자신을 바로 알아본 황제를 여유롭게 응대했다.
“너와 나의 사이에 그런 것이 어울린다 생각지도 않으면서 말을 참 곱게도 하는구나.”
황족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태양을 그대로 머금은 금빛 머리칼이 사라져 잿빛으로 어두운 머리카락이 바람에 스산하게 나부꼈다.
“수고를 덜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선조시여.”
존대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진정 자신의 선조라 생각지 아니하는 황제의 굳건한 의지를 담은 눈빛이 퍽 웃긴 듯, 그의 입가가 비틀려 올라갔다.
굳이 대화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황제의 돌격성 공격을 제로드는 여유롭게 피했다.
“그 아이가 너를 참 많이 닮았구나. 적으로 인지하면 실력의 차이를 가늠도 하지 못하고 다짜고짜 덤벼드는 꼴이 참으로 어리석어.”
“허허허. 갑자기 칭찬을 들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죽고 죽이는 전쟁에 실력의 고하를 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의 비꼼에도 황제는 태연스레 맞받아치면서 다시 검을 고쳐 쥐었다.
“하긴, 틀린 말은 아니지. 허나, 어리석은 것은 변함이 없구나. 전쟁을 치르지 않는다하더라도 어차피 세상이 멸망하면 다 끝나는 것을, 미련하게 붙잡고 있을 필요가 있느냐?”
이제야 검을 빼들어 보이는 제로드의 질문에 곧은 심지를 진심을 담아 내보였다.
“지킬 가족이 있고, 지켜야할 이들이 있다면 미련해도 붙잡아야지요. 황제이기 전에 한 가정의 아비이기에 더욱 미련해지려 합니다.”
“대현자를 믿는 것이냐? 정녕, 무너지는 세상을 고치고 지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제로드는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황제의 검을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주자, 두 개의 마력이 충돌하며 돌풍이 일어나더니 주변의 땅들이 움푹 패었다.
카가각 맞물린 검과 검의 마찰음과 두 명의 얼굴이 가깝게 마주했다.
“믿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며, 아직 끝날 것이라고 결정되지 않은 미래에 미리 절망할 필요가 있을까하는군요.”
두 번째 마력이 충돌하면서 거리를 벌린 황제는 표정에 변화는 없지만, 등 뒤는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마력의 깊이와 차이에서 자신이 한참 밀린다는 것을 쉽게 깨달았고, 어쩌면 자신의 마지막이 오늘 이 자리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아멜리아. 어제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다행이오. 아이들을 두고 죽는 것에 걱정은 없지만, 홀로 남을 당신에게는 정말 미안하단 말 밖에 할 수 없구려.’
땀으로 흥건한 손바닥을 대충 닦아 검이 미끄러지지 않게 고쳐 잡으며 죽음 앞에 의연함을 가장하고, 자신을 죽일 사신 앞에 날카로운 살기를 뿜었다.
“그거 하나만은 칭찬해야겠구나.”
황제가 무엇을 눈치 채고 각오했는지 안 제로드의 칭찬에 황제는 그저 미소로 화답했다.
두 명의 거물들의 격렬한 공방에 적아 구분 없이 근처에 있는 이들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고 멀리 거리를 벌려야만 했다.
노엘경은 떨어진 중앙 쪽에서 심상치 않은 마력들의 공방전에 다급해져 작전을 뒤로하고 그 곳으로 내달리려 했지만, 제임스의 등장에 쉬이 달려갈 수 없었다.
그러한 상황이 전장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막사에까지 느껴졌는지, 바이안이 회의를 하는 막사에서 빠르게 나왔다.
“아바마마.”
“전하!”
