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으응.”
그래도 부르니 어렵게라도 대답한다.
“그동안의 대현자들과는 다르게, 나는 애초에 처음부터 이러려고 스스로 선택하고 이곳으로 돌아와 태어났어.”
“...그게.. 뭐.”
울음 섞인 목소리는 목이 메이고 갈라져, 세이나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투정부렸다.
“생명이 죽고 영혼이 여행을 하다 다시 태어난다고 그 전의 생을 기억하지 못해.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고개를 뒤로 한 껏 제쳐 울고 있는 바이안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면서 귀엽게 베시시 웃었다.
“여기에 오기 전의 생에서 역대 현자들의 영혼의 기억이 남은 조각인 이들이 더듬더듬 헤매다가 간신히 나를 찾고, 나에게 호소했어. 처음에는 내가 미쳤나 싶어서 엄청 당황했는데, 그들과 접촉하자마자 뽱~하고 기억이 터지더라고. 특히나 라이트리아였을 때의 내가.”
세이나는 이미 있을 수 없는 힘을 썼던 전적이 있던 영혼이었기에 이미 틀에서 벗어난 상태였던지라 기억이 쉽게 돌아왔었을 것이라 짐작했다.
게다가 라이트리아의 기억이 가장 많이 돌아온 이유는 아마도 그 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살고 있던 곳이기에 가능했었을 것이다.
전생의 기억은 그 상태였기에, 라이트리아보다 더 많이 남아있기도 했다.
“내가 이 곳으로 돌아오려고 한 것은 희생을 위해서가 아니야.”
“죽는 것에 자유롭지 못한 것은 변함없잖아.”
짓씹으며 따지는 말에 세이나는 손가락을 튕겨서 바이안의 코를 때렸다.
따가움에 찡그리는 바이안에게 이겼다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반 오빠. 이유든 상황이든 어떻든 간에 시작한 것은 나야. 그러니 못 다한 것을 끝내는 것도 나고. 단지 그것뿐이야. 마무리 짓지 못하고 죽은 것이 싫더라고. 그래서 망설임 없이 전생을 버리고 그들의 힘을 빌어 억지로 이곳으로 영혼을 끌어 당겨서 태어났어.”
세이나의 말을 듣던 바이안은 문득 세이나의 전생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소멸할 수도 있는데 망설이지도 않고 바로 돌아왔다고? 그 곳에 살고 있던 인생이 있었을 거잖아.”
“으음... 쉽던데? 거기에서는 뭐, 별로 미련도 없었고.”
정말 아무렇지 않은지 음성이 담담했다.
“왜? 게다가 육체가 죽지 않으면 영혼은 자유롭지 못하잖아.”
포인트를 잘도 집어내니 세이나는 볼을 긁적였다.
“나 거기에서는 애기였을 때부터 고아였어. 고아원원장님이 그러던데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다더라고. 친척도 없고, 가깝게 지내는 친구도 쭈욱 없었지? 아마도? 흐흐”
마주보고 있는 자세도 아니건만 세이나의 눈동자가 왼편으로 또르륵 굴러갔다.
“영혼이야 뭐, 오빠말대로 육체가 죽으면 자유로워지니까 간단하지.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살.”
자살이라는 단어에 바이안이 격하게 움찔했다.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 끼치는 자살은 안했어. 이 곳으로 바로 가겠다고 선택하자마자 육체는 소멸했으니까, 시체도 안 남았지.”
아무리 생각해도 전생의 자신이 참 잘했다 만족스러웠다.
그러다가도 세이나는 자신이 생각해도 조금 웃기긴 해서 비시시 웃어버렸다.
이곳에 다시 태어나자마자 자신이 무슨 이유로 이 곳으로 돌아왔는지 등의 기억은 처음에는 없었다.
성장하면서 단편적으로 조금씩 꿈을 꾸는 것으로 섞여서 사진을 남기는 것처럼 기억을 하기 시작했었고, 기억을 잃은 채로 현자의 돌을 취하고 나서야 빠르게 돌아오면서 표면적인 기억들이 남았다.
“나는 내가 못해서 이런 상황을 만들었으니까 내가 책임지고 마무리 하고 싶어.”
“하지마.”
세이나의 입장과 이야기를 들었다한들 바이안은 들어주고 싶지 않다.
“나랑 한 약속 기억해?”
“...무너지지 말아달라고? 이런 것을 예상하고 한 말이구나.”
“응.”
바이안의 품에서 벗어나 의자를 돌려 마주봤다.
눈물범벅에 삐져있는 사람처럼 입술을 비죽이는 바이안의 얼굴을 보자마자 세이나는 꺄르륵 웃었다.
“나는 만약이라도, 이 후에 우리 같은 사람들이 태어나지 않도록 나 끝까지 하고 싶어. 여러 사정으로 힘을 사용하고 소멸 해야만 했던 아이들이 더는 생기지 않게.”
“......”
