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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연재 > 일반/역사
나는 김구다! 제2부 - 홍구공원 1932, 백범 김구
작가 : 과하객
작품등록일 : 2017.11.22

'나는 김구다!' 제2부의 연재를 다시 시작합니다. 전날 천붕을 당해 의욕이 꺾였던 글인데 권유가 있어 다시 써보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에 가장 조심스러운 부분이 인물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일인데, 혹시 아니다 싶은 부분이 보이거든 가차없는 질책을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10. 전설을 만든 사나이 2 (김당쇠의 보고문 계속)
작성일 : 17-11-23 13:20     조회 : 474     추천 : 2     분량 : 7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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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전설을 만든 사나이 2 (김당쇠의 보고문 계속)

 

  …김의군 동지는 조사할수록 인품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경이의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그의 소식통은 우리도 본받을 점이 많았는데, 원래 포수 출신이라 전국의 동업자들을 협력자로 가졌을 뿐만 아니라 약초꾼이나 땅꾼, 금점꾼 등 곳곳에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활빈당의 면임이나 통주 중에도 김의군 동지의 명을 받드는 이들이 있음이 밝혀져서 조직 안에 별개의 연락망이 있지 않나 의심이 들 지경이었습니다.

  활빈당의 백의대를 저격한 왜적을 추적하던 이걸 동지가 횡사하기 전에 남긴 소식에 의하면 왜인 저격수들은 호랑이 사냥을 핑계로 움직이고 있다 합니다. 대규모 몰이꾼을 동원하고 지방 포수들에게 높은 수고료를 주는 왜인 사냥꾼들은 총독부의 해수구제정책에 동조한 관민 협력의 행사를 가장하여 신분을 감추고 있다 하였습니다.

  비무장 비폭력을 천명한 만세운동을 암중에서 호위하던 이걸 동지는 진작 왜인 저격수의 노림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유탄에 의한 동포의 희생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숲을 싸움터로 택하고 반격을 시도한 듯싶은데, 왜인들은 다수의 저격수를 매복시켜 이걸 동지가 실력을 발휘해 볼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싸움의 막바지에 달려가서 이걸 동지의 시신을 수습한 김의군 동지는 활빈당의 연락망을 통해 왜인 저격수들의 다음 목표가 북간도의 최진동 장군이라고 전해 왔습니다. 최진동 장군은 동생 최운산과 함께 간도 지역 중국 군벌의 막하 군관으로 근무했던 인물입니다. 을사늑약 이후 만주벌로 모여든 조선인들을 위해 집단부락을 마련하여 경영하다가 마적단의 습격을 막으려 무장을 갖추었다 하였습니다.

  최진동장군은 군무도독부 명목으로 사병단(私兵團)을 운영하며 군사학교를 열고 실력을 길렀는데, 이를 눈엣가시로 본 왜적은 마적단을 충동질하여 습격하기를 여러 차례 하였고, 김의군 동지가 그 과정에 암중에서 최진동장군 형제를 도았다는 소문입니다.

  전년에 최진동장군은 상해임시정부의 명령을 받들어 북로군정서에 들었습니다. 그의 군무도독부가 보호한 길림성 화룡현 봉오동의 신한촌은 최진동 형제의 기업으로 간도로 흘러들어온 조선인 유민들을 위해 만든 집단부락입니다.

  아래 김의군 동지가 홍범도 장군의 정일제일군사령부(征日第一軍司令部)를 도와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사건의 전말을 전합니다. 제자의 속하 백의대는 겉으로 나서지 않았으나 급박한 상황에 이르면 협력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므로 김의군 동지는 우리가 임시정부의 명을 받아 따르고 있음을 짐작했을 것입니다.

