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나.”
“넹~”
“...라이트리아.”
“네엥~”
잠꼬대에 맞춰서 속닥이고 있자니, 확하고 들려진 얼굴 위로 커다랗게 떠진 눈과 마주쳤다.
“워메!!”
“세나?”
놀람과 의문이 가득 담긴 바이안의 표정에 깜짝 놀라 도곤하는 심장에 손을 얹고 어색하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네가 어째서 라이트리아의 이름에 대답하는 거야?”
어렸을 적에 자면서도 잠꼬대를 해왔던 바이안을 자주 봐왔었고, 그때도 이렇게 맞춰서 떠들었었는데, 세이나는 바이안이 아무래도 깊이 잠이 들지 않았던 모양이라고 느끼자마자 뭐라고 해줘야 할지 순서가 고민되었다.
“으음.. 내가 라이트리아가 맞긴 했었는데, 지금은 아니지만.”
바이안은 자리에 벌떡 일어나 세이나의 두 어깨를 꽈악 틀어쥐고,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무섭게 구겨진 바이안의 표정에 세이나는 사락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그리고 바이안의 양쪽 팔목을 잡아 자신의 무릎 위로 내려놓았다.
“오빠. 일단 앉아. 그래야 말해주지.”
“......”
자신이 너무 흥분해서 순간적이지만 세이나에게 화를 낸 꼴이 된 바이안은 어렵게 몸을 틀어 세이나의 옆에 걸터앉았다.
“일단, 이건 짚고 넘어가자. 내가 라이트리아였었기는 하지만, 엄연히 인간이었고, 절대로 그런 절대자 같은 여신은 아니야. 다시 태어나고 보니, 완전 여신 취급에 여기저기 동상이 뿌려져 있어서 내 손 발이 쪼그라들어 사라질 뻔.. 아, 조금 셌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창피한 지라 자신도 모르게 흥분했던 세이나는 헛기침으로 무마했다.
그리고는 그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자리에 일어나자, 바이안도 따라 일어났고, 세이나는 그런 그를 테라스로 데리고 나갔다.
테라스의 의자에 앉아 새벽하늘을 올려다보니, 아직 별들이 힘을 내고 반짝이고 있었고, 그런 별들을 눈에 담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빠. 생명이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될 것 같아?”
“난, 그것보다 어째서 네가 라이트리아인지, 그...”
세이나는 엉덩이를 살짝 떼어 자신의 입술로 바이안의 입을 막았다.
부드럽게 닿는 입술의 촉감과 온기가 남아 손으로 자신의 입술을 더듬고 있자, 세이나는 베죽 웃어보였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
세이나는 조금 쑥쓰러워 서둘러 고개를 다시 하늘 위로 돌렸다.
“다들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될지 많은 상상을 하고 그만큼 많은 말을 하잖아.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둥, 아무것도 없다는 둥.”
그렇게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별들이 뭉쳐서 강을 이루고 있는 은하수를 가리켰다.
“죽은 후에는 다 똑같아. 죽으면 영혼이 육신에서 떨어져 나오는데, 그런 후에는 그 영혼은 아주 먼 여행을 떠나. 저렇게 모여 있는 별들처럼 셀 수 없는 수많은 영혼들이 함께 모여 으쌰으쌰 힘내서 흘러가.”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자마자 세이나는 의자를 바이안의 옆에 더 바짝 끌어 앉았다.
“지금 우리가 살고 발로 지탱하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을까? 우리들에게도 영혼이 있는데, 이 세계도 영혼이 있다면 자연히 수명도 존재할거야. 그렇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모르겠어.”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는 바이안의 어깨에 머리를 살풋 기대본다.
“내가 여기로 태어나기 전에 머물고 있던 세상에서는 말야. 수명이 있다는 것을 과학이라는 문명과 지식으로 풀어놓았어. 우주속에 수많은 별들, 그 별들이 팀을 짜는 것처럼 모여서 은하계 속에 태양계 이런 식으로 뭉쳐 있대. 그리고 그 별들 중 하나인 곳, 생명이 움트고 노래를 부르는 곳이 이런 곳이고.”
세이나가 꺼내는 말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들이 많았지만 바이안은 묵묵히 경청했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별들이 태어나고 수명이 다해 죽기도 하고, 또 다른 별들이 다시 태어나는데 그 별들 중에서 생명이라고 부르는 존재들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곳도 생겨.”
두 팔을 활짝 펼쳐 붕붕 휘저었다.
“너무나도 많고, 너무나도 크고 넓어서 찾아갈 수도 볼 수도 없지만. 딱 하나, 여행을 하는 영혼들은 그런 곳들을 지나쳐가. 그러다 무리에서 하나씩 떨어져서 다시 태어나고 죽고를 반복해.”
