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끈하게 땀을 빼면서 한 숨 푹 자고 일어나니 기침과 열은 금세 가라앉았다.
다만 아직 코가 조금 막히는 정도라 답답한 것이 남아는 있었지만 세이나는 기운차게 빨빨빨 돌아다녔다.
귀차니즘을 감기라는 핑계로 며칠 뒹굴었지만, 역시 아무리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하기 때문에 그녀 나름 바빴다.
방안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는 황후의 심심하다, 보고 싶다는 연통에 놀러가서 이야기 삼매경에 한 숟갈 얹기도 하고, 황제와 만나 그간의 일들의 진척에 대한 상의도 했고, 현궁 안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들을 훑어보기도 했다.
세이나가 바쁘다는 것을 주변에 열심히 보여주고 있지만, 아마 현궁에서 제일 바쁜 사람은 다름 아닌 시녀장인 히데아일 것이 분명하다.
“히데아.”
마침 히데아는 감기에 좋다는 차를 가지고 들어와 세이나의 책상에 놓아주고 있었다.
“뭐, 더 필요한 거 있으세요?”
“그건 아닌데, 오늘 따라 사람들이 상당히 적어서, 뭐하는지 알고 있는가 해서 말이야.”
“아, 오늘 다들 중요한 훈련이 있다고 하시던데 아마 그거지 않을까 싶어요.”
“다들 정말 부지런 하네. 쩝”
몇 명의 호위만 빼고 바이안도 론도 심지어 친구처럼 말상대도 해주는 로이에도 보이지 않아, 절대로 심심해서 물어본 것이 맞은 세이나는 납득을 하면서도 온몸을 뒤틀며 심심함을 표현했다.
론은 조금 전까지 있었지만 잠시 나가있는데, 얼마나 심심하면 보기 싫은 능글능글 시비를 거는 론의 말이 그리울까.
히데아도 대화 상대를 해주기는 하지만, 직책에 의한 바쁨에 이리저리 돌아다니기에 놀아달라고 그녀를 잡을 수가 없어 책상위에 엎어져서 물가에 벗어나 파닥이는 생선처럼 팔딱팔딱 괴로워했다.
책상에서 바르작 바르작 행위예술을 하다 못해, 꽈배기가 되가는 세이나와는 다르게 현제 기사단들은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아 저새.. 알바트론 단장님보다 더한 놈. 아니, 분.”
예전에는 자신들이 선배였지만 지금은 수하인 기사들은 눈에 쌍심지를 키우고 이리저리 굴려대는 하일에게 행여 들릴까, 작은 목소리로 씹어댔다.
모두 똥을 밟은 사람들처럼 와락 얼굴을 구기고 있지만, 몇몇은 그렇지 않은 이들도 눈에 띈다.
특히나 홍일점인 로이에는 신이 나 있어서 조금 무섭다.
외관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기 힘들 정도로 땀에 절고 먼지투성이지만 검을 들고 이리저리 휘둘러 대는 그녀의 행태에 모두의 고개가 동시에 좌우로 저어진다.
“으햐햐~ 덤벼. 내 가드를 뚫지도 못하는 꼬챙이들아~”
본인도 아직 신입딱지를 떼지도 못했으면서 신입들을 발밑에 엎어트리고 지렁이를 밟듯 잘근잘근 밟으면서 희열에 차 아주 밝고 시원하게 웃는 것이 로이에게만 먼저 봄이 온 것 같았다.
거기에 로이에의 제일 큰 특징인 신랄하게 까대는 조막만한 조댕이가 제일 심했다.
“여기사는 원래 저러냐?”
“내 환상이 와륵 무너진 것만 생각하면... 크흑~”
이상하게도 공백의 기사단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는지 들어오는 이가 하나 없어, 그동안 쭉 온전히 남탕이었다.
그래서 황궁에 소속이 되어 있는 기사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갑옷이나 제복을 입고 검을 차고 돌아다니는 여기사들을 볼 때마다 그렇게 아름답고 멋져 보였더랬다.
그러다 로이에가 들어 왔을 때, 모두 두 팔을 번쩍 들어 환호했었다.
