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 추워. 반 가을 맞지? 겨울 아니지?”
황궁으로 향하는 걸음을 늦추지 않고, 제 양팔을 감싸 묻는 세이나에게 겉옷을 벗어 가만히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며 바이안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추워?”
“응. 따뜻한 남쪽이 그리워질 지경이야.”
“하긴, 여기가 겨울이 빨리 찾아오는 느낌이긴 하지.”
그 옆에서 혼잣말처럼 긍정하는 론의 말에 그도 남쪽의 따뜻한 로도스가 그리운 표정이다.
“오~ 입구다. 빨리 안으로 들어갈래.”
쪼로록 발걸음을 빨리 하는 세이나의 뒤로 일행들은 바람을 막아주는 황궁의 건물 안으로 우루루 따라 들어갔고, 곧바로 재상이 머무는 집무실로 방향을 잡았다.
바이안은 옆에서 함께 걸어가면서 머리를 하나로 묶어 움직일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세이나의 머리에 달린 꼬랑지를 만지고 싶다가도 혼난 전적이 있어 매우 아쉬워 입맛만 다셨다.
그것을 그세 눈치 챈 세이나는 가던 중간에 가늘게 뜬 눈으로 의심스러워 하니, 괜히 뜨끔해 슬쩍 눈을 피하면서 그때 왜 세치를 뽑았을까 괜시리 후회해 본다.
집무실 앞에 당도한 세이나는 문을 시원하게 벌컥 열었다가 스르륵 조용히 문을 닫았다.
“왜 안 들어가?”
“주군?”
다임경의 의아해 하는 부름에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입 꼬리가 매우 어중간하게 걸쳐졌다.
“으음... 아무래도 내가 만나는 시간을 착각했나봐.”
세이나의 대답과 동시에 우당탕 큰 소리가 들리면서 허겁지겁 문이 열림과 함께 세이나와 다르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케리프와 에바가 그녀를 맞아주었다.
일행은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어 했지만 세이나는 케리프와 늘 만날 때 딱히 노크를 한 적이 없던 과거의 제 버릇을 탓했다.
‘아.. 노크 할걸.’
세이나가 당도하기 10분 전에 케리프는 세이나와 만나는 약속으로 온갖 서류와 자료로 엉망인 방을 정리하고 있었을 타이밍에 소식도 없이 에바가 불쑥 찾아 왔다.
“케리프님~”
“황녀님.”
이제는 자신의 반려가 될 에바황녀를 반가이 맞이하는 케리프와 베시시 사랑스럽게 눈을 접어 웃는 에바는 들고 온 바구니를 꼬옥 끌어안았다.
일에 한번 집중하기 시작하면 밥을 먹는 것을 잊을 정도인 케리프의 일중독에 에바는 한 번씩 이렇게 불쑥 나타나 그의 건강을 챙겼다.
케리프는 늘 고마워하며 에바의 앞에서 맛있게 먹어주는 것으로 그녀의 마음에 보답을 해왔었다.
“오늘은 일 하고 계시지 않네요.”
“네. 약속이 따로 있어서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서류더미를 분류하면서 치우고 있던 케리프와 방안을 둘러보던 에바는 재상도 보이지 않는 모습에 다른 일로 미팅을 잡았다는 것을 얼추 예상했다.
문득 자신이 방해한 것 같아 슬쩍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다.
“몇 시에 약속인데요?”
자신이 방해한 것이 맞지만 그래도 조금 서운한지 발을 바닥에 슬슬 문지르는 에바의 볼이 조금 뚱하다.
“이제 곧 오시겠네요.”
완전히 타이밍이 좋지 못함을 상기한 에바는 주방의 시녀들과 함께 간단한 식사를 준비해서 챙겨온 바구니를 더욱 품에 끌어안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돌아가기에는 케리프가 밥을 걸렀음이 확실해 얼른 먹게 해주고 싶다가도,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금 있다가 다시 찾아오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자리를 비켜줘야 하는 두 가지의 마음에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중요한 약속 이예요?”
“그렇습니다. 현궁과 황궁이 함께 하는 일 이라 서요.”
“언니요?”
세이나가 온다는 말이라서 에바는 반가우면서도 짐짓 다행이라 느껴졌다.
언니인 세이나가 오기 전까지는 같이 있어도 문제가 없지 않을까.
언니가 도착 했을 때 자리를 빼줘도 괜찮을 테니, 오기 전에 한 입이라도 케리프의 배를 채워줄 수 있을 거라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하지만 손이 없는 케리프의 상황에 바구니를 책상에 놓고 잘 익은 부드러운 고기를 야채들이 포옹을 하고 소스에 목욕을 시킨 뒤에 빵 가운을 걸친 샌드위치 조각을 들고 그의 움직임에 방해를 하지 않는 선에서 입에 넣어주니, 케리프의 입이 절로 열리며 앙 한입 물었다.
