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장전용 집무실의 문이 활짝 열려있었고, 그 근처로 시작하여 많은 수의 기사들이 정복을 입은 채로 좌우로 길을 만들어 도열해 있었다.
사람으로 만들어진 길을 지나 방안의 중심에 서있는 하일단장의 앞에 선 바이안은 들고 온 갑옷과 정복 등 기사단의 상징인 물건들을 그에게 넘겼고, 하일은 조용히 받아 들였다.
“단장의 권한으로 바이안경의 은퇴를 정식으로 받아들이겠네.”
하일의 크지 않은 선언이 끝나자, 단체로 오른손을 심장에 대었다.
“후회 없이 걸어갈 거라고 나는 믿는다.”
“그동안 고마웠다.”
잠시간 동안 친우이자 동료로 돌아가, 서로에게 한 번씩 대화를 주고받은 후에 론이 슬쩍 앞으로 나와 들고 있던 망토를 바이안에게 넘겨주었다.
남청색의 망토를 건네받은 바이안은 망토에 수 놓여진, 황가의 문양을 잠시 내려다 본 후에 망설임 없이 제 어깨에 걸쳐 고정했다.
주먹을 쥐고 들어 보이는 하일과 똑같이 들어 툭 마주치고 떨어진 바이안은 등을 돌리고 옛 동료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타고 걸어 현궁에서 벗어났다.
현궁에서 나와 나아가는 방향에는 오롯하게 서있는 황궁이 바이안을 맞이했고, 문 앞에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그를 알아보고 경례를 하면서 문을 열어주었다.
천공의 땅과 대륙이 합쳐지며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된 황궁의 안을 거침없이 걸어 황제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회의실에 모여 있던 관료들이 바이안을 알아보며 목례를 하다가 바이안의 전혀 다른 모습에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들의 인사를 고개를 끄덕이면서 적당히 받아 안으로 들어가 황제와 마주하자, 그들은 업무를 잠시 미루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어서 오거라.”
“......”
묵묵히 서서 인사를 해 오는 바이안의 등에 걸쳐진 망토에 잠시 눈을 이동했다가 황제는 못마땅한 척 대화를 늘렸다.
“이럴 때는 다녀왔습니다. 라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니더냐?”
그의 말에 바이안은 엷게 지어지는 미소로 다시 인사를 정정했다.
“다녀왔습니다. 폐..”
“어허!”
“아바마마.”
드디어 소원했던 말을 들은 황제는 시국이 시국이라 하여도 지금은 편히 웃었다.
“그래. 내 너를 이리 보니, 마음이 놓이는 구나. 오랜 시간을 돌아 이제야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 온 듯싶구나.”
“그동안 마음 쓰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조용히 사과를 하는 바이안에게 가까이 다가온 황제는 가만히 아들의 두 어깨에 손을 얹고 자랑스러운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으로 그를 환영했다.
“그동안 하지 못해서 앞으로 배워야 할 것들이 많을 터이니, 무척 바쁠 것이다.”
“각오한 바입니다.”
커다란 무언가를 털고 일어난 바이안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현기로 반짝여 굳은 의지를 황제에게 보였고, 황제는 믿음직해 호탕히 한 번 웃어주었다.
“허허허. 다시 한 번 환영하마. 지옥적인 황제의 길에 어서 오거라.”
조금 장난스러운 환영 인사에 절로 미소가 그려진다.
“진짜 지옥을 알고 있는데, 설마 황제의 자리가 지옥이겠습니까?”
농에는 농으로라고, 설마 둘째인 바이안이 농을 받아칠 줄은 몰랐던 황제의 눈이 살짝 크게 뜨여졌다.
“너의 선택 덕분에 딸의 잔소리에서 드디어 벗어나겠구나. 으음.. 이건 좋군.”
그동안 후대의 문제로 틈만 나면 에바를 설득하는데 열을 올렸던 지난날들이 스쳐 지나간 황제는 그때가 무척 고역이었었는지, 근심스러웠던 마음을 편히 풀었다.
케리프와 결혼이 정해졌는데, 황제해도 되지 않겠느냐? 했더니, 케리프님에게 집중할 시간이 부족해서 싫다고 방방 뛰어서, 협의 방향으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를 황태자로 책봉을 하자라는 말에 에바는 정색하며 미쳤냐는 말을 시작으로 팩폭을 당하고 뒤에서 눈물을 콕콕 찍었더랬다.
