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는 이상한 남자를 만났다. 180cm정도의 키에 작은 눈, 그리고, 이마 위에 반달모양의 흉터를 가진 남자로, 꽤 선한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남자는 잠시 산책을 갔다가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마주쳤다.
이름이, 서민석이라고 했나? 빙긋 웃으며 다가온 남자가, 시아에게 이상한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사무실에서 흔히 쓰이는 누런 서류봉투였다.
"이게 뭐에요?"
"선물입니다."
"네?"
신아는 저도 모르게 봉투를 받아들였다. 빳빳한 봉투의 촉감이 오늘따라 거칠게만 느껴졌다.
"곧 알게 될거에요."
의문스런 말을 던진 남자는, 신아가 어찌할 새도 없이 금세 자리를 떠났다. 돌려줘야한다는걸 알았지만, 정신을 차렸을쯤에는 이미 모든 상황이 정리된 뒤였다. 멍한 표정으로 서있던 신아가 급히 서류봉투를 뜯어보았다. 특이하게도, 봉투 안은 텅 비어있었다. 날 갖고 논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걸 왜 선물이라고 준거지? 그냥 장난인건가? 사무실에 도착한 내내, 신아는 그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남자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준에게 말해볼까?'
신아는 한참을 망설였다. 그냥, 흔히 넘어갈 수 있는 일임에도, 이상하게 기분이 좋질 않은 탓이었다. 서준에게 상담해봐야하는게 아닐까 고민했으나, 한참 후에도 시아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가뜩이나 바쁜 서준을 괜히 신경쓰게 만들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그 순간, 똑똑, 가볍게 노크를 한 서준이 빙긋 웃으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양 손에는 두툼한 비닐 봉지가 들려있었다. 저녁 아직이지? 다정하게 묻는 얼굴이 금세 가까워졌다. 시아는 살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
상혁은 상처를 치료해주는 내내, 투덜거리기 바빴다. 유연이 병원은 죽어도 싫다며, 버럭버럭 우긴 탓이었다. 병원을 다녀오면 좋으련만, 유연은 언제나 막무가내였다.
끈질긴 다툼 끝에 상혁은 결국, 구급상자를 가져와 유연을 직접 치료해주는 것을 택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상혁은 유연에게 한없이 약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침묵이 흐르는 사무실이 오늘따라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유연은 맞은편에 앉은채로 가만히 상혁의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상처 위에 연고를 바를때마다, 상혁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다.
"팀장님이 다쳤어요?"
"네?"
"표정이 왜그래요."
민망함에 유연은 괜히 퉁을 줬다. 걱정했을 상혁이라는걸, 유연이 모를리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런 분위기는 너무도 어색했다. 둘만 덩그러니 사무실에 남아, 상처치료를 하고 있다니. 얼굴이 화르륵 달아오른 탓에 고개를 숙인 것도 한 두번이 아니였다. 상혁은 깊은 한숨과 함께 유연의 손목에 붕대를 감았다. 깊은 상처는 아니였지만, 보고 있자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걱정되니까 그러죠."
"……."
"앞으로는 다치지 말아요."
붕대를 감는 손길이 몹시 조심스러웠다. 치료를 모두 끝낸 상혁이 살짝 고개를 들어 유연을 바라보았다. 한없이 다정하고, 걱정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딱 마주친 시선에 유연은 멈칫, 내쉬던 숨을 멈추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얼굴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유연은 결국,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다, 다 했으면 먼저 갈게요."
*
시완은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냥 인생의 대부분이 그랬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린 시절에도 그런 것 같았다. 다들 자신을 못마땅해했고, 자신을 이용하려 했으며,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 그래서, 시완은 사람들이 싫었고, 그 중에서도 최악의 기억을 심어준 여자들이 더 더욱 싫었다.
쇠창살 안에 갇혀있는 내내, 수많은 형사들이 다녀갔고, 그럴때마다 똑같은 말을 들어야만했다. 왜 그런 짓을 한거야? 미친놈, 등등 비난의 말들이 대부분이였지만, 딱히 나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동정해주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다. 시완은 동정이라는 감정이 싫었다. 제 자신이, 우주의 먼지만큼도 못한 작은 존재가 된 것 같아서, 소름이 끼쳤다.
유연이 찾아온건, 뜻밖이었다. 유연은 시완을 보고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차가운 시선도, 그렇다고 해서 따뜻한 시선도 아니였다. 그냥, 평범한 표정이었다. 변함없이 평온한 표정, 시완은 그런 유연이 신기했다. 대부분 받아봤던 시선과는 달랐다. 따갑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그냥, 조금 슬플 뿐이었다.
"잘지내라."
"그 말 하려고 여태까지 있던거에요?"
"응, 나 간다."
