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이 일상생활로 돌아갈 정도로 안정을 찾고, 재해에 대비하는 대처 방법을 구상하여 그들에게 가르치다보니 시간은 빠르게 훌떡 지나갔다.
멸망까지 앞으로 한 달, 그리고 대륙은 많은 것이 변했다.
대륙이 완벽하게 두 개로 갈라져 멀리 떨어졌으며, 땅위에 얹어져 있던 천공의 땅도 큰 지진에 어느 순간 쿵 떨어져 대륙과 높이가 같아졌다가, 처음부터 하나의 땅이었다는 것처럼 딱 붙어버리기까지 하면서 기다란 산맥이 솟아올라 장관을 연출하기도 했다.
수시로 변하는 대륙의 상황에 대처하면서 모든 병력을 이끌고 전장으로 진군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사이에, 기사가 허겁지겁 들어와 급보를 전했다.
전투가 다시 시작되었다가 패배하여 천공의 땅의 북쪽 끝으로 후퇴했다는 보고에 관료들은 창백하게 질려버렸고, 바이안은 당장 모두를 이끌고 가겠다는 참전 의사를 표명했다.
그렇다고 하여도 시간이 걸려 삼일이 지나서야 출정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때마침 간편한 복장을 하고 나타난 황후는 자신도 함께 가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지만, 바이안이 그런 어머니를 말렸다.
하지만 황후는 자신의 남편인 황제가 걱정이 되어 얼굴이라도 보고 돌아와야 마음이 편하다 그를 설득했고, 바로 궁으로 복귀하겠다는 확답을 듣고서 간신히 허락했다.
에바도 케리프가 걱정이 되어 따라가고 싶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그의 약혼녀로서 그리고 황족으로서의 의무라며 의연한 척 궁에 남았다.
“출발한다.”
“충!”
현궁과 황궁의 전 병력이 이동하는 장관에 백성들은 그들의 승전을 위해 거리에 나와 기도하고, 기원하며 배웅했다.
세이나와 황후가 타고 있는 마차와 말을 타고 달리는 기사들이 전장에 도착했을 때는 부상자들과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바쁜 모습이었다.
작전회의를 하다가 후발대가 도착했다는 보고에 케리프가 대표해서 바이안을 맞이했고, 곧 바로 현 상황에 대해 보고했다.
“저 쪽에도 머리를 쓰는 책사가 있는 듯싶습니다. 숫자로 밀어 붙이기밖에 하지 않았던 적들이 갑자기 방식을 바꿔 약한 병력을 집중적으로 파면서 밀고 들어와 많은 이들을 잃었습니다.”
케리프는 바이안과 세이나를 번갈아 보면서 짧게 상황을 보고한 뒤에 고개를 떨궜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저들이 전쟁의 승리가 목적이 아닌, 그저 피를 보며 이 상황을 즐거워 한다는 것에 편중하여 머리를 쓰는 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했습니다.”
자신의 판단 오류에 잃은 수많은 생명들에 대한 책망을 스스로 하는 케리프의 침중하게 어두워진 표정에 바이안은 가만히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회의하는 막사로 이동했다.
많은 말보다 더 위로가 되는 그의 도닥임에 우울할 세가 없는 것을 아는 케리프는 자세와 표정을 갈무리하고 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고, 바이안과 세이나를 추가로 잠시 멈췄던 회의를 빠르게 진행해갔다.
황제가 머무는 막사 안에서 황후는 안절부절 그가 돌아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다 늦은 시간에 안으로 들어온 황제를 보고 그에게 뛰어들어 안겼다.
“폐하.”
“많이 기다렸소?”
“폐하..”
그의 질문에 대답보다 다시 한 번 더 그를 불렀고, 황제는 그런 황후를 다치지 않도록 부드럽게 보듬어 안았다.
“걱정 마시오. 이리 멀쩡하잖소.”
곱게 빗어 올린 황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달래어 고개를 들어 자신과 마주보게 했다.
“아멜리아.”
혼인을 하고, 황제와 황후가 되면서 자신들의 자리에 맞추어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은지 너무도 오래되어 얼마 만에 사랑하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는 것인지, 그녀의 이름이 낯설기도 하면서 가슴속이 폭신했다.
“트로벤.”
황후도 그에게 보답하듯 가만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서로가 오래 떨어져 있어본 적이 이번이 처음이기에 서로에게 더욱 애정 어린 표현과 그동안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함께 밤을 보냈다.