키도 크고, 선배라고 깍듯이 인사하는 청량한 하이톤의 목소리에 마음이 홀라당 꽃밭으로 들어가, 자신들이 비집고 자면 된다며 숙소의 방 하나를 통째로 내어 주면서 덮고 자는 이불까지도 제일 좋은 놈으로 챙겨주기까지 했지만, 로이에에게 잘 보이려 애쓴 것도 며칠이지, 검만 들면 론보다 더 신랄하게 쪼아대는 입과 순식간에 돌변하는 모습을 목도하면서 로망과 환상이 무너지며 절망했다.
황궁기사들은 서로 사귀기도 하고 기사가문끼리 결혼도 해서 깨가 쏟아지는 것도 그렇고, 서로 합을 보면서 검과 검을 부딪치는 연무장 데이트에 손잡고 검술에 대한 토의를 하는 것 등 늘 부럽게 바라봤었던 로망을 공백의 기사단들은 품어왔었다.
“천공 기사단에 있는 베일 기억하냐?”
“왜?”
“윈드 기사단의 부단장이랑 사귄 댄다.”
“유망주로 떠오르는 그녀를?”
“나.. 울어도 되냐?”
황제폐하와 어르신의 대련이 있은 뒤에 황궁의 기사들과 가깝게 교류를 하게 된 뒤로 많이 친해져 서로의 소식은 금방 알 수 있게 되었다.
“실력차이가 심하게 나잖아.”
“날카롭게 파고드는 그녀의 검술에 반했댔나? 그 부단장은 묵직한 파워에 반했다고 하더라고.”
“얼굴도 험악해서 무식하게 힘만 쎈 놈이?”
“나.. 울어도 되냐?”
어깨가 추욱 쳐진 상태로 힐끔 시체(?)의 산위에 발을 떡하니 올리고 더 덤빌 놈은 없냐면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로이에를 암담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흐음... 훈련의 강도가 내 생각보다 느슨했나 보군.”
“?!!”
언제부터 있었는지 하일이 손가락으로 턱을 매만지면서 살기를 쫘악 깔자 단체로 식겁했다.
“다 단장님.”
“자네들만 훈련이 끝난 후에 마력을 일체 배제한 뒤, 전신 무장을 한 상태로 연병장 500바퀴 추가는 어떤가?”
“시정하겠습니다!”
모두는 허겁지겁 연병장의 중심으로 달려갔고, 하일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숨을 길게 바닥에 뿌렸다.
무시무시한 하일단장에게서 벗어나, 검을 고쳐 쥐고 막 대련을 시작하려는 때에 한명의 동료가 눈치를 살살 살피며 조심히 입을 떼었다.
“그... 미안하다.”
“응?”
“말할 타이밍을 놓쳐서 그동안 말 못했는데, 저번 합동 훈련에서 그.. 윈드 기사단의 미나리경한테 고백 받았었거든? 나 사귄다.”
““......””
“나 먼저 결혼..”
일대일 대련의 구도가 한 순간에 일대 다수의 진을 만들며 검들이 말을 꺼낸 사내를 조용히 겨냥했다.
“미모 탑 3에 드는 그녀를 네가 감히..”
“오냐~ 다구리의 힘이 무엇인지 알려주마. 배신자새끼야.”
어쩐지 로이에가 들어왔을 때 저 자식만 심드렁했더랬다.
배신감이 하늘을 찌를 듯 삐죽삐죽 솟아나더니, 그 곳에 먼지 구름이 가득 메워져 오랫동안 가라앉질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까지는 상당히 폐쇄적인 기사단이기도 했었던 덕분에 결혼 적령기를 놓친 자신들에게 동료의 고백은 그들의 눈가를 촉촉이 적셔 눈물 짖게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열두살 차이가 웬 말이냐악!”
“우리가 목검 들 때, 막 태어났.. 부러운 놈. 죽어!”
부러운 이유들을 절규하듯 외치는 목소리들로 먼지 속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을 얼추 예측 되었다.
