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에는 여름 장마가 없는 지역인데도 불구하고 거센 빗줄기가 끊이지 않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치고 있었다.
멀리서는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소용돌이치며 땅에서 위로 솟아올라 지나가는 곳곳마다 나무도 건물도 가리지 않고 뽑아 집어 삼키기까지 하고 있었다.
“거참 날씨가 도와주지 않네.”
“출발 전까지는 멀쩡한 날씨였는데, 이렇게까지 급격하게 변한 날씨는 처음 보는군요.”
날씨까지 제멋대로 굴기 시작하는 장관에 세상의 균형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을 체감한 하일은 심각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름을 잃은 폐허의 마을에 조금 멀쩡한 건물 안에서 비를 피하고 있자, 이제는 덩달아 지진까지 합세했다.
작은 진동이다 싶었더니, 갑자기 중심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크게 흔들렸고, 건물에 금이 쩌적 가면서 우르릉 무너지기 시작했다.
바이안은 서둘러 세이나를 감쌌고, 론이 새롭게 벽을 만들어 갈 때, 로이에가 떨어져 내리는 잔해들을 주먹과 발길질로 쳐냈다.
구멍이 뻥 뚫린 천장에서 살을 아프게 때리는 빗줄기가 모두를 덮쳤다.
하일은 서둘러 새롭게 비를 피할 곳을 찾기 위해서 건물 밖으로 나왔지만, 그가 나오자마자 하늘을 어둡게 가렸던 검은 비구름들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렸고, 그와 동시에 지진도 함께 멈췄다.
모두는 흠뻑 젖은 옷을 비틀어 물을 쥐어 짜내면서 밖으로 걸어 나왔다.
“반으로 뚝 잘렸네.”
땅이 갈라지며 지층의 단면이 여실히 드러난 땅이 불쑥 솟아올라 엄청난 크기의 절벽을 만들었고, 갈라진 틈으로 보이는 밑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오라버니 차례다. 땅 다시 붙여.”
로이에가 론의 등을 툭 치면서 임무를 부여하자, 론은 로이에의 뒤통수를 때리며 어이없어 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마라. 아무리 나래도 자연재해는 어쩌지 못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 나보고 마력 바닥내서 죽으란 소리냐?”
현실남매의 싸움이 잠시 일어나고 있는 사이에 건물들의 여기저기를 뒤져서 비에 젖지 않은 땔감들을 쓸어 모아 불을 붙이고 옷과 몸을 말렸다.
현재 세이나를 따라온 이들은 단 네 명이었다.
최강의 탱커 로이에, 베리어겸 검인 로트론, 은신이 특기인 변수담당 하일단장과 최종보스전용 바이안이 함께였다.
“대략적인 곳까지 오기는 했지만, 어떻게 부르실 생각이십니까?”
하일의 물음에 세이나는 따뜻하게 데운 물을 나눠주고 깍지를 끼고 쫙 기지개를 폈다.
“이미 불렀어.”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어서 제로드가 가지고 있는 현자의 돌과 링크를 걸었고, 그 변화에 분명 반응을 했을 것이다.
“일단은 대비를 하겠지만, 전력을 다 끌고 와서 덤빌지, 혼자 나타날지..”
“그것이 아니면 아예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
론의 말의 뒤를 이어 뱉은 바이안은 지금당장에라도 제로드를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갈무리했다.
“오긴 올 거야.”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 타다닥 모닥불이 타올라 주변을 밝히고 공기를 데웠다.
“저도 따라가겠어요.”
우루루는 자신을 두고 나가려는 제로드의 팔을 잡으며 서둘러 자신을 어필했고, 제로드는 무심한 눈으로 그런 우루루를 내려다보았다.
“너는 여기 있어라. 내가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싫습니다. 데리고 가주세요.”
평소와 다르게 자신의 명령에 반발하면서 고집을 부리는 우루루가 의아하게 다가왔지만, 냉정하게 그녀의 팔을 뿌리쳤다.
우루루는 자신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있던 제로드가 벌떡 상체를 일으키고 현자의 돌을 유심히 살피다 갑자기 외출을 하겠다기에 벌컥 겁이 났다.
평소에는 그러세요라며 대충 대꾸했을 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의 가슴에 불안함이 파문을 일으켜 그를 놓을 수가 없었다.
“주인님!”
등을 보이고 밖으로 나가려던 제로드는 처음 들은 우루루의 큰 목소리에 눈을 크게 뜨고 쳐다봤다.
잘게 떠는 양손을 주먹 쥐고 버티면서 고집적으로 자신을 보기에 그리 기분 나쁘지 않은지, 다시 등을 보이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방해하지는 말거라.”
“네.”
행여 두 번의 번복이 있을까봐 후다닥 달려가 그의 옆에 나란히 섰고, 제로드의 동행으로 반조와 페르디난드가 따라 붙었다.
