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동안 이어진 술자리에 세이나는 먼저 자리에 일어나서 나머지는 다들 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비켜주고, 한 건 올린 만족감을 품고 방으로 돌아왔다.
“히~”
“물 좀 마셔.”
방으로 돌아올 때까지 멀쩡해 보였던 세이나가 역시 술이 좀 되었는지 침대 가에 앉아 바이안을 올려다보면서 헤프게 웃자 바이안은 물을 챙겨주었다.
“웅.”
마치 술을 마시듯 쭈욱 들이키며 시원하게 숨을 뱉고 히죽히죽 입 꼬리를 올리는 세이나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자 바이안의 품에 머리를 대고 부비적 문댔다.
“다들 사람들이 좋아. 내가 다 든든한 거 있지.”
“재밌었어?”
“응. 조금은 모두랑 친해진 것 같아.”
세이나의 옆에 나란히 앉으니, 가만히 무거운 머리를 기대 바이안의 온기를 만끽하면서 한껏 어리광을 부렸다.
“안심이 된 달까..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그 부분?”
“앞으로 있을 싸움 말이야. 아무도 다치지 않고 죽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건 어렵다는 것은 잘 알아. 그래도 나를 위해 검을 들고 싸워주겠지. 모두가 주는 신뢰가 고맙고 한편으로 걱정이 덜어지더라고.”
가만히 미소를 지어주며 살살 쓰다듬는 바이안의 손길에 머리카락이 사락거리며 손가락사이에서 스쳐 떨어진다.
“그래도 내가 제일 세나를 많이 생각해.”
“아이고 그럼요. 말하지 않아도 잘 아는 걸? 킥킥 우리 반 오빠 그거에 또 질투 하는 거야?”
고개를 슬쩍 들어 장난스럽게 눈을 접으니 바이안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질투는 아니야. 그냥 그렇다고.”
“우웅~ 나한테 오빠가 최고고 제일 잘났고, 짱 쌔.”
양팔로 그의 허리를 감으며 고개를 더욱 파고 들이밀자, 포옥하고 안아주는 바이안의 손길과 따뜻한 품이 상냥하고 부드러워 잠이 솔솔 온다.
바이안의 규칙적인 토닥임을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다.
규칙적으로 색색 들리는 숨소리가 간질간질 바이안을 자극했지만, 조심히 세이나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후에 그녀의 잠든 모습을 가만히 감상했다.
“오늘은 술 때문이라고 해도, 우리 요정님이 잠이 많이 늘었네.”
손가락으로 세이나의 미간을 톡 건드리니 살짝 찌푸렸다 바로 펴지면서 우웅하며 입맛을 다셔대자, 절로 호선이 그려진다.
“일단 나도 남자라고.”
물론 자신과 세이나의 주인과 기사의 입장적인 관계로, 이 이상 좁혀지지는 못하겠지만, 그렇기 때문인지 거리낌 없는 세이나에 왠지 자신만 안달이 나는 것 같아져 오늘 같은 날에는 살짝 얄밉기도 했다.
회식이 있은 다음 일주일 후에 단장의 자리에 하일이 올라갔다.
처음에 하일은 상당히 당황했지만 모두의 동의하에 어렵게 받아들었고, 그는 호위와 단장의 업무에 한동안 바빴다.
빠르게 겨울이 다가와 숨을 내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퍼진다.
히데아는 남들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는 이른 새벽부터 주변을 정리하기도 하고, 시종들과 시녀들의 일을 꼼꼼히 체크한 뒤에 세이나를 깨워 식사를 챙겨가면서도 혼자서 하기에는 빠듯한 업무를 빠르게 착착 진행하는 것이 마치 분신술을 써서 다량의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대단했다.
특히나 히데아에게 제일 익숙한 주방에 들어가 아직 적응하지 못한 신입의 일을 도와주다가 어린 시녀들의 수다에 잡혀버렸다.
“아~ 한번이라도 좋으니 기사님들과 말이라도 섞어봤으면~”
“리라이는 누가 제일 멋있는 것 같아?”
“당연히 이번에 단장님이 되신 마힐튼님이지.”
서로가 누가 더 멋있더라 누가 최고더라 꺅꺅 떠드는 모습이 순수한 소녀들 같아 부드럽게 지켜봐주는데, 갑자기 눈동자들이 데구르르 굴러 히데아에게 몰렸다.
“시녀장님은 누구 마음에 두신 분, 안계세요?”
“응?”
“맞아요. 시녀장님은 매일 기사님들과 함께 계시잖아요. 얼마나 부러운지 모르시죠?”
부럽다며 그녀를 재촉하지만 히데아에겐 매우 어색한 분위기라 표정이 애매하게 뒤틀렸다.