세이나는 어째서 저렇게 장황한 말을 하는 것인지, 그 이야기들이 자신이 알고 싶어 하는 것들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어쩌다보니 내 이름이 붙어버렸지만, 라이트리아라는 이 세계도 하나의 별이고, 이 별은 이미 진즉에 수명이 꺼져가고 있었어.”
애정과 안쓰러움, 그리고 안타까움을 가득 담아 시선을 멀리 두어 어스름하게 밝아지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 이름을 사용하던 시절이 어땠을 것 같아? 죽어가는 별에서 살고 있다는 게.”
어차피 모를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질문을 해본다.
“지진에 화산폭발, 하늘 높이 뻗어 대지를 무참하게 쓸어버리는 바다 등. 맑았던 날씨가 갑자기 변해서 태풍이 몰아친다든가, 급격하게 온도가 떨어져서 얼어 죽는 것은 뭐,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났고,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서 죽고 죽이고, 먹을 것이 없어 서로를 뜯어 먹기도 하는 등 말도 못할 것들 투성이의 지옥이야. 혼란보다 더한 혼돈의 세상 이였지.”
마치 남 일처럼 무덤덤히 뱉는 세이나의 어깨를 가만히 안았다.
“나라고 전생을 전부 기억하는 건 아니야. 단락이기는 하지만, 확실하고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하나 있어. 이 아이가 그 많은 생명들 중에서 나를 선택했을 때.”
바이안이 아이라고 지칭이 된 존재가 이 세상 그 자체라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눈을 까뒤집고 덤비는 사람들에게서 도망치고 있었을 때였을 거야. 알 수 없는 기운이 내 몸을 감싸고 헤집고 있다는 느낌을 받자마자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정체를 바로 알게 되더라. 그리고 그 기운이 마치 울면서 살고 싶다고 나한테 말을 거는 것 같은? 지금도 말로는 설명 못하겠다.”
그 어떤 역사책과 고서를 뒤져도 나오지 않은 신화의 시초가 된, 오직 그 곳의 당사자였기에 나오는 이야기는 듣고 있는 바이안에게 허무맹랑하기도 했지만, 멍멍하게 다가왔다.
“특별할 것도 없는 나를 왜 골랐을까? 왜 하필 나일까? 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너무 아파서 그냥 품었어.”
라이트리아가 세상을 품었을 타이밍에 멀쩡했던 산이 와르륵 무너져 사방을 덮쳤다.
그리고 무섭게 쫒아왔던 많은 사람들은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 온전하게 서있는 이들은 라이트리아를 포함한 단 세 명뿐이었다.
사람이 혼돈에 먹혀 이성을 상실하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끝이라며 지혜를 가르치고 함께 해온 그녀의 제자, 엘라이어와 반다디.
셋은 어떠한 상황인지도 모른 채로 살기위한 여정을 계속 이어가던 중에 진짜로 세상의 마지막이 왔다고 체감하던 그 순간, 라이트리아는 둘이 무사하기를 바라면서 힘을 사용했고, 그대로 그녀의 육신은 빛 가루를 뿌리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거둘 육신도, 유품도 없이 그녀를 보내버린 둘에게 남겨진 것은 그녀가 사라지고 나타난 두 개의 돌, 하나의 돌은 어딘가로 날아가 사라졌지만, 빨갛게 빛을 내는 그 돌을 반다디가 거두었다.
거둔 그 돌의 모양이 마치 라이트리아가 세상이 너무 안타깝고 슬퍼 흘린 눈물 같아 둘은 그 자리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처음에 둘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라이트리아의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그녀가 지켜낸 이 세상을 위하여, 그녀의 힘에 영향을 받아 알 수없는 능력이 생긴 엘라이어가 힘을, 반다디는 돌을 지키며 세상을 유지하는 현자가 되어 혼란한 세상을 정리하고 수많은 생명들을 이끌기 시작한 것이 황족과 대현자의 시초이자, 시조다.
이 이야기는 이미 라이트리아가 죽어, 영혼의 여행을 떠나버려 그녀는 모르는 이야기지만, 시조인 반다디의 조각처럼 남은 기억을 세이나가 되어 돌을 거두고 단편영화처럼 본 단락이었다.
“그 시절에는 자신을 지칭하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극히 적었어. 이름 없이 사는 사람들이 태반이야. 히~ 엘라이어라는 이름 있잖아. 지금 성으로 쓰고 있지만, 그거 내가 지어준 이름이다? 몰랐지?”
“어... 으음..”
웃고 있지만 웃는게 아닌 바이안은 묘했다.
