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가 사라진지 한참이 지났어도 그가 서있었던 곳을 노려보며 살기를 내 뿜으며 버티다가 그대로 머리가 먼저 바닥에 떨어지면서 풀썩 쓰러졌다.
“아니야. 거짓말이다. 나를 혼란시킬 의도야.. 흔들리지마. 바이안 정신차려...”
엎어진 몸을 간신히 돌려 하늘을 향해 누운 채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고, 사내의 말을 부정하고 또 부정하면서 자신을 다독여댔지만 은연중에 가지고 있었던 두려움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상태였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의 약함에 그의 두 눈에 주륵 짜디짠 물줄기가 흘러 내렸다.
“일찍 가서 세나를 빨리 보려고 했는데, 이대로 가면 혼나겠네. 늦는다고 혼나려나..”
일부러 화제를 돌려서 억지로 웃어보지만 억지의미소가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처음 깨달았다.
자신의 근처에 떨어져 있는 상자에 시선을 옮겨 힘겹게 그 상자의 안을 확인하고 뚜껑을 덮었다.
“다행이다. 깨지지 않아서.”
세이나에게 건네 줄 내용물의 무사함으로 애써 위안하면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다녀오셨어요?”
“그래.”
우루루는 자신에게 건네는 겉옷을 받아들며 마중했고, 주인의 뒤를 바짝 쫒아 걸어갔다.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역시 너는 바로 눈치 채는 구나.”
“칭찬 감사합니다.”
도착하자마자 방으로 들어가는 주인을 따라 들어가 겉옷을 정리하던 우루루는 그의 말에 경청했다.
“내 손으로 하는 것도 좋지만, 후손의 손으로 직접 이 세상을 끝내게 하는 것도 좋겠더구나.”
“그럴 것 같나요?”
“안 그럴 것은 또 무에 있겠느냐?”
우루루는 살풋 고개를 갸웃 하다 이내 끄덕인다.
“나와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러져가는 이를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과 지옥인지 겪다 보면 알아서 추락하게 되어있지. 나와 많이 닮은 아이니까 말이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우루루. 이리 오거라.”
침대가에 앉아 우루루를 부르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침대의 머리맡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그는 우루루의 다리에 머리를 베고 누워 눈을 감았다.
“안녕히 주무세요. 주인님. 꿈이 없는 어둠이 함께하시길.”
조심히 이불을 끌어다 그의 목에 덮어주며 우루루도 앉은 상태 그대로 눈을 감고 함께 잠을 청했다.
피를 토하고 기절한지 한나절이 지나있었는지, 차가운 공기가 코를 건드리며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와 함께 힘겹게 눈을 뜬 바이안은 내상이 심한 것인지, 혼란함이 정리가 되지 않는 것인지 한참을 누운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리도 실력의 차이가 날 줄이야.’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자신의 무능력함이 점점 비참하게 짓누른다.
그리고 분명 자신을 들쑤셔 혼란과 의심을 가중시키려는 적의 농간이라 생각을 하면서도 제대로 부정한번 하지 못한 채로 잔뜩 흔들린 자신의 한심함에 이가 갈려 턱의 언저리에 굵은 힘줄이 두껍게 드러났다.
“말도 안 돼는 소리다. 재물이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기사가 된 나는 뭐란 말이다. 정작 세나를... 크윽”
기사가 되기 위해 인생을 바치고, 세이나를 지키기 위해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자신을 갈고 닦았다.
하지만 압도적인 패배감이 앞으로의 전쟁에서 그녀를 지킬 수 없을까 너무나 두렵다.
그러면서도 만약 지킨다 하더라도 정말 그가 한 말대로 세이나가 죽는다면 어찌 손 써볼 수도 없이 또 다시 잃게 되는 것이었다. 그때처럼.
한 번도 아니도 두 번이나, 그것도 이번에는 눈앞에서 스러지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 무섭고 공포스러워, 아무 힘도 들지 않았다.
“더 늦었다가는 걱정하겠지..”
비틀거리면서 자리에 일어나 몸을 살펴보니 겉으로 드러나는 외상은 거의 없고, 내상만 있어 다행이었다.
대충 묻은 피를 닦고 짐을 챙겨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하면서 걸어가 근처의 마을에서 옷을 대충 사 갈아 입고 현궁의 근처에 다다랐을 때, 자신의 태도와 자세를 고쳐 잡았다.
세이나는 누구보다도 눈치가 좋으니 자신의 미세한 변화도 금방 알아차릴 것이라서 진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해야했기에 숨을 고르는 데 꽤나 시간이 걸렸다.