“나는 딱히 없네. 애초에 평민이 바라서 어디에 쓴다고.”
“에이~ 좋아하는 마음은 상관없잖아요. 정말 없으세요?”
아직은 이성에 관심이 많을 때라서인지 그녀들의 시선이 한층 더 밝게 히데아를 탐했다.
“으음... 역시 없어.”
조금 고민을 해보았지만 역시 자신에게 어울리는 감정도 아니라 바로 고개를 저었다.
모두 아쉬워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기사님들의 인기순위를 매겨갈 정도로 이성에 열을 내는 시녀가 파칭 눈을 번뜩이며 히데아를 공격했다.
“레인트님.”
“응?”
“베이다님.”
“응?”
갑자기 호위기사들의 성이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히데아를 살피는 모습이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을 것이라 매섭다.
“카시어스님.”
“..응?”
다시금 파칭~ 번뜩 뜨며 한건 올린 사람마냥 어린 시녀의 기가 올랐다.
“꺄~ 세상에. 하긴 카시어스님도 엄청 멋있죠.”
“에에?”
그녀의 말을 시작으로 호들갑스러워진 분위기에 당황한 히데아는 쩔쩔 맸지만 이미 모두는 흥분해서인지, 그녀의 당황해서 나오는 새끼 새처럼 양팔을 휘젓는 파닥파닥을 보지 못했다.
자신들의 윗사람인 히데아는 일에 있어 꼼꼼하고 엄격하긴 했어도 모두 그녀가 성실하고 한 없이 착한 것을 알고 있어서인지, 제 마음을 알지 못하는 감정을 깨우쳐 주고 싶은 오지랖으로 떠들떠들 신이나 카시어스백작에 대한 칭찬과 찬양을 서슴지 않았다.
자신을 도마 위에 놓고 성둥성둥 썰고, 지지고 볶는 시녀들에 당황스러운 감정을 가리기 위함인지 감자의 껍질을 깎아내리는 속도가 가속도가 붙어 빨라지면서 애써 변명을 시도했다.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해 본적이 없어. 그 그것도 그렇잖아. 신분도 신분이고..”
하지만 본인도 몰랐던 감정을 들키기라도 한 건지, 시녀들은 그렇지 않다며 그녀보다 더 적극적이다.
새빨간 꽃잎처럼 붉어져서 쩔쩔 매고 있을 때, 문가를 똑똑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한명의 목소리가 그런 그녀의 귀에 상냥하게 내려앉았다.
“히데아.”
“꺗! 네.”
화들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감자를 정면의 시녀에게 스트라이크를 꽂으면서 자리에 벌떡 일어나 대답을 하는 히데아에 그 목소리의 주인공인 론은 갸웃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였다.
늘 한결같이, 나긋나긋하던 히데아의 당황스러움에 의아해하다 금세 평소로 돌아가 멀쩡해져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론은 제 볼일을 꺼냈다.
“나 도시락.”
“오늘도 연무장에서 따로 점심 드시려고요?”
“뭐. 그렇지.”
론이 비번일 때나 교대 시간이 낮일 경우에 늘 도시락을 챙겨왔는지, 매우 익숙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미 그가 찾아 올 줄 알았던 히데아는 부끄러워하는 감정을 숨기기 위해 새삼스럽게 물어보며 아침에 따로 준비해 놓은 도시락을 챙겨 그에게 건네주었다.
“바쁠 텐데 매번 준비하게 해서 미안하네.”
“아니에요. 요리하는 거 좋아해서 오히려 즐겁습니다.”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그녀가 건네주는 도시락을 받아 들던 론은 히데아의 뒤에서 소곤소곤 자기들끼리 떠들며 묘하게 즐거워하는 시녀들과 면상에 감자 퍽을 당한 시녀가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 엄지를 척 세우며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오늘따라 미세하게 시선을 맞추지 않는 히데아에 흐음 소리를 내면서 무언가를 생각하듯 가만히 있더니, 대뜸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
가까이 들이밀어진 론의 눈동자와 딱 마주치게 된 히데아의 눈이 또르륵 왼쪽으로 돌아갔다.
피식 웃음소리가 새듯 흘린 론이 손을 내리자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이 사라락 히데아의 눈을 다시 덮었다.
“그 앞머리 정리 좀 해. 예쁜 눈 가리지 말고.”
제 할 말을 마친 론은 등을 돌려 연무장으로 걸어가면서 한 손을 흔들어보였다.
론이 사라지자마자 뒤에 있던 시녀들이 참고 있던 소리를 꺅 지르더니, 타오를 정도로 붉어진 히데아 대신 좋아했다.
이성에 대해 면역이 없는 히데아로서는 주변의 분위기도 그렇고,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가림막을 걷어 눈을 마주치고 흘리듯 지나간 론 덕분에 영혼을 잠시 외출시켰다.
