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던 만큼 날뛰거라.”
제로드의 입에서 그토록 기다렸던 허락이 떨어지자, 주인의 앞이라고 하더라도 상관없이 희열에 달아올라 공개를 데웠다.
“사지를 뜯고 심장을 찍어 도려내, 소중하게 생각하는 녀석의 입에 박아 넣으면.. 크으~”
상대를 실컷 괴롭게 하는 자신을 상상하면서 낫을 틀어쥐며 붕붕 흔드는 베인트는 옆에 있는 제임스를 불렀다.
“너도 같이 도시가지?”
베인트의 권유에 제임스는 불쾌함을 드러내면서 거절했다.
“너나 실컷 해라. 나는 전쟁터가 될 곳으로 갈 거다.”
서로가 어디에서 뛰어 놀지 각자가 가고 싶은 곳을 다시 선정하고 있지만, 제임스는 민간인들이 있는 도시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베인트는 그런 제임스가 오히려 못마땅해졌다.
“빠르다는 것밖에 장점이 없는 주제에 전쟁터에서 날뛰면 얼마나 날뛴다고 그러냐?”
제임스는 자신과는 상극인 베인트의 비꼬는 말투에 굳이 상대하지는 않으려 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살인에 취한 녀석과는 무조건 함께 하고 싶지 않았고, 도시로 갔다가는 저번처럼 딸이 나타나 괴롭힐 것이 뻔한데, 누구 좋으라고 따라나설까, 그를 무시한 채로 신나서 박차고 후다닥 전쟁터로 나간 아리아와 엘로이가 있는 곳으로 휘적이며 자리를 이동했다.
의자에 일어나 나가려던 릴리움은 자신을 따라오려는 반조가 조금 못마땅했다.
평소라면 당연하게 여겼을지도 모르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가 번거롭고 귀찮아져서 버리고 가고 싶었다가 별로 상관도 없을 것 같아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고아하게 목적하는 곳으로 가는 릴리움은 자신의 귀에 짤그락 거리는 귀걸이를 무의식적으로 매만졌다.
“알고 준 건 아니겠지만, 나랑 안 어울리는 꽃이네. 후훗”
하얀 백합이 세공되어 있는 귀걸이는 하느작 걸어가는 걸음에 맞춰 춤을 췄다.
차례로 빠져나가 텅 비어진 홀의 중심에 상체를 늘어트려 이마를 괴고 앉아 있는 제로드의 옆으로 우루루가 다가오자, 그의 얼굴이 가만히 들려 슬퍼하는 표정을 지긋이 관찰했다.
“우루루. 너의 얼굴로 그런 표정을 보고 싶지는 않구나.”
제로드가 하는 말에 우루루는 바로 표정을 바꿔 방긋 미소 지었다.
“주인님께서는 아무것도 하시지 않으시나요?”
“글쎄... 어쨌으면 좋겠느냐? 어찌할까.”
오히려 반대로 물어보자 뾰족이 어찌 하는 것이 좋다 말을 꺼낼 내용이 없어 솔직하게 말했다.
“저는 주인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것에 따라갈 뿐입니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꺼내지 않고, 어떤 좋지 못한 것이라도 순종적으로 따라오는 우루루의 변함없는 대사에 피식 세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겠지만, 네 갈 길을 찾아 가거라.”
“네?”
자리에 일어나 검을 챙겨 등을 보이면서 하는 말에 우루루는 처음으로 그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해 반문하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옥타브 높았다.
자신을 이대로 놓고 나가려고 하는 행동에 커다란 그의 등을 서둘러 따라잡으려 뛰었고, 바로 그의 옷깃을 잡아 당겼다.
“주인님!”
“너에겐 나를 대신해서 이 세상의 마지막을 보아줬으면 하는구나.”
“싫어요. 따라가게 해주세요. 마지막까지 주인님과 함께가 아니면, 제 존재의 의미가 없어요.”
필사적으로 자신의 말을 반박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비추는 우루루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제로드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얼굴을 들어 제로드를 올려다보는 우루루는 처음으로 그의 눈동자에서 온전히 자신을 비추는 모습에 두근거리는 것이 아니라 덜컹하고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처음부터 너는 우리 같은 이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아이였다. 단지 나의 미련스러운 욕망에 끌려 다녔을 뿐이야. 내 마지막 명령이다. 너는 남거라.”