절대로 그녀에게 짐을 그 이상 지우게 해서는 안 된다며 다짐하고 꼭꼭 숨겨 문을 닫고 자물쇠를 걸어 잠갔다.
세이나는 방안에서 커다란 거울이 달린 화장대에 대충 엎어져 토끼기사님을 괴롭히고 있었다.
“도착했어도 진즉에 도착했을 땐데, 오빠가 늦네... 말이 길어지나, 아니면 다른 데로 샌 건가? 키킥 오빠가 그런다는 건 상상도 안 되네 진짜로 그런 거면 웃기겠다.”
땡땡이 치고 여기저기 활보하고 다니는 바이안의 모습을 상상하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절로 웃음이 세어 나왔다.
맹수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마침 똑똑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리고 바이안이 빼꼼 고개를 안으로 들이밀었다.
“반 오빠.”
“다녀왔어.”
요즘 세이나가 방안에 있을 때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게 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바이안과 세이나 단 둘이만 있을 수 있었고, 세이나도 자연스럽게 둘만이 있을 때의 태도로 돌아가 반갑게 바이안을 반겼다.
“뭐했는데 이렇게 늦어?”
“으음.. 생각보다 말이 조금 길어졌어. 걱정했어?”
“당연한 거 아냐? 부우~”
잔뜩 볼을 부풀리니 통통 말랑한 세이나의 볼을 꼬집고 슬쩍 늘려보는 바이안은 은근 짓궂었다.
‘단순한 산 재물일 뿐이란다.’
그러다 세이나가 질끈 묶은 꽁지머리에 시선이 닿자마자 숨겨둔 소리가 올라와 서둘러 다시 내리 눌렀다.
바이안의 꼬집힘에 아프지는 않았지만 두 팔을 파닥파닥 날개짓을 해보이자 다행히 바로 자유로워졌다.
잡혔던 볼을 살살 문지르며 그를 흘겨보니 바이안은 멋쩍게 웃다가 들고 온 상자를 건네주었다.
“응? 이거 뭐야?”
“공작이 세일리아 이모님께서 생전에 쓰셨던 물건이라고 전해 달라 시더라. 그래서 가지고 왔어.”
“엄마 거?”
“응.”
상자를 조심히 만지작 만져보면서 소중히 받아 들고 원래의 목적에 대한 답을 마저 전해주었다.
“편지의 답은 조만간 시간을 내서 찾아뵙겠다고 전해달래.”
상자를 화장대에 얌전히 내려놓고 활짝 웃었다.
“고마워 오빠. 다녀와서 많이 피곤하겠다. 얼른 돌아가서 쉬어. 그리고 쉰 김에 며칠 쉬고. 한동안 쉬는 날도 없이 바빴잖아.”
“그럴게.”
세이나의 배려를 받아 들여 끄덕이는 고개에 세이나는 베죽 아래 입술을 한 댓발 내밀었다.
“또 그렇게 한다고 하면서 창문가의 나무위에 숨어서 지켜본다든가, 집무실의 방안 구석에 은신해서 고개만 빼꼼 내밀어 있다든가 하지 말고 진짜로 쉬어. 안 쉬면 호~온나.”
“아하하..”
조그만 손을 말아 쥐고 주먹을 들어 보이는 나름 엄한 몸짓에 절로 어색하게 눈동자가 왼쪽으로 돌아갔다.
스토킹은 하지 않고, 제대로 쉬겠다는 확답을 몇 번이나 해서야 바이안은 제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세이나는 상자를 다시 들어 검지로 모서리의 한 귀퉁이를 살살 쓸었다.
“바보 멍청이...”
어두운 색감의 나무 상자라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아주 작게 마른 핏자국이 남아 있었고, 그 상자를 노려보는 세이나의 표정은 심각했다.
“숨기려면 제대로 숨기던가...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바이안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바로 눈치 챌 수 있었던 세이나는 얼마 전에 컨텍아이를 했던 모든 일의 원흉이 떠올랐다.
“후~ 내가 할 말은 아니네. 나도 슬슬 숨기는 것도 한계고.”
끈으로 질끈 묶은 머리카락 속에 숨긴 흰머리가 이제는 거의 완벽하게 숨기기에는 너무 늘어나서 자세히 보면 주변에 희끗하게 몇 가닥이 세어 보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있으면 돼.”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노려보는 세이나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깊게 가라앉아있었다.
“너의 뜻대로는 안 될 것이다.”
순간적이었지만 마치 다른 사람이 세이나의 몸을 타고 들어왔다 나간 듯 차갑고도 냉랭한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