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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연재 > 일반/역사
나는 김구다! 제2부 - 홍구공원 1932, 백범 김구
작가 : 과하객
작품등록일 : 2017.11.22

'나는 김구다!' 제2부의 연재를 다시 시작합니다. 전날 천붕을 당해 의욕이 꺾였던 글인데 권유가 있어 다시 써보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에 가장 조심스러운 부분이 인물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일인데, 혹시 아니다 싶은 부분이 보이거든 가차없는 질책을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2. 종교전쟁 1
작성일 : 17-11-22 05:11     조회 : 431     추천 : 3     분량 : 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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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종교전쟁 1

 

  그날 선생은 한 통의 편지를 받고 한 통의 편지를 썼다. 받은 편지는 만주벌의 부경주에게서였고, 보내는 편지는 저승에 있는 안중근에게였다.

  편지를 전해온 이는 선생의 제자를 자처하는 김오산으로 만주벌에 머물다가 급한 소식을 갖고 귀국한 것이었다. 오산은 만주 땅을 휘돌아 전령 역할을 하며 역시 제자를 자처하는 부경주의 사업을 돕고 있었다. 따라서 편지의 명의는 제자 부경주로 시작하여 제자 부경주로 끝맺는 것이었다.

 

  홍암 나철 선생이 세상을 뜨셨습니다. 우리 단군교의 겉으로 드러난 세력인 대종교를 이끌던 도사교(都司敎)로 노고가 많았던 분이라서 삼가 머리를 숙여 영령을 전송했습니다.

  홍암 도사교와 우리는 여러 해 전 삼일신고(三一神誥)와 신사기(神事記)등을 드려 경전으로 삼도록 한 인연이 있습니다. 그가 원래 망국의 과거에 급제했던 학식 높은 선비라 많은 이들이 따랐고, 우리 역시 그를 도와 교세의 융성을 꾀했으므로 그의 단군교가 나라 안에 한 세력으로 떨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여러 해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도사교가 주장하는 대종교 명색의 단군신앙은 373대 단군인 제가 이끄는 우리 일족의 그것과는 형식이 달랐지만, 우리가 밀교(密敎)인 만큼 백주에 나설 수 없는 형편이라 그가 모신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우리의 성조 단군과 방불하여 선조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보아 응원을 보냈고, 더욱 그의 대종교는 망국의 조상을 지킨다는 명분이 뚜렷하여 갈 데 잃은 민심을 하나로 모으는 데 적합했던 것입니다.

  홍암 도사교는 우리가 전한 경전에 더하여 단군한배검의 강도하신 뜻을 삼신일체의 원리로 설명한 신리대전(神理大全)을 펴고, 조화를 바탕으로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원리를 설명하여 범세계적 후천세계(後天世界)가 나갈 방향으로 하였습니다. 이는 우리 일족이 뜻한 바 단군신앙과 다를 바가 없어 우리는 음양으로 그의 교세 확장을 돕도록 하였습니다.

  최근에 도사교는 강화도 마니산 제천단(祭天壇)과 평양의 숭령전(崇靈殿)을 순방하고 만주 화룡현 청파호(靑波湖)에 교당과 지사(支司)를 설치하였습니다. 이는 우리도 바라던 바라 만주에 들렀을 때 재회의 기쁨을 나눈 게 엊그제의 일인데, 그만 망극한 소식이 들려온 것입니다.

  도사교를 잃은 대종교의 도우들이 하나 됨을 다짐한 것은 더한 다행이 없는 일입니다마는, 홀연 세상을 등지신 이유는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교세의 급속한 확장에 당황한 총독부가 종교통제(宗敎統制)를 공포하고 대종교의 단군숭배를 탄압한 일은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 왜적의 종교 집단 일파가 마수를 펼치고 있다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일러주신 바도 있지만 왜적은 무단정치와 문화정치를 아울러 표명하고 있습니다. 왜적의 종교 천리교가 상륙하여 우리의 단군성조를 배척하고 있고, 소위 그들의 국가 신도(國家神道)가 총독부의 위세를 빌려 민간에 침투하기 시작한 게 3년 전의 일입니다. 이제 홍암 도사교의 순교를 돌이키건대 그들의 마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전에 대종교의 백포종사(白圃宗師) 서일(徐一) 동지를 만났는데 홍암 나철 도사교 순교의 이면 사연을 밝히고 왜적의 흉계를 만천하에 알리자고 하였습니다. 대륙의 일은 제자가 하려니와 국내의 일은 선생님이 계시니 삼가 도움을 청합니다.