소매를 잡아 바이안의 젓은 눈가를 살살 닦아주니 바이안은 그런 세이나의 손을 잡아 내렸다.
“마지막 하나 남은 돌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아마도 계속해서 내 육체의 기능들이 하나씩 떨어질 수도 있어. 아닐 수도 있고. 그래도 나 멈추고 싶지 않아.”
“그러지마.”
그녀의 말에 바이안은 세이나의 왼쪽 귀를 크고 두터운 손으로 덮었다.
세이나는 그런 그의 손등 위로 자신의 작은 손으로 부드럽게 덮었다.
“딱히 희망적인 말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 새끼와 나의 차이점은 이 돌의 의미를 내가 가장 많이 안다는 거야. 힘을 사용하고 소멸하게 된 이들의 공통점은 그저 돌을 취하고 불안한 상태로 사용한 것.”
손가락을 펴 세우면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리고 나는 돌을 내 몸에 온전히 받아 흡수하는 방법을 택했어. 처음부터 형태가 없던 아이니까 그 때로 돌리기 위해서라도 내 자체가 현자의 돌이 되 줘야지.”
“이마에 있던 돌이 사라진 것도 그런 거구나.”
천천히 진정이 되어가고 있는지 바이안의 떨리는 목소리가 조금은 차분해졌다.
“뭐든지 급하면 체하는 법이라서 이마를 택해서 천천히 흡수하려 한 건데, 그 새끼가 이렇게 미친 짓을 할 줄은 몰라서 마지막에 조금 체했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아래위로 운동을 하면서 혼자 납득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괜찮아?”
걱정하면서 여기저기를 살피는 모습에 마음이 간지럽다.
“응. 하나는 완전히 흡수 완료! 체했으니까 어떻게든 소화시키려고 몇일 쿨쿨 잔거야. 이제 나머지도 꿀꺽 해야징~”
다람쥐처럼 냠냠뇸뇸하는 모션을 취하자 바이안은 그제야 작게 웃었다.
이야기를 전부 들은 바이안에게 여태껏 오랜 세월동안 지켜왔던 세상의 룰이 소용이 없어졌다.
처음에는 바꿀 수 없는 법도라 생각했고, 제로드를 만나 대현자 그 자체가 현자의 돌에 영구히 묶여 어떠한 것에도 자유로울 수 없는 삶을 산다고 하기에 절망도 했다.
하지만 세이나의 말을 들으며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알았고, 그녀의 선택의 의미를 알게 되었기에, 소망하지 않으려 꾹꾹 숨겼었던, 가장 크게 욕심을 가졌었던 본심 하나를 꺼냈다.
“더는 말리지 않을게. 네가 하고자 하는 것을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거야. 하지만 딱 하나만. 내가 소원하는 것을 들어줄래?”
“뭔데?”
다시금 애처롭게 일그러진 바이안의 표정에 조금 불안해진 세이나가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감히 당신에게 청합니다. 당신이 나의 배필이 되어 주기를. 나와 결혼해 줘.”
“오...”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있던 세이나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더니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이 주륵 흘렀다.
아무리 태연하고 의연하게 있던 세이나라고 하더라도 그의 말의 뜻을 모를 수가 없었다.
세이나 또한 평범하게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꿈을 꾸지 않은 것은 아니었기에 마음이 크게 요동쳤다.
스스로 선택했고, 품고 있던 이유들이 있기에 덤덤하게 있었을 뿐이지, 죽을 수도 있는 이 상황이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속으로 여러 번, 이 일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기도 했었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 속 깊숙이 눌러 자신을 어르고 달랬다.
자신이 그러할 진데, 이후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자신을 알면서도 청혼을 하는 바이안의 속은 오죽할까, 세이나는 그런 그의 청혼을 거절 할 수가 없었다.
바이안은 소리 없이 눈물만을 흘리는 세이나의 두 볼을 엄지로 슥 닦아주었다.
“함께하는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설령, 그 순간이 찰나라 하더라도.”
손을 펴 올리며 꺼내는 맹세의 말에 세이나는 마주 깍지를 끼며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당신께 맹세합니다. 단 하나의 배필이자 유일한 나의 사랑과 영원을 함께 하기를.”
맹세의 말을 서로 주고받다가 바이안은 그대로 세이나의 등과 머리를 손으로 받치고, 입술을 겹쳤다.
격하게 탐하다가도 부서질까 달래듯이 하지만 집요하게 탐했고, 서로를 껴안고 있는 둘을 비추는 아침 해가 테라스를 밝혀왔다.
서로를 원하는 마음이 겹쳐지며 마주치는 시선과 반복적으로 부딪치는 입맞춤 사이에 서로의 눈물이 볼을 타고 섞여 바닥에 떨어져 고여 갔다.
‘만일, 정말로 너와 하는 순간이 짧더라도, 그것이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나는 굳건히 버텨내고 지킬 거야.’
