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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검은 병자
작가 : 자전거탄구름
작품등록일 : 2018.3.7

모든 것을 잃은 왕은 오늘도 파멸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다.

 
사람 먹는 동굴 -1-
작성일 : 18-03-07 14:38     조회 : 328     추천 : 0     분량 : 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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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계집을 죽여라!” 뭉툭한 칼을 들고 있던 남자가 소리쳤다. 시커멓게 수염을 기른 남정네들이 횃불을 들고, 날붙이를 휘두르며 노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 소리에 소녀는 세차게 땅을 박차며 내달렸다. 어깨 너머로 쇳소리가 울렸다. 욕지거리가 들렸다. 모두 소녀를 죽이려는 소리였다.

 

 소녀는 숨이 차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나뭇가지에 살갗이 쓸렸고, 돌부리가 소녀의 발바닥을 찢었다. 목구멍은 말라 붙어 입안에서 피 맛이 돌았다. 그래도 소녀는 달렸다. 있는 힘을 다해 뜀박질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정네들이 소녀보다 빨랐다.

 

 그들은 고함을 지르며 무서운 기세로 소녀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붙잡았다. 남정네들이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겼고 소녀의 얼굴을 후려쳤다. 소녀는 머리카락이 뽑히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소녀는 살기 위해 몸을 삐걱삐걱 일으키려 하였다. 하지만 다시 몽둥이가 날아와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말았다.

 

 소녀는 고꾸라진 채 눈알을 뒤룩 굴렸다. 흙바닥이 자신의 피를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흙바닥 위에 남정네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입 꼬리를 실룩거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제 맘대로 될 거라는 마냥.

 

 ……끝나는구나. 소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남정네들이 소녀에게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소녀의 머리를 짓눌렀다. 그녀의 옷을 찢어버렸다. 비열한 웃음소리가 떠다녔고, 기분 나쁜 감촉이 소녀의 몸을 훑기 시작했다. 소녀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배어 나왔다. 머릿속이 멍해져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눈알이 새빨간 흙덩이 바라 볼 뿐이었다. 그렇게 남정네들이 소녀의 몸을 범하려던 때였다. 갑자기 뒤쪽에서 비명소리가 났다.

 

 남정네들이 흠칫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조금 떨어진 곳에 사람 대가리가 떨어졌다. 대가리가 떨어진 곳엔 피가 고였다. 대가리는 자기 피를 뒤집어 쓴 채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남정네들은 날붙이를 손에 들고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그저 이따금씩 불어온 바람에 나뭇가지가 쓸리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뭐야.”

 

 “쉿!” 삐쩍 마른 남정네가 말을 떼자, 흉터투성이 남정네가 그의 입을 틀어 막았다. 그리곤 날붙이를 정면을 향해 겨누더니 나직하게 말을 붙였다. “……뭔가 오고 있다.”

 

 사박사박, 저 멀리에서 흙 밟는 소리가 자그맣게 들렸다. 들짐승이었을까, 소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계속 일정하게 들려오는 발소리에 소녀는 생각을 바꿨다. 그렇다면 사람인가, 이 새까만 어둠 속을 발 헛딛는 일 없이 말이다. 뭔가 이상했다. 저것은 확실하게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끓었고 남정네들도 조바심이 났는지 한 명이 노성을 터뜨렸다. “썩을 것아, 튀어나와라!”

 

 흙 밟는 소리가 끊겼다. 무엇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남정네들이 술렁거렸다. 손끝은 떨려 횃불이 일렁거렸고, 말라가는 목구멍에 그들은 혓바닥을 굴렸다. 그리고 그때였다.

 

 쫘아아악!

 

 갑자기 고기 뜯겨지는 소리가 났다. 살가죽이었다. 꺾어진 뼈들이 살가죽을 찢는 소리였다. 뼈들은 살가죽을 찢고 튀어나와 피를 뿜었다. 단말마는 굵고 짧았다. 노성을 터뜨린 남정네는 곧장 숨통이 끊어졌다.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 졌다. 남정네들이 몸을 가늘게 떨었다. 소녀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횃불이 타닥거리며 소리를 냈고, 저 어둠 너머로 흙 밟는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소녀는 두려웠다.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용기가 나오지 않았다. 흙 밟는 소리는 가까워져 왔고, 그 자리에 있는 모두는 핏기 가신 얼굴로 어둠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 흙 밟는 소리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불빛이 닿지 않는 곳에 사람이 걷는 것이 보였다. 그 사람은 거동이 이상했다. 묘하게 발을 절뚝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그 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남정네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병자였다. 피를 머금은 헝겊을 가슴팍에 두르고 있었고, 다리 한쪽이 이상하게 꺾이어 있었다. 누더기까지 뒤집어 쓰고 있어 낯빛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웨, 웬 놈이냐?” 흉터투성이 남정네가 작게 물었다. 병자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병자는 이쪽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이, 이이 썩을 놈!” 그때 갑자기 삐쩍 마른 남정네가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가 병자의 가슴팍에 박혔다. 그의 가슴팍에선 붉게 피가 흘렀고, 남정네는 능글맞게 웃으며 다시 활시위를 메겼다. 병자는 뒤로 주춤거렸고, 남정네가 다시 쏘아 올린 화살이 병자를 향해 육박하기 시작했다.

 

 “뒈져라―!” 삐쩍 마른 남정네가 소리쳤고, 화살이 병자의 급소를 찔러 넣었을 때――.

 

 갑자기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아악!” 삐쩍 마른 남정네의 목소리였다.

 

 소녀는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그 의문에 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삐쩍 마른 남정네의 왼팔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팔은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뼈가 튀어 나오고, 살점이 터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잡아 비틀어 놓은 것 같았다.

 

 “……아. ……아아!” 그 모습을 본 남정네들이 소리쳤다. 비릿한 냄새에 구역질이 치밀었고,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내달렸다.

 

 절뚝.

 

 병자가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한 걸음씩. 천천히.

 

 “……저, 저리 꺼져!” 남정네들이 소리쳤다. 그들은 언성을 높이고, 날붙이를 휘두르며 병자를 위협했다. 하지만 병자는 고개만 까딱거릴 뿐이었다.

 

 ……살려줘. 소녀는 몸을 벌벌 떨었다. 손발은 얼음장 같았고, 몸은 꿈쩍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소녀는 숲 한가운데에서 알몸뚱이를 사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시끄러운 고함이 울렸고, 비명소리가 짧게 퍼졌다. 그러다가 무언가 찢기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터지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소리가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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