 

  #. 1920년 6월. 만주 길림성 왕청현 봉오동. 대한독립군 북로독군부 정일제일군사령부

  대대 단위의 일본군이 조선인 집단거주 마을을 노리고 진격 중이었다. 대대장은 야스가와(安川)소좌. 봉오동 일대에는 대한독립군 정일제일사령부 병력 400명이 최진동 홍범도 두 사령관의 지휘 아래 독립부대를 이루고 있었다. 조선주둔 일본군 제19사단이 긴급 출동시킨 야스가와 부대는 기관총대 1개 소대와 보병 1개 중대를 선발로 봉오동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에 앞서 홍범도부대의 1개 소대가 조선주둔 일본군 제19사단 선발대의 간도지역 진입을 추적하던 중에 두만강 건너 강양동(江陽洞)의 일본군 초소를 습격하고 왜군 헌병 10여 명을 처단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때가 6월 4일이었다. 이에 남양수비대 소속 아라미(新美)중위의 병력이 추적해 온 것을 최진동부대의 일지대가 6월 6일 오전 10시경 화룡현 삼둔자(三屯子)에서 전멸을 시켰고, 야스가와부대는 그 복수를 명령받고 추적해 온 것이었다.

  6월 6일과 7일 이틀간의 싸움은 사실상 일본군 야스가와부대를 전멸시킨 섬멸전이었다. 홍범도장군은 일본군의 진격로에 복병을 두어 기습작전을 펼침으로 대승을 이끌 수 있었는데, 이는 일본군의 이동로에 관해 자세한 정보를 입수한 덕분이었다.

  전날 정일제일군사령부(征日第一軍司令部)는 한 통의 밀서를 받고 긴급회의 중이었다.

  “‘일본군 나남사단 예하 연대단위 병력이 국경을 넘고 있음. 선발대인 야스가와소좌의 1개 대대는 본대의 병력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소대 외에 남양수비대의 잔존 병력과 왕청현 주둔 헌병을 망라하여 500명 이상의 병력으로 봉오동을 바라고 진격중임.’이라고 하였습니다. 서명은 이번에도 왕대입니다.”

  수하 사관이 읽은 밀서를 받아 든 홍범도장군은 글의 마지막에 날아갈 듯 그려진 호랑이 그림을 보았다. 이마에 왕(王) 표시가 선명한 조선호랑이가 금세라도 달려들 듯이 포효하고 있었다.

  “그 친구로군. 이 첩보는 믿어도 좋을 거요.”

  문득 홍범도의 눈빛이 흐려지며 김의군의 집을 방문했던 여러 해 전의 사건을 돌이켰다. 한때의 인연을 기억하여 정탐병을 자처한 김의군의 의리가 뼛속 깊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1915년 여름, 함경남도 갑산의 백두산 포수 김의군의 집에는 진객의 방문이 있었다. 한만 국경일대의 전설적인 의병장 홍범도가 모집한 의병들을 이끌고 김의군을 찾았던 것이다.

  “대형의 뜻을 따라야 마땅하지만, 집사람이 이런 몸이라서……”

  “아닐세. 좋은 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찾은 내가 잘못일세. 제수씨를 보니 아들이 확실해 보이네. 미리 축하함세.”

  김의군이 아내 박순녀는 만삭의 몸이었다. 홍범도는 가세를 권하러 왔다가 김의군 부부의 경사를 축하하여 미역 값과 덕담을 남기고 떠났다.

  “튼튼한 아이를 낳으세요.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뒤지지 않을 명포수가 될 아들을. 나 역시 포수 출신이지만 댁네 남편에게는 한 수 접고 들어간다오.”

  산자락을 돌아 멀어지던 홍범도가 되돌아보니 아직 김의군과 박순녀 부부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우 운산이 봄철 영역 순례를 다녀오던 길이었습니다.”

  김의군과의 인연을 회상하던 홍범도가 말문을 멈추자 문득 최진동의 소리가 이어졌다.

  “이웃한 중국인 마적단이 기습전을 펼쳐 왔는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세력이 임시정부에 들기 전의 일이었다. 중국인 군벌의 막하 장수로 근무하던 최진동은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일대에 땅을 마련하여 조선인들을 위한 집단부락을 세우고 스스로 무력을 갖추어 마적단에 대항하고 있었다.

