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대회도 마치고 다시 고3의 충실한 삶으로 돌아왔다.
지난 중간고사 이후로 학구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야자 참여율도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고 있었다.
시청각실의 빈자리는 하나하나 사라져 가고 그때마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며 다짐했다.
“수시 쓸 거야?”
문제집을 열심히 풀던 강민이는 마지막 장을 넘기며 물었다.
“음, 한군데?”
“그런 말 나한테 한 적 없었잖아.”
살짝 인상을 쓰는 강민이를 보며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꼭 써야겠다, 는 생각이 없어서 굳이 의논은커녕 언질도 없었으니 당연히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게 당연했다.
“가고 싶다기보다는...”
“어디?”
“청우대?”
“거기 꽤 높지 않나?”
“그래?”
“응. 그래도 청우대 정도면 10위권 내 들지 않아?”
“그렇구나.”
근처에 있어서 그냥 지방 대학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
“강민이 넌? 수시 써?”
“아니, 그것도 계속 상위권 성적 유지해야 써보기라도 하는 거지.”
연필을 돌리며 강민이가 답했다.
“어차피 논술이나 적성검사로 갈리는 거 아니야?”
“그래도 기본 점수가 있어야지. 어차피 상위권 애들만 쓰니까 다 기본 점수는 비슷하고 적성이나 논술로 갈리겠지. 써봐도 나쁘진 않겠다만 난 수능 올인.”
“아아, 수능... 수능 싫다. 왠지 수능은 망칠 거 같은 불길한 징조가 느껴져. 그냥 수시 한 번에 턱 하니 붙으면 수능이랑 빠이 하는 건데.”
수북한 문제집 위로 팔을 베고 누워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런 나를 강민이는 손을 들어 머리를 토닥여주었다.
“왜? 아주 수시 붙고 체육관에서 살려고?”
“그것도 있고.”
아니 사실 그게 수시를 지원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아, 진짜 그러면 좋겠다. 대학 다니기 전 체육관에 빠져 사는 걸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좋단다. 아주.”
강민이는 내 볼을 늘리며 살짝 핀잔을 주었다.
“어? 안돼! 곰 수시 붙으면 야자 안 할거잖아.”
옆에 누워있던 나나는 다급하게 속삭이며 고개를 들었다.
“은나나. 웬일로 나랑 생각이 같냐.”
둘은 처음으로 의기투합을 했다.
“고맙다. 아주 큰 응원이 되었어.”
삐죽거려봤지만 같이 수능을 봐야 한다며 둘은 쿵짝이 맞았다.
“어차피 2명 뽑더라 전국에서 나 같은 애들 잔뜩 오는데.”
“그래. 곰. 경험이다 생각하고 시험 잘 보고 와.”
“빠른 태세전환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작게 기지개를 켜며 나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정확히 야자가 끝나기 10분 전이었다.
“완전 시계네. 지금 딱 10분 전.”
“어쩐지 눈이 번쩍 떠지더라니.”
나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래도 이 시간 동안이라도 공부는 해야 하지 않겠냐며 쌓인 문제집 중 적당한 걸 꺼내 펼쳤다.
나도 풀던 페이지를 끝마치기 위해 다시 연필을 들었다.
“아 근데, 담임 결혼한다며?”
“아, 그런 거 같더라.”
나나의 충격적 발언에 강민이도 알고 있다는 듯 말을 보탰다.
아니 뭐지? 왜 나는 몰라.
“뭔데? 왜 나만 몰라?”
“왕따 곰. 너만 몰라. 요즘 소문이 파다한데? 체육관만큼 학교에 관심 좀 가져주렴.”
나나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나나 옆에 앉은 인성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아... 나만 몰라?”
“응. 우리 학년 대부분 다 알고 있을걸? 윤 쌤이랑 김 쌤 우리 대학을 보내든 취직을 시키든 다 하고 결혼할 거라 하더라고.”
같은 직업을 가진 부부라, 부럽네.
뭔가 굉장히 서로에게 의지가 될 거 같았다.
그나저나 나는 왜 몰랐지? 그렇게 학교 소식에 둔감했네?
그 뒤로도 강민이와 나나, 그리고 인성이가 말해주는 흥미로운 학교 이야기를 들으며 야자가 끝나는 종이 울릴 때까지 단 한 문제도 풀지 못했다.
