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미쳤어?"
"진심이야, 나 이제 일 그만 두고 쉴려고. 더 이상은 묻지마, 어차피 개인적인 사정이라서 말 못해줘."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끝낸 시언의 모습에 상혁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야말로 기가차고,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도무지 이해를 해보려고 해봐도, 이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도 그럴게, 시언이 갑자기 사표를 냈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 다급히 사무실로 뛰어들어와서는 이제 일 그만하겠다며, 최대한 빨리 사표를 수리해달라고 부탁 같지도 않은 부탁을 건넨 상태이기도 했다.
상혁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얘가 진짜 미친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적어도, 상혁이 아는 시언은 일을 쉽게 그만둘 사람이 아니였기 때문이었다. 성범죄 수사팀도 자진해서 들어올 정도로, 늘 일에 열심이었던 시언이 일을 그만둔다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쉽게 받아들여질만한 상황은 아니였다.
'장난 치는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치기엔 시언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했다. 딱 보기에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하긴, 뭣하러 이런 얘기를 거짓으로 고할까 싶기도 했다. 하다못해, 그만 두겠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이건 쉽게 납득이 되는 상황이 아니였다.
"너 진짜 왜그러는건데?"
"말했잖아 자세한 얘기는 해줄 수 없다고, 사표 수리되면 연락줘, 나 간다."
망설임 없이 뒤를 돈 시언이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등 뒤로 어이없다는 듯한 상혁의 시선이 와닿는걸 느꼈지만, 시언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 태연히 문을 향해 걸었다. 어차피, 마음 먹은거 이대로 진행해볼 계획이였기 때문이었다. 시언은 제 생각을 물릴 자신이 없었고, 쉽게 내린 결정이 아닌 만큼, 쉽게 접을 마음도 없었다. 그건, 상혁이 아무리 말린다고 해도, 제 생각을 접지 않을거라는 뜻과 같았다.
시언은 문을 열고 사무실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형사과에 들려 동료들에게 인사를 건넬 생각이었다. 계단을 내려간 뒤, 모퉁이를 돌아 갈때쯤,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오는 익숙한 얼굴을 마주했다. 시언은 가까이 다가온 선경을 보고는 그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또 앞 안보고 다니냐?"
"어?"
인기척을 느낀 선경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당황한 얼굴이 눈을 크게 뜨더니, 입을 떡하니 벌리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꽤 많이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아, 저, 저 그게."
또 다시 고개를 숙인 선경이 말끝을 흐렸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선경은 늘 이런 식으로 굴었다. 얼굴을 들지 못하고, 사람의 눈치를 보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답답한 모습으로 말이다. 이러지 말라고, 몇번이나 말했음에도, 습관이라는게 쉽게 고쳐지는건 아닌 듯했다. 지금까지도 이러는 걸 보면.
"잘 지내라."
"네? 선배님 어디 가세요?"
놀란 듯, 살짝 고개를 든 선경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 시언은 곤란한 얼굴로 이마를 긁적이며 답을 회피했다. 언젠간 알려야할 사실이긴 했지만, 굳이 제 입으로 꺼내고 싶진 않았다. 그만 둔다고 말한다면, 선경과도 진짜 끝이 나는 것만 같아서 말하기 싫은 것도 있었다. 초조한 얼굴로 답을 기다리던 선경이 잔뜩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손가락으로 툭 건드린다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냥, 뭐, 나 걱정말고, 잘 지내라, 나 간다."
"선배님!"
시언은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아 자리를 떠났다.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는 시언을 바라보고 서있던 선경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물이 핑 돌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심장을 누가 도려낸 것처럼, 허한 마음으로 시린 바람이 쌩 불었다. 꽈악 부르쥔 주먹으로 가슴께를 쿵쿵 내리치다가, 짧은 비명을 토해냈다. 선경은 결국, 그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붙잡아 볼걸."
시언의 소식은, 방금 전 사무실로 오던 길에 우연찮게 듣게 된 상태였다. 시언이 이제 성범죄 수사팀을 그만 둔다고, 수군거리는 형사들의 목소리에 선경은 몇번이나 마음을 다잡아야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거짓일거라고 생각했다. 그 누구보다도 일을 사랑하는 시언인걸 알기에 그 모든건 거짓일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언을 마주하게 되자마자, 선경은 그 모든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말았다.
'잘 지내라.'