  “아우의 수하 셋이 일시에 쓰러지고 타고 있는 말들이 도망을 가서 꼼짝없이 마적단의 포로가 될 찰나에 구원이 있었습니다.”

  마적단은 포로를 잡아 몸값을 요구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다. 최진동 형제는 화룡현 일대에 제주도에 필적할 만큼의 영역을 갖고 있었고, 그의 신한촌은 벼농사에 성공하여 부유하기로 소문이 높았다. 하여 최진동의 아우 최운산의 몸값이라면 어림하여 한 재산이라 자주 습격을 받아왔는데, 오늘의 공격은 포로를 잡으려는 수단이 아닌 듯하였다.

  “무작정한 살상이었습니다. 수하의 병력 중 셋이 죽고 다섯이 부상을 당하여 속수무책인 상황에서 운산 혼자서 쓰러진 군마를 방패삼아 사격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전장의 총소리에 섞여 간간히 색깔이 다른 단발총의 발사음이 들려왔다고 하였다. 마적단의 총성이 차츰 잦아지고 마지막 단발총의 발사음이 들린 후 나타난 사내는 등에 호랑이 가죽을 걸메고 있는 조선인 포수였다고 하였다,

  “홍장군이 이야기한 김의군 동지와 제 아우 운산이 도움을 받은 포수는 같은 인물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진작 그의 보호 아래 있었던 것 같아요.”

  신민단의 박승길이 최진동에 이어서 말문을 열었다.

  “우리가 두만강 건너 강양동의 일군 초소를 공격할 때 도움을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왜적의 기관총좌를 침묵시켜 승전을 이끌어준 사람도 그가 맞는 것 같습니다.”

 

  홍범도부대의 일지대가 강양동의 일본군 초소를 습격한 것은 1920년 6월 4일의 일이었다. 항일무장투쟁을 천명한 상해임시정부의 방침에 따라 국내 진공을 준비하던 중에 결행한 싸움의 하나로, 일본군 경비 태세의 허점을 찾아보기 위한 전초전 격인 공격이었다.

  “기관총좌가 문제입니다. 병력은 1개 소대 정도이니 우리와 차이가 없지만, 적은 단단히 방책을 쌓고 기관총을 배치해 두었습니다.”

  적정을 살피고 온 휘하 사관의 보고를 듣고 자원하여 나선 신민단의 박승길대장은 북로독군부의 일지대를 이끌고 있었다. 그는 홍범도부대의 선봉 역을 자원하여 두만강을 건넜고, 함북 종성군 강양동의 일본군 수비대 1개 소대를 전멸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

  “기습전이었지만 적도 준비가 있어서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적은 돌과 나무로 망루를 설치하고 기관총 사격을 했습니다. 우리 군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도 이 부분이었습니다.”

  진격로가 막힌 박승길지대를구한 것은 뜻밖의 방향에서 날아온 탄환 일발이었다. 일본군 수비대의 기관총좌는 엄폐물 뒤에 숨어 사격을 하였으므로 전면 공격을 시도한 박승길지대의 소총 사격은 어림없는 저항이었는데, 후방에서 날아온 총탄 일발이 기관총수의 목숨을 끊어 놓았던 것이다.

  “적을 섬멸한 후 총기를 노획하기 위해 망루로 올라가서야 우리가 도움을 받았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적의 기관총수와 조수 두 사람은 뒤편으로부터 날아온 저격수의 총에 맞아 전투력을 잃었더군요.”

  망루의 뒤쪽은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급경사의 악산이었다. 그러나 백두산 일대를 터전으로 삼아 사냥을 하는 포수들에게는 내 집 뒷마당처럼 익숙한 영역이기도 하였다. 기관총수의 숨통을 끊어놓은 총알은 조선인 포수들이 애용하는 단발총의 사제 납탄이었다고 하였다.

  “왕대의 첩보대로 준비를 합시다. 우리가 매복하고 있는 곳으로 적을 끌어오겠다고 하니.”