“대화만 하려는 것이니, 쓸데없이 움직이지는 말거라.”
둘에게 명령을 덧붙여 주고 앞서 걷는 제로드의 머릿속은 독백으로 가득했다.
‘재미있기도 하구나.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되었고 멈출 수도 없다는 것을 알 텐데도 어찌 나를 부를까.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궁금해서 나가는 나도 퍽 웃기구나. 그 아이의 옆에 아이야 너도 있을 테니, 함께 확인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테지.’
서로가 현자의 돌을 각각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놓고 드러내는 세이나의 존재감은 이미 느끼고 있기에 방향을 잡기에 어렵지는 않아 그의 행보는 빨랐다.
‘그녀와 너는 어찌하여 다른 것이냐? 나와 그 아이는 비슷하거늘, 아이야 너는 어찌하여 나와 다른 길에 서있을 수가 있는 것이냐? 너에게는 소중한 이를 잃는 다는 공포가 없던 것이더냐?’
“주인님.”
우루루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인 그의 손을 잡아 살짝 힘을 주는 것으로 그가 품고 있는 절망과 슬픔을 달래려 애썼다.
“...너에게는 전부 들키는 구나.”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이상에는 먼저 손을 대게 하지 않았지만, 오늘 그는 우루루의 그런 행동에 나무라지 않고 가만히 두었다.
무심하지만 거부하지 않는 손길에 작게 안도하며 우루루는 그의 옆에서 처음 함께했을 때부터 보아왔던 슬프면서도 공허한 눈동자를 아프게 올려다보았다.
통행구를 이용해 대략적으로 가늠하여 도달하고 보이는 주변은 폐허의 잔해들과 땅에 금이 가, 그 거대한 입을 쩍하고 벌려 을씨년스러운 마을이 먼저 반겼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가만히 응시하던 제로드가 다시 앞서 걷기 시작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인 덕분에 달과 별빛에도 주변이 잘 보였다.
걸을 때마다 질퍽이는 땅에 신발은 금방 더러워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끊어진 땅 중에서 아래에 있어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오는지 확인이 늦은 모두도 이질적인 마력을 감지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세이나를 중심으로 서서 검 집에 손을 얹어 발도 준비를 하며 주변을 경계했다.
“날이 밝고 올 줄 알았더니, 일찍 왔네.”
태연스러운 말투를 구사하면서도 세이나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가워 여름의 빙하처럼 굳어있었다.
“나는 궁금한 것을 오래 두지 않는 성격이다.”
텅 빈 껍데기를 두른 것 같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리며 엄청난 압박감에 모두는 잔뜩 긴장했다.
세이나는 가까워진 제로드의 모습을 확인하면서 그의 음성에 핏기가 가신 두 손을 주머니에 꽂아 태연을 가장했다.
‘전에 멀리서 봤을 때 괜찮은 줄 알았는데, 트라우마라는 것이 그리 쉽게 나아지는 건 아닌가보네.’
자신이 공포에 찌드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마을 사람들을 하나하나 눈앞에서 죽여 댔던 장면들이 그의 얼굴과 함께 오버랩 되며 소중한 이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로 스러져 갔던 절망적이었던 모든 것들이 세이나를 덮쳤다.
유일하게 소리를 지르고 끝까지 바르작 대며 자신을 감싸려 했던 알 오빠가 세이나를 괴롭혔다.
제로드가 알을 마지막으로 둔 것은 분명 자신이 죽는 것보다 세이나를 어떻게 해서든 지키려는 것이 더 강했기에 흥미로워 관찰했던 것이 분명했다.
어린 세이나가 반쯤 정신을 놓았을 때, 희미한 시선에 달려오던 엄마의, 엄마였던 피와 육신의 비가 내렸을 때가 훙 하고 덮쳐와 질끈 아랫입술을 와작 깨물었다.
“괜찮아.”
세이나의 미세한 변화에 바로 반응한 바이안은 검을 빼들면서 다른 손으로 세이나의 어깨를 잡아 제 품에 보호하자, 그의 체향과 따뜻한 온기에 물었던 이에 힘이 풀리며 입술이 작게 올라갔다.
“흐음.. 신기해. 그리 힘을 사용해 놓고 멀쩡해 보이니, 어찌 했는지 무척 궁금하구나.”
제로드의 질문에 천공의 땅이 추락했을 때를 의미하기에 입술을 삐뚜름하게 비틀면서 받아쳤다.
“대충 예상하면서 질문하는 의도는 무엇? 그건 네 녀석이랑 비슷하지. 네 놈도 힘을 팡팡 써대도 아무렇지 않잖아.”
건들거리며 양아치처럼 대꾸하는 세이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제로드의 미간이 작은 파도가 쳤다.
