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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연재 > 일반/역사
나는 김구다! 제2부 - 홍구공원 1932, 백범 김구
작가 : 과하객
작품등록일 : 2017.11.22

'나는 김구다!' 제2부의 연재를 다시 시작합니다. 전날 천붕을 당해 의욕이 꺾였던 글인데 권유가 있어 다시 써보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에 가장 조심스러운 부분이 인물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일인데, 혹시 아니다 싶은 부분이 보이거든 가차없는 질책을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4. 종교 전쟁 3
작성일 : 17-11-22 12:06     조회 : 405     추천 : 3     분량 : 5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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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종교 전쟁 3

 

  왜적의 대종교 공격은 집요하고 철저했다. 특히 간부급 교인들에게는 가족과 친지를 볼모로 한 압박이 심했는데, 백주 대낮의 공공연한 체포 외에 야밤을 틈탄 자객 집단의 습격으로 집이 불타고 가족과 재산을 잃은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당시 일제의 종교 탄압에 대해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역임하신 박은식선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이렇게 썼다.

  (…혹 기도나 선강하는 언사에 신앙의 자유니 정신의 자유니 마귀의 권세를 꺾어 깨트린다는 말이 있으면 경찰서로 불러 심문하기를 “네가 원하는 자유와 자립은 한국의 자유 독립을 원하는 것이 아니냐?”하고 매를 치고 가두었다가 여러 날 후에 석방한다. 교직자로서 조금이라도 명성이 들어난 자는 형사의 미행과 정탐을 받지 않은 날이 없다.)

  왜적의 종교 탄압에서 가장 피해가 큰 교단이 대종교였다. 박은식선생은 왜적의 종교 압박의 예로 기독교의 경우를 들었는데, 선생 자신이 대종교 창교 때부터의 간부이셨으므로 에둘러 말씀하신 것이었다.

  “정신적 순치(順治)가 가장 두렵습니다. 적은 우리가 총독 정치에 익숙해지기를 바라고 있고, 사실상 백성들의 생활은 나아지고 있어요. 조선왕조가 워낙 부패하여 백성들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트렸던 탓도 있지만, 저들이 가져온 신문물과 새로운 교육제도와 사회 체제는 확실히 전 왕조의 우위에 있습니다. 이제 적들은 새로운 종교론을 들고 나와 민족혼의 동화를 꾀하고 있는데, 우리가 익숙해져서 민족혼을 잃으면 적의 순치는 성공한 것이 됩니다.”

  모처럼 선생을 찾은 만년학생 안창호는 왜적의 종교정책을 들어 염려의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무렵 안창호는 흥사단을 조직하여 민족정기의 보전을 부르짖고 있었는데, 국민 개개인의 인격혁명을 주장하는 흥사단은 암중의 일을 하는 선생과 좋은 궁합이 되어 나라 안의 명암을 지탱하는 지주가 되었다.

  “표면의 일은 우리가 할 것이니 적의 암중 침입을 막아주시오.”

  전날 동학의 3대 교주 손병희가 선생에게 부탁한 말이었고, 만년학생 안도산의 부탁이기도 하였다.

  “그들의 실천훈에 ‘히노끼싱’ 이란 말이 있네. 저들 종파의 삼개훈인 ‘아침 일찍 일어나 정직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일하자’의 실천 방법이라는데,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고 실천하고 있었던 간단한 일이지만 삶이 팍팍한 백성들에게는 행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이 일을 저들은 얄팍한 구제를 곁들여 포교의 기본을 삼고 있네.”

  가난에 찌들은 조선의 농촌마을에서는 가을걷이를 해도 쌀밥 구경이 힘들었다. 지주가 소작료로 추수의 절반 이상을 걷어가 버리고, 나머지는 갖은 명목의 세금이 훑어갔다. 백성들은 자투리땅에서 거둔 잡곡과 장리변으로 생활을 이어갔는데, 장리변이라는 게 봄에 한 섬 빌려 가을에 두 섬으로 갚는 고리라 갈수록 빚이 쌓이는 구조였다. 조선 농촌의 이러한 현실은 일본 종교들이 침투하기에 딱 좋은 여건이 되었다.

  “형편이 어려운 집에 쌀자루를 내려놓고 ‘아침 일찍 일어나 열심히 일하시오. 좋은 세상이 올 터이니’하면 ‘감사합니다’ 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더구나 인연 닦는 방법이라는 게 ‘아침에 일어나 즐거운 마음으로 내 방을 치우고 주변을 둘러보며 구석구석 더러운 곳을 닦고 내 할일을 즐겁게 열심히 하며 가족과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 하니, 거부감을 가질 이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쌀이 생기기도 하는 일이라, 친한 친구에게 알려줘야겠다고 마음이 동하지 않겠나.”

  일본 천리교가 공식적으로 조선 땅에 뿌리를 뻗기 시작한 것은 을미사변이 있던 1895년의 일이었다. 당시는 조선 백성들의 반일 감정과 민족 종교들의 위세에 밀려 힘을 쓰지 못하다가 한일합병과 함께 총독부의 종교정책에 힘입어 본격 포교를 시작하게 된다.

