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루가 귀찮음을 뒤로하고 자신의 품에 안겨서 평소와 너무나도 다르게 의기소침하고 우울해하는 아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자신 나름대로 달래주고 있었다.
“제대로 시작하기 전에 미리 말하마. 너희들에게 약속한 것을 지키지. 삼개월. 삼개월동안 원하는 만큼 실컷 날 뛰거라.”
제로드의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모두에게 만면에 기쁨이 드리웠다.
허락에 제일 좋아했을 아리아만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제로드는 그런 그녀를 향해서 말을 덧붙여주었다.
“평소처럼 하지 않고 말을 잘 들었으니, 너에게 먼저 시작할 수 있게 해주마. 상이다.”
“진짜? 정말요? 진짜죠? 아싸!”
아리아가 금세 기운을 차리고 원래대로 돌아가자마자 이번에는 하밀이 의기소침해졌다.
“내가 먼저 뛰어 놀고 싶었는데. 칫”
모두 각자 알아서 자기 나름대로 준비를 하기 시작할 때, 릴리움이 가만히 손을 들어 질문했다.
“하는 것은 좋지만, 아직 개인 시간은 있나요?”
“그래.”
모두와 조금 다르게 릴리움은 크게 좋아하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다들 개인적인 성향이 강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너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군.”
과묵해서 말을 거의 하지 않는 반조가 심드렁한 릴리움에게 말을 걸자, 릴리움은 자리에 일어나면서 따라오려는 그를 막았다.
“혼자 있고 싶어. 따라오지 말아줬으면 좋겠네.”
어느 순간부터 보디가드를 자처하며 따라와 주었던 반조마저 귀찮은지, 릴리움은 그를 단호하게 거절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볼일을 보러 밖으로 나갔다.
한참 후에 자신들 전용으로 개조가 되어 있는 통행석을 이용해서 그녀가 도착한 곳은 수도의 중심가였다.
“이제 와서 뭐가 있다고 나는 어째서 여기에 온 걸까.”
홀로 중얼거리면서 천공의 땅이 추락한 후에 분위기는 많이 바뀌었지만, 지상인들도 더러 섞여 활발하게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면면을 관찰했다.
“미련은 분명 없는데, 시간이라는 것이 참으로 웃기지 않니? 나를 버린 이곳도 많이 바뀌어 흔적도 없는데, 지금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는 데도 무언가를 찾고 있네. 그것이 뭘까?”
도대체 자신은 무엇을 찾는 것인지,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면서 고개를 저어 모른다 표현했다.
한참을 있는 듯이 없는 듯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릴리움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발견했고, 발이 이끄는 데로 찬찬히 그 곳으로 걸어갔다.
“그래 너 많이 미친 것 같긴하다. 저걸 말릴 수도 없고, 저 자식이 뭐하는 놈인지 알고 만나려는 건지 원...”
릴리움의 뒤를 몰래 따라온 제임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자신들은 서로가 가지고 있는 어둠이 무엇인지 각각의 과거들을 일체 모른다.
하지만, 제임스는 오늘 릴리움이 품고 있는 어둠이 무엇인지, 다르겠지만 자신과 비슷할지도 모를 과거의 한편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 지금이라도 막아주고 싶었다.
“이제 와서 태양 앞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지 말아라. 그러기에는 우린 이미 미쳐버렸잖아.”
따라온 것이 너무 우스워져서 등을 돌리려는 찰나, 허벅지에 통하고 부딪히는 작은 충격에 자신도 모르게 뒤로 쿠당하고 넘어지려는 아이를 서둘러 안았다.
“아빠.”
“아빠?”
튼튼한 품에 안겨 다치지 않은 쪼꼬만한 여아가 제임스의 상의를 움켜잡고 활짝 웃었다.
“괜찮으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딸아이가 어른 남자만 보면 다 아빠라고 하는 통에.”
아이의 엄마가 허겁지겁 달려와 놓지 않으려고 우악스럽게 쥐고 있는 딸의 손을 조심히 뜯어내 그의 품에서 떨어뜨리고 꾸벅 허리를 숙여 다시 사과했다.
모녀가 뒤돌아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보던 제임스는 피식 한 쪽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일부러 비꼬듯 웃었고, 돌아가기 위해 걸었다.
“내가 너를 뭐라고 할 처지는 못 되는 것 같다. 내 딸도 저리 예뻤었던 것은 기억하는데, 얼굴이 생각이 안 나네? 마지막 얼굴은 생생한데 이상도해라.”
혼잣말을 하면서 빈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온 몸이 난도질되어 토막이 된, 예쁘고 고왔던 젖살이 가득했던 얼굴이 형태를 잃고, 눈이 파이고 찢기고 갈라져 혀가 뽑혀 기괴하게 웃고 있는 형태의 얼굴만이 그가 기억하는 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응? 아니야. 지금도 예뻐. 안 예쁠 리가 없잖아요. 우리 딸. 아이고 떨어진 혀는 아빠가 못 넣어 주는데. 어쩌지?”
