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고 내려온 인원들의 거취가 정해지자, 케리프와 숙소의 배치와 안내 등의 대화를 하고 있는 중간에 세이나의 옷깃을 잡고 있던 에바는 그녀의 옷깃을 톡톡 잡아당기며 세이나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렸다.
“어..언니.”
세이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에바는 간절함의 빔을 열심히 쏘아 보냈다.
“언니가 살던 집 작다며? 괜히 나까지 같이 가면 좀.. 그러니까. 나도 여기서 묵을게.”
아, 얼굴이 뚫린다라고 생각할 때쯤에 우물쭈물 하며 자신의 눈을 슬쩍 피하는 에바를 보니 개구진 미소가 절로 나왔다.
내려오기 전부터 세이나의 집에서 같이 자고 놀고 싶다며 예전부터 언니가 있었으면 했다는 말을 강조하면서까지 붙어 있으려던 에바라서 그 갭이 놀리고 싶은 마음을 증식시킨다.
“흐응~ 그럴래?”
“응. 응.”
허락해준다는 뉘앙스가 나오자 아까까지 눈을 피하던 에바는 반짝이며 똑바로 올려다본다.
에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히데아에게 에바를 돌봐달라는 부탁을 하고, 할아범과 세이나를 필두로 론과 바이안, 하일 외 기사 2명이라는 단촐한 숫자만 도시 외곽의 집에 도착해서 늦은 저녁을 준비했다.
“끌끌 왜들 그리 딱딱하게 서있는 겨? 어여 식탁에 자리 잡지 않고.”
할아범이 기사들에게 자리를 권했지만 그들은 주방에서 요리하느라 나오지 않고 있는 세이나의 눈치만 살폈다.
주군의 할아버님이신 분의 권유를 받아드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정작 자신의 주군은 당연하다는 듯,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어디 마음이 편하랴, 그런 그들을 유심히 보던 할아범은 그만의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비장의 수를 식탁에 턱하니 올려놓았다.
그 비장의 수는 술이었다.
할아범 자신도 그렇지만 몸을 쓰는 사람일수록 술을 좋아하는 것이 당연한 진리인지, 예전에 론이 기사들에게 술은 최고로 사랑하는 물건이라고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어서 꺼낸 한 수였고, 확실히 그 효과는 상당했다.
위에서 론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신이 마셔본 술중에서 할아범의 술이 제일 맛있다고 온갖 자랑을 해댔고, 지금 그 술이 눈앞에 보이니 단체로 동공에 지진이 심하게 일어나다 못해 붕괴 되서 흰자만 남을 정도다.
기사들의 입장이라는 것이 어디 마음대로 할 수 있는가, 지켜야할 이의 보좌, 주변의 경계등을 수행해야 하기에 비번이지 않은 이상에는 흐트러짐이 없어야 했다.
괜히 침만 삼키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인데 그런 그들을 놀리듯 편하게 자리 잡고 앉아서 잔에 술을 따르고 있는 론이 부럽고 원망스러웠다.
“캬~ 이게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를 겁니다. 역시 할아버님께서 담으신 술이 세상에서 최고다 아닙니까.”
순식간에 한잔을 원 샷 하면서 하일들을 놀리기 위해서 과장되게 표현하며 능글거리던 론은 참교육을 담은 세이나의 주먹에 뒤통수를 가격 당했다.
“뭐해? 앉아서 밥 먹을 준비하지 않고? 여기서는 위험할 것도 없는데 그렇게 폼 잡고 서있지 말고 앉아.”
인원수대로 나오는 음식을 보자마자 때는 이때다 하며 후다닥 자리를 잡았다.
“술은 무리가 가지 않게 적당히 마셔. 대신에 다른 사람들한텐 말 하지마. 삐진다.”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다 말고 덧붙여줬다.
“....꿀꺽...”
“그.. 음식도 우리들 것까지 챙겨주시고, 명령도 받았는데... 조금만”
“우리들은 기사다. 본분을 잊으면 안 돼.”
정작 하일은 단호하게 모두를 제지했다.
“애초에 주군과 자리를 함께 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그럼 넌 왜 앉아있냐?”
자신을 흘겨보는 시선들에 곤란할 때는 고개를 스윽 하고 돌리며 딴 짓이 최고다.
“...본능이 그만..”