  최진동장군의 최종결정이었다. 그는 연합세력인 북로독군부의 총사령이었다. 따라서 그가 명명한 ‘왕대’라는 이름은 정체불명의 저격수의 이름이 되었다. 북로독군부의 주력 전투력인 정일제일군을 지휘하는 홍범도장군은 상사인 최진동장군의 명령을 받들어 ‘왕대’의 첩보에 따른 매복작전을 명령했다.

  강양동의 수비대를 전멸시킨 독립군을 추적해 온 일본군 야스가와부대는 6월 6일 오전 10시경 삼둔자의 싸움에서 대패한 후 한국독립군을 경시하는 버릇을 버렸다. 기습전에 능하고 뜻밖의 장소에 매복해 있다가 저격을 하는 저격수들의 사격술이 뛰어나서 척후로 나선 분대 단위 병력의 지휘관이 세 차례나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적의 숫자는 많지 않다. 화기도 단발총이 주력이고 연발총은 거의 없는 듯하다. 추격하라!”

  척후대의 지휘관을 차례로 잃은 후 야스가와 소좌는 공격해 온 적의 총탄을 조사하고 치를 떨었다. 한 세기 전의 유물인 사제 납 총알이 피살된 일본군의 머리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봉오동은 만주지역 특유의 장원 형태를 갖춘 부락이었다. 최진동장군은 두만강을 넘어온 조선인들을 모아 농사를 짓게 하고 마적들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자위대를 만들었는데, 세력이 커져 군무도독부를 칭하게 되었고, 상해임시정부의 명을 받들어 북간도 일대의 독립군들이 연합세력을 이룰 때 북로독군부의 총사령으로 추대되었다. 북로독군부의 주축인 정일제일군사령부는 임시정부가 인정한 사령관 최진동 휘하 홍범도부대의 공식 명칭이었다.

  봉오동은 서쪽으로는 석현, 동쪽으로는 비파동, 북쪽으로는 대감자로 빠져나갈 수 있는 세 갈래 골짜기가 있어 삼개라고도 불리고 있었다. 이웃한 고려촌, 안산촌, 삼둔자 등의 지역이 모두 조선인 부락으로 독립군들의 근거지가 되고 있었는데, 삼둔자 싸움에서 매복한 북로독군부 병력에 큰 손해를 본 일본군 야스가와(安川)소좌의 잔존 병력은 안산촌 방향의 길을 택해 봉오동으로 전진해 들어갔다. 안산촌은 봉오동으로 들어가는 세 골짜기 길의 하나에 위치해 있었는데, 일본군이 진격해 들어갔을 때 마을 사람들은 미리 준비가 있어 피신하고 보이지 않았다. 마을에 불을 질러 후위의 위험을 일소한 야스가와부대는 척후를 앞세우고 봉오동을 향해 골짜기 길로 들어섰다.

  일발의 총탄이 부대의 진격에 앞서 전진하던 척후병대의 지휘관을 쓰러트렸다. 네 번째 척후를 잃게 된 야스가와부대는 총탄이 날아온 방향으로 일제사격을 하였다. 골짜기 좌우 밀림 속의 어딘가에 숨어 있을 적은 야스가와부대의 전진 방향을 선도하는 듯 갈림길이 나설 때마다 사격을 해왔는데, 냉정한 지휘관인 야스가와 소좌는 추격을 자제하여 유인된 길로 나서지 않았다.

  봉오동에 진입한 야스가와부대는 마을에 불을 질러 전소시키고 동북편 골짜기를 따라 추격전을 계속했다. 예의 저격수가 사격해 온 방향을 피해 다른 길을 택했음은 물론이었다.

  6월 7일 오전 6시 30분, 일본군은 조선독립군의 한 부대를 발견했다. 북로독군부 제2중대 제1소대의 1개 분대가 분대장 이화일의 지휘 아래 일본군의 전면에 나서서 사격전을 벌였고, 곧 일본군 기관총부대의 난사를 견디지 못하고 후퇴를 했다.