평소에 평정심을 잘 유지하고 있었는데, 릴리움에게 영향을 받아버린 것인지, 두 모녀의 자극에 헛것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덜덜 떠는 손으로 품속에서 약을 꺼내 다량을 털어 씹어 삼켰다.
눈알이 없어 시컴한 동굴이 보이는 눈을 하고 길쭉한 혀를 자신에게 뻗어 원래대로 해달라고 조르는 딸에게 미안하게 웃었다.
약이 효과가 도는지, 허상이 희미해지면서 사라져갈 때 다시 딸에게 사과했다.
“아빠가 미안. 아빠는 죽으면 우리 딸이 있는 곳으로 못 가겠다. 아빠는 이제 어디에도 못가거든.”
어차피 자신들은 그의 손을 잡은 것으로 죽음후의 길은 소멸이라고 정해져있기 때문에 거듭 사과했다.
가고 싶어도 갈 수도 없고, 자신이 한 선택에 딸과 함께 할 면목도 서지 않아 진즉에 포기했다.
수도 중심 광장의 분수대의 턱에 앉아 레인트는 이제는 완전히 버릇이 된 풀을 입에 물고 멍하니 하릴없는 시간을 떼우고 있었다.
“이제 오늘 아니면, 쉬는 날도 주어지지 않을 텐데 아무것도 안 할 거냐?”
함께 비번이 된 문트라의 잔소리에 심드렁히 대답한다.
“할게 없다. 주군께서 지금 같은 시기에 쉬는 날을 왜 주신 건지는 알아들었는데,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나한테 붙지 말고 너 알아서 놀아라. 좀.”
자신을 귀찮아하는 말에도 문트라도 딱히 할 것이 마땅치 않아서 레인트의 옆에 앉아 함께 멍 때리기 시작했다.
검을 쓸 줄만 알았지, 성 밖에서 노는 것을 거의 하지 않았고, 천공의 백성들과 지상인들의 경계가 없어져 두 문화가 조금씩 섞여가고 있는 수도의 북적임을 열심히 구경하니 그래도 나름 재밌긴 했다.
“야. 문짝. 우연이 세 번이면 진짜 운명 아니냐?”
문트라의 별명을 부르며 갑자기 운명을 들먹이자, 이놈이 미친 건가? 절로 두 눈썹의 거리가 좁혀졌다.
“두 번째도 운명이라 생각했지만, 세 번은 맞지? 그지?”
이젠 아주 닦달하기까지 하자, 버럭 소리 질렀다.
“그래 운명 맞다. 그래서? 어라?”
운명이 맞다는 소리가 나오자마자 레인트는 그를 버리고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나가 사람들의 틈으로 사라져버렸다.
“뭐 이런 미친 새끼가 다 있냐? 나 혼자 뭐하라고.”
왕따가 되어 버려져 잊혀진, 문트라는 어깨를 떨어트리고 노점에서 파는 대륙의 간식들을 잔뜩 사들고 쓸쓸하게 성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내 연인은 술이구나. 넌 배신하지 않지. 훌쩍”
동료에게 아픔을 선물로 준 것도 모르는 레인트는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는 묘령의 여인에게 허겁지겁 달려가다 말고, 고백했다가 차였던 상황을 떠올리고는 멈췄다.
차였다가 다시 말을 걸면 끈질기다고 질려하지 않을까 무섭기도 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쉽게 접지 못하는지, 다시 보니 어떻게든 다시 말을 걸고 싶어 망설였다.
“어머나?”
우왕좌왕하고 있는 레인트를 발견한 여인의 목소리에 팟하고 고개가 그녀의 얼굴을 향한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놀라하자, 허리까지 내려오는 진보라색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반했습니다! 저와 사귀어 주십시오!”
허리를 구십도로 꺾고 손을 쫙 펴 목청 크게 외치던 레인트는 자신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튀어나온 고백에 아차 했다.
“풋~~”
뻘뻘뻘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그의 머리위에서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어쩜, 만날 때마다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말을 하시네요.”
고개를 슬쩍 들어 본 여인이 배를 잡고 작게 주먹 쥔 손을 입에 대고 키득키득 웃는 모습에 자연스럽게 넋을 놓았다.
“그렇게 차이고도 어떻게 계속 그럴 수가 있는지, 아 웃겨라. 후후훗.”
미소 짓는 얼굴은 봤지만, 정말 즐거워서 환하게 웃는 것은 처음인지라, 그녀의 주변에 꽃이 만개해보였다.
“저의 답도 전이랑 똑같아요. 거절할게요.”
상냥한 말투지만 나오는 것은 예상한대로 거절이라, 레인트는 다시 땅을 푹푹 팠다.
사내로서 포기할 때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왕 엎질러진 물, 레인트는 이번만은 한 번만 더 크게 용기를 내보기로 다짐했다.
곧 일어날 전쟁으로 자신은 언제든 죽을 수도 있는 길을 가기에, 추억이라도 좋아 짜 올린 용기였다.
