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나지만 세이나가 아닌 듯, 세이나가 아니지만 세이나인 그녀가 제로드와 가까이 마주 했다.
“어이하여 없는 것이냐?”
세이나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할 수 있게 된 제로드는 그제서야 세이나의 이마에 현자의 돌이 사라져 있는 것을 깨달았고, 그녀의 왼쪽 눈이 현자의 돌의 색을 띄며 붉게 변한 것에 놀랐다.
“이 세상 모든 이들 보다, 이 돌을 받아 지켜왔던 수많은 대현자들 보다, 그리고 네 녀석 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 당연하지.”
돌의 유무에 대한 질문이었지만, 세이나는 조금 다르게 대답을 하면서, 흰자위가 사라져 전체가 붉은 자신의 왼쪽 눈가를 쓸어 올리는 것으로 대신 하니, 제로드의 의문은 더욱 미궁에 빠졌다.
“모든 것은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 하는 성질이 있지. 생명으로 따지면 귀소본능이라 하는 것이 타당할까?”
차분하게 내려간 말투 속에 그를 무시하는 혼잣말이 제로드의 귀를 괴롭혔다.
“무슨 말을 하려..”
제로드는 막 세이나의 말을 따지려다 흠칫 몸을 경직시키다가 자신의 품에 있는 돌을 움켜잡았다.
“굳이 돌려주려 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이 몸에게 돌아온단다.”
세이나는 단지 손을 뻗은 것뿐이고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제로드는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하는 돌을 필사적으로 움켜잡기에 바빴다.
힘을 써서라도 막아보지만, 그의 노력이 요원하게도 손가락이 억지로 벌어지며 순식간에 세이나가 있는 곳으로 날아가 검은색을 띄는 현자의 돌이 그녀의 손에 안착했다.
“오백년... 오백년이다. 오랜 연구와 실험으로 이루어진 기간이 오백년이야. 불안정한 세상에 희생이 강요되는 이런 세상..”
작은 한 숨을 살풋이 흘리며 세이나는 웅웅 떠는 돌을 더욱 세게 움켜쥐면서 그의 말을 뚝 잘랐다.
“애초에! 현자의 돌을 아무도 건들지만 않았으면 되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모두가 나를 찾았고, 나를 발견하면 알아서 내가 태어나 못 다한 일을 처리했을 것이야. 헌데, 모든 것을 네녀석의 어리석은 오만과 행동으로 틀어지어 희생을 불러일으킨 것은 네 놈이 아니더냐?”
지금 일어난 일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는데, 한없이 어린아이에게 질책을 받아 분노하면서도 또 다시 자신이 잘 못 되었다 부정당했다.
“내가 잘 못 되었다 하는 것이냐? 아니다. 이 세상 자체가 잘 못 되었다. 이러한 세상을 처음부터 없던 것으로 하는 것이 옳은 것이야.”
분노를 가라앉히며 세이나의 말에 반박했고, 계속 떠들었다.
“그러한 세상이기 때문에 그녀가 희생된 것이야. 말 같지 않은 의무로 모든 것을 포기한 그녀가 이런 불완전한 세상을 지킨다고 소멸했다.”
세상 탓, 남 탓, 제로드가 비뚤어지게 된 계기가 소멸된 대현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희생이라 외치고 있으면서도 그녀 탓을 하는 것이 세이나는 못내 못마땅했다.
무엇이 그리 원망스러워 저리 틀어진 것일까, 무엇이 그리 잘 못되었기에 모든 것을 부정만 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달래고 설득할 마음은 없었기에 더 차갑고 냉정하게 제로드를 잘랐다.
“들을 귀를 잘라내고, 보는 눈을 가려, 멋대로 떠드는 꼴이 철없는 아이들보다도 더 아이 같은 놈.”
오랜 세월을 산 제로드는 자신을 오히려 아이처럼 대하는 세이나의 말투가 거슬리며,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하는 모습이 걸리기 시작하면서 세이나가 떠들었던 말들이 올라왔다.
천하의 자신이 불안감을 느낀 것 등을 상기하면서 정말 말도 안된다 싶지만, 자신이 가장 많이 원망하는 존재의 이름이 퍼뜩 떠올랐다.
“라이트리아.”
대답은 없었지만 단호한 세이나의 눈빛이 긍정이었다.
“라이트리아.. 라이트리아 라이트리아 라이트리아 네 년.”
텅 비어 공허함만을 비추었던 제로드의 눈동자에 분노와 원망, 혼돈에 잠식 되어 라이트리아란 이름을 반복적으로 외치면서 어떻게 해서든 세이나를 잡아 죽이려 달려들었다.
바이안이 세이나를 뒤로 빼며 앞을 막아들면서 그와 동시에 두 거대한 힘이 부딪혀, 커다란 폭발음이 터지며 움푹 패인 땅의 잔해들이 주변의 시야를 가렸다.
