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얼굴로 가볍게 쏟아지는 햇빛에 눈을 뜰 수 있었어.
몇 년 만에 느껴보는 개운한 아침이었어.
전날 술을 안마시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지.
시간은 아직 한참이나 남아있었어.
그렇게 누워있는 채로 말없이 창문을 바라보았지.
내방 특유의 퀴퀴한 냄새는 그대로였지만 그 작은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밝은 햇빛에
방도 내 마음도 기분 좋게 데워지고 있었어.
솜이불을 덮은듯한 그 따스함에 조금 더 누워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몸을 반만 일으켜 기지개를 켰어.
기분 좋은 꿈을 아직도 꾸고 있는 듯 실없이 웃음만 나왔어.
방안은 메우고 있는 햇빛만 봐도 정말 좋은 날씨라는걸 알 수 있었지만
날씨를 좀 더 보고 싶어서 몸을 일으켰지.
내 생각대로 아니, 내 생각보다도 정말 맑은 하늘이었어.
어느 유명한 화가가 그렸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진한 파란 하늘에 금방이라도 닿을 것만 같은 하얀 구름이 있었고
그 아래로 쏟아지는 햇빛이 돌멩이며 나무며 이름없는 풀 위로 부숴지고 있었어.
‘아’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이렇게나 좋은 날씨라니.
감탄사가 나올 수밖에 없었지.
다만 바람은 좀 심하게 부는지 나뭇가지들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어.
잠이라도 깰 겸, 바람이라도 쐴 겸 창문을 열려는데, 열리지 않더라고.
오래된 하숙집이라 창문이 뻑뻑하긴 했지만, 온 힘을 주는데도 미동조차 없었어.
이게 왜 이러나. 주인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려 뒤를 돌아보는데
벽에 걸려있는 흰 셔츠와 검은색 바지.
난생처음 내 돈으로 나를 위해 산 옷이 보이는 거야.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어.
얼굴은 맥박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달아오르고
손은 금새 땀 범벅이 되었어.
오랫동안 기다렸던 순간이 곧 있으면 현실이 된다는
그 행복한 긴장감에 휩싸여있었어
마치 꿈만 같았지만 꿈이 아니었어.
나에게 너무나도 과분한 현실이 점점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온 책상 한 구석에 올려진 작은 편지봉투 하나.
매일 술기운에 도망만 다니다 처음으로 나의 진심을 담은 편지.
그 편지를 보니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다시 기억해냈지.
찬장을 열어 어제 미처 버리지 못했던 술들을 모두 꺼내서
봉투에 담아 집에서 멀리 떨어진 쓰레기장에 버렸어.
평소라면 아까웠을 그 술들을 버리는데 오래된 짐도 같이 버리듯 마음은 홀가분해졌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배고플 법도 하지만 난생 처음으로 느끼는 만족감이
공복을 대신했지.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는 내 손이 자꾸만 바쁘게 움직이려고 하는 거야.
그 서두름을 애써 누른 채, 천천히 급한 마음을 뒤로 한 채
그녀를 만나기 전만으로도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었지.
전날 조금만 더 서둘렀다면 머리라도 다듬었을 텐데.
아쉬운 감은 있었지만 거울 속에 비친, 새 옷이 어색한 듯 멋쩍게 웃는 나는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 보였어.
혹시나 바지에 빠져 나온 실밥이 있는지, 소매에는 무언가 묻은 것이 없는지
옷이 나에게 큰 것은 아닌지.
꼼꼼히 살펴봤어.
내가 나를 그렇게 자세히 살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어.
아마 살면서 거울을 가장 오래 본 날이었을 거야.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돈을 주머니에 넣으며
전날의 하루가 고스란히 남아있다고 해도 될,
쓰고 지우길 반복한 편지를 말없이 바라보았어.
만일 기회가 된다면 오늘 그녀에게 전해주리라.
그 동안 바보같이 스스로 모른 척을 했던 내 마음을 더 이상 상처받게 놔두고 않으리라.
나는 당신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리라.
다짐하며 내 심장에 제일 가까운 가슴주머니에 넣었어.
주머니보다도 살짝 큰 편지봉투는
나의 마음을 눈으로 보여주듯 주머니 밖으로 한 귀퉁이를 빼꼼 내밀고 있었어.
온도가 있을 리 없지만 따듯함이 느껴지는 편지를 가슴에 품은 채
제일 먼저 꽃집으로 향했어.
그녀가 무슨 꽃을 좋아하는지, 심지어 꽃을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도 모른 채
수많은 꽃들 앞에서 머리만 긁적이고 있었어.
그런 모습을 본 주인이 나에게
‘여자친구에게 줄건 가봐요?’ 라고 물어보았지만
잔뜩 얼굴이 벌개져
‘아니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줄 겁니다.’
바보 같은 대답을 하고 말았지.
