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궁과 현궁에서 사람들을 추려 조사단을 만들고, 대륙의 사북에 고루 퍼트려 이상 징후나, 적의 본거지 등을 찾으며 올라오는 보고서들을 받아 읽고 있던 중 현궁에 작게 진동이 일어났다.
“후.... 또 저러네.”
거친 마력을 느끼며 세이나는 책상에 읽고 있던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쉬는 날마다 저렇게 무리해서 후유증이 또 심해지면 어쩌려고 저러는 거야.”
반복되는 진동에 안타까워하는 세이나의 마음을 모두가 동일하게 느끼는 것인지, 그녀의 옆에 있는 이들도 마음이 그리 좋진 않았다.
“그때의 일을 마음에 두고 있어 더한 듯 하네요.”
“반의 잘못도 아니고,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카이덴의 사건이 있은 후로 바이안은 쉬는 날마다 제 몸을 혹사 시키며 훈련을 하는 그의 행동에 아예 길게 휴가를 주고 푹 쉬게도 해주었지만, 그것을 빌미로 휴가 내도록 현궁에 있는 이들 모두가 알 정도로 자신을 채찍질 해댔다.
세이나는 그의 마음을 알면서도 이럴 때 어떻게 달래주어야 하는지 몰라 속이 상했다.
이 날은 론 역시 그리 좋지는 않았다.
어렸을 적 기사단에 처음으로 들어갔을 때 무리를 하던 바이안이 겹쳐지며, 이럴 때 단장님이 멀쩡하게 계셨으면 그때처럼 길을 제시해 줄 터였지만 지금은 요원했고, 그도 썩 좋은 방도가 떠오르지 않고 있어서 저러할 때는 자신도 말릴 수 없어 착잡했다.
모두의 걱정을 알고는 있는 것인지, 연무장의 중심에 훈련을 하는 다른 기사들은 차마 훈련을 하지도 못하고 구석에 찌그러져 연병장을 혼자 독점하고 있는 바이안에게 밀려나 있었다.
바이안이 휘두르는 검격에 주변의 공기들이 비명을 질러댔지만 무시하듯 더 거칠고 강하게 휘둘렀다.
‘아직 아니야. 부족해.’
세이나와 동료들이 예상했던 대로 바이안은 카이덴의 사건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 곳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세이나의 짐이 된 것에 자신에 대한 화가 가시지를 않아 답답했다.
그녀를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 그리 생각했던 것에 대한, 자신의 어리석은 오만함에 그토록 그녀의 검과 방패가 되겠다던 제 다짐이 속절없이 무너진 것이 이리도 속을 뒤집는다.
하지만 아무리 검을 휘두르고 마력을 갈고 닦아도 부족하고 또 부족해 구멍 난 둑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그녀를 노렸던 적들이 어떠한지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정작 자신에게 약점이 있으면 어찌하란 말인지, 저번처럼 또 그렇게 노려지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도 없기에 어떻게 하더라도 극복해야했고, 더 강해져야 했다.
“두 번은 없어야 한다.”
온 몸에 마력을 돌리며 주변을 장악해 가자, 버티다가는 탈이 나겠다 싶은 기사들은 어쩔 수 없이 연병장에서 나가야했고, 그런 그를 한명의 노인이 가만히 바라보다 터덜터덜 걸어 멀어졌다.
“끌끌끌끌 문제구먼. 문제여.”
할아범은 뒷짐을 지고 현궁에서 나와 그 옆에 굳건히 서있는 황궁으로 걸음을 옮기자,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그를 알아보고 자연스럽게 문을 열어주었다.
어떤 제제도 없이 들어간 할아범은 이제는 황궁의 내부를 꿰듯, 자연스럽게 황제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 집무실을 지키는 기사들에게 얼굴을 보였고, 그들이 황제에게 알아서 할아범의 방문을 알렸다.
보통 황제와 만나기 위해서는 미리 연통을 하고 허가를 받아 안내해주는 응접실에서 대기해야 했지만, 할아범에게는 그런 절차를 하나도 거치지 않고 직통으로 만났다.
“오셨습니까?”
“끌끌끌”
황제는 업무를 잠시 내려놓고 반가이 할아범을 맞아주었고, 자리를 옮겨 서로 마주 앉았다.
“이 늙은이가 참견 좀 하러 왔습니다.”
무슨 일인지 짐짓 진중한 모습에 황제는 경청할 자세로 할아범의 말을 기다렸다.
“남의 가정사에 너무 들어가도 좋지 못하다는 것은 아는디, 보기 안쓰러워 참지 못하겠습니다.”