  아울러 나철 도사교의 뒤를 이은 무원종사(茂園宗師) 김교헌(金敎獻) 동지가 대종교의 총본사를 동만주 화룡현(和龍縣)으로 옮기고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항일투사 양성에 힘쓴다고 하였는데, 교관이 될 인재를 부탁하였기로 선생님께 의논을 드렸던바 일전에 알음을 주신 김좌진 공이 가세하여 우리의 힘을 백배 발휘할 수 있게 된 점과, 김 공의 역량 높은 장수됨을 보고 드립니다. (제자 부경주 배상)

 

  김좌진은 전날 안명근의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 옥중에 있을 때 우정을 쌓게 된 후배였다. 눈빛이 깊고 사리가 정연하여 연하임에도 불구하고 우정을 나누었는데, 왜적에게 고문을 당할 때 단 한 차례의 비명도 없어 천하 무골로 통했다. 홍암 나철의 순교로 분기한 대종교의 무리가 대륙에 무장 세력을 만든다 할 때 연줄을 이었던 것을 과연 낭중지추(囊中之錐)라 유능함이 언급된 것이었다.

  부경주의 편지는 여러 가지 생각을 갖게 하였다. 왜적의 총독정치는 강력한 무력을 배경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선생이 감옥에서 나온 1916년의 시점에는 백성들에게 순치(順治)의 기미가 보일 지경이었다. 남한대토벌 이후 이렇다 할 무장투쟁의 길마저 막힌 조선의 백성들에게 왜적의 총칼은 이미 익숙한 위협이 되었고, 분위기가 익었다 싶은 왜적은 새로운 정책을 잇달아 발표하여 민심을 돌리려 하였다. 헌병경찰제도로 조선 백성을 옭아맨 일제는 하등 경찰과 헌병보조원 등에 조선인을 두어 회유의 방법으로 삼고 민족세력을 이간질하려 하였다.

  “백범이 옥에서 나온 후 눈빛이 달라졌다고 하더군요. 그간의 일로 자책의 마음이 심하다고도 들었소.

  하기는 나라 잃은 백성으로 자기완성만을 찾았음을 반성하는 것은 무리도 아니고, 나 역시 같은 후회가 많기도 하오.

  허나 우리는 그럴수록 자기완성에 힘을 더해야하오. 건전한 정신만이 올바른 나라를 만들어요. 지금은 힘을 기를 때이고, 특히 백범에게는 왜적의 감시가 집중되고 있으니 은인자중하시기를 바라오.”

  인편으로 전해 온 도산 안창호의 구전(口傳) 편지였다. 스승이 가신 후 안도산은 선생의 새로운 지주로 고비가 있을 때마다 길을 열어 주었다. 한때 도산의 누이와 혼삿말이 있었을 만큼 절친한 사이이기도 했지만, 서로 상대의 역량을 높이 산 존경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소문에 듣기로 적들의 일본주의(日本主義)라는 것이 조선 땅에 상륙했고, 추종하는 무리도 생겼다 하오. 총칼보다 무서운 게 꿀이오. 이를 경계하기 바라오.”

  이어지는 도산의 구전에서 선생은 부경주의 편지에서 언급된 부탁과 관계된 의미를 되풀이 읽었다. 왜적은 추호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 거대한 파도였고, 종교 침입은 그 한 사례로 민족세력의 대기(大忌)일 터였다.

  일본의 사상계는 진작 대일본협회를 만들고 신신도(新神道)운동으로 사실상의 국가주의적 종교운동을 성공시켰다. 그들의 일본주의(日本主義)는 ‘국조(國祖)는 굉원(宏遠)한 지려(志慮)를 가지고 이 나라를 조조(肇造)하고 국경민복(國慶民福) 영원무궁(永遠無窮)히 발달할 기초를 만들었다. …우리 일본인에게는 국조(國祖)를 제쳐놓고 숭배해야 할 다른 귀중한 신(神)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운운하는 국조숭배론을 내세워 국가의 근본 사상을 꾀했고, ‘국조 및 황종(皇宗)은 일본국민의 종가로서 무상(無上)의 숭경(崇敬)을 받아야 하며, 일본주의(日本主義)는 국조(國祖)를 숭배(崇拜)하고 항상 건국(建國)의 포부(抱負)를 봉례(奉禮)하는 것을 원한다’로 발전시켰다.

  제국주의로 치달리는 일본의 국가주의적 종교 신도(神道)의 시작이었다. 소위 만세일계의 황통(皇統)을 강조하고, ‘조선교(祖先敎)는 우리 국체(國體)의 기초(基礎)’로 발전시켜 현인신(現人神) 사상의 이론적 뒷받침이 되었는데, 왜적의 그 같은 국가종교론은 훗날 세계전쟁을 일으킬 때의 사상적 무장의 발판이 되고,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는 방책으로 응용된다.

  훗날의 신사참배 논란은 당시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거니와, 대종교의 도사교 홍암 나철의 죽음을 부른 일본신도(日本神道)와 조선단군교(朝鮮檀君敎)의 충돌이 그것이었다.