“이렇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헌데, 네가 현자의 돌을 취한 때는 고작 2년이 아니더냐.”
두 수장들이 태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고 있지만, 주변의 모두는 살이 베일 정도로 날카롭게 서로를 경계했다.
“나랑 네 녀석의 차이점이 큰데, 내가 너랑 같겠니? 븅아.”
대화를 하는 것은 좋은데, 세이나가 아주 시비를 걸겠다고 비뚤어진 말투를 대놓고 구사하는 통에 긴장감이 고조된 상태에서도 론의 눈이 슬쩍 세이나를 흘겼다가 다시 정면으로 눈을 돌렸다.
“그래. 그 부분은 넘어가지. 그런다 하더라도 너의 영혼이 소멸된다는 것은 변함이 없지.”
소멸이라는 단어를 일부러 강조하면서 제로드는 바이안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 어떤 흔들림도 보이지 않아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현자의 돌의 힘이 그 사람의 영혼을 소멸시킨다고 누가 그래?”
새끼손가락으로 귀속을 후비면서 한쪽 다리를 달달 떨자, 모두의 눈에 세이나는 얄미워 보이는 캐릭터가 됐지만, 바이안은 귀여워 부비적대고 싶은 심정을 애써 모른 척 아쉬움을 몰래 삼켰다.
“나를 도발하기 위함인 것이냐? 마치 나와 너에게는 다른 것이 있다 그리 말을 하는 듯하구나.”
“잘 알아듣네.”
자세를 고쳐 턱을 치켜 올리며 고고하게 올려다보니, 불쾌함에 찌그러진 제로드의 면면이 보인다.
“역시 그때 죽었어야 했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야. 쯧”
혼잣말을 하며 머리를 쓸어 올리는 제로드의 움직임과 동시에 공기가 팽팽하게 잡아당겨졌고, 언제든지 발도할 준비를 하는 수하들을 제지하지도 않았다.
건방진 모습을 버리고 세이나는 한발 앞으로 걸어 나와 한 손을 앞으로 뻗었다.
“너와 굳이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아. 내가 네 녀석을 이리 부른 것은 내 것을 돌려받기 위함이란다.”
눈매를 고아하게 접으며 웃는 세이나의 미소와 달라지는 말투에 다른 사람이 빙의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고, 그것은 제로드도 확연하게 감지했다.
“네 것? 무엇이 네 것이라 하는 것이냐? 오만방자한 것.”
가슴속에서 불안함이 올라오려 하자, 천하의 자신이 그런 감정이 있을 수 없다 부정하기 위해 화를 참지 않고, 세이나에게 짓쳐 들어갔다.
순식간에 세이나의 눈앞으로 들어온 제로드를 막지 못하고 빈틈을 준 모두가 경악하면서 세이나를 보호하려 움직이려 했지만, 세이나가 한발 더 빨랐다.
구긴 미간에 강줄기가 세줄 그어지며, 혀를 차면서 손바닥을 휘둘러 제로드의 얼굴을 쳐 내렸고, 그대로 제로드는 멀리 날아가 간신히 자세를 고쳐 잡았다.
볼품없이 나동그라지지는 않았지만, 맞은 볼의 열기를 느끼면서 부릅뜬 눈으로 세이나를 쳐다보았고, 그 눈이 한 번 더 크게 떠졌다.
“이 몸이 힘을 다루지 못해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소멸이 무서워, 하지 않는 것도 아니야. 네 녀석도 사용하거늘 이 몸이 못 쓸 것이라 생각하는 네가 오만방자하다 그리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경악해서 한쪽 눈가를 떨고 있는 제로드가 있는 곳으로 찬찬히 걸어가니, 제로드의 수하들이 서둘러 그의 주변을 보호하며 경계했지만, 세이나는 그들을 아랑곳 하지 않고 제로드에게만 집중했다.
“나를 이 곳에 태어날 수 있게 해준 나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힘으로 타인을 겁박하기 싫기에 쓰지 않으려 했을 뿐이야.”
손가락을 까딱이니, 제로드를 뺀 모두가 쉽게 나동그라졌다.
“특히나 네 녀석이 모든 것의 우위에 있는 것처럼 생명을 농락한 방식을 더더욱 쓰고 싶지 않아.”
8살적 그의 손가락하나가 움직일 때마다 쉽게 죽어간 생명들을 품고 미래에 이러한 일이 없도록 일어섰기에 더욱 어깨를 폈다.
모두를 내려다보던 제로드의 오만한 시선과 몸짓을 세이나가 표표히 드러냈고, 경악으로 물들은 제로드를 더욱 내려 깔아 보았다.
“여신 강림이네.”
세이나를 따라 걸으며 세이나의 태도가 변한 모습을 확인하면서 론이 작게 중얼거리자, 모두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