“싫..”
강하게 좌우로 흔들면서 반항을 하려던 우루루는 끝까지 하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제로드는 그녀의 목뒤를 쳐 기절시키고 무심한 척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홀을 마지막으로 빠져나가 사라졌다.
“너의 마지막 선물은 고맙게 받아가마.”
이미 정신을 잃어 듣지 못하겠지만, 사라져가면서 잔상처럼 희미하게 남은 그의 마지막 말이 홀에 메아리쳤다.
전 대륙적으로 일어나는 자연재해와 피해규모 등의 보고들만으로도 쉴 틈 없이 뛰어다녀야 하는데, 시체의 군대들이 나타난 뒤로 조용했었던 적들이 몇 배는 더 되는 군대를 이끌고 대륙의 중앙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이미 대비하고 있었기에 황제는 잠시 벗어 놓았던 자신의 갑옷을 빠르게 챙겨 입고, 자신을 걱정스럽게 보고 있는 황후를 꼬옥 안아주어 그녀의 이마에 작게 입맞춤을 하고 떨어졌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압니다. 폐하께서 어련히 잘 하시는 걸요.”
그의 아내로서 의연하려 하지만 불안함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지, 입매를 올린 그녀의 입가가 잘게 떨려왔다.
붉은 망토를 그의 뒤로 돌아 걸치고 고정시켜주며 황후는 고고하게 어깨와 허리를 세워 만인의 어머니임을 보였다.
“저 역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렵니다. 폐하께서 하고자 하시는 모든 것에 여신의 가호가 있...”
큰일을 하는 이를 위할 때 나오는 예를 말 하다가 황후는 끝맺음을 하지 못하고 입을 우물거렸다.
“허허허. 지금 그 여신이 코~ 자고 있소만.”
황후가 어물어물 하는 이유를 아는지라 사랑스러운 아내인 황후의 얼굴을 가만히 쓸어 그녀의 입에 마무리 인사로 촉 부딪혔다.
“이이가~”
심각하고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하는 상황에서 보이는 그의 애정 어린 행동에 절로 쑥스럽고 당황스러워 그의 가슴팍을 통 쳤다.
황제는 사랑스러운 황후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옆에 서 있는 바이안을 불렀다.
“중앙은 너에게 맡기마.”
“맡겨 주십시오.”
늠름하게 서 있는 바이안의 모습을 보자니, 어느새 이리 자랐는지, 자신보다 한 뼘은 더 커보였고, 든든하고 믿음직했다.
황제가 출정하자, 황후는 양 손바닥에 힘을 주어 짝하고 자신의 두 뺨을 찰딱 때렸다.
평소의 하늘거리는 옷을 벗어 던지고 움직이기 간편한 복장을 한 황후는 머리를 틀어 묶어 학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보통 사람들보다 몸이 약하다 할지라도 보여주는 황후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도 강인하고 의연했다.
바이안은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면서 부부는 닮는 다는 것에, 자신도 세이나와 닮은 점을 잠시 떠 올려보고, 쉬지 않고 들어오는 여러 상황들의 급보들을 추스르고 조율해갔다.
회의장에서 황제를 대신해서 열심히 파고 있던 바이안의 앞으로 한명의 기사가 급하게 뛰어 들어와 부복하며 급보를 전했다.
“전하. 천공의 땅으로 알 수 없는 적군들이 쳐들어왔습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바이안은 검을 들고 서둘러 나가면서 마저 들었다.
“규모와 피해상황은?”
“여기저기로 퍼져 있기에 규모파악에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일부는 북측의 외곽부터 시작해 중앙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으며, 그곳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기사단들은 전멸했습니다.”
“백성들과 지상인들의 대피는 어찌 되었는가?”
연무장의 중심에 도열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기사들에게 걸어갔고, 남은 병력들이 서둘러 모여 숫자를 늘렸다.
“밀고 들어오는 적들과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최대한 도피를 돕고는 있지만, 상황이 그리 좋지는 못합니다. 전체 피해를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이미 많은 이들이 죽고 다쳤습니다.”