  신출귀몰, 몸을 감추고 총탄을 쏘아오던 저격병이 아닌 본격 조선인 독립군부대와 조우하여 이를 격퇴한 일본군은 추격전을 시작했다. 6월 7일 오후 1시, 상촌 방향으로 진출한 일본군을 기다린 것은 강상모 중대장 휘하의 북로독군부 제2중대 병력이었다. 저격병의 사격을 조선독립군의 유인전술로 보고 스스로 판단한 공격로로 진격해 해왔다고 자부하던 야스가와부대는 정작 호구로 돌입했던 것이다.

  오전 일찍부터 조선군의 추격에 나섰던 일본군은 피로가 극에 달해 있었고, 강상모부대는 요지를 점령하고 매복하고 있었던 터라 일본군은 대혼란에 빠져들었다. 더구나 화력의 중심이 될 기관총소대의 지휘관 이하 병사들이 공격 방향을 짐작할 수 없는 저격수의 총탄을 맞고 차례로 쓰러졌는데, 한 발, 또 한 발, 표적이 된 일본군 병사들을 쓰러뜨리는 저격병의 총탄은 일본군 기관총소대의 전의를 상실케 하였고, 싸움이 조선독립군의 승리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봉오동전투의 결과를 발표한 상해임시정부의 공식 보고서는 일본군 전사 157명, 중경상자 300명 이상의 전과를 기록하고 있었다. 독립군의 희생은 전사 4명, 중상 2명뿐이었으니 일방적인 대승리였던 것이다. 이후 일본군은 병력을 증파하여 복수전을 벌인 결과 신민단 소속 북로독군부 병력 80명을 전몰시키기도 하였지만, 이때도 600명 이상의 전상자를 내야했다.

  봉오동 전투가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고 전리품 수습이 한창인 6월 10일, 홍범도장군은 예의 왕대가 그려진 밀서를 받아들고 있었다.

 

  (대형의 지우를 받아 강을 건너온 후 항상 은혜를 갚을 길을 찾던 차에 이번의 싸움에 약간의 도움이 되었다하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원수인 왜놈을 치는 일이니 굳이 치사를 하시지 않아도 좋을 줄 압니다.

  이 아우는 러시아 쪽에 원수가 있다하여 쫓기로 하였습니다. 제가 친구를 통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백두산 호랑이 왕대를 죽게 한 야마모도 다다사부로(山本唯三郞)라는 자의 휘하 일인들은 일본군 특무기관의 밀정들로 소위 대륙낭인들이었습니다. 놈들은 조선의 상징인 호랑이를 절멸시켜 민족의 기상을 억누른다는 목적 하에 북으로 백두산부터 남으로 유달산까지 포수들을 풀었고, 이제 조선에서의 목적을 달성한 후 일본의 가상 적수인 러시아를 정탐하려 출발했다 합니다. 왕대는 백두산 호랑이의 두령이었고 내 친구였습니다. 제가 호랑이 한 마리 죽인 원수를 찾아 적을 쫓고 있음이 아닌 것을 형도 유념하시리라 믿습니다.

  이번의 싸움에 제게 약간의 공로가 있다 하시니 대형의 도움을 청하고자 합니다. 갑산에 남겨두고 온 가솔들에게 이 물건을 전해주시면 떠나는 길이 가벼울 듯하니, 형께서 염려 베풀어 주소서. 아우 김의군 드림.)

 

  홍범도장군의 앞에는 백두산호랑이 왕대의 가죽과 약간의 돈, 그리고 김의군 자신의 것인 듯싶은 모발 약간이 놓여 있었다. 민족의 정기를 끊으려 했던 원수를 찾아 이국땅으로 들어가는 행도가 만만치 않을 것임을 짐작한 친구 김의군의 가장으로서의 마지막 충정을 홍범도 장군은 깊은 시름을 안고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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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이브 17-12-02 10:30
 
근대사에 관심이 많은데 정말 공부 많이 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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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우 18-01-02 13:16
 
역사적 지식, 서사, 이건 프로 중에서도 내공10갑자 정도 되는... 공짜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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