물론 바이안이 황자로 완전하게 돌아 왔다고 하더라도 그 후대의 문제가 해결 된 것이 아니어도, 마음이 한결 편했고, 안심이 되었다.
“시간이 없어 대화할 틈이 짧구나. 이야기는 나중에 틈틈이 하는 것으로 하자. 따라 오거라.”
“예. 폐하.”
“쓰읍~”
현장으로 데리고 나가려던 황제는 바이안이 버릇처럼 부르는 표현에 세이나에게 배운 눈 흘기며 이 악물고 숨 들이키기를 해주자, 아바마마라고 바로 정정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바이안이 황제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이 일, 저 일을 해결하고 있을 때, 황후궁에서 소식을 들은 황후는 시녀장과 에바 앞에서 꺼이꺼이 울었다.
“흐어어어엉~~~”
체통도 위엄도 다 내려놓고 바닥에 주저앉아 치맛자락을 콰악 움켜쥐고 목 놓아 울어대는 통에 황후가 흘리는 눈물로 방안에 강이 만들어질 것 같았다.
그녀의 등을 쓸어주고 토닥여주는데도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않아도 천성적으로 몸이 약한 어마마마가 기력이 떨어져 쓰러지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된 에바가 눈물 뚝! 할 수 있는 것이 퍼뜩 떠올라 황후의 귀에 입을 가까이 가져가 속삭였다.
“어마마마. 오라버니가 언니한테 프로포즈 했대요.”
“진짜?”
조금 전까지 징징 울었던 지라 그 어느 때보다 더 촉촉한 눈으로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태도를 싸악 바꾼 황후의 눈에서 별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근데, 괘씸하게 둘이서만 작게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문이..”
“안 돼지. 그건.”
진짜 괘씸했던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현기증에 비틀했지만, 의지로 자세를 세우더니 황후는 잔소리를 하러 튀어나가려 했고, 에바가 서둘러 행동파인 황후를 말렸다.
“후후후~ 언제 어디에서 하는지는 전~부 소녀가 파악했답니다.”
“우리 딸 능력도 좋지~ 후후후~”
모녀의 작당모의가 한창 진행되기 시작하자, 시녀장은 살짝 좌우로 고개를 저으면서 황후의 떨어진 기력을 보충할 수 있는 다과를 챙기러 조용히 물러났다.
커다란 나뭇가지에 몸을 지탱하고 등을 기댄 제임스는 망원경을 들고 있던 팔을 늘어뜨리면서 크게 하품했다.
“아쉽겠네, 나는 거의 마지막에 재밌는 것을 본 꼴이기는 하지만.”
“지랄 하지마라. 네놈이 뭐가 재밌는지 나는 도통 모르겠다.”
나무 밑에서 들리는 무거운 목소리에 제임스는 손을 휘적였다.
조금 시비적인 몰렌의 말에도 타격이 없는지, 제임스는 느그적 대꾸해주었다.
“주인님이 후계로 까지 생각했던 놈이, 자신이 언제 미쳤냐는 듯이 멀쩡하게 돌아다니잖아. 안 웃겨? 난 웃긴데. 주인님의 판단이 완전 틀어진 거잖아. 저거.”
“그게 뭐가 재밌는데? 돌아가면 저번처럼 돌아버리실까 나는 그게 무섭다.”
몰렌은 그때 훙 하고 날아가 벽을 뚫고 쓰러진 자신이 떠올랐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나저나 릴리움은 움직임이 제일 느린 주제에 사라져서 돌아올 생각을 안 한데?”
“속이 시꺼먼 년이 뭐가 걱정이라고.”
몰렌은 릴리움이 마음에 들지 않아, 무시하듯 제임스의 말에 토를 달았다.
“슬슬 돌아가야 하는데, 없으면 찾으러 가기 귀찮아지잖아.”
둘에게 짜증과 귀찮음을 안겨주고 있는 당사자인 릴리움은 동료들과는 다르게 한껏 신이 나 있었다.
“꺄~ 찾았다. 억지로 따라오길 잘했다니까. 허락 없이는 천공의 땅을 밟을 수 없어서 그동안 내가 너를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 모르지? 호호호”
천공의 땅에서만 자라는 독초를 발견한 릴리움은 행여 뿌리가 다칠까봐 살살 땅을 팠다.