“늘 이렇게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황녀님을 신경 써 드려야하는데, 그러지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예요. 난 이것도 좋은데..”
자상한 케리프에게 말끝을 흐리며 쑥스러워하던 에바는 또 이리저리 움직이는 케리프의 뒤를 쫒아 다니면서 먹여주는 일을 반복하다가 오물거리는 케리프의 입에 집중을 하던 나머지 발밑을 보지 못해 의자의 모서리에 순간적으로 걸려 앞으로 고꾸라졌다.
“에?”
“에바!”
케리프는 들고 있던 책을 던지듯 버리자마자 훌떡 고꾸라지고 있는 에바를 와락 껴안은 것은 좋았지만 자세가 좋지 못해 그대로 바닥으로 넘어져버렸다.
케리프를 바닥의 쿠션으로 놓고 넘어진 에바는 그의 품에 얼굴을 찧었다.
당황해 고개를 뽁 들던 에바와 그녀의 안위를 살피는 케리프와 시선이 맞물리며 서로 움직임을 멈췄다.
‘이름 불러줬어.’
에바는 케리프가 제 이름을 불러주는 감미로운 목소리에 감격을 하면서도 그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그의 품안에서 도곤도곤 뛰는 심장 소리가 그의 귀에 들릴까 걱정해가며 그에게서 쉽게 떨어질 수가 없었다.
딱 그 타이밍에 문이 활짝 열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문가로 돌아갔고, 어중간하게 웃는 세이나가 조심히 문을 닫는 것을 확인해서야 허겁지겁 떨어져 벌떡 자리에 일어나서 닫혀진 문으로 달려가 급하게 열었다.
“언니.”
“세이아나님. 오셨습니까.”
“으음... 조금 있다가 다시 올까요?”
볼을 긁적이면서 약속 시간을 미룰까 물었다.
잘못한 것도 없던 둘의 얼굴이 동시에 화앗 붉은 꽃이 피어올라 쩔쩔맸다.
상황을 보지 못한 일행들의 눈이 죽 찢어지더니 에바와 케리프의 옷이 구겨지고 먼지를 뒤집어 쓴 상태를 확인하면서 짐짓 엄한 상상을 절로 했다.
“아 아니야. 아무 일도 없었어. 응. 없었어.”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는데, 뜨끔할 것이 무에 있다고 당황해 변명하듯 손사래를 치면서 열심히 부정하는 에바의 행동 덕분에 케리프에게 향하는 남정네들의 시선이 더 끈적해졌다.
“언니가 온다기에 인사만 하고 갈려고 했어. 응. 나 이제 갈거야. 그.. 케리프님. 저 이만 가볼게요. 남은 거 꼭 챙겨 드셔야 해요.”
에바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후다닥 말을 덧붙이고, 계란이 익을 정도로 뜨거운 제 볼을 차가운 자신의 양 손바닥으로 식히면서 호다닥 복도를 질주했다.
“아따~ 뜨겁구마잉.”
왼 손을 이마에 가져다 대고, 얼굴에 그늘을 만들어서 사라지고 있는 에바의 등을 확인하면서 사투리를 구사하던 세이나는 그 상태 그대로 케리프에게 고개를 돌려 드러낸 표정이 매우 짓궂게 히죽였다.
“흐 흐흠. 들어오십시오.”
분위기를 돌리기 위한 케리프의 헛기침이 터지고서야 모르는 척 안으로 들어와 소파에 엉덩이를 깔았다.
“이젠 궁 생활이 많이 익숙해 진 것 같네요. 므흐흐흐”
케리프의 적응을 염려했기에 꺼냈는데, 자신도 모르게 조금 전의 일이 상기되면서 다시금 음흉한 웃음소리가 세어 나왔다.
거기다 가려질 일도 없는 것을 알면서도 손으로 한껏 위로 올라간 입을 가려본다.
“예. 염려해주신 덕분에 이제 많이 적응 했습니다.”
무엇이든 얼굴에 그대로 보이는 에바와 달리 케리프는 금세 평정을 찾고는 초연하게 대답을 하니 놀리는 맛이 시들시들 사라져버렸다.
아쉬워하면서도 오늘은 일로 만나는 것이라 세이나도 바로 자세를 바꿨다.
“재상은 자리를 비웠나 보네요.”
“황제폐하께 알현하러 가셨습니다.”
“그렇군요.”
케리프는 소파 앞 테이블에 놓인 서류를 세이나에게 밀어주자, 세이나는 서류를 한 장 한 장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뭐, 이럴 거라 예상은 했지만, 다들 복귀는 끝났나보네요.”
약속 시간 전에 현궁에서 파견을 나간 기사들과 몇의 관료들이 모두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온 참이라 황궁의 복귀도 다 됐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확인 차 물었다.
“역시 세이아나님께서 예상 하신대로 아무 것도 발견을 하지 못했습니다.”