전부가 전쟁터에 나타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군대가 출정한지 오래지 않아서 갑자기 도시에 나타나 아무 힘도 없는 이들을 싸잡아 죽일 줄은 몰랐다.
그들의 자비 없음과 잔인한 행태에 이가 갈리고 화가 났지만, 냉정함을 잃지 않고 중앙에 남은 전 병력 중에 혹시 몰라 수도를 지킬 이들만을 남겨둔 채로 현장으로 달려 나갔다.
그런 바이안의 뒤를 따라 많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지켜야할 이들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살리기 위해 자신들을 재촉했다.
목적하는 곳으로 거의 다가왔을 때 다른 기사가 바이안의 옆으로 빠르게 달려 보폭을 맞춰 다른 급보를 알렸다.
“현재 바바 백작령에 발을 묶어두고는 있으나, 그 곳에 황후마마와 황녀님께서 계시다는 전갈입니다.”
황후와 에바는 많은 수의 시종, 시녀들과 관료, 학자들을 이끌고 발 벗고 대피를 도와주고 있었다가 말려든 상황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적의 규모는 오천 정도로 추정이 되며, 간부로 보이는 이들은 다섯으로 파악했습니다.”
이제야 간신히 대략적인 규모의 파악이 끝이 났는지, 거의 도착해서야 들을 수 있었다.
“미친 새끼가 많이도 모았었군.”
“세상에 돌은 놈이 많다는 것이죠.”
자신의 밑에 들어온 공백의 기사단 중 한명이 바이안을 대신해서 비꽜다.
“먼저 가있겠다.”
마력을 발에 집중하여, 땅을 박차고 날아가는 바이안을 보며 다른 기사들도 더 빠르게 나아갔다.
여러 충격들과 엄청난 소음 속에 겁에 질린 많은 이들의 비명과 무너지고 부서지는 건물들의 잔해들로 인해 자욱한 먼지들이 시야를 가리는 아수라장의 한복판에서 이성을 상실한 적들을 막아내는 기사들이 서둘러 고함을 질렀다.
“어서 피하셔야합니다.”
“나 혼자 살겠다고 도망칠 수는 없네.”
“하오나.”
사방에서 찔러 들어오는 살기와 죽음에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지만, 황후는 더욱 굳건하게 섰다.
“아직 도피하지 못한 이들이 많을 진데, 어찌 피하겠는가? 더 많은 이들을 구하고 나서 피해도 늦지 않아.”
혼잡해진 전쟁 통에 피신하고 있는 이곳까지 적들이 쏟아져 들어와, 둘을 호위하고 있는 기사들은 필사적으로 막아냈다.
“어마마마!”
순간의 틈으로 들어온 눈 먼 검이 황후 쪽으로 날아갔을 때, 에바가 서둘러 그녀의 앞을 막았다.
무너진 집안에서 찾아낸 프라이팬을 그러쥐고 까앙 하고 조금 맑은 쇳소리가 울리면서 검을 막아낸 에바가 무서움을 쫒아내기 위해 크게 외쳤다.
“나도 황족이야! 나라고 못 싸울 줄 알아? 쒹쒹.”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당당하게 외친 것도 잠시, 자신의 팬에 막혀 움찔했던 적의 목이 기사의 검에 꿰뚫려 피를 뿌리며 쓰러졌고, 눈앞에 일어난 살인에 얼굴이 파리하게 창백해졌다.
황후는 그런 에바의 팔을 끌고 잠시 멈췄었지만, 엎어지고 쓰러지고 다친 백성들을 서둘러 부축하고 이끌어 최대한 벗어나기 위해 달렸다.
“꺄아악~”
“크억!”
수많은 비명들을 뚫고 달리던 중에 엄청난 마력이 하늘 위에서 날아와 쿠웅 큰 진동을 일으키며 착지했다.
“오라버니!”
바이안은 아주 잠깐 뒤를 돌아 어머니와 동생의 무사함을 확인하자마자 인사하지 않고 그대로 앞으로 쏘아져 날아갔고, 검을 휘둘러 눈에 보이는 족족 쓸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