  총독부의 종교 침입 정책에 따라 상륙한 일본종교들에 영향을 받은 친일파를 중심으로 신궁봉경회(神宮奉敬會)라는 단체가 만들어졌고, 그들 무리는 대조선개국시조(大朝鮮開國始祖) 단군(檀君)과 대일본국개국(大日本國開國)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양국의 국조로 신봉하자는 주의를 취해 ‘국조숭봉사해일철(國祖崇奉四海一轍) 이일한양국지성대사야(而日韓兩國之盛大事也)’라고 하였다. 국조 단군을 왜적의 신과 대등 이상의 신으로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허나 이는 표면상의 대등이었고, 실은 일본에 동화되는 과정의 단계적 유화책에 순치된 주의였으니, 꼬장꼬장한 조선선비의 전형이었던 대종교 도사교 홍암 나철이 분사한 이유가 되었다. 죽음으로 왜의 잔꾀를 폭로한 홍암의 유지를 받든 대종교는 투쟁의 장소를 만주로 옮겨 서일(徐一)과 김좌진(金佐鎭)의 영도 아래 청산리대첩을 이루니, 이는 후일의 일이다.

  홍암은 “아동포형제자매(我同胞兄弟姉妹)는 개아대황조백세본지(皆我大皇祖百世本支)의 자손(子孫)이오”라 하여 왜적의 종교 침입에 대항하는 민족종교로서의 이론적 근거를 삼고 사사건건 총독부의 유화책에 반기를 들었다. 당연히 왜적에게 눈엣가시가 되어 핍박을 받았고, 이를 피하려 순치에 응하는 세력이 나타나는 것을 경계하여 순교했다는 것이 부경주의 편지에 보이는 홍암의 죽음에 관한 의견이었는데, 안도산의 구전 편지 역시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겉으로 나타난 무력의 압박은 반작용을 부르지만 암중의 공격은 내분을 일으키오. 종교에 이르면 더욱 그러하니 특히 경계하지 않을 수 없어 백범에게 부탁드리오.”

  위와 같이 시작한 안도산의 구전 편지는 선생이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를 곁들여 끝을 맺고 있었다.

  “일전에 동경에 들렀을 때 교오(京)로 자칭하는 여인에게서의 전언이 있어 옮기니 새겨 읽으시오. ‘홍암은 전날 일본에 있을 때 스스로 약간의 무술을 익혔으나 대적이 되지 못한 적을 만나 분해 한 적이 있습니다’ 하였소.”

  특별히 전한다 하였지만 별다른 내용이 아닌 듯싶은 예의 전언은 선생에게는 의미가 특별한 것이었다. 홍암 나철은 을사늑약 체결 후 조약체결에 협조한 매국노들을 주살(誅殺)하려 무장투쟁을 선언하고 투쟁하다가 10년 유형(流刑)을 선고받고 복역 중 특사로 나온 경력이 있어 선생과 인연이 짧지 않았다. 그런 연고로 홍암의 무술 정도를 짐작하고 있는 선생으로서는 ‘홍암을 분해하게 하였다’의 전언은 본래 의미 이상의 사건을 암시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광신도라는 것은 무슨 짓을 해도 정의가 되는 집단이라오. 역시 교오(京) 씨의 전언이오.”

  ‘교오(京)’는 전날 중근에게 척살된 이토(伊藤博文)의 양녀였다. 독립협회 서박사의 은우(恩遇)로 길을 달리한 후 선생을 돕기를 여러 차례 하였는데, 이토가 죽은 후에도 일본에 남아 음양으로 힘이 되고 있었다. 일본국의 이면세계 일에 밝아 보내오는 정보마다 예사가 아니었으므로 그러한 전갈을 보냈다는 것은 유의할 이유가 충분했다.

  “오산 동지를 불러 조선 팔도 전역의 동지들에게 전하도록 하시오. 일본종교의 무리 중 최근에 잠입한 무장 세력을 찾으라고.”

  집사격인 진경에게 명령을 내린 후 선생은 입술을 깨물었다. 일본국의 이면세력 중 무장집단의 출동이라면 반듯이 사사키가 있을 터, 서대문의 옥중에서 받은 수모를 씻을 기회를 얻는가 싶어서였다.

 

  …이러한 경과로 그와 또 한 번의 싸움을 시작하게 될 모양이네. 지경을 달리하여 몸이 나뉘었다지만, 넋이야 어디 다르겠는가. 아우가 남긴 뜻을 기필코 이룰 각오이니, 어떠한 악전에서도 더는 흐트러짐이 없기를 바랄 뿐이네. 중근 아우의 가호를 기다리겠네.

 

  선생이 쓴 편지는 그렇게 말미를 맺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푸념을 할 뿐인 중근에의 편지는, 하얼빈에서의 거사 이후 생긴 선생의 버릇이었다. 생사별리로 입장이 달라졌다지만 혼백의 일념이야 다르겠느냐 싶어, 선생은 그렇게 사건이 있을 때마다 중근을 불러 의견을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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