“혹, 바이안에 관한 것입니까?”
“그 아이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어떠하게 성장해왔는지 잘은 모르지만, 폐하께서는 그 아이의 아비지이지요?”
고개를 끄덕이며 할아범은 부모자식을 언급했다.
“남자는 남자가 안다고, 아들은 아버지가 알아준다 하지 않습니까. 내 폐하께서 바쁘신 것은 알지만 잠시 시간을 내어 고 녀석 좀 패주면 좋겠습니다. 그랴~”
할아범은 끌끌 웃으며 바이안이 연무장에서 깽판을 치는 일을 입에 올리니 황제는 가만히 자신과 아들의 사이를 상기하며 고민했다.
어렸을 적, 바이안을 제대로 봐주지 못했기에 그러한 일들이 있었었고, 둘째가 현궁의 기사가 되어 자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바이안이 장성해서도 자신은 황제로 늘 바빴으며, 알아서 잘 할 것이라 그리 생각해왔고, 제대로 마주할 틈도 시간도 없었기에, 아비로서 해 줄 수 있는 것도 많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그리 핑계를 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바이안과 자신의 사이가 이제 조금은 나아졌다 해도 이제 와서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무엇을 당당하게 나서고 무엇을 알려줄 수 있을까, 또 그리 자책을 하게 되니 그러겠다 쉬이 말이 나오지 않는다.
할아범은 마치 황제의 속이 어떠한지 알기라도 하는지 제 말을 꺼냈다.
“이 늙은이는 자식이라고는 손녀딸 하나라 어찌하라 말을 해 드릴 수는 없어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 있습니다. 자식은 그 부모의 등을 보고 자라고 또 부모와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그 등을 잊지 않는 다고 합니다. 그러할 진데, 부모자식 간에 늦고 빠른 것이 무에 있겠습니까.”
할아범의 말이 조금은 위안이 되는지 황제는 자신이 용기를 내야 할 때가 지금이지 아닐까, 시선을 현궁이 있는 방향으로 두었다.
아직 해가 중천인 한 낮이기도 했고, 바이안이 오늘 쉬는 날에 연무장에 있다하니, 바로 가 보겠다 제 결심을 보이자 할아범은 들어 온지 그리 오래 되지도 않았지만 가볍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에게 인사했다.
“노친내가 늙으면 말만 늘고, 오지랖만 는다고, 너무 싫어하지는 말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끌끌”
할아범이 언제 황궁에 찾아왔냐는 듯 자연스럽게 벗어나 현궁에 마련된 자신의 방으로 까까를 챙겨들고 아이처럼 놀고 있는 알바트론과 놀아주었다.
여전히 검을 놓지 않는 바이안의 전신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얼마나 그리하고 있었는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몰입하던 그에게 큰 마력을 담은 주먹이 갑작스럽게 몰아쳐 꽂혔다.
“흡!”
자신을 노리는 주먹을 서둘러 막았지만, 알아채는데 늦어버려서 복부를 쉽게 내주게 되었고, 그대로 멀리 날아가 바닥에 쳐 박힐 뻔한 것을 자세를 틀어 착지하고 짓쳐들어온 방향으로 고개를 들어 노려보다 상당히 의외의 인물에 눈이 크게 뜨여졌다.
“폐하?”
“일어나 거라.”
“......”
움직이기 쉬운 옷을 입고 있는 황제는 자신의 등장에 놀라 어리둥절해 하는 그를 불러 세웠다.
바이안은 황제가 갑자기 등장한 것에 놀랐고, 특히 이곳은 현궁이라 그 놀람은 조금 더 컸다.
황제가 어찌 자신을 찾아 왔는지 의아해 하면서도 자신을 향해 처음 보이는 분위기에 가만히 서있자, 황제는 허리에 차고 온 제 검을 꺼내 들어보였다.
“검을 들 거라.”
일단 의문은 접고 바이안도 검을 곧추 세워 황제와 가까이 다가가 자세를 고쳐 잡았다.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
뿜어지는 투기가 그 대답을 대신했고, 두 부자는 눈을 맞추는 것으로 시작을 알렸다.
왼 발을 앞으로 밀어 자세를 낮추어 검을 잡은 오른손을 왼쪽 앞으로 향하게 한 뒤 강하게 발을 굴려 순식간에 뻗어 나갔지만, 황제는 간단하게 막으며 그 반동을 이용해 바이안이 비어있는 곳으로 파고들어 그 검을 쏘아 찔러 들어가자, 서둘러 마력을 발에 집중해 뒤로 물러나 자세를 고정했다.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 마력을 상당히 낭비하고 있구나.”