회의가 끝났지만, 바이안과 케리프는 조금 더 남아서 이런 저런 대화를 이어갔고, 먼저 막사로 돌아간 세이나는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자신들이 태어날 곳을 위해 여행을 하는 영혼들의 무리에서 자신들이 갈 곳을 찾은 영혼들이 별똥별처럼 여기저기로 빠르게 내려가는 장관을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던 세이나는 자신에게 찾아와 품에 안기는 것처럼 들어오는 꿈을 꾸고 눈을 번쩍 떴다.
“나.. 어떡해.”
덜컥 마음이 내려앉는 감각에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다른 때의 자신이라면 영혼이었을 적의 감각이 남아 있었으니, 이런 꿈을 꾸었을 것이라 넘어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인간이기 보다, 이 세상과 연결이 되어 있어서 평범치 아니한 자신이기에 너무나도 쉽게 자신의 변화를 알아챘다.
“왜 하필 지금이니? 어째서 지금인데.”
간단하게 마련된 침대 위에 무릎을 세워 얼굴을 묻고 세이나는 소리 없이 흐느꼈다.
세상이 무사히 안정이 되고, 자신도 살게 되었을 때, 가질 희망이었지만, 지금은 타이밍도 시기상으로도 아니었다.
자신이 살아남을 확률이 얼마나 있다고, 살고 싶지만 산다는 확신이 없는데, 거기에 자신의 몸은 이미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제 몇 주도 안남은 상황일진데, 어찌하라는 것인지 화가 나기도 하면서 속이 상하고 아프고 미안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이 마지막에 해야 할 일을 멈춰서면 그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죽고 싶지 않아. 죽지 않을 거야. 아니, 안 죽어. 절대로 안 죽어. 내가 방법을 꼭 찾을게. 찾을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고개를 들고 말갛게 웃던 세이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나 두 번째잖아. 그렇지? 너도 힘내줘. 그러니까,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물에 적신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바이안이 들어오기 전에 침대에 누워 미리 잠을 자기 위해 눈을 감았다.
방이 아닌 막사라 어두운 것이 다행이랄지, 그 부분에 안도하면서 쌔액 잠이 들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딱딱하고 듬직한 품에서 눈을 뜨는 일상에 역시나 먼저 일어나 자는 얼굴을 감상하고 있는 바이안과 눈이 맞았다.
“세나야. 눈이 왜 그래? 울었어?”
너무 빤히 마주 봤는지, 조금 충혈 된 눈에 걱정스레 묻는 그의 질문에 부루퉁하게 그의 가슴팍을 때렸다.
“남편 때문에 울었다. 왜?”
자신 때문에 울었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면서 귀를 한껏 내리고 꼬리를 아래로 말아 내린 바이안의 불쌍한 표정에 삐진 척 이유를 설명했다.
“오빠야가 꿈에서 내가 아껴뒀던 타르트 다 훔쳐 먹고 오리발 내밀잖아. 미워서 울었거든?”
“헉.”
바이안은 세이나의 꿈속에 나타난 자신에게 한껏 욕하면서 미움 받았다는 충격과 함께 실제로 한 행동도 아니건만, 열심히 사과했다.
둘만의 작은 소동을 마무리 하고, 새롭게 짠 진형과 군대들의 정비를 해갔고, 세이나는 다친 이들이 모여 있는 막사를 찾아갔다.
그곳에는 황후가 의원들을 도와 간호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에서 할아범이 드란체 후작의 병문안을 나온 것을 확인하고 그쪽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가슴에 붕대를 칭칭 감고 호탕하게 웃는 후작은 사나이의 훈장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가, 패배한 것에 상처를 입어 살짝 의기소침해 있었다.
자신이 중상을 입지 않았으면 다시 한 번 더 붙어볼 의향을 보였지만, 전쟁을 하는 사이에 개인적인 욕심을 부릴 수도 없다는 것에 우울증이 생긴듯한 모습도 비쳤다.
후작은 맞닥뜨린 간부와 싸우는 도중에 펜던트를 품에서 떨어트려 뚜껑이 열렸고, 그 안에 아이들의 그림을 보던 놈이 머리를 짚고 물러나 살아남았었다.
할아범은 그런 후작에게 강자일수록 처음 갖는 패배는 떨치기 어렵다며 자신 나름대로 그를 위로해주고 있었다.
황후에게 몸을 돌리고 위험하니 돌아가야지 않겠느냐 물어봤지만, 자신의 할 일이 여기에 있다면서 이미 황제에게 허락을 받았다며 깨끗한 물을 담은 대야와 수건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다가 몸을 못 가누는 병사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몸을 닦아주고 붕대를 갈아주었다.
