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에 세이나가 돌아와서야 무시무시한 에바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케리프는 에바가 세이나를 데리고 사라지자마자 울먹이며 론과 바이안에게 상담했다.
“엘라이어님.... 소인이 황녀님께 무슨 무례한 일을 저지른 것이 있습니까? 제가 지상인이라서 그 부분의 지식이 없어하여 여쭙는 것인데..”
“크핫~ 푸하하 무슨 일 있었나 보네. 얼굴이 완전히 반으로 쪼개졌어.”
남일 이라는 듯 배를 잡고 웃던 론은 자신의 말에 얼굴에 그림자가 더 짙어지는 케리프에게 상황을 물어보았다.
“그.. 후~. 어제까지만 하여도 제 얼굴도 보지 않으셨던 황녀님께서 오늘 하루 종일 저를 노려보시지 않습니까? 영문은 모르겠고, 소인의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것인지, 아무런 말씀도 없으십니다.”
더 이상 안 되겠다고 있는 대로 큰 소리로 웃던 론은 재밌으니까 한동안 힌트도 주지 말아야지라며 엉뚱한 대답을 해줬다.
“응. 저질렀지 아주 큰일을 저질렀어.”
“무 무엇입니까?”
“흐흐 알아서 생각해봐.”
론이 짓궂은 것은 이미 알고 있기에 케리프는 바로 에바의 오빠인 바이안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오래 떨어져서 거의 만나지 않아 잘 모른다는 대답만이 돌아와 어깨를 무겁게 떨어뜨렸다.
케리프가 다크빛 고민상담을 했다면, 에바는 방에서 세이나에게 핑크빛 고민상담을 하고 있었다.
“언니는 작은 오라버니랑 약혼했던 사이잖아. 언니처럼 좋아하는 사람을 내 것으로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아?”
자신과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데 어쩜 이리 순수할까 그녀를 보면 황제와 황후가 얼마나 그녀에게 사랑을 주었는지 알 것 같았다.
게다가 에바는 황녀라는 입장이니 여태껏 함부로 누구를 만나지도 못했고, 주변은 늘 그녀를 조심히만 대했으니 처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그렇게 케리프씨가 좋아?”
“응? 내 내가? 무슨... 티나?”
너무나 깜찍한 반응에 에바의 머리를 헝클어트려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다 나지.”
“후으으으”
세이나는 새빨개진 얼굴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에바의 수준에 맞춰서 쉽게 이야기 해주기로 했다.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지.”
“헙! 찍어?”
“아니 비유야 비유. 우선 내 걸로 만들기 전에 너를 의식하게 만들어야지. 케리프씨 은근히 인기 많다?”
인기가 많다는 말에 에바는 마음이 덜컥했다.
“안 돼.”
다급해 하는 음성이 필사적이고, 너무 귀여워서 놀리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는 것을 살살 눌렀다.
“다른 여자한테 뺏기기 싫으면 빨리 찜꽁 해야겠네.”
“찜꽁?”
“내거다 하고 침 발라서 여자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이때까지는 세이나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자신은 비유적으로 알기 쉽게 표현을 해주었지만 정작 에바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세이나가 돌아가고 나서 에바는 혼자 잠자리에 누워서 그녀가 해준 말을 계속 되뇌었다.
“지상인들 만의 방식인가...”
에바는 검지손가락으로 입에 가져다 댔다가 떼기를 반복하다가 살풋 잠들었다.
이틀 밤이 지나고 삼일 째에 케리프만의 불편한 생활이 또 시작되었다.
에바는 여전히 케리프의 뒤를 쫒아 다니며 있는 대로 째려보는 것은 기본이요, 이제는 얼굴에 구멍이 나다 못해, 생길 구멍이 더는 없어 소멸하게 생겼고, 변화는 오후쯤에 찾아왔다.
치맛단을 두 손으로 틀어쥐고, 발을 쿵쿵 굴리면서 케리프와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온 에바는 얼굴이 달아오른 상태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화내시려는 건가?’
“그...후~”
이를 악 물며 무언가를 말하려다 숨을 고른 에바는 다시금 용기를 끌어올렸다.
“찌 찜꽁!”
“네? 찜꽁?”