장난스럽게 밝힌 세이나 덕분에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 부모니, 세이나를 조상님으로 불러야 하나라는 엉뚱한 고민부터, 라이트리아의 사정을 몰라서 욕한 것 등, 너무 많고 큰 이야기에 정리하기도 복잡했다.
“이보셔요~ 오라버니~ 나는 나예요. 라이트리아가 아니라고는 못하지만, 애초에 다른 사람이라고요.”
표정이 왔다 갔다 하는 바이안의 두 볼을 꾸악 잡고 쭉쭉 늘리면서 나름의 불만을 표했다.
볼이 조금 부은 느낌과 붉게 올라오는 열기를 손으로 덮고 바이안은 많은 의문 중에 한 가지를 꺼내 질문했다.
“돌을 사용하면 소멸한다는 것은 어떻게 된 거야? 그럼 세나는 사용해도 괜찮은 거야?”
“아, 그거? 세상 그 자체나 다름없는 힘을 사람이 어떻게 감당하겠어? 이 세계에 눈이 있다면 사람이 점으로 보일걸? 아니다, 티끌도 안 되겠다.”
유쾌하게 풀고 있지만, 그 말의 뜻은 부정 같아서 희망이 조금 생겼던 바이안은 다시 기운이 쪽 빠졌다.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보면서 세이나는 나밖에 모르는 멍청이라고 작게 중얼이다가 바이안이 원하는 희망스러운 답을 꺼내주기로 했다.
“오빠야. 나야. 전 라이트리아. 내가 힘을 사용했으면 영혼이 소멸 되었을 건데, 여기 있네? 영혼이 멀쩡한데? 소멸했으면 다시 태어나지도 못했고, 오빠랑도 못 만났거든요?”
맞는 말이라 다시 희망이 가져보지만, 분명 세이나는 자신도 다른 이들과 다를바가 없다고 했었던 말에 나쁘다는 건지, 괜찮다는 건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라이트리아가 힘에 대해서 많이 알지도 못했고, 도중에 죽어버려서 둘에게 힌트도 설명도 해주지 못해서 설마, 이런 식으로 돌이라는 매개체가 생길 줄도 몰랐고, 둘이 돌을 관리한지는 더더욱 몰랐지. 사용할 거라는 것도 몰랐고.”
꾸물꾸물 품으로 파고드는 세이나를 보던 바이안은 자리를 새롭게 잡아서 등 뒤에서 그녀를 포옥 끌어안았다.
세이나는 그런 바이안의 크고 딱딱한 가슴에 편하게 등을 기댔다.
“형태도 없던 힘이 아마도 육신이라는 내 영향을 받아서 형체가 만들어졌나봐. 그리고 그때의 나는 완전하게 다듬기 전에 죽어버린 거라서, 이 아이는 다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을 거야.”
“그렇다는 것은 제로드리어스가 멸망을 자초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다는 거구나.”
정수리에 자신의 턱을 살짝 걸치고 세이나의 손을 꼼질꼼질 만지작대며 꺼낸 대답에 그를 칭찬했다.
“정답. 역시 우리 오빠야. 근데 그 자식 이름이야? 그거? 이름 길기도 해라. 그 새끼가 한 짓은 멸망을 아주 확실하게 앞당긴 거야. 그것도 최악으로. 쩝.”
칭찬 받아서 오랜만에 미소가 잠시 번졌지만, 다시 진지해졌다.
“세나야. 이것만.. 지금의 네가 힘을 쓴다면, 멸망을 막을 수 있는 거야? 그리고 네가 죽는 것이나, 소멸은 정말로 상관없는 거고?”
가장 확답을 듣고 싶은 질문을 다시 하자, 불안하게 세이나의 입이 잠시 굳게 다물렸다.
“...미안. 실은 나도 자신 없어. 전에도 하다가 도중에 죽어버렸으니까, 다시 한다고 막을 수 있을지도 확신이 서지는 않아. 그리고 내가 죽을지 소멸할지는 해 봐야 알고.”
이 세상에서 스스로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물론 세이나도 죽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마치 희생하는 것 같은 죽음은 더더욱 사양이었다.
하지만 거짓말도 그렇다고 얼버무리고 싶지 않아서 세이나는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바이안은 그런 세이나를 와락 껴안고 얼굴을 묻더니, 더는 나오지 않을 것 같았던 눈물을 소리 없이 흘렸다.
그의 떨림을 느끼면서 바이안의 손을 살포시 잡고 그를 위로하려 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시한부 인생 같은 삶인 당사자 자신이 달래줘 봤자 하등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진정이 될 때까지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세이나는 등 뒤에서 흐느끼고 있는 바이안에게서 조금씩 떨어져 자신의 옷자락을 적시는 그의 눈물을 보다가 눈을 사락 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