“오~ 선배님들 힘이 잔뜩 들어가셨네. 그렇지. 일대일 보다는 일대 다수가 실력을 키우기에는 더없이 좋지. 흠흠~”
먼지구름이 한창 퍼지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로이에는 그들의 속이 어떤지 알지도 못한 채로 존경심을 가득 품고 자신의 주변을 휘 둘러 봤지만, 정작 대련하던 기사들은 자신의 발아래에 엎어지고 겹겹이 쌓여있었다.
지금 시간에는 신입들과 기존의 기사들로 따로 나뉘어져 대련을 하고 있는 중이라 로이에는 자연스럽게 신입들과 함께 검을 마주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로이에가 신입의 딱지를 떼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신입들에게 큰 자극제가 될 것이라는 계산으로 하일이 로이에를 집어넣은 것이 더 컸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여러 훈련들 중 하나라지만 신입들에게 로이에라는 자극제가 과다 복용이 된 것인지, 아무도 로이에의 가드를 뚫지 못한다고 할까, 살을 주고 뼈를 깎는 다는 전법이 로이에가 사용하니 피부로 튕기고 뼈를 가루 낸다가 되어버린 형국에 하일은 빠르게 늙어갔다.
“방어력만 믿고 저리 날뛰면 나중에 크게 데일 텐데.”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동료들 간에 특출 난 실력을 보이는 동료가 한 두 명이 있는 것이 강해지기 위한 자극제로 상당히 좋지만, 과했다는 결과를 슬쩍 외면하면서 정작 로이에 본인의 실력을 키우기에는 좋지 못한 방법임을 느낀 하일은 다른 훈련법을 구상해 봐야겠다면서 가지고 다니는 작은 노트에 체크했다.
“끌끌끌 젊었을 적이 떠오르는구먼~”
나무 그늘 아래에서 돗자리를 깔고 다과를 즐기고 있는 주군의 두 할아버님과 과자를 양손가득 쥐고, 잔뜩 입에 넣어 먹고 있는 알바트론 전 단장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자 할아범이 하일에게 말을 걸었다.
“어르신. 로이에경에게 어울리는 훈련법이 무언가 없을까요?”
생각난 김에 할아범의 지혜를 빌리고자 물어보는 물음에 할아범은 조금 추억에 젖었다.
“검만 들면 신나서 방방 뛰는 늠은 그냥 내비 둬.”
딱히 답이 없다는 소리로 들었는지 하일은 기사들의 장단점을 적은 수첩을 노려봤다.
“끌끌~ 내 예전 동료들 중에서 저 아이랑 성향이 거의 비슷한 늠이 있었는디, 알아서 성장하더구먼. 본능인지, 스스로 찾아가. 밟혀도 좋다고 웃으면서 덤비는디 뭘 걱정하나.”
할아범은 분명 단점일 수도 있지만 상당한 장점이기도 하다는 것을 적당히 알려준 뒤에 마누라인 하이론 남작과 두런두런 잡담을 이었다.
북새통에 정신없는 연병장과 떨어져 있는 또 다른 연병장 중심에 바이안은 검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로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기사단에서도 독립된 가디언이 되고 나서는 독단적으로 따로 훈련을 해도 상관이 없어 그의 훈련은 자유로웠다.
“스읍~ 후우~”
숨을 깊게 들이 마시고, 천천히 느리게 뱉어내면서 들어 올리는 검의 끝에는 살기도 분노도 없다.
‘평정심.’
허공에 그어지는 그의 검선은 물이 흐르듯 부드럽다.
‘흔들림은 독이 되어 나를 찌를 것이다.’
찔러가는 검에서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살기는 이곳에 없는 누군가를 상정하며 찌른다.
“지키는 검을 든 자가 무너진다는 것은 그 주인을 해하게 하는 법이다.”
바이안은 적의 농간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내면에 있는 나약한 자신과 한창 싸우고 있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고 촉망받는 인재라고 주변에 인정을 받으면 뭐할까? 이미 자신은 여러 번이나 세이나를 지키는 것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채로 압도적인 힘에 밀렸지 않은가? 어떻게 해서든 이길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해야하는 것이 자신의 새로운 숙제였다.