“끌끌끌끌”
귀족도 같은 사람이구나 싶다며 그들의 망설임을 없애주기 위해서 할아범은 각자의 잔에 술을 직접 채워줬다.
이제는 자신들의 눈 바로 앞에 예쁘게 찰랑 거리면서 그 빛깔을 뽐내는 잔에서 스멀스멀 코가 절로 벌름거릴 정도로 알콜의 향기를 퍼트려 대니 동공이 다시금 격한 운동을 시작한다.
“으아~ 난 모르겠다. 우리들의 주군은 남다르신 분이니까. 마실련다.”
“이런, 미친. 야! 메드.”
모두가 당황했지만 술은 이미 메드의 목으로 넘어가 위장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크으~~ 죽인다.”
천국에 올라선 메드의 풀어진 표정에 자제력에 심하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주방에서 그런 모두를 힐끔 본 세이나는 작게 한 숨을 내쉬고는 그들의 남은 자제력을 완전히 무너뜨려줘야겠다 생각했다.
“여기서 까지 그렇게 딱딱하게 있을 필요는 없다고 얘기 해줬잖아. 여기서는 내가 위험할 일은 애초에 없어. 놀 땐 놀아.”
주인이 저렇게까지 말을 해버리면, 당연히 기사의 본분이 져버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시작한 모두가 거의 동시에 잔을 비웠다.
“캬~ 맛 좋다. 쩝, 단장님이 아시면 연병장행이겠네.”
“연병장행보다 더 독할걸?”
이미 배는 떠났고, 그들의 틈에 론도 합세해서 계속해서 술을 비워대고 있을 때, 주방에서 세이나의 요리를 나르던 바이안을 마지막으로 모두가 자리에 착석했다.
아주 맛깔나게 술을 싹싹 비워대는 동료들을 부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보고만 있는 바이안은 나도 술을 참 좋아하는데 말입니다의 문구를 이마에 써 붙이고, 술잔에 물을 채워서 그들이 한잔 들이키면 같이 들이키면서 자신만의 자린고비를 열심히 수행했다.
할아범은 그런 손주사위가 안쓰러워서 자리에 일어나 터덜터덜 술 창고로 들어갔다가 기사들에게 준 술과는 다른 술을 꺼내서 바이안의 잔에 따라줬다.
“끌끌~ 우리 손주사위도 한잔 해야지. 이건 몸에 아주 좋은 약술이여.”
침이 흐를 것 같은 표정으로 동료들의 술잔을 노려보기만 하던 바이안은 자신 앞에 나타난 술잔을 멀거니 보며 중얼거렸다.
“약술... 약술...약, 약은 꼬박꼬박 챙겨먹는댔으니까.... 꿀꺽”
좋아하는 것을 참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르는 이들이 없을 텐데, 어쩌겠는가, 그리고 할아버님이 약이라시지 않는가.
열심히 자기합리화를 하더니 슬슬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이 잔에 거의 다 닿았을 타이밍에 갑자기 휙 하고 바이안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크~ 쓰다. 바아아아아아안!”
세이나는 바이안의 술을 자신의 입으로 싹 털어 넣고 울망거리는 바이안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끌끌 한잔 정도는 괜찮지 않냐? 너무 작두리 하는거 아니여?”
“뭐라는 거야 할아범. 한 달 음주 금지라고! 넌 마력이 한 번 더, 뒤틀려봐야 안 마실래?”
할아범에게 한번, 바이안에게 한 번씩 잔소리를 퍼붓고 나서야 식탁에 합류 했다.
그리고 작은 잔치가 그녀의 집에 열렸다.
세이나가 로도스로 돌아온 다음날 도시 주민들의 대화의 화제는 모두 세이나였다.
특히 세이나와 친하지 않은 이들도 그 이야기로 떠들어댔다.
“세상에 세이나 그 아이가?”
“아이고, 이제 그 아이라고 하면 안 되지. 애초에 귀족이라지 않나?”
“그건 아니라던데? 귀족 남성의 눈에 들어서 출세했데.”
“그러고 보니, 얼마 전부터 따라다니던 남자 두 명이 있었지?”
“맞네. 맞아.”
부인들이 냇가에 모여서 빨래를 하며 서로가 들은 소문들을 나열했다.
