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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연재 > 일반/역사
나는 김구다! 제2부 - 홍구공원 1932, 백범 김구
작가 : 과하객
작품등록일 : 2017.11.22

'나는 김구다!' 제2부의 연재를 다시 시작합니다. 전날 천붕을 당해 의욕이 꺾였던 글인데 권유가 있어 다시 써보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에 가장 조심스러운 부분이 인물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일인데, 혹시 아니다 싶은 부분이 보이거든 가차없는 질책을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8. 기미년 4
작성일 : 17-11-23 11:42     조회 : 400     추천 : 2     분량 : 5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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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기미년 4

 

  북포태산은 백두연봉의 하나로 보천군과 삼지연군의 경계에 위치한다. 해발 2,288m의 높은 산으로 산세가 험하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백두산 호랑이들의 세력권이었다. 1910년대 후반에 들어 여러 차례 총독부령으로 발표된 해수구제정책의 일환으로 호랑이 사냥이 시작된 후 남녘 유달산에서부터 시작된 사냥 열기가 북녘 끝 북포태산에 도달하기까지에는 1년의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왜인 사냥꾼들 중에 유독 은제 탄환을 고집하는 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조사가 끝나는 대로 다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이걸의 마지막 보고가 들어온 지 열흘이 못되어 비보가 이어졌다.

  “이걸 동지가 흉탄에 희생되었습니다. 은제 총탄을 사용하는 자를 비롯한 왜인 사냥꾼들 몇이 호랑이를 쫓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추격하다가 매복을 당하여 그만……”

  이걸은 선생이 약관의 몸으로 삼남을 유력하던 시절에 소백산 당산마을에서 왜병과의 전투를 벌일 때 도운 인연으로 수하에 든 후 중한 임무를 여러 차례 수행한 귀중한 장수였다. 구황실의 친위대 참위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한 경력을 가진 유능한 동지였는데 원하던 조국의 독립이 요원한 이때 비명에 간 것이었다.

  “다른 동지들은 뜻밖의 구원이 있어 무사할 수 있었는데 유독 이걸 동지만이 변을 당했습니다. 살아남은 동지가 도움을 준 은인의 편지를 전해 왔습니다.”

  (이 싸움에 개입하지 말아주십시오. 모처럼 잡은 원수의 소식이라 제가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끝난 후 자세한 사정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짧은 편지의 말미에는 호랑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선생은 신의주에서 동지들을 도왔다는 백두산 포수 김의군을 떠올렸다.

  “내 스승 독고스님이 친히 가르치신 사람입니다. 스승께서 안배하신 데는 까닭이 있을 터, 몰래 호위를 붙이되 개입하지는 마세요.”

  백두산 포수 김의군에게 관심을 갖고 따르는 활빈당으로는 김당쇠 휘하 정예 백의사가 있었다. 선생은 당쇠를 급거 소환하여 총독부의 유해조수퇴치사업과 백두산 포수 김의군에 얽힌 사연을 조사토록 하였다.

  그 밤, 선생은 중근에게 또 편지를 썼다.

 

  -왜인들은 우리의 민족혼을 빼앗으려 들더니 문화마저 개조하고 있네. 중근 아우도 소문난 사냥의 명수였으니 조선호랑이가 민중에게 주는 토속적 의미에는 미신으로 돌릴 수 없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아실 걸세. 산군이 멧돗을 막아주지 않으면 농사가 안 된다는 건 산촌의 상식이고 사람과 호랑이가 서로 경애하여 길을 비켜주는 것은 오랜 공존의 지혜였지 않은가.

  왜인들이 조선호랑이를 말살하려 드는 목적은 유해조수퇴치가 아님이 명확하네. 저들은 왜색 종교를 토착화시켜 민중의 의식을 바꾸어 놓을 속셈으로 대종교를 탄압하더니 이제 조선호랑이의 멸종을 꾀하고 있네. 호랑이는 곰과 더불어 조선의 민족혼과 관계된 주요 생령인데 이의 멸종획책은 또 하나의 침략정책이네. 더구나 전국에 걸친 연중행사로 조선인 포수들을 대거 동원하고, 현지의 사람들을 몰이꾼으로 고용하여 높은 임금을 주는 형식이라 하니, 인심을 돌리는 방법치고는 참으로 고약한 것일세.

  다행히 스승께서 안배가 있으신 듯싶으니 우선은 지켜볼 따름이네. 전날 중근 아우가 이토를 칠 때에 암중에서 도왔던 유력한 동지의 하나를 잃었지만 사실상 그쪽으로 눈을 돌릴 여가가 없네. 만세운동 후 왜인들의 횡포는 날로 달로 더하고, 활빈당의 조직도 백주에 드러나서 어찌 수습해야 할지 어지러울 지경이라네.