케리프는 자신의 옆으로 순식간에 나타난 바이안을 크게 소리쳐 불렀지만, 전장을 노려보는 그의 얼굴에 더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바이안은 자신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영문을 모르는 이들을 둘러보지도 않고, 그대로 전투가 치러지고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전장 통에서 바이안을 알아본 기사들은 황자의 등장에 화들짝 놀랐다.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덤벼드는 적들을 도륙하면서 가는 길을 방해하는 통에 그들이 거슬린 바이안은 하늘 위로 도약해 그대로 쏘아져 날아갔다.
제로드와 황제가 시야에 들어오자 급박함은 더욱 거세게 심장에 몰아쳤다.
자신을 비아냥하려는 의도인지, 한발 늦은 그에게 비친 장면은 검에 심장을 꿰뚫려 피를 토하는 아버지였다.
꼬챙이에 꿰이듯 가슴을 뚫고 나온 검날을 손에 움켜쥔 황제는 경련하는 몸을 억지로 버티면서 힘겹게 제로드를 올려다봤다.
“선조시여.. 당신...이 쿨럭... 바라는 미래는.. 없을 것...입니다.”
죽어가는 황제의 눈빛은 미래를 끝까지 놓지 않아 빛나있었지만, 제로드는 그런 그의 눈빛이 자신의 잘못을 책망하는 것처럼 보였다.
더는 그 눈을 보지 못한 제로드가 황제를 발로 찼고, 그대로 검에서 뽑혀 나가 멀리 날아간 황제는 커다란 바위에 힘없이 부딪혀 바닥으로 미끌어졌다.
“그르륵... 저의.. 아들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급속도로 숨이 꺼져가고 있음에도 미소를 유지하는 황제가 못마땅한 제로드는 그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지척에 다다른 바이안의 마력의 파동을 감지하고, 자리에 서서 불쾌함을 여실히 드러냈다.
황제와 제로드의 사이로 직각으로 떨어지면서 땅에 검을 꽂아 넣자, 쿠왕하는 커다란 소음과 흙먼지를 일으켜 사위를 가렸다.
혀를 찬 제로드는 바이안까지 상대하면 속이 뒤틀릴 것 같은지, 그대로 등을 돌려 돌아갔다.
바이안은 그가 돌아가든 말든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님을 알기에 자신의 아버지에게로 빠르게 달려갔다.
심장이 멎고 꺼져가는 그의 동공이 흐려졌지만, 바이안의 등을 보면서 입을 달싹이지 못해 소리를 내지 못하여도 아비로서 아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했다.
‘아들아. 네가 있어 미래가 두렵지 않구나. 네가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거라. 앞으로 나아가거라. 다만, 나를 대신하여 아멜리아에게 전해주었으면 하는구나. 나는 후회 없이 살았다고, 그대를 사랑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먼저 가서 미안하다 그리..’
무릎을 꿇고 숨이 멎은 자신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가슴에 새겨 넣으며 손으로 그의 눈을 덮어 감겨주었다.
“실망하시지 않을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바이안은 자신의 망토를 벗어 잠이든 황제의 상체를 덮어 안아들고 걸어갔다.
제로드의 변덕에 반응을 한 것인지, 적군들이 후퇴를 하여 소강상태가 된 덕분에, 격전을 치르지 않고 기사들과 병사들이 고개를 숙이며 바이안이 가는 길을 터주었다.
진영으로 도착하니, 이미 소식을 듣고 나와 있는 황후가 허리를 곧추 세우고 고고하게 서서 둘의 귀환을 맞이했다.
황후이기에 모두의 앞에서 슬프다 하지 아니하고 있지만, 그녀의 손이 떨면서 아파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바이안은 그런 자신의 어머니의 앞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다가왔고, 황후는 아들의 품에 머리를 기대고 입가에 미소를 그린채로 잠이든 황제의 얼굴을 확인했다.
황제가 머무는 막사 안으로 들어가 그의 시신을 뉘이고, 함께 들어온 황후에게 고개를 숙인 다음 바이안은 그녀를 두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멀리 떨어져 있으라 명령을 했다.