모두가 그리 떠들고 있을 때, 이야기의 주인공인 세이나는 케리프의 자택으로 돌아와 케리프와 모닝 차를 즐기고 있었다.
“역시, 여파가 상당하네.”
“그럴 수밖에요. 한 두 명도 아니고, 광장에 갑자기 많은 귀족 분들이 나타났는데, 당연한 반응이죠. 이렇게나 많은 귀족 분들을 한 번에 본 곳은 아마도 이곳이 최초일 겁니다.”
세이나와 대화를 하면서 케리프는 찻잔을 들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에바황녀를 신경 썼다.
‘으음..내가 무슨 잘 못이라도 했나? 아니면 내가 싫으신 건가? 어디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신 건... 곤란하네. 조금 더 신경 써드려야지.’
“황녀님께서 대륙의 차가 입에 맞으실지 걱정입니다.”
“네? 네.”
자신의 말에 얼굴을 한 번도 들지 않고 건성하게 대답하는 에바의 태도에 자신이 황녀님께 무엇을 잘 못했는지를 심각히 고민했다.
“에바. 슬슬 도시 구경하러 갈까?”
“응? 어..언니. 나 오늘은 그냥 쉴래. 몸이 안 좋네...”
얘 봐라? 말괄량이에, 대륙에 내려가면 하고 싶은 것들을 리스트로 만들어 보여주기까지 했던 아이가 맞아? 싶지만 모른 척 해주기로 했다.
“히데아. 에바를 부탁할게.”
“네. 염려 마세요. 세이나님.”
세이나는 소수의 기사들을 데리고 지인들을 만나러 갔고, 에바는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서 이리저리 뒹굴어 다녔다.
“꺄~~ 어떻게. 히데아 히데아. 나 예뻐?”
히데아는 좋아라하면서 흥분해 있는 에바를 우쭈쭈 띄워줬다.
“그럼요~ 황녀님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시죠.”
“정말? 그렇지? 어제 나보고 예쁘다고 하시는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
이제는 손으로 두 볼을 감싸고 발을 동동거렸다.
“그리 좋으세요?”
“응. 하~ 오늘도 멋있으시더라.”
지적이고 부드럽게 웃는 케리프의 얼굴을 상기하면서 행복해 하다가 갑자기 기분이 급 떨어졌다.
“히데아는 나보다 어른이잖아. 저기...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어떻게 표현해야해?”
히데아는 첫사랑에 빠져서 좋아했다가 고민하는 황녀를 응원해주고 싶어졌다.
“진심을 어필하면 되죠.”
“어필?”
“으음.. 어필이 어려우시면 은연중에 좋아하고 있어요~ 라고 상대가 눈치 챌 수 있게 조금씩 표현하는 방법이 있죠. 예를 들면 시선을 건네준다던가?”
“시선....”
히데아의 말을 참고하고 나서, 에바는 바로 행동으로 옮기겠다고 하더니 자리에 일어나 다시 케리프를 찾아갔다.
고용인들이 케리프가 집무실에 있다고 하는 대답을 듣고, 에바는 다짜고짜 쳐들어가서 집무실의 책상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케리프는 일하고 있는 집무실로 갑자기 들어온 에바에 놀랐지만 침착하게 차와 다과를 내어주었고, 그녀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 개도 없이 자신을 째려보는 에바의 눈빛에 식은땀을 흘렸다.
어색한 침묵이 점심시간이 다 되도록 계속 되어 그를 괴롭혔다.
참기가 버거운 케리프가 먼저 나서서 식사를 권했건만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에바의 째림은 자신의 얼굴에 구멍을 송송 뚫고 다녔다.
‘하아~ 미움 받고 있는 것이 확실하구나.’
퍽 버거워진 케리프는 어떻게든 해서 에바에게 벗어나고 싶었지만 하루 종일 마음의 안정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게 숨통을 틔우려 한 숨을 쉬다가 건물의 기둥 뒤에서 자신을 강렬하게 노려보는 에바를 발견하자마자 흠칫, 정원으로 피신했더니 수풀사이에서 에바의 금발이 뽁하고 솟아 있는 것을 확인하고 화들짝, 그런 식의 반복이 계속 이루어졌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이런 것임이 틀림이 없다며 세이나님이 빨리 돌아오시기를 간절히 비는 것이 현재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