  왜적의 압제를 피하여 대륙으로 피신하는 백성들을 암중에서 돕는 일이 우선의 가장 큰 일일세. 도산 형님이 임시정부를 만든다고 부른지가 오랜데 상해 행을 미루고 있는 이유가 그걸세. 그만큼 다급한 상황에 몰려 살얼음판 위를 걷듯 위태하게 살고 있는 요즈음이지만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네. 김의군 동지의 소식은 보고가 들어오는 대로 전함세.

 

  ―――――― ―――――

 

  대한제국 원수부 친위대 전 참위 이걸(李傑). 선생과 동년배로 뒤늦게 막하에 들어 많은 일을 해낸 동지이자 친구였다. 선생은 그를 만약의 사태가 있을 때를 대비한 후계자로 내정해 두고 있었는데, 그보다 먼저 선생을 추종했던 김오산, 김당쇠, 부경주가 선생보다 나이가 많았던 데다 제자를 자처하여 물러서 있었고, 이걸의 실력마저 세 사람의 윗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을 손에 잡지 않았는데 칼바람이 일었습니다. 떨어져 있는 제게도 느껴질 정도였으니 상대한 적은 총을 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세운동 기간 동안 활빈당, 특히 그 중 가려 뽑은 정예인 백의사의 집단은 무기의 지참을 허용 받지 못했다. 총수인 선생의 명령이 엄중했기 때문이었다.

  “하얀 옷을 입고 선두에 서세요. 왜적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 백성들에게 향할 압박을 최소화하고, 비폭력 평화적 시위의 모범을 만드는 게 우리의 임무입니다.”

  안주에서 왜인 저격수들의 총격을 받고 쓰러진 동지들은 당연히 저항할 무기를 지닐 수 없었다. 칼로 찔러오면 몸으로 받고 총을 쏘면 흰옷을 빨갛게 물들일 각오로 앞장서서 받아들이라 하고 명령이 내려졌고, 그렇게 이행되어 많은 수의 활빈당원이 죽었다.

  백의사의 별동대를 이끌고 저격수의 집단을 쫓던 이걸 역시 무기를 지니지 않았다. 적수공권일망정 본래 대한제국의 무과 급제자였던 이걸의 무예는 일반적인 고수 따위는 범접할 수 없는 초범적인 데가 있었다. 게다가 선생이 친히 후계자 교육을 시켰기 때문에 예사 살수의 솜씨로는 그를 해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무기는 흉기요. 평화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흉기를 들 수밖에 없는 현실은 우리가 감내해야 할 시련일 거요. 더구나 이번의 비폭력 만세운동은 우리 활빈당의 성격과는 전혀 맞지 않은 투쟁방법인데, 어찌하겠소, 명령을 받은 이상 행할 수밖에. 하여 공권 무예를 가르치니 백의사 동지들은 모두 배워 두시오.”

  선생은 전날 스승 독고스님의 명으로 중국 땅을 유력한 일이 있었다. 그때에 스승의 친구 되는 중국인 무예가에게 배운 무술이 이걸에게 전해졌다.

  “팔극권이라 하였소. 다른 무예가 예(藝)를 추구하여 무(武) 본래의 의미를 벗어난 길을 걸어온 동안에 술(術)을 극에까지 끌어올려 패도적인 완성을 이룬 실전무술이었소. 배운 시간이 짧아 깊이 이르지는 못했지만 방식만은 익혀 두었으니 전하리다.”

  선생이 전한 형식만의 중국 실전무술은 이걸의 손에 들어 달인으로서의 진면목을 보였다. 원래의 특기 검술에 응용한 이걸의 팔극권은 선생도 감탄한 바가 있었는데 피워보지도 못하고 생을 달리했던 것이다.

  “적들 중에 냉정한 자가 있었습니다. 이걸 동지의 보호로 만세운동의 행렬이 왜경의 총탄 세례에서 벗어나자 홀로 따라와 조준 사격을 하였습니다.”

  맨손 무술의 한계는 총기 앞에 약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연발총이 도입되기 시작한 후부터의 무술은 전통의 검술조차 무용한 것으로 만들었다. 권풍을 일으킬 정도의 경지에 있던 이걸이 비명에 간 이유였다.

  “그 자를 추적하여 보고를 주세요. 이걸 동지의 죽음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겠습니다.”