시언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선경을 아프게만 만들었다. 차라리, 모질게 대하지. 이럴때마다 상처를 받는건 선경 뿐이었다. 어차피, 시언은 자신을 좋아할리 없을테니까. 희망고문하는 것과 다를게 없다고 생각했다. 마지막까지 이러고 가면 난 어떻게 하라고, 선경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괴로워했다. 날이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
박교수를 잡기 위해선 미끼를 쳐놓아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박교수의 수업을 직접 들어가, 증거를 잡아내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미친 짓이긴 했지만, 딱히 다른 방도가 없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신고하는 것을 꺼려한 것이 그 이유였다. 피해자가 없는 이상, 가해자를 잡아 넣을 수는 없었다. 호랑이를 잡으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한다고, 딱 그 상황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상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연은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고 답했다. 어차피, 제 얼굴을 박교수가 알리 없으니 괜찮은 방법이기도 했다. 유연은 평범한 대학생들 처럼 옷을 입고, 가벼운 화장을 했다. 지나치게 여유로운 몸짓임에도, 그 앞에 서있던 상혁은 안절부절 못하며, 유연의 주위를 빙빙 맴돌고 있던 상태였다. 뭐가 그렇게 불안한건지,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는 얼굴엔 걱정돼 죽겠다는 마음이 대놓고 써있었다.
"괜찮겠어요?"
"그럼요, 어차피 증거를 잡기 위해선 이 방법 밖엔 없잖아요."
어깨를 으쓱거린 유연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하게 답했다. 진짜 괜찮은건지, 괜찮은 척을 하는건지, 그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어 알 수는 없었지만, 얼굴을 보아하니 딱히 나빠보이진 않아 더 만류하려던 상혁도 결국 마음을 접고 말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유연의 고집을 꺾을 만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볼게요."
"유연씨."
"네?"
"조심해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요, 제가 준 무전기 잘챙겼죠?"
"그럼요."
고개를 끄덕인 유연이 망설임 없이 뒤를 돌더니, 강의실 안으로 향했다. 쾅, 닫히는 문소리에 상혁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푹 한숨을 내쉬었다. 불안하고, 걱정되는 마음이 커도, 지금은 유연을 기다리는 방법밖에는 없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박교수의 실체도 알아내야만했고, 그러기 위해선, 다른 방법이 없을테니까. 유연도, 실력이 좋은 형사이니,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게 뻔했다. 상혁은 애써 안좋은 생각들을 털어냈다.
"그나저나, 이시언은 어떻게 된거야?"
학교를 빠져나가던 상혁이 연락없는 핸드폰을 노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진심이냐고, 진짜냐고, 시언에게 수없이 문자를 보냈지만, 답장은 여전히 오질 않은 상태였다. 도대체 무슨 마음을 먹고 있는건지, 생각할수록 마음이 답답해져오기만 했다. 핸드폰을 신경질적으로 재킷 주머니에 꽂아넣은 상혁이 강의실 근처에 세워놓은 차에 올라탔다. 몇시간이 걸리던, 며칠이 걸리던, 상혁은 유연의 연락이 올때까지, 기다려 볼 생각이었다.
강의실 안으로 들어온 유연이 재킷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약통을 꺼내들었다. 수업시간보다 훨씬 일찍 들어온 탓에 강의실은 텅 비어진 상태였다. 매서운 눈길로 주위를 휙휙 살피던 유연이 약통에 있던 약들을 입안으로 탈탈 털어넣었다. 우르르 쏟아진 약들이 입안을 가득 채우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당장 뱉고 싶을 정도의 쓴 맛임에도, 유연은 마지막 약까지 꼭꼭 씹어 삼켰다.
"더럽게 맛없네 진짜."
그 어떤 약이라도 맛이 있을리 없겠지만, 유연이 먹은 약은 특히 그 맛이 더 고약했다. 남자에 대한 공포심을 없애주는 약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먹고 나면 마음까지 답답해져오곤 해, 늘 곤욕을 치뤄야했기 때문이었다.
'빨리 끊어야할텐데.'
마음과 달리 유연은 이 약을 쉽게 끊지 못했다. 최근 들어, 상혁의 도움으로 인해 많이 줄이게 된 약이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다른 남자를 볼때마다, 공포감이 차올랐기에 차마 끊을 수가 없었다. 유연은 침을 꿀꺽 삼키며, 양볼을 툭툭 두드렸다. 아릿한 맛이 혀끝을 맴돌았지만, 어떻게든 참아넘겨야만 했다. 유연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박교수를 잡아야만 했으니까.
*
시아는 책상 정리에 한참이었다. 생각보다 점심을 빨리 먹고 온 탓에 시간이 좀 남아, 오랜만에 책상 정리를 하기로 마음 먹은 뒤였다. 걸레를 가져와 책상 위를 닦고, 책꽃이에 꽂혀있던 책들을 정리했다. 서랍을 열어, 안쓰는 물건들을 버리려는데, 순간, 책상 위에 놓인 누런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이걸 안버렸던가? 가만히 생각해보던 시아가 봉투를 집어,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
그때였다.
쾅-!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책상이 튕겨져 올랐다. 순식간에 불이 옮겨 붙더니, 사무실 안이 뿌연 연기로 가득차 올랐다. 그 앞에 서있던 시아 역시 뜨겁게 치솟는 불길에 의해 뒤로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삐용삐용, 쩌렁쩌렁한 소리의 경보음이 울리고, 눈앞으로 검은 인영이 스쳐지나갔다. 시아는 어느새 정신을 잃은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