이유를 듣지 않아도 아는 이들은 묵묵하게 그의 명령을 듣고 황제와 황후만의 시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온전히 단 둘이 된 막사 안에서 황후는 밤이 깊어가도록 차갑게 식은 황제를 끌어안고 오래토록 슬피 울었다.
바이안은 기사들을 쉬게 하고 전열을 다듬어 가며 모두를 독려하고 돌아온 자신의 막사 안에 들어와서야 조그마한 세이나의 품에 상체를 기울여 안겼다.
“슬퍼?”
“슬퍼.”
“힘들지?”
“그러네.. 그런데 눈물은 나지 않아.”
세이나는 바이안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주었다.
“사람마다 슬퍼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잖아. 오빠는 이미 폐하가 바라는 바를 아니까, 그러지 않는 거라고 생각해.”
“세나야.”
힘이 없는 그의 부름에 다음에 나올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영혼들이 새로운 생을 위해 여행을 한다고 했잖아. 벌써 떠나셨겠지?”
“응. 오늘 함께 죽은 영혼들을 진두지휘하시면서 떠나셨을 거야. 나를 따르라! 이렇게.”
황제의 행동을 따라하며 근엄한 척 하면서 하는 세이나의 말투에 위로를 받은 바이안이 엷게 미소를 지었다.
전장에서 죽은 시신들을 거두어 모은 곳의 상단에 황제의 시신을 담은 관이 놓였다.
전시상황이기에 정식적인 장례식을 치르지는 못하지만, 하늘의 아버지인 황제의 서거에 약식의 장례식을 열기로 했다.
세이나는 히데아의 도움으로 잠옷처럼 얇은 햐안 드레스로 갈아입은 뒤에 천천히 막사를 나와 숙연하게 묵념을 하고 있는 이들의 사이를 걸어 나가 관들이 있는 곳에 당도했다.
모험가, 병사들, 기사들 그리고 상복차림의 대용으로 검은 색의 의상을 갖추고 있는 황족인 황후와 바이안이 그런 세이나에게 작은 목례를 했다.
장례식을 주도하는 신관이 없기에 세이나가 대신해서 나서기로 하였고, 세이나는 급조한 단상에 올라 숨을 골랐다.
“하늘 위 저 푸르른 세상. 누군가 저리 슬프게 우는지 구름 한 점 없이 비는 내리고...”
노을 지는 태양아래 세이나의 청아한 목소리를 담은 장송곡이 하늘 위로 퍼져나갔다.
그 어떤 이들 보다도 많은 생과 죽음을 보아오며 기억을 하고, 세상을 품고 아파했었던, 영혼들의 여행에 좋은 곳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라이트리아, 그녀의 마음이 소리를 타고 모두를 대표하여 멀리 뻗어 나갔다.
바이안은 짧은 장례식이 끝나고 단상에 내려오는 세이나의 손과 허리를 잡아 뒤 늦은 식사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이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았다.
이 곳에서 사랑하는 이를 잃어 가장 슬플 황후의 약한 체력에 진즉에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황후는 묵묵하게 다친 이들을 돌보고 시종들, 병사들과 함께 식사를 나르고 도왔다.
“엄마라는 존재는 세상에서 제일 강한 이름인 것 같아.”
세이나는 따뜻한 차를 받아 호록 마시면서 몸을 데우며 바쁘게 움직이는 황후에게 잠시 시선이 머물렀다.
홀로 앉아서 많은 이들의 면면들을 둘러 보다 황제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바이안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밤이 어둑해져서야 세이나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오빠.”
“응?”
빤뜩 올려보면서 자신의 옆에 막 앉는 바이안과 눈을 맞추었다.
“나 오늘부터 다시 잘 거야.”
그냥 잔다는 의미가 아닌 것을 눈치 챈 바이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들은 걱정하지 말고, 푹 자.”
한 품에 들어오는 세이나를 끌어안아 가만히 입을 맞추고 잠시간의 이별을 인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