  선생의 명이 떨어지자 이걸 휘하에 있던 백의사의 별동대가 분사한 상전의 복수를 위해 움직임을 시작했다. 선생은 당쇠를 불러 이걸 휘하에 있던 흰옷의 지사들을 지휘하게 하고 전권을 맡겼다. 당쇠는 백두산 포수 김의군의 뒤를 쫓는 한편, 이걸과 함께 총기를 사용하여 활빈당의 간부급들만을 노리는 살수들을 추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간도 일대의 동포들을 왜적의 군경이 습격하여 많은 수의 희생자를 냈다 합니다. 연해주의 국민회의가 사태의 경과를 전해 왔습니다.”

  “나남의 일본군 19사단이 월경을 준비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본격적인 토벌전이 있을 듯합니다.”

  이 무렵 선생은 명목상 상해에 있었다. 여기서 명목상이라 함은 선생의 일이 한곳에 머물 수 없는 형편이라 그렇게 칭한 것이다. 3.1만세운동 직후에 국내를 탈출한 선생은 안창호의 천거로 임시정부 경무국장의 직책을 맡았는데, 국내에 있을 때부터의 활빈당 자원이 경무국의 주요 성원이었고, 사실상 임시정부의 숨겨진 무력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조선 땅과 대륙 각처를 오가며 지휘를 할 수밖에 없어 상해에 주재한 임시정부의 각료회의에서는 선생의 모습을 볼 수 없는 날이 많았다.

  “김당쇠 동지의 첩보입니다. 홍범도장군의 대한독립군 정일제일군사령부(征日第一軍司令部)에서 마적들과 결탁한 일본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는데 김의군 동지의 도움이 컸다 합니다.”

  1910년대의 만주는 마적 출신 중국인 군벌들과 백계 러시아군의 잔병들, 한국계 독립군들, 일본군의 만철수비대, 지방 토호들의 보위단 등이 제각기 무력을 갖추고 난마처럼 얽혀 돌아가던 복마전이었다. 그중 일본군은 본격 무력을 동원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는데 중국인 마적단은 무기를 얻는 수단으로 일본군의 주구가 되어 조선인 집단부락을 습격하는 경우가 많았다.

  홍범도(洪範圖)는 평안북도 양덕 출신의 포수로 정미의병운동 때에 북청 후치령(厚峙嶺)싸움에서 일본군에게 패배를 안긴 전설적인 의병장이었다. 산포수들을 중심으로 한 그의 부대는 매복과 기습을 반복하여 두만강 유역의 일본군수비대를 괴롭혔으므로 왜적이 홍범도부대를 추적하는 전담 부대를 월경시켜 독립군의 본거지를 습격했던 게 훗날 봉오동전투의 전말이었다.

  “김의군 동지는 홍범도장군의 부대가 어려움에 있을 때마다 뛰어난 사격술로 도움을 주었다 합니다.”

  1919년 5월, 3.1만세운동이 절정에 있을 때 연해주의 대한국민회의는 대한독립군을 결성하여 본격 무장투쟁을 천명하는데 홍범도는 이동휘 휘하의 선봉장으로 이해 8월 혜산진의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하는 등으로 활략을 한다. 3.1운동 이후의 첫 번째 국내진공작전이었던 혜산진 싸움을 승리로 마감한 홍범도부대는 국내진공전은 더욱 활발히 펼쳐 9월의 갑산군 금정의 일본군주재소 습격과 10월의 자성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등으로 기세를 떨쳤다.

  “자성군 전투에서는 일본군이 첩보를 입수하고 매복하고 있었는데 적의 기관총좌를 부수어 승리를 도왔다 합니다.”

  백두산포수 김의군은 포수 출신인 홍범도와 인연이 깊었다. 훗날의 홍범도장군 전설의 태동격인 자성군 싸움은 70여 명의 왜병을 사살한 승전이었지만 적의 매복에 걸려 사흘 동안이나 일진일퇴의 접전을 벌여야 했던 악전이기도 하였다.

  “가장 곤란한 순간에 저격수로 나타나 적의 주력인 기관총을 침묵시키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합니다. 홍범도장군과는 진작부터 연락이 있어서 도움을 받아왔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싸움의 승패를 돌려놓고 떠났다고 특별히 보고를 해왔습니다.”

  백두산 포수 김의군의 활략은 해가 바뀐 1920년에도 이어져 곳곳에서 전설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전설은 대한독립군 정일제일군사령부(征日第一軍司令部)가 일본군 나남 19사단의 월경부대와 부딪친 봉오동전투에서 더욱 빛이 났다.

  “김의군 동지의 행적을 추적하여 그가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 밝히도록 하시오. 도울 수 있으면 최선을 다해 돕도록 하고.”

  봉오동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인 1920년 초, 선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의 비밀첩보기관 백의사의 장수 김당쇠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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