“하루만 저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딱 하루면 됩니다. 아니, 그것이 아니면 반나절이라도 좋습니다. 저와 데이트해주십시오.”
다시 구십도로 허리를 접었고, 기대하지는 않고 있지만, 그래도 나름 불안해서 땅으로 향한 얼굴로 풀을 잘근잘근 씹었다.
“좋아요.”
“...네?”
“해요. 데이트”
긍정적인 대답을 들을지는 몰랐던 얼굴이 팟하고 환해졌다.
“모 모시겠습니다.”
허리를 살짝 숙여보이며 양손을 곱게 뻗어 방향을 제시하자, 다시금 예쁘게 웃어주는 여인에 절로 어깨가 들썩인다.
“저의 뭐가 그리 좋으신 건가요?”
함께 보폭을 맞춰 걸어가면서 물어보자, 레인트는 쑥쓰러워 볼을 긁적였다.
“누굴 좋아하는데 이유가 있겠습니까? 반했으니까 좋아하는 거죠.”
어느 순간 여인의 걸음이 느려져 의아하게 쳐다보니, 그녀에게 씁쓸한 그늘이 비쳤다.
“상대가 어떤 성격인지도 모르고, 그 이면의 뒤에 얼마나 추하고 더러울지도 알 수 없는데, 이유 없이 좋다는 말은 모순이지 않을까요?”
그녀의 말속에 뼈가 있어 심각해졌지만, 레인트는 바로 표정을 회복했다.
“저는 그런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제 성격이 단순하달까, 워낙에 솔직해서요.”
“마치 제 성격이 못나도 좋아했을 거라고 들리는 모순이네요.”
상처가 있었던 것 같은 말투였지만, 깊게 들어가는 것은 예의가 아닌지라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저는 좋아하는 마음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싫으셨습니까?”
“아니요. 나쁘지는 않아요.”
다행이라 절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거리의 이곳저곳을 구경하면서 오늘 하루는 자신이 광대가 되기로 작정한 레인트는 그녀를 웃게 하는데 열심이었고, 효과를 톡톡히 보는지 꺄르륵 여인의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혹시 그거, 저 따라하신 건가요?”
“네? 아.. 이거요?”
자신의 입에 물린 풀을 가리키며 묻는 질문에 의식도 하지 못하고 물고 있었다고 깨닫고는 멋쩍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너무 맛있게 드시는 통에 정말 맛있나 해서 시작한 것이 그만 버릇이 되어버렸습니다.”
“푸웃~ 아하하하하. 저는 잡초까지 먹지는 않아요. 맛있는 풀들은 따로 있어요.”
따라했다고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오히려 유쾌하게 웃던 그녀가 갑자기 레인트의 손목을 잡고 약초상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약초들을 꼼꼼이 확인하더니 하나를 구입해서 레인트의 입에서 풀을 떼고 하나를 입에 물려주었다.
“이건 생으로 씹어도 맛있을 거예요. 처음에는 살짝 쓰기는 해도, 향도 좋고 끝에 고소한 맛이 있거든요. 약으로도 사용하지만, 이렇게 간식처럼 먹어도 무척 좋답니다.”
레인트는 그녀의 설명을 들으면서 한아름 약초봉지를 받아들고 열심히 우물우물 씹으면서 좋아죽었다.
시간이 조금 멈춰주는 센스라도 있었으면 하지만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기시작하자, 데이트의 끝이 왔다는 것을 알았고, 다시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저.. 이름. 이름만 알려 주실 수는 없을까요?”
이제 헤어지려 하는 그녀를 잡고 허겁지겁 이름을 물어보자, 여인은 무척 곤란해 했다.
“저는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곧 큰일을 하게 돼서 추억으로라도, 이름이라도 알고 싶습니다. 무례라는 것을 알지만..”
“비.”
처연하게 웃으며 말하는 이름이 본명이 아니라는 것이 얼추 느껴졌지만, 그래도 기뻤다.
“저는 레인트입니다. 오늘 저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돌아가려고 했었던 여인은 양손을 목뒤로 가져가더니 자신의 목에 있는 목걸이를 레인트의 손에 쥐어주었다.
“무슨 일을 하시는지는 몰라도, 하시는 일이 잘 되기를 빌게요.”
마지막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려 막 돌아가려는 여인이 마침 지나가던 행인이 들고 있는 날카로운 짐에 손등이 살짝 스쳤다.
“아야.”
“괜찮으..”
손등에 작게 스크래치가 나서 피가 살짝 베어 나오기에 서둘러 손을 뻗었지만, 여인은 오히려 그의 손등을 찰싹하고 때리더니 뒤로 물러나 그를 경계했다.
“그만 가볼게요.”
손등을 다른 손으로 덮어 숨기고 빠르게 벗어나는 그녀를 붙잡지 못한 레인트는 얼얼한 손등과 짤그락 들려있는 목걸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꼭 이 세상을 지켜내 보이겠습니다. 당신을 위해서라도.”
미안해하는 얼굴로 돌아간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가슴에 세기고 레인트는 목걸이에 가만히 입을 가져다 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