야자를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이미 세상은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10분도 짧았는지 계속 이야기를 하는 나나에게 귀 기울이며 풀벌레 소리 가득한 교정을 걸었다.
좋네.
바람도 시원하고 간간이 장난치는 강민이와 인성이, 그리고 나나의 모습도 좋았다.
깔깔거리며 웃는 다른 과 학생들의 웃음소리도 여기저기서 울렸다.
고3임에도 그냥 계속 이런 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냥 웃음이 나왔다.
아직 초라 그런가?
2학기가 되면 살벌해지려나?
잡생각에 한눈을 팔아서일까?
“어?”
발에 꼬여 넘어질 뻔했다.
옆에 서서 걷던 강민이가 빠르게 잡아주었다.
“가만 보면 곰 진짜 허술해. 이제 맨땅에서도 넘어질라 그러는구나. 아니, 운동 실력이랑 이거랑 관계가 없나 봐.”
나나의 말에 강민이도 크게 동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이 둘 오늘따라 쿵짝이 왜 이렇게 잘 맞아.
“잡아.”
강민이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따뜻한 손을 잡고 걷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까만 하늘에는 커다란 붉은 달이 아주 낮게 떠 있었다.
“와, 신기. 진짜 붉은 달이다.”
내 말에 모두 고개를 들어 달을 쳐다보았다.
“어? 진짜다. 오 대박 신기.”
나나는 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찍은 결과물은 검은 하늘에 작은 점 하나여도 만족한 듯 나나는 폰을 집어넣었다.
다시 재잘거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근데 체육관은 계속 다닐 거야?”
강민이가 물었다.
䄚학기 때부턴 아무래도 힘들겠지. 지금도 담임이 맨날 뭐라 그래.”
“나라도 뭐라 그러겠다.”
“열심히 하는데...”
“그나마 성적은 좋으니까 내버려 두는 거지 너 성적 떨어지는 즉시 난리 날걸?”
“그렇겠지. 더 열심히 해야겠네.”
떨어지는 순간 날 달달 볶을 것이 뻔한 담임이 떠올랐다.
어휴, 진짜 열심히 해야지.
어쨌든 성적을 유지하면 크게 터치는 안 할 테니까...
“근데 곰 운동이 그렇게 좋아?”
“응 좋아. 진짜 너무 좋아.”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아아 그건 좀 부럽다. 나도 뭔가 열정적으로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좋겠다.”
“하잖아. 지금 마술.”
“아! 맞다. 나 요즘 그거 하지. 음 나도 열심히 사는구나. 서강민 넌 요즘 뭐하냐?”
“고3이 수능 공부하지 뭐하냐.”
“그래 성실한 고3. 먼 훗날 나는 그래도 고등학교 생활 내내 마술을 열심히 했다고 회상할 거다.”
“후회나 말아라.”
“너나 후회하지 마. 아, 내 10대는 공부만 했구나! 하면서.”
“보통은 그 반대거든? 아 공부 좀 할 ! 하면서.”
의기투합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둘은 다시 티격태격이었다.
“인성인 넌 뭐할 거야?”
나나의 물음이 이번엔 조용히 걷던 인성이에게 향했다.
“글쎄? 난 내 가게 내고 싶다.”
“모범답안이네. 그리고 보니 우리 다 조리과인데 마술에 운동에 그냥 공부에... 우리 여기 왜 왔니?”
나나가 웃었다.
그렇게 재잘재잘 이야기하며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걷는 우리 머리 위에선 붉은 달이 빛나고 있었다.
*
“안돼.”
담임의 잘생긴 미간이 찌푸려지며 예상치 못한 거절이 돌아왔다.
“아 쌔앰~ 왜요?”
“지금 모의고사 성적에서 영어만 올리면 한국대도 지원이 가능한데 어딜 청우대를 넣어 안돼.”
헐, 한국대? 담임의 욕심이 너무 과한 듯했다. 그리고 그냥 지원이 가능한 거지 붙는다는 보장도 없는 일에 힘쓰고 싶지 않았다. 그 힘을 쓸 곳은 따로 있었다.
“왜요 쌤. 넣어볼래요. 넣을래요.”