벌떡 일어난 유연이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았다. 하, 기가 찬 웃음을 터트린 시완이 고개를 저었다. 생각보다, 더 이상한 여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쓸데 없는 말을 던지는걸 보면. 벌컥, 문을 연 유연이 밖으로 나가려다말고 다시 뒤를 돌더니, 시완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갑자기 뜬금 없는 말을 던졌다.
"아프지 말고."
빙긋 웃어보인 유연이 그대로 밖을 나섰다. 쾅, 문이 닫혔다. 시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머지않아 하하, 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예상치 못했던 말에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다. 큭큭 터진 웃음이 좀처럼 멎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코끝이 찡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유연의 말이 납득이 가질 않은 탓이었다.
'아프지 말고.'
유연의 말을 곱씹던 시완이 양손으로 뜨거워진 얼굴을 감싸쥐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이상한 감정이 온 몸을 뒤덮자,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런 생각도 할수가 없었다. 큭큭 터지는 웃음이 점차 울음으로 번져갔다. 이런건, 반칙이였다. 이런건 정말, 반칙이 확실했다. 시완은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지금 이 순간, 밀려오는건.
"또 당했네."
후회 뿐이었다.
*
이시완은 거침없이 진술을 이어나가고 있던 중이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건지는 모르겠지만, 제 입으로 순순히 진술을 털어놓는 탓에 수사팀에겐 그리 나쁠 것은 없었다.
맞은편에 앉은 형사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진술서를 작성해나갔다. 말을 하고, 적는 것의 반복. 지겹도록 똑같은 일상이였지만, 뭔가 다른 느낌이 들었다.
김주니는 곧장 병원으로 호송되었다. 심하게 다친 곳은 없었으나, 정신적인 충격과 피부 찰과상이 심했다. 피부 치료가 다 끝나면, 정신과 치료를 병행할 예정이라고 전해졌다.
머지않아, 취조는 끝이났다. 이제 이시완은 죗값에 맞는 처벌을 받게 될 게 뻔했다. 유연은 취조실을 벗어나려는 이시완의 팔뚝을 잡아세웠다. 옆에 서있던 경찰들에겐 잠시 자리를 피해줄 것을 부탁했다. 문이 닫히고, 정적이 맴돌았다. 이시완은 다소 놀란 눈으로 유연을 바라보았다. 유연의 행동이 의외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시완."
유연은 조심스레 이시완의 이름을 불렀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이시완의 몸이 움찔 떨렸다. 아까 전, 유연이 했던 말 탓인지는 몰라도 심장이 두근거린 것도 사실이었다. 시완은 저도 모르게, 유연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을 기대하고 있었다.
"너 왜이렇게 순순히 나오는거야?"
하지만, 혹시나는 언제나 역시나였다. 픽, 기가찬 듯 웃음을 터트린 이시완이 고개를 저었다. 뭘 기대한거야 정말, 변함없는 유연의 표정에 시완은 금세 정신을 차렸다. 쓸데 없는 생각을 너무 오래한 듯 했다. 형사에게 기대를 하는 걸 보면. 골똘히 생각하던 시완이 어이없다는 투로 답했다.
"왜요, 순순히 나오는 것도 불만이에요?"
"이상하잖아, 갑자기 이러는게."
이시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딱히 유연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였기 때문이었다. 제 스스로도 이상해졌다는걸, 시완은 은연중에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마음을 뭐라고 정의할 수는 없었다. 단 한번도 겪어본적 없는 감정을 뭐라 말할 수가 없던 탓이었다.
"나에 대한 동정이야? 내가 남자를 무서워하는게 불쌍해보여서?"
유연은 어림짐작한 말로 이시완을 떠보았다. 하. 짧게 터지는 웃음도 예전만큼 무겁지 않았다. 이시완은 천장을 바라보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이시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아무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취조실 문가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았다. 철컹거리는 문고리가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수갑을 채워놓은 손 탓에 문을 여는 것도 한참이었다. 문을 열기 위해 애를 쓰던 시완이 잠시 숨을 골랐다. 순간, 또 다시 이상한 감정이 몰려왔다. 간질거리고, 슬픈, 그러면서도 힘겨운 감정이.
동정이라.
유연의 말을 잠시 떠올리던 시완이 고개를 저었다. 동정은 아니였다. 그건 확신할 수 있었다. 이 감정을 딱히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는데, 적어도 동정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시완은 다시 뒤를 돌아, 유연을 바라보았다. 시야로 들어온 것은, 단 한번도 본 적 없던, 따뜻한 얼굴이었다.
"그런 감정은 아니였는데."
애매모호 하지만, 나쁘지 않은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씩 웃어보인 이시완이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쾅, 문이 닫히자, 묵직한 마음이 따라붙었다. 유연은 잔뜩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생각보다, 기분이 더 이상했다. 답답하고, 짜증나고, 힘겨웠다. 이시완이 사라진 후에도, 유연은 좀처럼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