맞붙은 두 힘의 충돌에 제로드와 바이안만이 서로의 얼굴을 바짝 붙여 닮은 눈매에 다른 의지를 품은 눈동자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엘라이어 자체가 괴를 달리하는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은 인정 하지만, 그것보다 더한 사기적인 힘을 빼고 보니 붙어볼만 하지 않나?”
고저 없는 바이안의 질문과 흔들림 없이 굳건히 자리 잡은 눈동자가 거슬리고 불만스럽다.
세이나가 돌을 거두면 힘을 쓰지 않아야 된다고 했던 말이 있기에 바이안은 뒤를 흘끔 보면서 뒤로 물러나 모두의 보호 속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제로드에게 집중했다.
“비키거라.”
“안 비켜.”
“죽일 것이야.”
“못 죽여.”
서로 한껏 끌어올린 마력으로 다시 부딪히자 쿠왕하는 거대한 소음에 모두 귀를 막아야할 정도였고, 힘의 충돌에 의해 서로 밀려나 떨어져서 다시 대치했다.
“오오~”
폭발하기 직전에 로이에가 세이나의 귀를 양손으로 텁 막았는데, 폭신폭신 보들보들로 변해 소음에서 보호해주었고, 세이나는 신기해 감탄했다.
본래의 세이나로 돌아가 개구지게 감탄하고 있자니, 모두의 입가가 엷게 미소를 띠었다.
“근데, 나 왼쪽 귀는 먹어서 오른쪽 귀만 막아줘도 됐는데.”
세이나의 말투에 적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 거짓 같아지게 개구졌다.
멀찍이 떨어져 이가 닳아 없어질 정도로 득득 갈아붙이고 있는 제로드에게 수하들이 서둘러 달려왔고, 우루루가 허겁지겁 달려와 이성을 잃어갈 정도로 분노하는 그를 걱정스럽게 올려다보았지만, 차마 말릴 수가 없어 속이 안절부절하다 못해 타들어갔다.
“어째서인 것이냐?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세상을 만들고 이제껏 외면한 주제에 어찌하여 이제와 나타난 것이란 말이냐? 의무를 억지로 씌운 네 년과 네 년의 세상을 내가 전부 없앨 것이야!”
악에 받친 원망과 함께 일방적인 적의에 미쳐있는 제로드의 절규에 세이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손바닥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하아...”
했던 말을 반복하며 소리치는 제로드의 소음 속에서 작게 한 숨을 쉬며 아직도 부르르 떨고 있는 검은 현자의 돌을 꽈악 움켜쥐었다.
“아무리 미쳤든, 아니든 강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남는 다는 건지..”
처음 현자의 돌과 접촉 했을 때, 역대 대현자들의 영혼의 영향을 받아 탄생된 그들의 의지가 꾸준히 남아온 것처럼 조금은 다르지만 제로드의 시점으로 보이는 여러 기억들이 세이나를 헤집고 있었다.
“루미나.”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타인의 입으로 절대로 듣지 못할 것이라 여겨왔던 이름이 제로드의 입을 막았다.
“...뭐?”
“너의 시작이 된 사람.”
돌처럼 굳어져 죽어있는 눈동자만이 세이나의 움직임에 맞춰 움직였다.
세이나는 느릿하게 몇 발자국 걸어 나오면서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이 돌의 불안정한 힘의 여파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있는 이들이 적지만 태어나. 그런다고 억지로 대현자의 자리에 앉으라 강요도 하지 않아. 상대가 싫다고 한다면 알아서 다른 사람들을 찾아 하겠냐고 물어보지. 그 자리를 선택한 것은 그녀의 의지야.”
붉은 안광이 점점 커지면서 세이나의 온몸을 덮으며 엄청난 위압감이 주변을 쓸었다.
“희생? 그 희생을 하게 만든 원인이 정작 무엇인지 모른다고는 하지마. 선택과 의지를 존중해주기는커녕, 네 놈의 시선에 불행해 보인다고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그녀가 달라져 자신을 봐주지 않는다면서 비뚤게 본 사람이 누군데?”
힘의 억제에 버거운 상태에서 세이나의 감정에 맞춰 커지며 누르는 압박에 모두는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남 탓도 아주 대단하네. 내가 수많은 생들 중에 하나였었던 라이트리아가 맞아. 그렇다하더라도 나는 여신도 이 세상을 만든 창조주도 아니야.”
순간적으로 뻗쳐 나온 힘의 여파 탓인지, 오른쪽 눈자위가 희미하게 검어지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이 눈을 질끈 감았고, 힘이 누그러진 타이밍에 바이안이 망토를 벌려 세이나를 감싸 안았다.
“애초에 이 세상은 멸망직전이었어. 단지, 나는 너무나도 지키고 싶었었고, 그래서 지키려 했지만, 도중에 죽어버려 끝마무리를 못했을 뿐이야.”