“후~”
적당히 손을 털며 숨을 작게 고른 후 바이안은 다시금 황제와 검을 마주했고, 챙 소리와 함께 서로의 검이 맞물려 튕겨나갔다.
그것이 신호였다는 듯, 둘의 공방에 주변의 공기들이 이리 튀고 저리 튀며 주변의 나무기둥들에 검상을 그어내며 상처를 입히기 시작했지만 정작 둘은 멈추지 않았다.
멈추는 사람이 밀리는 것을 알기에 더 집중해야 했지만 찰나에 놓친 황제의 발차기에 바이안은 서둘러 손을 엑스자로 막아냈지만 어쩔 수 없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어찌 된 것이 검에 이리도 상념이 많더냐? 그러고도 기사라 할 것이냐?”
“아닙니다.”
“쯧. 열두 살에 나에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했던 말은 다 거짓이었더냐?”
“아닙니다.”
“헌데, 지금 너의 검은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
황제가 콕콕 집으며 하는 날카로움에 끝내 입을 다물어야했다.
지금 자신이 향하고 있는 검의 방향이 틀어져 있다 지적하는 그의 말에 차마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너의 실력에 세이나 그 아이를 지킬 수 없을까 그것이 분할 뿐이 맞는 것이냐? 단지, 아무것도 못한 네 자신에 대한 수치심이지 않느냐?”
“전...”
“기사가 왜 되려 하였느냐? 네가 바랐던 그 기사가 무엇이더냐?”
“약속이며, 제 꿈이고,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검이 되기 위해섭니다.”
토하듯 외치는 바이안의 대답에 황제는 더 인상을 구기며 검을 세워 자신의 아들을 노렸다.
“약해서 아무것도 못한 것이 아니다. 약하기에 검을 들고 허리를 세워 지켜내기 위해, 무너지지 않으려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못한 너의 그것이 그리도 원통하더냐?”
“원통합니다.”
“검을 다시 들 거라. 지키기 위한 검은 제 자신이 약해서 무너졌다 한들, 원통해할 틈도, 일도 없이 다시 일어나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마.”
“.....”
바이안은 황제의 검에 맞춰 다시금 검을 세워 자세를 고쳐 잡았다.
“지금 네 녀석이 어리석은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겠다.”
다시 시작한 부자의 공방에 그렇지 않아도 바이안의 마력에 현궁 전체가 흔들렸는데, 황제가 추가 되어 더 흔들리기 시작했고, 세이나는 연무장이 보이는 창틀에 팔을 걸쳐 늘어진 채로 그런 둘을 지켜봤다.
“잘 해결 될 것 같네. 역시 자식을 위해주는 부모는 좋은 거구나.”
“주군이 마치 부모님이 안 계신 아이처럼 말씀하시네요.”
늦게 들어와서 아직 잘 모르는 로이에가 창틀에 등을 지고 고개만 세이나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돌려 꺼낸 말에 세이나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는 짧지만 있긴 했지...”
그녀에게 대답을 해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혼잣말인지, 아주 작게 나직이는 세이나의 왼쪽 눈 전체가 마치, 충혈 된 듯 붉게 퍼졌다.
창틀에 걸쳐진 상체를 들어 흐느적 제 방으로 걸어 들어간 세이나는 침대에 대충 누웠다.
“하~ 엄마는 나 때문에 괜히....”
아무것도 없이 하얀 천장을 멍하니 보던 세이나는 꾸물거리며 이불속으로 기어 들어가 목까지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간간히 느껴지는 진동을 자장가 삼기라도 했는지 그리 오래지 않아 잠이 들었다.
세이나가 얼마나 잠이 들었었는지 해가 지고 달이 떠, 밝은 별들이 자신을 봐 달라 빛을 뿌려대고 있을 때, 조용히 안으로 들어온 바이안은 쌕쌕 고른 숨을 뱉는 세이나의 침대 맡에 앉아,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정리해주고 쓸어 넘겼다.
“예쁘다. 내 요정님”
행여나 그녀가 다칠까 조심스러운 그의 손길엔 애정이 가득 묻어난다.
다행히도 악몽을 매일 꾸는 것은 아닌지 오늘은 유독 편해 보였고, 덕분에 작은 안도가 그의 가슴에 몽글몽글 솜이불을 덮는다.
“미안.. 사랑해.”
자리에 일어나 허리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문 밖에 대기하고 있는 동료들과 대충 인사를 한 뒤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계절의 바뀜을 알리듯 차가운 밤인데도 따뜻하게 자신을 감싸 안아주어 그날 오랜만에 푹 잠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