‘희생양. 산 재물. 소멸. 현자의 돌.’
횡으로 긋는 그의 검이 틀어지며 반대편에서 콰앙하고 마력이 비산해 터졌다.
“젠장.”
음산한 듯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사내의 목소리가 바이안의 머리에 울리고, 헛소리라며 치부하면서 외면한 단어들이 강조되어 그를 헤집었다.
이제는 자신 외에도 세이나의 신체적인 이변은 동료들도 모두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다들 깊게 파고들지 않고는 있었지만 아는 것이 없으니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거기다가 세이나 본인이 이제는 하얗게 세기 시작한 흰머리를 숨기려 하지도 않아서 더 컸고, 숨기기에는 이미 머리카락의 반을 차지하고 있으니 숨길 수 없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주인이 아무렇지 않아 하는데 자신들이 감히 어찌 물어 볼 수 있을까.
검을 자신의 발 앞에 세운 상태로 꽂아 놓고 하늘을 노려보는 바이안의 눈동자는 분노에 한없이 흔들렸다.
“도대체 현자의 돌이 무엇이기에,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한단 말이냐.”
“그건 내가 너한테 한번 물어보자.”
언제 왔는지 론이 삐딱하게 서서 무거운 표정으로 바이안을 잡아먹을 것처럼 차갑게 물어왔다.
“론.”
“예전에 단장님한테 쥐어 터지면서 배운 거 잊어버린 거냐? 네가 무엇 때문에 또 정신머리를 버렸는지 알기나 해보자.”
“한창 세나의 옆에 있어야하는 거 아닌가?”
“잠깐 나갔다 온다고 허락 맡고 나온 거다. 말 돌리지 마. 내가 네 녀석과 알고 지낸지 몇 년이라고 생각 하는 거냐?”
뒷머리를 거칠게 벅벅 긁어대며 바이안이 있는 곳으로 걸어 나오는 론은 심기가 상당히 불편했다.
“그러니까 뭣 때문인데? 알고 있는 거 다 불어.”
“아무것도 아니다.”
말해줄 필요성이 없다는 것처럼 무뚝뚝하게 고개를 돌려 무시하는 행동에 빠직 힘줄이 돋아났다.
“개자식이.”
화를 참을 생각도 하지 않고 론은 자신의 친구에게 생전 처음으로 그대로 주먹을 쥐고 면상을 가격했다.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아, 고개가 왼쪽으로 강하게 제쳐 지면서 입가가 살짝 찢어졌는지 핏방울이 맺혔다.
“......”
“하~ 이것저것 따지지 못해서 아무 말 하지 않은 것이 아니잖아. 좋은 말로 할 때 꺼내놔. 주군을 모시는 기사가 너 하나만 있다고 생각하지마라.”
바이안은 손등으로 입가를 대충 닦아냈다.
“나도 몰라. 알 수 있는 수단이 없어서 답답해하는 중이다.”
조금은 누그러진 상태로 바이안은 솔직하게 털어놓았지만 론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추측이든, 뭐든 알고 있는 것이 있잖아.”
“......”
론과 한참을 눈으로 싸우다 길게 숨을 내 쉰 바이안은 바닥에 대충 앉았고, 론도 그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자신이 공작령으로 다녀왔었을 때의 일들을 전부 털어 놓으니 론의 표정이 가관으로 물들었다.
“이거 완전 븅신아냐? 주군에 관계된 것만 있으면 멍청해진다 생각하긴 했는데, 너 진짜 븅신이냐?”
자신을 신랄하게 욕하는 론에게 반박할 것이 없어 묵묵히 듣고 있으면서 바이안의 고개는 숙여져 올라가지 못했다.
“하... 상황이든 이유든 뭐가 어떻든 간에 왜 보고도 하지 않고 있는데? 이런 중요한 사안은 바로 보고해야지. 기사라는 새끼가 잘 하는 짓이다.”
론의 말에는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고, 바이안도 그것을 잘 알지만 마음이 그것을 따라주지 않았기에 할 말이 없어서 묵묵히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