망토 속에 폭 가려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느 누구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세이나는 뒤에서 안아주고 있는 따뜻한 바이안의 체온에 등과 머리를 기대면서 눈을 감아도 보이는지, 제로드를 향한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내 육체가 소멸하며 태어난 이 두 개의 돌 중 하나를 두 명의 내 제자가 거두었고, 기틀을 만들어 지금껏 지켜오며 다시 다가올 멸망을 늦춰왔지만, 필요 없는 설명이려나?”
들으려 하지 않는 자에게 아무리 옳은 소리나, 사실을 말해도 통하지 않는데 뭘 이리도 열정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나 싶어 키득키득 웃자, 이마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쪽하고 붙었다가 떨어졌다.
“오빠. 나 번쩍 해줘.”
소곤거리면서 하는 부탁에 무릎 밑으로 손을 넣어 안아 들어 세이나가 편하게 머리를 기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크크크... 크하하핫.”
고개를 한껏 치켜들고 광소를 터트리던 제로드의 안광이 번들거리며 그 어느 때보다 더 흉폭 해져있었다.
“쯧”
혀를 차면서 바이안은 뒤로 훌쩍 뛰어 거리를 벌리자마자 자신이 서있던 곳의 땅이 움푹 패였다.
푹 꺼진 자리에 서있는 제로드가 시야에 잡히자마자 그동안 주변에서 대기만 하고 있던 반조와 페르디난드가 거의 동시에 그의 앞으로 나섰고, 물러난 세이나와 바이안을 대신해서 앞으로 나선 로이에와 하일과 부딪혔다.
머리위로 돌려 찬 로이에의 발목을 잡은 페르디난드에 로이에는 당황을 금하지 못했다.
분명 자신의 전신을 강한 암석으로 변형시켰는데, 잡힌 발목부터 시작해서 본래의 신체로 돌아가는 현상에 반대 발을 박차고 돌려차기로 어쩔 수 없이 손을 놓는 틈에 자세를 고쳤다.
그 옆에서는 경량화한 건틀릿과 하일의 검이 서로 부딪혀 대치했다.
“정녕 네년이 인간이라면, 더 잘 알 것이다. 이제와 어찌 한다 하더라도 네년이 하려는 것 또한 희생이 아니고 무엇이냐?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세상을 고칠 수 없을 것이다.”
온 마력을 돌려 언제라도 폭발할 정도의 힘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세이나가 아닌 바이안이 묵직하면서 단호하게 대답했다.
“멋대로 희생이라 단정 짓지 마라. 아직 해보지도 않았거늘, 못 막는다 단정 짓지 마라.”
제로드의 말들을 반박하면서 바이안도 마력을 풀로 개방하면서 언제 덤벼도 충분히 막을 수 있음을 보였다.
“바이안. 아이야 정녕, 네 놈은 아무렇지 않더냐? 소멸 하지 않을 것이라 단정 되지도 않았다. 돌 하나에서 세어 나오는 작은 힘만으로도 쉬이 스러지는 생명이거늘, 두 개를 품은 네 연인이 정녕, 무사할 것이라 단정할 수 있더냐?”
그를 바라보는 눈빛은 굳건했지만, 세이나를 품에 안고 있는 바이안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바이안의 불안함을 바로 안 세이나는 엷게 미소를 띄우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포옥 기대 살짝 비볐다.
그런 세이나의 행동에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면서 바이안도 입 꼬리를 작게 올렸다.
“그따위 것에 신경이 몰려 하나라도 더 해줄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허비할 마음은 없다.”
제로드는 동요하는 기색도, 어떠한 흔들림도 없이 굳건하게 서있는 바이안을 보면서 마력을 갈무리했다.
“후회할 것이다.”
“이미 바라던 소원은 이루어서 후회할 것 같진 않군.”
머리를 기대고 있어서인지, 바이안이 말을 할 때마다 울리는 진동과 음성에 세이나는 자신도 모르게 풋 하고 웃었다
“그러네. 이미 할 것 못할 것 없이 다한 사이죵~.”
결혼반지를 낀 손을 펴서 제로드가 있는 방향으로 당당하게 들어 올렸다.
세이나는 눈을 감고 있어서 제로드가 지금 무슨 표정인지 못 본 것이 살짝 아쉬울지도 라고 뜬금없이 생각했다.
예상하고 경계했던 것과 다르게 한 풀 꺾인 제로드가 모두를 물렸고, 세이나 쪽도 굳이 덤비지 않았다.
여기에서 더 해도 서로에게 좋을 것은 없어서 의외로 쉽게 거리가 멀어졌다.
등을 돌려 돌아가기 전, 제로드는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바뀔 것은 없음을 강조했다.
“이미 가속화 되어 무너지기 시작한 세상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설령, 성공한다 하더라도 라이트리아 네년이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어중간하게 유지되겠지. 모든 것이 되풀이 될 뿐이다.”
제로드 쪽에서 먼저 사라졌고, 폐허에 남아있던 모두도 미련 없이 궁으로 복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