주인장이 추천해준 장미꽃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그녀를 만나기로 한 그곳으로 걸어갔어.
전날과 마찬가지로 나무도 하늘도 사람도 심지어 굴러다니는 돌멩이마저
아름다워 보이는 건 단지 날씨가 좋아서가 아니었지.
그녀를 만나기로 한 11시보다
한 시간 먼저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렸어.
잔뜩 멋을 부린 모습에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웃고는 했어.
평소라면 부끄러웠을 테지만 얼핏 그 사람들의 마음이 읽히더라고.
나를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응원하는 것이라고
그저 밥 한번 먹는 자리에 꽃과 편지라니.
소심하기만 했던 내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
나 혼자 너무 멀리 가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나는 믿었어.
나 자신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이제야 나의 행복을 찾으러 가고 있다고
한 시간이나 일찍 온 주제에 그 짧은 5분이라는 시간 동안
시계를 몇 번이나 봤는지 몰라.
십 분은 한 시간 같았고, 한 시간은 하루와도 같았어.
그러나 약속시간이 되었어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
혹시 장소를 헷갈린 게 아닐까.
조금 더 멀리 가보려 했지만 내가 자리를 비운 그 잠깐 사이에
길이 엇갈릴 까봐 어느 한곳도 가지 못한 채
계속해서 돌고 또 돌았어.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따스한 햇살에도 불구하고 내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지기 시작했어.
무슨 사고가 생긴 게 아닐까.
아니면 내가 날짜를 헷갈린 게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
그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만 했어.
기다리는 것.
그렇게 저녁이 되었을 쯤 나는 깨닫게 되었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이름 세 글자와 일하고 있는 식당의 위치밖에 없었지.
분명 식당에 사정이 생겨서 못 나온 것이라고 믿고 식당을 향해 달려갔어.
마침내 그녀가 일하는 식당근처에 왔을 때, 혹시 누가 볼세라 꽃을 뒤로 숨겼어.
‘제발 아무일 없어야 하는데. 제발. 제발.’
그리고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녀가 아닌 처음 보는,
다른 사람이 열심히 주문을 받고 있었어.
내 눈은 계속해서 그녀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어.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서있을 때 처음 보는 여종업원이 나에게 말을 걸었어.
‘혼자 오셨어요?’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여종업원에게 그녀의 행방을 물었어.
종업원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자기는 잘 모르겠으니 주방에 한 번 물어보라고 하더라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방까지 들어가서 주인장에게 다시 한번 물어봤지.
하지만 주인 역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거야.
난 이 사람들이 못된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어.
잘못 찾아올리는 없었어.
몇 달 동안을 하루도 빠짐없이 온 곳인데 그럴 리는 없었지.
나올 리 없는 미소를 억지로 띄우며 다시 한번 그녀에 대해 물어봤어.
그러나 돌아온 것은
술을 마셨냐 느니 미쳤냐 느니 하며 거칠게 밖으로 끌어내는 주인장의 손이었어.
잔뜩 화가 난 덩치 큰 주인장은 나를 잡아채 식당 밖 바닥에 내팽개쳐 버렸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져있는 나를 향해 하는 주인의 말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
‘혼자 하다가 바빠서 오늘 처음으로 사람 불렀는데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그럴 리 없다고 말을 하려 했지만
‘처음으로 사람을 불렀다고?’
‘그럼 내가 그 동안 본건 뭐지?’
이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어.
그때 알았지.
사람은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있고. 만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할 경우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는 걸.
한참을 일어서지도 못한 채 주저앉아서
거짓말 같았던 꿈만 같았던 순간들을 생각했어.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해 버린 나.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는 소심했던 나.
나에게 먼저 다가와준 그녀.
내 손에 아직도 쥐어져 있는 장미 한 송이.
‘내가 미친 건가.’
‘그저 꿈이었나.’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메아리처럼 질문은 질문으로 돌아왔어.
내 의지를 벗어난 발이 스스로 움직이는 동안에도.
거지꼴을 한 채로 동네를 계속 걸어 다녔어.
목적지를 읽은 꽃은 다 시들어버리고
목적지를 잃은 나 역시 시들어버렸지.
새로 산 옷은 잔뜩 구겨진 채로 흙투성이였어.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걷고 또 걸었어.
그러나 어디를 가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어.
결국 내 발은 만나기로 했던 그곳으로 돌아갔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한지 그 주변을 하염없이 맴돌고 또 맴돌았어.
‘이럴 리가 없는데.’
‘이럴 리가 없는데.’
어느새 밤이 되어, 하나 둘씩 불은 꺼져가고
거리마저 잠들기 시작할 때
서서히 전원이 나가듯. 걸어가고 있는데도 눈이 감기기 시작했어.
‘여기서 잠들면 안 되는데……’
그러나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진 눈꺼풀은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었어
그렇게 나는 그대로 길거리에서 쓰러지듯이 잠이 들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