  “그들은 구태여 신을 말하지 않네. 조롱 받고 무시 받고 더러운 일과 궂은일은 다 하는 백성들에게 ‘천리교의 진리를 알고 삼개훈을 행하다 보면 무시 받고 조롱 받은 자는 인생이 올라가고 뽐내며 으시대던 자는 액운 속에서 인생이 내려간다’고 보상심리를 자극할 뿐이네. 한 걸음 더 들어가 오야꼬(親分)로 맺어지게 되면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지만, 우선 먹기에는 곶감이 달다고 일반 백성들은 그들이 내미는 쌀자루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니, 이 얼마나 무서운 종교 침투인가.”

  가난에 찌들어 극한 상태에 있는 백성들에게 한 자루의 쌀은 하늘같은 감동이었다. 천리교는 농촌 백성들의 가난을 공략하는 방법으로 신도를 늘였다.

  천리교는 원래 교조인 나카야마 미키를 따르는 일본식 민중종교운동으로 기존의 일본종교들과 충돌이 잦았다. 1870년에 메이지 정부가 국가신도(國家神道)를 선포하고 소위 만세 일계의 황통을 정당화할 때 천리(天理)라 하여 추종하게 된 이후 사교 집단의 명목에서 벗어났는데, 조선 땅에 교리를 심는 방법으로 칼과 꿀을 아울러 들고 들어왔던 것이다.

  “일본신도는 국교라 하여 표면상 정당하지 못한 일을 기피하고 있지만 저들은 다르네. 요즘의 대종교가 받는 압박의 반절은 암중에 공격해 오는 저들 천리교 명색 왜인 광신도들의 폭력에 있네.”

  대종교는 단군성조를 조선의 대황조로 받드는 민족 종교로 공공연히 일본의 소위 만세 일계 황통을 비방하고 있었다. 이는 총독부의 종교정책을 정면에서 가로막는 것이었으므로 교인들에게 가해지는 압박은 일가의 몰살에 이르기를 예사로 하는 것이었다.

  “최대한 많은 교인들을 대륙으로 피신시켜야겠습니다. 우리 활빈당이 전력을 다해 돕겠습니다. 따로 지연책을 생각해 두기도 하였습니다만, 도산 형의 인맥을 빌리고 싶습니다.”

  선생은 대륙에 전통을 때려 김당쇠와 이걸을 오게 하고 기왕에 활약 중이던 김오산과 김진경에게 특별히 당부의 말을 하였다.

  “오산 동지는 야밤에 담을 넘어 교인들에게 피해를 주는 왜종교의 광신자들을 철저하게 응징하세요. 활빈당이 악역을 맡아 왜적의 관심을 돌리는 사이에 진경 동지는 만주의 부경주 동지와 연계하여 교인들을 국외로 피신시키기로 합니다.”

  조선 팔도의 활빈당원들에게 총동원령이 내려지고, 선생 휘하 범 같은 장수들의 지휘를 받은 활빈당원들은 대종교인들을 습격하는 왜인 자객들에게 응분의 벌을 내리기 시작했다. 만주에서 급거 달려온 당쇠와 이걸 휘하의 활빈당원들은 원래 정예였을 뿐만 아니라 새로 무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더하여 큰 힘이 되었다.

  1918년의 원단, 선생은 의암 손병희와 함께 경학원대제학(經學院大提學) 김윤식을 방문하고 있었다. 김윤식은 한때 흥사단의 대표를 역임하기도 한 인연으로 안창호의 소개장을 들고 온 선생 일행을 기꺼이 맞았다.

  운양 김윤식은 구한말에서 일본제국주의 통치로 넘어가는 격동기에 반일과 매국의 경계선을 외줄타기 하던 묘한 인물이다. 이토(伊藤博文)가 안중근의사에게 처단되었을 때 조선 조정의 조문 대표로 도쿄로 가서 일본인들에게 훈장을 받는 등의 친일 행각으로 지탄을 받았지만, 일제가 준 중추원 부의장 자리를 거절하거나 사재를 털어 유학생들을 지원했다는 일화도 전해지는 걸로 미루어 나름의 고충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대종교의 창시자 홍암 나철의 스승이기도 한 그의 삶은 당시의 기득권층이 보인 ‘살아남는 자가 이긴 자다’의 대표적인 행태로 불리는데, 그의 이율배반적인 삶을 희화화하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한일합방을 앞두고 어전회의가 열려서 대신들이 의견을 낼 때 김윤식은 “불가불가(不可不可)”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은 한문자의 속성을 빌린 말장난으로 “옳지 않소, 옳지 않소(不可 不可)”라는 뜻과 “어쩔 수 없이 찬성하오(不可不 可)”라는 뜻을 동시에 갖고 있어 후세의 기록을 의식한 사례로 전해지고 있다.