“안돼. 유지애 너는 진짜로 대학 멀리 가서 이 동네를 떠야 해.”
뜬금없는 담임의 말에 놀랐다.
“왜요오?”
“몰라서 묻냐? 널 그 체육관이랑 떨어뜨려야지. 안 그러면 어영부영 대학 생활도 대충하고 체육관에서 살지 살아. 잔말 말고 쓸 생각은 하지도 마.”
“에이 쌤. 거기 높다면서요. 한 번 써볼게요. 어차피 2명 뽑는다면서요.”
“그러다 덜컥 붙으면? 1차 수시는 합격과 동시에 수능도 못 보고 강제 입학이야.”
아, 또 새로운 사실이네.
“아? 그런 것도 있어요?”
“넌 고3의 자세가 안돼있어.”
사실인지라 혀를 차는 담임에게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경험삼아...”
“안돼!”
생각보다 완강한 담임의 반대에 잠시 물러나기로 했다.
수시를 못 쓰게 할 줄은 몰랐는데.
그리고 다음 날.
“쌤. 거기 좋대요.”
“그럴 리가. 내가 너는 꼭 한국대 보낸다.”
“아 쌤! 내가 안가요 내가.”
“거기가 학비도 싸!”
“제가 수능 망하면요!”
“고3이 진짜 별 소릴 다 한다.”
담임은 내 귀를 잡아당기셨다.
“아악. 귀 아파요 귀.”
“내가 너를 모를 거 같냐? 뻔하지. 체육관이랑 가까워서 쓰는 거지?”
“헤헤. 족집게시네요.”
“그러니까 안돼.”
“제가 혼자 쓸 거예요!”
“얼씨구?”
“쌤 한번만 써볼게요. 네?”
“넌 왜 남들은 한국대 못 가서 안달인데 넌 안 갈려 난리이야.”
“아잉. 쌤.”
“어휴. 그럼 거기 한 군데만 써야 한다? 사실 거기도 만만한 곳은 아니긴 하지.”
한 수 접어주시는 담임의 맘이 변하기 전에 재빨리 수시 지원서를 작성했다.
“대신 여기 떨어지는 즉시 내가 하라는 대로 한국대 갈 준비해야 한다.”
“그럼요.”
무슨 말을 못 할까.
일단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놈의 체육관도 끊고.”
아, 역시나 저게 딜이네.
수시에 목숨 걸어야 할 판이야.
“네...”
작은 대답에도 담임은 만족한 듯 지켜보셨다. 그나저나 헐! 10만 원?
뭔 접수비가 이렇게 비싸!
짜증을 내며 빠르게 은행까지 다녀와 계좌 이체까지 마쳤다.,
“경쟁은 한 30:1 정도 되려나? 뭐 적성검사야 서점 가서 책 찾아보면 있을 거다 그거 사서 풀어보고.”
“헤헤. 잘 보고 올게요.”
“제발 못 보고 와라.”
담임은 피식 웃으시며 프린트한 종이를 건네주셨다.
오예! 어쨌든 접수가 완료되었다.
*
고3의 하루라는 게 크게 변동은 없었다. 늘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공부만 하면 됐으니까.
재우와 준성이도 청우대를 포함해서 몇 군데 더 원서를 넣은 모양이었다.
아니 접수비만 돈 백 깨지겠는데? 가난하면 수시는 쓰지도 못하겠다 생각했는데 수시 과외도 있다는 말에 더 놀랐다.
알았다 해서 비싼 과외를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차피 과외도 푸는 요령만 알려 준다고 했으니 그냥 푸는 거랑 별반 다르지 않다고 위안을 하면서 그냥 담임 말대로 서점에서 문제집만 사
죽어라 풀었다.
그리고 적성검사 날.
떨리는 마음으로 청우대 강의실에 앉아 모든 뇌를 하얗게 불태웠다.
답안지를 내고 나니,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이었다.
발표만 남았지. 8월 발표였던가?
가벼운 가방을 들쳐 메고 시험장을 빠져나갔다.
넓은 청우대 교정은 시험을 보고 나온 학생들과 수고했다며 어깨를 두드리는 부모님들로 가득했다.
씁쓸한 웃음을 짓고 넓은 청우대의 교정을 홀로 빠져나왔다.