빽 하고 소리 지르며 외친 단어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라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게다가 검지손가락을 세워 들고, 에바는 이내 얼굴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터질듯 빨개졌다.
“요 용기.. 후우... 에잇!”
손가락질 하면서 뭐라 할 줄 알고 긴장하고 있었던 케리프는 황녀님이 검지손가락에 침을 바르더니 갑자기 자신의 왼쪽 뺨에 쿡 찌르고 그대로 도망치듯 달려가며 사라지는 모습을 멍하니 보면서 사고회로를 정지시켰다.
“???????”
한참동안 혼이 나가서 돌아오지 않아 석화가 진행되고 있는 케리프를 멀리서 훔쳐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에바의 연애사업을 응원하기 위해서 몰래 숨어 있던 세이나와 그 일당들이었다.
세이나는 에바의 행동에 충격을 받고 이마를 짚어 한탄했다.
“하아아~~~ 남매가 똑같이 스토킹이야? 반이야, 나 때문에 반동으로 그리 됐다고 생각하지만. 폐하랑 황후마마 연예결혼 아니셨어? 어떻게 둘다.. 아니, 그것보다도 진짜로 침을 바르면 어떻게 해? 찜꽁은 왜 외치는 건데?”
그런 그녀의 바로 뒤에서는 배를 부여잡고 바닥을 굴러다니는 론과 에바의 행동을 진지하게 고찰하고 있는 바이안, 마지막으로 오늘 호위담당인 기사들이 웃음을 꾸욱 참으려 노력하는 전혀 통일성이 없는 상황이 연출됐다.
에바황녀가 절대로 아둔해서 나온 행동은 아닌, 단지 환경이 그리 만든 것이리라.
황족이라는 입장이라서 소소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말벗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황궁에서 벗어나는 것도 소원했고, 누구를 만난다 하더라도 다들 조심하고 눈치를 보기 바쁘다.
그 덕분에 사람들과의 교류는 거의 없다 시피 하게 되었을 테니, 이런 지식을 누가 알려주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라도 처음으로 편하게 대해주는 세이나를 따르게 되는 것에 더해서 어떤 말에도 필터 없이 들어버려 생긴 해프닝이다.
단지 황족으로서는 바이안만이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론이라는 친우를 둔 것도 그렇고, 어렸을 때는 대륙에 생활을 하며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었으니, 황족으로써는 더없는 혜택을 누린 것이다.
여러 해프닝이 오가며 로도스에서의 다음날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천공의 땅으로 올라갈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 12월 31일이 되었고 오늘은 반대로 케리프가 세이나의 집에 찾아왔다.
그리고 그의 옆에 케리프의 껌 딱지가 된 의기양양한 에바가 함께했다.
찜꽁에 성공했다고 한 뒤에, 당당히 붙어 다닌 결과였다.
케리프는 이제는 에바의 째려봄도 익숙해져서 반대로 편한 모습으로 돌아간 케리프의 상태는 마치 해탈의 경지를 넘어 사리 한바가지를 배에 품었다.
‘성장했구나.’
‘성장했어.’
‘성장했네.’
케리프와 에바를 지켜본 일행들은 속으로 케리프의 성장을 인정했다.
“오늘은 어쩐 일이에요?”
“신년제의 일로 찾아뵈었습니다.”
신년제의 문제로 찾아왔다고 하자 세이나는 갸웃했다.
신년제는 1년이 지나고 새로운 1년이 시작함을 알리는 풍습이지만 기본적으로 가족들과 보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세이나님의 생신이 신년의 날이라는 것을 알게 된 주민들께서 함께 축하해 주고 싶다고 저에게 알려 오셨습니다.”
“아~ 생일?”
9년 동안 한 번도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 본적이 없어서 괜히 어색하다.
“모두 처음 축하해주는 파티라서 힘이 들어가다 보니 일이 조금 커졌습니다. 완전히 축제분위기입니다.”
식탁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모닝 약을 뇸뇸하고 있는 바이안은 귀를 쫑긋하며 둘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의 말에 세이나의 긍정적인 대답이 들리자, 옛날처럼 가족이랑만 해서 생일을 축하 해주고 싶었던 바이안이 살짝 의기소침해졌다.
세이나의 생일을 괜히 알려준 듯싶은 후회도 아주 조금 했다.