바이안의 새로운 맹세와 앞으로 그가 나아갈 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오빠님아. 나도 애초에 죽을 생각 없으니까. 찡찡 울면 안 된다?”
품에 안겨 울보라고 놀리자, 바이안이 세이나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부볐다.
“눈물자국이 선명한 채로 말해도 설득력 없거든?”
개구쟁이처럼 치고 들어오는 말투에 어렸을 적의 바이안이 떠올랐다.
서로 티격태격 장난을 치다가 막혔던 둑이 터져버린 바이안이 다시 세이나를 와락 끌어안고 입술을 공략했고, 세이나는 못이긴 척 키득이며 받아들였다.
“이제 기사님 졸업이네.”
세이나가 이루고 싶어 하는 바를 위해서이면서 바이안 자신이 앞으로 목표하고 나아갈 방향을 잡고 정리한 뒤에 꺼낸 말과 함께 품에 안긴 세이나가 그의 품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 안겼다.
“나한테는 앞으로도 반 오빠가 최고의 기사님이고, 가장 멋진 기사님인 것에는 변함없어.”
반백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는 손길이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랑이 가득 묻어났다.
“그것만?”
짓궂게 들어오는 물음에 세이나의 얼굴이 퐁퐁 붉어진다.
“그.. 나..”
“나?”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서인지,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고 어물거리다가 기대 가득 품은 바이안의 표정을 마주하자니, 퍽 난감했다.
“제일 멋진 남편님?”
용감하게 꺼내 놓고 보니 화르륵 활화산처럼 터지려는 얼굴에 바이안은 이마부터 눈 코 입 순으로 입술도장을 콕콕 찍어 내려가면서 찜해댔다.
론과 하일을 필두로 호위팀 전체는 방 앞에서 복잡한 표정을 지은 채로 침묵했다.
깨지 않는 주인의 걱정에 밤잠을 설치던 중에 세이나가 새벽에 깨어나 바이안과 대화를 하는 소리를 밖에서 듣고 돌아간 나머지 동료들을 불러 단체로 대기를 하는 중이었다.
대화소리가 속삭이는 소리도 아니었고, 애초에 범인들과는 다르게 단련된 신체를 가지고 있어서 조금만 집중하면 대화소리를 자세히 듣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엄청난 이야기를 들어버렸네.”
“세상의 한 페이지를 엿 본 느낌이 이런 거지 싶다.”
한참 만에 꺼낸 말들에 절로 끄덕여진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냐?”
“낸들 알겠냐? 어떻게 해서든 주군을 지켜야 한다는 것에는 변함없을 거잖아.”
서로 한 번씩 돌아가며 꺼내는 대화를 가만히 듣던 하일이 덧 붙였다.
“주군을 지키는 것이 우리들이 할 일이지만, 그 무게가 더 커진 것 같군.”
그에 머리를 벅벅 헤집던 론이 벽에 등을 기댄 채로 길게 숨을 뱉어냈다.
“무게가 커진 것보다도, 더 하지. 주군의 존재 자체가 가지는 영향이 세상 그 자체와 연결되는데, 그걸 어떻게 가늠할 수 있겠냐?”
주군을 지키는 기사로서 가지는 자부심과 충심보다 더 큰 무언가가 그들에게 안겨졌다.
만약에라도 자신들이 주군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면 세상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릴 것이 확실하자, 오싹하고 소름마저 돋아났다.
“아침부터 길막하고 뭐혀들?”
하도 심각하게 있다 보니 문이 열리면서 튀어나온 세이나를 늦게 발견했고, 단체로 움칫 놀라버렸다.
“막혀있으면 뚫으면 되지.”
어정쩡하게 굳어 있는 동료들을 흘기던 바이안이 세이나의 무릎사이에 손을 넣더니 그대로 들어 안고는 성큼성큼 길을 뚫고 걸어갔다.
“저 새끼 봐라. 이제 거리낄 거 없다고 대놓고 애정행각을... 으~ 꼴 뵈기 싫어.”
론은 대놓고 시비를 털면서도, 앞서 나가는 둘의 꽁냥질이 조금 매우 많이 부러웠다.
그러다가 양손을 마주 붙여 세이나를 향해 들어 올리더니 간절함을 담아 기도했다.
“라이트리아 여신님. 부디 그녀도 나랑 같은 마음이기를...”
“누구한테 비는 거야?”
세이나를 겨냥해서 소원을 비는 행태에 세이나가 바이안의 목에 팔을 둘러 상체를 세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바이안의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성을 내던 세이나는 론의 뒤에서 조금 소심하게 손을 모으고 있었던 몇몇을 추가로 확인하자, 기가 차 할 말을 잃어버렸다.
“큭큭큭”
창피한지 바이안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자신을 있는 대로 미화시킨 초대들을 향해서 한껏 꽁시랑 대는 세이나를 내려다보면서 바이안은 귀엽고 사랑스러워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