전장의 중심에서 하루 더 지난 날, 적측에서 움직임이 일었고, 황제는 군을 통솔하여 진군을 하기 전에 바이안의 참전을 막았다.
“적들이 세이나가 여기 있는 상황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아직, 어찌 될지 알 수 없지 않느냐. 너는 여기에 남아 대비하고 있거라.”
세이나가 가지고 있는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고, 제로드에게 있어서 방해가 될 세이나에게 송곳니를 보일 경우를 파악하고 있기에 바이안은 쉽게 납득했다.
황제를 필두로 전선에 나선 군대를 뒤로 하고, 바이안은 막사 주변으로 방어진을 펼치고 수비에 전념했다.
항상 점잖은 페르디난드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지금의 상황에 즐거워했다.
제임스는 그런 그의 옆에 앉아서 처음 보이는 모습을 신기해하며 물었다.
“신났네. 뒤에서 뒷짐 지고 구경하는 것이 그리 재밌나?”
페르디난드는 제임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시원하게 대답했다.
“오랜만에 머리로 경쟁하니, 제 자신도 놀랄 정도로 즐겁습니다. 저 쪽에도 저와 만만치 않게 상당히 머리가 잘 돌아가는 책사가 있는 듯한데, 어찌 재미가 없겠습니까.”
허를 찌르는 작전으로 적들을 밀어 붙였지만, 밀려나던 상대편에서 짧은 시간에 방어진이 바뀌더니 더 피해를 줄 수도 있었던 상황이 도중에 끊어져 매우 아쉽지만 배는 즐거워졌다.
“그렇다면 너는 전쟁에 참가하지 않고, 계속 뒤에서 머리만 쓸 거냐? 뭐, 그러든지 말든지 상관은 없다만.”
자리에 일어나 몸을 풀면서 준비 운동을 하는 제임스를 올려다보던 페르디난드는 상대 진영이 있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직접 나서는 것도 좋을지도 모르겠지요. 저는 애초에 직접 몸을 쓰는 것보다 머리를 쓰는 것을 더 좋아하니 그다지 내키지 않긴 합니다.”
제임스는 제자리에서 통통 뛰면서 손목을 탈탈 풀고 자신의 검을 적당히 들어 허공에 몇 번 움직이고 나가기 전에 다시 뒤를 돌았다.
“네 작전에 맞춰서 적당히 놀아주기는 하겠지만, 너도 어느 정도만 하고 나와라.”
군대를 지휘하러 사라지자, 페르디난드는 고개를 돌려 늦게 합류한 뒤로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앉아만 있는 제로드를 걱정스레 지켜봤다.
시선을 느낀 제로드가 그런 그를 잠시 보다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은 무거운 입을 뗐다.
“그러고 보니, 너만은 다른 녀석들과는 달랐지.”
페르디난드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임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제로드는 계속 말을 이었다.
“처음에 네 놈이 나를 찾아 나타났을 때, 웃기긴 했었지. 내가 황태자로 있었을 때부터 내 옆에서 보좌했던 녀석과 똑 닮은 얼굴이었으니, 웃기지 않을 수가 없지 않느냐.”
피식 실소와 동시에 움직이지 않고 있던 몸을 일으켜 자리에 일어났다.
“대를 이어서까지 나를 보좌한답시고 녀석의 후손이 나를 찾아 나선 꼴이 우습기도 했지만, 지옥구덩이인 것이 뻔한데도 아무렇지 않아했었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다른 의미로는 일그러진 충심에 미친 집안이라 해야 맞을지도 모르겠구나.”
“전장에 참전하실 의향이십니까?”
자신의 가문을 비꼬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페르디난드는 칭찬처럼 받아 들었기에 순종적인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래. 나 역시 미친놈이니 내 후손.. 아니지, 내 여동생의 후손이라 해야 어폐가 맞겠구나. 직접 마주해보고 싶어졌어. 그 아이의 아비가 어떠한지 보고 싶구나.”
어떠한 것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아무리 페르디난드라 하더라도 알 길이 없어 그저 걱정 어린 말만 꺼냈다.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쓸데없는 걱정을 받은 것처럼 제로드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가 본연의 공허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래.”
제로드는 병장기가 막 부딪히기 시작하는 두 무리들이 있는 곳으로 휘적휘적 느린 발걸음으로 나아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