뿌리에 독이 고여 오래되면 오래 될수록 독해지는 독초라 그 손길이 섬세했고, 무사히 땅에서 벗어난 뿌리의 자태에 황홀하게 취해 두 볼이 빨갛게 상기 되었다.
지상인들과 백성들이 모여 있는 곳의 근처 수풀인지라 누가 지나가도 그런 릴리움을 이상히 여기는 사람들은 없었다.
게다가 릴리움이 들고 있는 풀이 독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이 없었고, 대부분 잡초로 여기고 있어서 편하게 캘 수 있었다.
황제에게 건네받은 서류를 챙겨 돌아가는 중에, 오늘도 여전히 풀을 입안에서 아작 내던 레인트는 서류를 옆 동료에게 확 떠넘기듯이 안겨주더니, 안절부절 주변을 둘러보다가 어느 집안에 핀 화단을 발견하고 서둘러 달려가 집 주인에게 부탁해서 꽃을 한 아름 꺾어 왔다.
“뭔 짓이냐?”
업무 중에 생뚱맞게 대 놓고 딴 짓하는 레인트에 얼척을 잃은 칼라임의 목소리에 그에게 사과했다.
“미안. 나도 이러면 안 되는 것은 알지만, 아주 잠깐이면 되거든? 아주 잠깐. 오 분만 기다려 주라.”
주군의 명령으로 다녀오는 중에 다른 길로 세면 안 된다는 것은 알지만, 레인트에게는 무척 다급하고 중요했다.
‘다시 볼 수 있을 줄 몰랐는데, 여기서 볼 줄이야..’
“후... 오 분이다. 갔다 와서 왜 그랬는지 말해.”
딱 봐도 견적이 나오는 행동에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면서 허락하자, 레인트가 쏜살같이 사라졌다.
적당한 곳에 앉아 있으니, 네 명의 황궁 기사들을 거느리고 나타난 바이안이 칼라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돌아가는 중 아니었나?”
칼라임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꾸벅 목례를 하자, 바이안이 적당히 손을 털었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편하게 하자. 기분 이상하다.”
“그렇지? 나도 너한테 하기 이상하다.”
서로의 입장이 달라진 것에 적응 하지 못해 살짝 꼬인 표정을 짓다가 동시에 피식 웃었다.
“몇 일전만 해도 동료였는데, 이제는 황태자 전하라니... 쩝.”
“정식으로 황태자가 된 것은 아냐. 그럴 시간도 없기도 하고. 아무튼 서류 받고 등 돌린 지 몇 분이라고 엉덩이를 깔고 있어?”
“레인트 새끼가 연애사업 좀 하게 오 분만 달랜다.”
레인트가 사라진 곳으로 손가락질 하는 방향으로 눈을 돌린 바이안은 마력을 눈에 모아 찌푸린 인상으로 집중하자, 시야에 잡힐 거리에 있기는 했는지, 바로 찾았다.
“그렇군. 레인트 놈의 취향을 오늘 처음 알게 되는군.”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보였지만, 레인트가 묘령의 여인에게 꽃을 한 아름 안겨주면서 허리를 바짝 숙이는 것을 자세히 보고 있자, 그 꽃다발을 안은 여인이 순순히 받아들어 잘 되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뻥하고 차이는 것인지, 여인이 레인트의 앞에서 꽃을 우그러뜨리면서 우적우적 씹어 먹는 장면에 바이안의 눈이 동그래졌다.
“...차였다.”
“차였냐?”
바이안보다 시야가 좁은지라 듣는 것으로 상황을 이해하고 있던 칼라임은 위로주로 무슨 술이 좋은지 고민했다.
“아닌가? 좋아하는데?”
“엥?”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보고 있어서 장면은 이상했지만 성공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고, 어깨를 추욱 늘어트리기에 이번에는 확실하게 차였다 싶었다.
“차인 게 맞다.”
“...어느 쪽이야?”
“네가 돌아오면 물어봐라. 걸어오고 있으니까.”
자기 몫까지 위로 해 주라고 한 마디 한 바이안이 지체된 시간에 서둘러 사라지고 난 후에, 칼라임은 울먹이며 다가온 레인트의 어깨를 토닥여가며 현궁으로 복귀하기 위해 걸음을 떼었다.
“두 번째 우연이니까, 운명이라고 생각했는데... 훌쩍. 맛있다고 칭찬 받았는데... 훌쩍.”
칼라임은 레인트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그의 혼잣말에 위로의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어깨만 반복적으로 다독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