“예전처럼 세이나라고 불러요. 굳이 이름그대로 부르지 말고요.”
그 전부터 정정해 주고 싶었던 부분을 지적한 후에 세이나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래도 아예 수확이 없지는 않네요.”
“그렇습니까?”
“뭐, 상대가 아주 우습게보고 있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던 바라 들켜도 그만, 안 들켜도 그만인가보죠.”
케리프는 세이나가 서류철들에서 따로 위로 올려둔 서류를 들고 다시 한 번 검토해봤다.
“정확한 지점을 유추하기에는 부족해도 북쪽에 둥지를 틀고 있던지, 최근에 그 곳에서 놀았나 봐요.”
‘진짜 우스운가 보네. 내가 따로 알아보려고 했는데, 버젓이 발자국을 남기다니.’
답을 찾지 못하면 미간이 좁아지는 케리프의 버릇이 나오면서 서류를 읽고 있는 그를 도와주려 서류를 내려놓게 한 뒤에 손가락으로 몇 가지를 가리켰다.
“북구가 사람들이 살기 척박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어도 마을이나 도시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잖아요. 특히나 작은 부락 같은 마을들은 거대한 마수들이나 산적들에게 습격을 받아 사라지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요즘에는 대륙 전체적으로 마을이나 도시들 간의 분쟁은 일어나지 않고 있는데도 상대적으로 마을의 수가 너무 적어요.”
케리프는 천공의 땅으로 올라오기 전까지는 로도스 외에는 대륙 분포도를 알 수 없었던 지라 아직 대륙전체를 외우지는 못했다.
그런 그가 캐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세이나의 친절한 설명에 그는 세이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그렇군요.”
“폐하와 제가 같이 내렸던 명령 중에 쓸데없는 것이라도 세세하게 보고하라고 했는데,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 꼼꼼하게 정리해줬네요. 여기 이 부분 평지라는 단어가 거슬리지 않아요?”
“아, 그러고 보니 북쪽에 평지가 상당히 많이 적혀있긴 하군요.”
“북쪽의 지리적인 특성상 산맥이 많아, 터들이 크든 작든 평지가 이렇게나 많이 있을 수는 없어요.”
“그 것으로 어느 정도 유추는 가능하겠습니다. 확실히, 평지에 풀 한포기도 없는 것도 그렇지만 자잘한 모래나 돌 같은 것도 없는 것이 어색하군요. 한명의 능력이 작용을 했든지, 아니면 일부러 흔적을 없애기 위해 그들이 땅을 뒤집어엎었다 그리 추론이 가능하군요.”
“만일 땅을 뒤집어엎은 능력이, 한명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상당히 껄끄럽죠.”
두 지식인들이 쉬지 않고 주고받는 대화에 끼지 못하는 이들은 귀만 기울여 듣는 것에 바빴다.
“평지의 면적들은 제각각이지만 작은 평지만 하여도, 그 면적에는 충분히 작은 부락이 있었을 만한 크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귀환하라 하지 말고 더 세세히 조사하라 명령을 내렸어야 하지 않았습니까?”
케리프가 날카롭게 한 질문에 세이나는 오히려 고개를 저었다.
“아뇨. 추측이라 조금 그렇지만, 이 이상의 흔적은 없을 테니 더는 찾지 못할 거예요. 게다가, 저희 쪽 사람들을 잃을 수도 있거니와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도 없고 적의 숫자도, 각각이 가지고 있는 능력도 모르니 저희가 불리해요. 기사들의 능력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실력의 차이는 극명히 날 거라 예상하고 있어요.”
턱을 톡톡 치면서 경청하던 케리프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만일, 그 곳에서 마주친다면 기사들을 잃고, 학자들을 잃을 테고, 그 곳으로 군대를 보내도 정작 아지트를 모르면 시간적으로도 인력적으로도 효율이 떨어지겠습니다. 오히려 병력만을 잃을 수도 있는 전재를 생각해봐야겠군요.”
몇 가지의 가정을 주고받으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저희들 쪽의 정리도 됐으니까 내일 폐하와 서로 정리된 부분을 다시 한 번 모아서 정리하면 되겠네요.”
오늘 같은 보고서를 케리프는 세이나와, 재상은 황제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상의를 했다.
처음부터 다 같이 모여 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현궁과 황궁은 엄연히 다른 별개의 조직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이나와 친하고 잘 아는 케리프와 함께 보고서의 내용을 상의하고 정리했고, 재상은 황제와 그 의무를 이행했다.
순서가 그렇기에 이 후에 모두 모여 서로 알게 된 내용과 정보를 교환하고 다시 한 번 논의를 거칠 것이다.
물론 현궁의 주인인 세이나가 황궁의 재상의 집무실에 들리는 것이 아니라 케리프가 현궁으로 찾아오는 것이 타당한 예의였지만, 세이나가 겸사겸사 찾아오겠다고 했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서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