나무 그늘에 도시락을 놓고 홀로 기초체력을 다지고 있는 론의 근처에 다가온 동료 기사들이 그의 도시락이 있는 그늘에 대충 앉아 휴식을 취했다.
“이번에 대륙으로 내려간 놈들이 8사단 놈들이지?”
“고생 꽤나 한다더라.”
“하긴, 우리들만 내려간 것이 아니고 황궁의 녀석들이랑 같이 내려갔으니 서로 불이 붙겠지.”
대륙의 조사단으로 꾸려진 원정대의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는 도중에도 땀을 흘리며 열중하는 론이 새삼스럽다.
“저녀석이 저리 진지하게 훈련한다는 게 참 신기하네.”
“크크 뭘 해도 저 주둥이가 쉬지를 않던 놈이니 그럴 만 하다.”
아주 시비를 걸 작정인지 그들이 떠드는 소리가 꽤 컸다.
론은 피식 한쪽 입 꼬리를 거나하게 말아 올리고 검을 그들이 있는 쪽으로 던져 발 밑에 꽂아 넣었다.
“시비 털 거면 덤비든가.”
비아냥거리며 도발하자, 제 발 밑에 꽂힌 검을 뽑아 론에게 던져주며 사양했다.
“아서라. 우리 이제 쉬고 있다. 게다가 우리의 신 단장님이 쓸데없이 난리치지 말라시잖냐.”
“어쭈? 질까봐 피하는 건 아니고?”
다시금 도발하는 론에 자리에 일어서려다 대충 널브러졌다.
“끄응~ 그건 부정을 못하겠네.”
“야 야 좀 봐줘라. 오늘 오후에 어르신이 봐주시기로 한 날이라, 체력을 보충해 놓아야 한다고.”
바이안과 론이 대륙에 머물다가 올라온 뒤로 론과의 실력차이가 상당히 크게 벌어진 상태라 그를 인정했고, 호승심도 일었다.
하지만 그런 반면에 론과 할아범 중 누구와 대련하는 것이 더 좋은지 저울질하기도 전에, 그들은 할아범과의 대련을 빙자한 구타에 익숙해지고 중독이 되어서 그 쪽을 더 중히 여겨 거절했다.
그러는 중에 손에 치이는 도시락에 눈동자가 또로록 아래로 내려갔다.
“요즘 식당에서 얼굴 보기 힘들다 했더니, 도시락이냐?”
“그 유명한 시녀장표 도시락이지? 그거.”
예쁘게 싸여있는 보자기를 스스럼없이 풀러 도시락의 뚜껑을 열어본 그들의 눈이 호기심에 번들거렸다.
히데아 본인은 모르겠지만 그녀는 기사단들 사이에서 상당히 유명인사였다.
주군의 바로 옆에서 신임을 한 몸에 받는 면에서도 그렇지만 그녀가 해 온 업무 처리 능력에 놀라기도 했고, 제일 유명한 것은 그녀의 숨은 요리 실력이었다.
아마 그녀가 시녀장이 되지 않았으면 주방에 한자리 크게 꿰차고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녀가 만든 음식을 먹었던 호위기사단인 10사단들의 입으로 퍼진 소문에 히데아의 요리는 매우 희귀하고 귀한 아이템 취급을 받고 있었다.
히데아가 시녀장이 된 덕분에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일이 거의 없다 보니, 눈앞에 정성가득 담겨있는 도시락에 침이 절로 고인다.
얇게 져민 고기에 짭쪼롬 하면서 달달한 소스가 덧입혀져 한입크기로 정갈하게 썰려, 녹색과 붉은 야채들이 한데 어우러져 볶아진 윤기가 자르르 흐르며 스며드는 향긋한 향에 코가 벌름거렸다.
그 옆에 찐 감자를 으깨서 작게 다져진 당근과의 하모니를 이루며 깔끔하게 만들어진 샐러드, 버섯으로 보이는 것들과 호박 등의 여러 종류의 튀김 위에 히데아만의 특제 소스로 이불을 덮었고, 느끼함을 잡아 주기 위함인지 살짝 매콤해 보이는 붉은 팩을 한 야채무침에 하얗게 핀 쌀이라는 곡물이 반짝였다.
위 칸을 들어 올리니 그 밑의 음식이 들어났는데, 가볍게 먹을 수 있게 샌드위치들이 가지런히 자신들의 이름을 소개하듯 애그 샌드위치, 다진 고기와 야채들을 고소한 하얀 소스에 버무려 만든 고기 샌드위치등이 손을 열심히 흔들고 있었다.
거기에 마무리로 상큼한 과일들이 춤을 추고 있으니 없던 식욕이 절로 솟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