  백범 김구와 의암 손병희가 신년인사 핑계로 방문했던 1918년의 정초의 시점에 김윤식은 조선 유림의 추천으로 경학원대제학(經學院大提學)에 있었다. 망국의 유신으로 자숙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 은거 중이었는데, 두 후진의 일장 설파(說破)에 특유의 처세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나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늙은이요. 물은 흘러서 강물이고 고여서 호수이니, 그렇게 알도록 하시오.”

  김윤식이 폐위된 임금 고종을 찾은 것은 김구와 손병희가 다녀간 다음 날이었다.

 

  “이태왕의 망명을 추진하는 세력이 있는데 그 중심에 경학원대제학(經學院大提學) 김윤식이 있다.”

  총독부 경무국장 고지마는 그 같은 첩보를 접하고 고등과장 구니모도를 불러 고등경찰의 동원령을 내렸다.

  “김구라는 자와 손병희라는 자가 다녀간 후 김윤식이 이태왕을 만난 것은 사실입니다. 헌데 동석한 우리 측 사람들의 보고에 의하면 신년 인사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고 합니다.”

  “이태왕은 불씨가 될 수 있어. 만주의 불령선인들이 책동을 벌리고 있다는 첩보도 있었잖은가. 조만간 처리해야겠지만, 이태왕은 살아있는 불씨인 게 확실한 만큼 추호의 방심도 없어야 하네.”

  만주의 이상설이 이동휘 박용만 등과 함께 신한혁명당을 만들고 외교부장 성낙형을 파견하여 광무황제의 망명을 추진하다가 발각된 것은 3년 전의 일이었다, 그 사건 이후로도 황제의 망명 계획이 발각되어 소동이 벌어진 일이 여러 차례였는데, 신중파로 알려진 김윤식이 중심인물로 움직인다면 예사 음모가 아닐 터였다. 고등과장 구니모도는 잔뜩 굳어진 얼굴로 답변을 하였다.

  “옛! 각하! 고등계의 전력을 동원하여 해결하겠습니다!”

  고지마는 인상을 흐리고 구니모도의 장담에 핀잔을 주었다.

  “이태왕의 망명이 여의치 않으면 이왕가의 왕공 중 누구라도 대동하여 탈출한다는 계획이 있다는 첩보야. 운신의 자유를 주어 음모가 익도록 하고 일망타진할 방법을 세워보란 말이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고지마는 고등경찰 외의 비선 첩보조직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여 고등과장 구니모도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김윤식이 맡은 경학원대제학이라는 직위는 친일 유림의 대표이기도 하였지만 이왕가의 자제들을 교육시킬 의무를 가졌음을 뜻하기도 하였다. 그날 궁중에 들었던 김윤식이 야밤을 틈타 승용차를 몰고 인천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를 접한 고등과장 구니모도는 기왕에 동원된 고등경찰 외에 헌병대와 일반 경찰까지 총동원하여 경인가도를 빈틈없이 감시토록 하였다.

  “인천항에 도착할 때까지 감시를 게을리 말 것! 누군가와 접선할 때 본청의 사람들이 한 그물로 잡을 테니 미행을 의심하지 않도록 신중할 것!”

  총독부의 고지마 경무국장이 친히 사람을 이끌고 체포의 현장에 출동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더한 작전이었다. 물샐 틈 없는 감시망 아래서 인천항으로 달린 김윤식의 승용차는 인적이 드문 바닷가를 택해 멈추어 밤새 머물러 있었다. 날이 밝기까지 그리하였으므로 참다못한 구니모도가 부하를 행인으로 가장해 승용차 주위를 거닐 게 한 후 받은 보고는 기막힌 것이었다.

  “기생을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 늙은이, 밤새 일을 치렀는지 피곤한 안색으로 깊이 자고 있습니다.”

  그 밤, 천리교의 경성 총본부에는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유령처럼 날아들어 기습전을 벌리고 있었다.

  “수괴를 잡아라! 그간 우리 동포들을 괴롭히던 무리에게 천벌을 내린다!”

  기습전에는 선생 휘하의 세 장수, 김오산과 김당쇠, 이걸이 동원되어 대종교의 교인들을 핍박하던 왜색 종교의 광신자들에게 천주(天誅)를 내렸다.

  같은 시각, 선생은 필생의 적수 사사키의 방문을 받고 있었다.

  “잘도 조호이산지계를 꾸미셨더군. 경기 일원의 경찰력을 엉뚱한 곳으로 몰고 천리교를 친다? 훌륭하오. 헌데 방해분자가 없는 이때가 우리가 겨루기 가장 좋은 때라는 생각이 들지 않소? 선생의 그 같은 계획을 사전에 알고서도 방해하지 않은 오랜 친구의 충의를 한 차례 대결로 갚지 않으시겠소?”

  사사키 주로가 애검을 하늘 높이 들어 다가오고 있었고, 선생이 모처럼 물미장을 잡아 새로이 터득한 조선국 18반 무예 중 창술의 진수를 선보일 준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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