하지만 좋아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차마 자신만 욕심을 부릴 수는 없었다.
“신년제와 제 생일을 함께 보내는 거네요. 크게 하는 건데 나도 뭔가 준비해야하나..”
“아니요. 이사준비로도 바쁘실 텐데 모두들 맡겨 달라고 하셨습니다.”
내일 있을 일정을 받아들이고 세이나는 이사 짐을 정리 하는 것에 열을 올렸고, 도시는 왁자지껄 바쁘게 내일을 준비했다.
케리프가 언질을 주고 난 다음날 이른 아침에 주인의 수행을 목적으로 따라온 기사들 전원이 심각하고 무섭게 론의 손에 집중하고 있었다.
“한방이다. 나오는 결과에 불만 없이 승복하기다.”
론이 재차 강조하자,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금 론의 손에는 기다란 나무 막대기가 기사들의 숫자에 맞춰져있었다.
“빨리 시작해.”
한명이 못 참고 재촉하는 소리와 함께 바로 운명의 뽑기가 시작이 되었고, 재빠르게 서로 막대기들을 하나씩 뽑았다.
서둘러 막대기의 표시를 확인한 기사들의 희비는 순식간에 엇갈리며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졌다.
“우오오오오오오오”
“안돼에에에에에에에”
“으하하 나만 아니면 돼.”
“내 유일한 희망이... 두 번 다시없을 기회였는데... 크흑.”
일희일비를 오가는 아수라장 속에서 유일하게 빠져서 관전하던 바이안은 절망하고 있는 동료들에게 피식하고 비웃어줬다.
“환자도 나쁜 것이 아니군.”
그의 비꼼에 곧바로 원망의 화살들이 바이안에게 쏟아졌다.
그들 모두 목을 매며 이리 달려드는 것은 어제 세이나가 그들에게 전달한 통보가 원인이었다.
모처럼 대륙에 내려왔기도 했고, 실례만 저지르지 않는 다면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즐겨도 된다는 그녀의 명령에 최소한의 호위인원만 빼기로 결론이 났다.
공정성을 위해 가디언인 론도 포함해서 호위로 딱 5명만 추리기라는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막대기 뽑기를 한 것이었다.
첫날에 주군의 집에서 술을 마신 것을 들킨 기사들 덕분에 세이나의 발언은 그들의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
늘 기사로서 틀에 묶여 살았던 그들이 대륙에 내려와서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기회는 평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다.
물론 자신들의 주인의 성향도 한몫했고, 술 냄새를 풀풀 풍겨가며 자랑을 늘여놓는 동료기사들이 얼마나 부러웠었는지 오늘의 뽑기는 마치 목숨을 건 싸움을 준비하는 자세였다.
그러니 환자라고 빠진 바이안의 발언이 당연히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론이 일하는 5명이 불쌍하니까 꽝은 노는 인원들 당첨은 일하는 것으로 하자며 제안했지만 그래봤자 그게 그거다.
그리고 그의 속에는 잔머리를 굴려 몰래 자신의 손에 남는 한 개의 막대기를 꽝으로 밑장빼기 전법을 시전 한 것은 그만의 비밀이다.
“끌끌끌 역시 젊은 것이 좋구먼~”
느긋하게 젊은 기사들의 행동을 관전하던 할아범은 일단락이 된 그들에게 느그작 다가갔다.
할아범의 등장에 움직임을 멈추고 자세를 바로하며 인사를 했다.
할아범은 그런 그들에게 옛다 선물이다 하며 술병 3개를 기사들에게 전달해줬고, 눈물을 삼키고 있는 5명만을 버리고 보란 듯이 주거니 받거니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환자라는 특성을 내세워 자연스럽게 빠져 자신들을 놀린 바이안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그의 얼굴 가까이에 술을 들이 밀다가 못된 얼굴로 쭈욱 입에 털고 알콜이 가득 담긴 트림을 얼굴에 뿜어주었다.
“큿.. 이자식들이!”
“흐흐 그러게 왜 시비를 거냐?”
환자를 강조하신다면 그 환자라는 명분을 이용해 드립니다.
평소라면 무조건 바이안에게 밀렸겠지만, 지금은 마력도 쓰지 못하고 약해빠졌을 때가 기회인지라, 단체로 바이안을 아주 가지고 놀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